공성과 자비 사이의 교리적 긴장
(3)자비에 대한 공성의 기능
소연이 없는 자비가 대승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보리행이긴 하지만, 샨띠데바도 쁘라즈냐까라마띠도 이것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자비는 유정이라는 소연이 없더라도 가능한 것임을 시사해 주는 것으로 그들의 역할은 일단 마무리된다. 즉 비인격적 존재요소인 법(dharma)을 대상으로 하는 자비도 있고, 게다가 어떠한 대상도 지니지 않은(anālambana) 자비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연기로서의 세계가 세계의 전체라면, 자비 역시 그 속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자비는 연기로서의 세계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
연기로서의 세계는 공성이다. 요가행자는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나는 연기로서의 세계, 즉 세속을 지각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현상들의 참된 본성(=공성)을 바르게 파악한다. 이것이 연기와 무자성으로 대표되는 공성의 지혜이다. 하지만 공성의 지혜로부터 자비가 논리적으로 자동적으로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성의 지혜로부터 자비가 실제로 발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앞서 미야자키(宮崎)가 『8천송반야경』을 예로 들어 주장한 바와 같이, 자비가 이미 공성의 지혜에 앞서서 주도적 동기로서, 예를 들면 서원의 형식(=원보리심, bodhi-praņidhi-citta)으로 시작하여 6바라밀의 실천(=행보리심, bodhi-prasthāna-citta)으로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된다. 자비는 보살도의 실천에서 항상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남수영은 공사상과 자비의 관계를 고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자비는 공성의 지혜를 성취하도록 촉발하는 동기가 되고, 그렇게 해서 성취된 공성의 지혜는 다시 자비를 더욱 순수하고 청정한 것으로 완성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짠드라끼르띠의 '공성에 대한 자비의 기능'(자비는 공성의 지혜를 성취하도록 촉발하는 동기)과 샨띠데바의 '자비에 대한 공성의 기능'(자비를 더욱 순수하고 청정한 것으로 완성시키는 원동력)에 다름 아닌 것이다.
자비가 연기로서의 세계 속에서 활동하는 것은 '자비에 대한 공성의 기능'을 통해 이루어진다. 즉 자비가 공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은 아니지만, 공성 없이는 자비가 완성되지 않는 것으로, 이것이 곧 보리심이 세간에서 생기하고 성장하는 모습이다. 공성을 기반으로 하여 자비가 연기로서의 세계 속에서 활동하고 완성되는 것, 다시 말해 보리심이 생기하고 성장하는 것은 BCA에서 크게 두 가지 모습으로 기술된다. 한 가지는 '공성과 자비 사이의 긴장'을 통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공성의 편재성'을 통해서이다. 우선 샨띠데바는 다음과 같이 공성의 결과에 대해 기술하면서, 공성과 자비의 관계를 표명한다.
"미혹(癡)에 의해 대상에 괴로워할지라도 집착과 두려움으로부터 해탈하지 않고서 윤회계(세간)에 머물러 성취한다. 이것이 공성의 결과이다."
샨띠데바는 상견(śāśvata-dṛṣṭi)과 단견(uccheda-dṛṣṭi)의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를 떠나는 중도의 문맥에서 이 게송을 기술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공성과 자비의 관계에 관한 중요한 관점이 담겨 있다. 요가행자는 공성의 수습에 의하여 집착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져, 고통받고 있는 유정의 구제를 위해 해탈하지 않고 세간에 머문다는 것이다. 즉 공성의 결과가 자비인 것으로, 그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긴장이 담겨있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런 인과관계만 존재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쁘라즈냐까라마띠는 다음과 같이 적대자의 견해를 소개하여 공성과 자비 사이의 긴장을 드러낸다.
