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역사는 환웅이 하늘나라에서 환인(桓因)으로부터 천부인(天符印)을 받고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와 3,000여 명의 무리들을 이끌고 백두산(白頭山) 신단수(神壇樹)로 내려와 신시(神市)를 베풀었다는 개천(開天)으로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10월 3일에 개천절(開天節)을 기념하면서 단군(檀君)을 거론하고 있는데 이날의 주인공은 단군이 아니라 환웅(桓雄)이다. 왜냐하면 단군왕검(檀君王儉)은 고조선을 개국(開國)한 분이지 신시개천(神市開天)을 하셨던 분이 아니다.
필자와 몽골학회 박원길이 환웅의 출발지를 추적해본 결과, 바이칼호수 동쪽 바르코진의 쿠룸칸 평원으로 백두산(不咸山)과 몽골제국 부르칸칼돈의 원형인 바르한언더르(Barkhanunder)산이 존재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또 브리야트 공화국의 에벤키 몽골족에는 환웅신화와 같은 아바이 게세르 신화가 있으며 우리와 같은 석관묘, 솟대, 장승, 성황당, 소도, 샤머니즘, 천신사상 등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즉 환웅족은 바이칼호수의 구석기 최종말기 말타 유적에서 시작된 세석기문화(細石器文化)를 가지고 출발하여 내몽고자치구 호륜패이시(呼倫貝爾市)의 찰뢰락이(扎賚諾爾)유적을 거쳐 만주로 들어와 흑룡강성 치치하얼(齊齊哈爾)의 앙앙계(昻昻溪) 유적을 거쳤고 백두산(白頭山) 언저리 만주 벌판에 살며 곰을 믿던 웅족과 호랑이를 믿던 호족(豪族)들에게 하느님 사상(天神崇拜思想)을 가르쳐주고 개화시켜 나갔다.
순종적으로 융화된 웅족 추장의 딸 웅녀(熊女)와 마지막 환웅(桓雄) 사이에 혼인이 이루어져 단군왕검(檀君王儉)이 탄생(誕生)하였으며 그가 조선(朝鮮)을 개국(開國)하게 된 것이다. 필자가 몽골의 부르칸칼돈에 갔을 때에 그곳의 곰들이 좋아하는 풀을 보았는데 잎은 쑥이고 뿌리는 마늘이었다. 이것을 보면 환웅이 웅녀에게 쑥과 마늘을 따로 준 것이 아니고 쑥마늘을 준 것으로 보인다.
신화(神話)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고 역사(歷史)의 거울이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나오는‘환인→환웅→단군왕검’흐름의 환웅신화에서 환인(桓因)의 나라는 바로 바이칼에 존재하고 있었던 환국(桓國)이다.
그런데 일제하 조선총독부에서 우리민족이 간직하고 있었던 여러 역사책들을 빼앗아 불태워 버렸다. 더구나 한국의 역사를 조작하기 위해 만든 조선사편수회의 위원으로 있던 이마니시 류(今西龍)라는 자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고조선조에 “옛날에 환국이 있었는데(昔有桓国)”라고 되어있던 첫 머리글을 “옛날에 환인이 있었는데(昔有桓因)”로 바꾸어 버렸다.
이것은 나라이름(國名)을 사람이름(人名)으로 바꾼 것으로 그에 의해 역사가 신화로 조작된 것이다. 그는 이런 조작을 바탕으로「단군고(檀君告)」라는 논문을 써서 ‘단군신화(檀君神話)’라는 것을 창작해냈다. 우리 민족 전체가 이것에 속고 있는 것이다. 해방 후 황의돈이 숨겨 훼손되지 않은 정덕본『삼국유사(三國遺事)』가 세상에 나옴으로 그가 조작한 사실이 증명되었다.
사실 우리 민족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단군을 신화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으며 특히 조선 초기의 관찬사서인『동국통감(東國通鑑)』에서는 “1천 48년이라고 한 것은 여러 명의 단씨(檀氏)들이 여러 대에 걸쳐 이어져 내려온 햇수이며 단군 한사람의 수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千四十八年者, 檀氏傳世歷年之數, 非檀君之壽也)”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마니시가 만든 단군신화가 지금까지도 우리민족 전체를 세뇌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제자격인 이병도가 해방 후 사학계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첫 국가였던 고조선의 중심지를 알기 위해서는 문헌학적 연구와 역사 유적의 분포 상태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역사학자들은 고조선의 강역이었던 위만조선과 그 후의 한사군(漢四郡)의 위치를 연구하여 고조선의 중심지를 파악해 왔다. 이런 연구에 의해 현재 고조선의 중심지에 대해서는 만주중심설, 대동강중심설, 중심이동설이라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만주 중심설은 고려시대부터 견해가 있었다. 『응제시주(應製詩註)』에는 한사군의 하나였던 낙랑군(樂浪郡)을 압록강 북쪽으로 보았으며 홍여하, 신경준, 이익, 박지원 등의 실학자들도 고조선의 중심을 요동으로 비정하고 있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서도 “당나라 이후로부터 모두가 대동강을 패수라 하나 실은 한나라의 군현의 패수가 아니다”라고 반박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신채호, 정인보, 박은식 등의 민족사학자들에 의해 민족사관(民族史觀)으로 정립되었고 안재홍, 홍이섭 등으로 이어져 내려오다가 이들 대부분이 납북 당하여 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 후 70년대 후반에 ‘국사찾기협의회’가 결성되고 안호상, 이유립, 임승국, 문정창, 박형표, 박시인, 최인 등의 재야사학자들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주장되었다. 이들은 민족사학자들의 전통을 이어 위만조선의 도읍지가 요녕성의 북진현 부근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고조선의 전통은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져 왔다는 만주를 중심으로 한 대륙사관을 부르짖었다.
