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장수왕과 진흥왕의 업적 답③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장수왕, 신라는 법흥왕~진흥왕에 대한 문제가 자주 출제됩니다.
(가)는 '영락'이라는 연호와 신라에 군사를 보내 왜를 격퇴해 준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니 광개토 대왕(릉)비입니다.
이 비를 세운 이는 광개토 대왕이 아니라, 그의 아들인 장수왕(412~491)입니다.
(나)는 '태창(진흥왕이 568년부터 사용한 연호) 원년 왕이 순수하고 돌에 새겨 기록하였다.'라는 내용으로 보아 진흥왕(540~576)이 세운 순수비 중 황초령비입니다.
(가)
광개토 대왕(391~412)에 이어 왕위에 오른 장수왕(412~491)은 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를 장악하는 한편, 중국의 남북조와 각각 외교 관계를 맺어 둘 사이를 견제하는 외교 정책을 통해 국경을 안정시켰습니다.
414년에는 고구려 왕실의 신성성과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한 광개토 대왕비를 건립하였어요.
427년에는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하여 국내성 일대에 뿌리깊은 기반을 가진 고구려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죠.
그리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475)하고 한강 전 지역을 포함하여 죽령 일대에서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혔는데, 이러한 사실은 충주 고구려비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공동으로 대항하기 위해 나·제 동맹을 체결했습니다(433.)
(나)
신라는 법흥왕(514~540) 때 국력을 강화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한 후 진흥왕(540~576) 때에 이르러 내부의 결속을 더욱 강화하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였습니다.
그리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꾀하였으며, 황룡사를 짓고 대규모의 불교 집회를 열어 국가의 평안과 발전을 빌기도 하였어요.
이를 토대로 영토 확장에 나서 영토를 크게 넓혔습니다.
백제 성왕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상류의 땅을 점령하고, 다시 백제가 되찾은 한강 하류의 땅마저 빼앗아 한강 유역의 땅을 모두 차지하였습니다. 이에 백제 성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말죠(554) 이어 가야 연맹의 맹주인 대가야를 정복(562)하여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였고, 동해안을 따라 함흥 평야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진흥왕은 새로 차지한 영토를 기념하기 위하여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진흥왕 순수비를 세우죠.
그리고 자신을 황제에 비겨 '태왕' 또는 '짐'이라 하였으며, '개국', '태창' 등의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 의식을 나타내었습니다.
특히, 이 시기 한강 유역의 장악은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는데, 이는 이후 신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① 당과의 안시성 전투(645)는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642~668) 때의 일입니다.
② 미천왕(300~331) 때인 4세기 초반의 일입니다.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5호 16국 시대의 혼란을 틈타 활발하게 대외 팽창을 꾀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미천왕 때에 낙랑군(313)을 완전히 몰아 낸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남쪽으로 대동강 유역까지
진출하였습니다.
③ 후기 가야 연맹을 이끌던 대가야를 정복(562)한 것은 진흥왕(540~576) 때입니다.
신라는 법흥왕 때 김해의 금관가야를 정복(532)하고 진흥왕 때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였습니다.
④ 이사부를 시켜 우산국(울릉도)을 복속(512)한 것은 지증왕(500~514) 때의 일입니다.
지증왕은 정치 제도를 더욱 정비하고 국호를 '신라', 왕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습니다(503).
⑤ 장수왕(412~491)과 진흥왕(540~576)은 시기적으로 겹치지 않았어요.
장수왕 때 한강 유역은 백제가 차지하고 있었으며, 진흥왕이 백제 성왕과 연합해 한강 유역을 차지할 때 고구려 왕은
양원왕(545~559) 때였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 4~5세기 고구려의 발전
4세기 | 미천왕(300~331)) - 한군현(낙랑군) 축출 → 평양 차지(남쪽으로 진출할 발판 마련) 고국원왕(331~371) - 전연(선비족, 모용씨)의 위협, 백제의 침략(고국원왕 전사) → 국가적 위기 소수림왕(371~384) -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불교 수용(전진) → 체제 정비를 통한 국력 결집 광개토대왕(391~412) - 대규모 정복 사업(요동 차지, 숙신 정복, 백제 공격), 신라에 침입한 왜 격퇴(신라에 영향력 행사), '영락'이라는 연호 사용 |
5세기 | 장수왕(412~494) - 외교 : 중국 남북조와 교류 ←두 세력을 조종하며 중국을 견제, 남하 정책 추진 남하 정책 : 평양 천도(427) → 한강 유역 점령(475), 충주(중원) 고구려비 건립 영토 확장 : 죽령 일대 ~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영역 확장 ↔ 백제와 신라는 이에 대항해 나·제 동맹 체결(433~552) |
■ 4~6세기 신라의 발전
내물왕 (356~402) | • 진한 지역 차지, 김씨 왕위 세습 → 마립간(대수장) 칭호 사용 • 고구려 도움으로 왜의 침략 격퇴(호우명 그릇) |
눌지왕 (417~458) | • 백제와 동맹(나·제 동맹, 433) • 왕위 부자 상속제 확립 |
소지왕 (479~500) | • 6촌을 6부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 경주에 시장 설치 • 백제 동성왕과 결혼 동맹(493) |
지증왕 (500~514) | • 국호 '신라', '왕' 칭호 사용, 지방 제도 정비(군주 파견) • 우경 장려, 동시전 설치(509), 순장 금지, 우산국 복속(512) |
법흥왕 (514~540) | • 병부 설치, 상대등 설치, 율령 반포, 공복 제정, 골품 제도 정비, 연호(건원) 사용 • 불교 공인(527) • 금관가야 정복(532) |
진흥왕 (540~576) | • 영토 확장 : 한강 유역 장악, 함경도 유역까지 진출, 대가야 정복(562) → 순수비 건립(단양 적성비, 북한산비·황초령비·마운령비·창녕비) • 화랑도를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 • 사상 통합 : 불교 교단 정비, 황룡사 건축 • 거칠부가 국사 편찬(545) |
고구려 장수왕과 신라 진흥왕에 대한 문제만 제시합니다.