"승의적으로 보면, 윤회하는 사람이라고 불리는 [유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가 어떻게 그곳에 머문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적대자로부터 제기되는 이 긴장은 이미 살펴본 '두 종류의 무명'과 '세 종류의 자비'에서, 구체적으로는 게송76과 77에서 다룬 것이다. 하지만 쁘라즈냐까라마띠는 이 긴장을 반복적으로 언급함으로써 공성과 자비 사이의 긴장이 BCA에서 어떻게 해소되는지를 강조하려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즉 그는 공성의 수습을 기반으로 하는 자비심에 의해서 이 긴장이 무주처열반으로 승화됨을 강조한다. 공성과 자비 사이의 긴장에도 불구하고, 이 긴장은 오히려 무주처열반에서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하여 여의주로 비유되는 대승불교 보살도의 정점을 이루는 것이다. 결국 공성의 지혜와 자비 사이의 긴장관계는 승의와 세속의 모순관계로 귀결되고, 마침내 한 발은 승의 속에 담그고 다른 발은 세속 속에 담그고 있는 이중적인 존재(=무주처열반)라는 조화의 열매를 맺는다. 이 조화의 열매는 보리심 개념의 다른 표현이다.
자비가 연기로서의 세계 속에서 활동하는 두 번째 모습은 공성의 편재성(sarvatragatva)을 통해서이다. 공성의 편재성이란 공성이 모든 유정에게 공통하는 참된 본질이라는 점이다. 모든 유정과 유정을 구성하는 존재 요소(오온)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이라는 점에서 공성은 연기로서의 세계에 편재되어 있다. 이 편재성은 자비에게 새로운 기반을 제공한다. 즉 '중생을 소연으로 하는 자비'와 '법(존재요소)을 소연으로 하는 자비'를 뛰어넘어 '소연이 없는 자비'의 가능성이 공성의 편재성을 기반으로 하여 열리는 것이다. 이 새로운 기반은 마치 지혜로부터 자비가 발생하는 것처럼 오해하도록 만들기도 하지만, 남수영의 지적처럼 공성의 지혜는 어디까지나 동기로서의 자비를 더욱 순수하고 청정한 것으로 완성시킬 뿐이다.
연기로서의 세계에 편재하는 공성에 대한 지혜는 자기 자신과 타자를 새로운 차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열어준다. 왜냐하면 공성은 자기 자신과 타자에게 공통하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타자는 자신 이외의 모든 것으로 일체 유정을 가리킨다. 그래서 샨띠데바는 말한다.
"자비심 가득한 그(붓다)가 이 모든 세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정의 모습으로 나타난 그들이 바로 우리들의 구원자가 아닐까. 어찌 [그들을] 공경하지 않겠는가."
자비로운 붓다들은 모든 유정을 그들 자신과 동일한 존재로 간주한다. 그래서 그들은 공성이 편재한 연기로서의 세계에서 유정과 동일한 모습으로 현현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성은 붓다들과 유정에게 공통하는 본질이고, 붓다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쁘라즈냐까라마띠는 말한다.
"[붓다들은 공성의] 편재성과 법의 구성요소가 [공임을] 통달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유정의 평등성과 자타의 교체가 성취되어 이 모든 세상을 자기 자신이 만든 것으로 받아들인다. 놀랍지 아니한가!"
이런 면에서 볼 때, "인간의 가장 큰 적은 자기 자신을 타자보다 더 중요하게 간주하는 것"이라는 달라이 라마의 가르침은 공성의 편재성에 대한 지혜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공성의 편재성은 자기 자신과 타자를 불변의 실체적 존재로 간주하는 '옛 나'를 버리고, 자기 자신과 타자를 공이라는 점에서 동등하게 보는 '새로운 나'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창조를 위하여 샨띠데바는 보리심을 수행할 것을 권고하고, 그 수행법인 자타평등(parārtha-samatā)과 자타치환(parārtha-parivartana)을 소개한다. 이 수행법에 대해서는 다음 장 「보리심 수행」에서 살펴보자.
<『입보리행론』의 보리심론 연구/ 이영석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