특히 윤내현은 『고조선 연구』를 통해 고조선과 기자조선은 요동지역에 존재했음을 심도있게 연구하였으며 북한에서는 이지린, 임건상, 이상호 등이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다. 특히 이지린은 『고조선 연구』에서 패수는 대능하, 왕검성은 개평, 패수는 요하 동쪽 해성(海城)부근의 어니하로 배정하였다.
특히 러시아의 유엠푸진에 의해서도 진행되어 『고조선(古朝鮮)』이라는 책자로 발간되었다. 한편 대동강(大同江) 중심설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비롯하여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 『동사강목(東史綱目)』 등에서는 고조선의 중심이 대동강에 있다고 보았으며 정약용, 한치윤 등의 실학자들도 그 중심지가 한반도 안에 있었다고 보았다.
일제하의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들은 특히 이 문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표적인 학자가 『만선사연구』를 쓴 이케우치(池內宏)이다. 조선총독부에서는 대동 강연안의 유적을 대대적으로 발굴하여 한(漢)나라의 낙랑군 유적으로 조작하였다. 특히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위원이며 경성제국대학교 교수였던 이마니시(今西龍)는 『삼국유사』 정덕본의 고조선사 부분을 조작하여 「단군고(檀君考)」라는 논문을 써서 고조선은 신화로 조작한 후 우리역사에서 말살해 버린 후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으로 이어지는 중국세력이 평양을 중심으로 북한지역을 다스렸고 일본이 남한의 가야지역을 점령하여 다스렸다는 임나일본부설의 논리를 펼쳐 식민사관(植民史觀)을 만들어 나갔다.
즉 조선은 예로부터 중국의 식민지로부터 역사가 출발했기 때문에 다시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건 역사의 필연이라는 논리를 주장하려는 의도였다. 이병도는 일제하에 『청구학총(靑丘學總)』 13호에 「패수고(浿水考)」라는 논문에서 패수를 청천강, 열수를 대동강, 만번한을 박천에 비정하였다. 해방이 된 이후 그를 중심으로 학계를 주도해온 실증사학(實證史學)은 고조선의 수도는 평양이었다고 보는 그의 학설을 학계의 정설로 고정시켜 버렸다. 그러나 만주와 북한지역에 비파형 동검이 넓게 분포되어 있었던 것이 밝혀지면서 최근의 학계에서는 이러한 평양중심설보다는 중심이동설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도유호, 박시형 등이 이러한 주장을 펼쳐 왔었는데 소련이 붕괴된 이후 북한은 주체사관으로 선회하면서 대동강을 고조선의 중심지로 정설화 시키고 있다.
특히 단군릉을 발굴하여 성역화 하는 동시에 평양지역에 수백기의 고인돌과 고조선시기의 토성 등을 대대적으로 발굴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황대성토성은 토성위에 고인돌이 축조 되어있어서 고조선시대의 것으로 보고 있다. 북한은 평양을 4대문명의 발생지에 버금가는 지역으로 주장하는 ‘대동강문화론’을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사서들을 종합해 보면 고조선 이전의 환웅시대에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라는 3사가 있고 그 아래에 각각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豬加), 구가(狗加), 양가(羊加, 계가) 등 5가가 있어 3사 5가(三師五加)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전통사상인 천부경을 근간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고조선 시대에도 진한, 마한, 변한의 3한(三韓)이 있었고 그 아래에 5가가 존재하고 있었다.
즉 진한은 만주지역을 다스렸던 최고의 수장으로 단군왕검의 뒤를 이은자들이 다스렸고 그 아래의 부왕인 마한은 한반도, 변한은 요동지역을 다스렸던 것이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는 이것을 전삼한(前三韓)으로 보며 후일에 정치적 분립이 일어나면서 진한은 신조선(辰朝鮮), 변한은 불조선(番朝鮮), 마한은 말조선(莫朝鮮)으로 분립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 후 만주지역의 진조선은 북부여에게 멸망당하였고, 요서지역의 번조선은 기자의 후손들에 의해 장악이 되었다가 위만에게 멸망당하였고 그들 또한 한무제에게 멸망당하면서 한사군이 설치되게 된 것으로 보았다. 이들이 멸망당하자 평양에 있었던 막조선은 위협을 느껴 한강 이남의 목지국으로 천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