■ 유사 기출문제 더 풀기
장수왕과 관련된 문제
19회 고급 8번 문제
8. 광개토 대왕의 신라 구원(400)과 장수왕의 한성 점령(475) 사이의 역사적 사실 답⑤
삼국의 발전과 관련하여 고구려는 광개토 대왕~장수왕 시기, 백제는 근초고왕~성왕 시기, 신라는 법흥왕~진흥왕 시기의 사실을 파악하는 문제가 가장 빈번하게 출제됩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중요 사실은 꼭 공부해 두셔야 합니다.
(가)는 광개토 대왕비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으로, 신라에 왜군이 침입해 신라가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자 고구려 광개토 대왕(391~412)이 신라에 구원병을 보내 왜군을 물리친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400).
당시 광개토 대왕은 만주 지방에 대한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고, 이어 신라와 왜·가야 사이의 세력 경쟁에 개입하여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함으로써 한반도 남부에까지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해 금관가야는 고구려의 공격으로 세력이 약화되어 금관가야개 이끌던 전기 가야 연맹은 해체됩니다.
(영락) 9년(399) 기해에 백제가 서약을 어기고 왜와 화통하므로, 왕은 평양으로 순수해 내려갔다.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말하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을 부수었으니, 노객은 백성 된 자로서 왕에게 귀의하여 분부를 청한다.”고 하였다. …… 10년(400) 경자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 관군이 이르자 왜적이 물러가므로,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렀다. 성이 곧 귀순하여 복종하므로, 순라병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신라의 □농성을 공략하니, 왜구는 위축되어 궤멸되었다. - 광개토 대왕릉 비문 - |
(나)는 장수왕(412~491)이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475)시키고 부여 경(개로왕)을 죽인 내용입니다.
광개토 대왕에 이어 즉위한 장수왕은 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를 장악하는 한편, 중국 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외교 정책을 써서 중국을 견제하였습니다.
그리고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427), 뒤이어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475)하고 한강 전 지역을 포함하여 죽령 일대에서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혔습니다.
이 시기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공동으로 대항하기 위해 나·제 동맹을 체결합니다(433)
① 신라 진흥왕(540~576) 때의 사실입니다.
진흥왕은 백제 성왕과 연합해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여(562)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습니다.
② 신라 법흥왕(514~540) 때의 내용입니다.
신라는 법흥왕 때 병부 설치(531), 율령 반포, 공복 제정(520)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습니다.
③ 고구려 영양왕(590~618) 때의 사실입니다.
수를 건국한 문제와 뒤를 이은 양제는 거듭하여 고구려를 침략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수 문제의 30만 대군의 침략을 막아 냈고(598), 수 양제의 침략도 크게 물리쳤습니다(살수 대첩, 612).
④ 백제 근초고왕(346~375) 때의 사실입니다.
백제는 근초고왕 때에 마한 세력을 정복해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결
하여 평양성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371) 등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⑤ 고구려 장수왕 때의 사실입니다.
평양 천도는 백제나 신라에 커다란 위협을 줌으로써 삼국 간 세력 다툼의 주도권을 쥐는 데에 유리하였으며, 안으로는
국내성에 세력 기반을 가진 귀족들을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16회 고급 4번 문제
4. 고구려의 남진 정책과 나·제 동맹 답⑤
삼국의 항쟁과 관련한 문제는 매번 빼놓지 않고 출제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4세기 후반의 백제의 전성기, 5세기 고구려의 전성기, 6세기 중반 신라의 전성기 상황을 묻는 문제가 많이 출제되죠.
그러니 이 시기의 대외 정복 모습과 이에 대항하기 위한 동맹 등을 함께 살펴두세요.
문제에는 신라가 소지 마립간(479~500) 시기에 백제와 동맹해 고구려에 대항하고, 백제 동성왕(479~501)이 혼인을 청하자 이에 응했다는 내용이 나와 있네요.
즉 나·제 동맹과 결혼 동맹의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신라는 내물마립간 때에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원조를 받아, 이후 고구려의 간섭을 받게 되죠.
그러나 5세기 초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고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펴자, 눌지마립간 때에 백제(비유왕)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와 항쟁하며 간섭에서 벗어 나려 하였습니다(433).
그 후 소지마립간 때에는 백제와 혼인 동맹까지 맺어 유대를 더욱 강화하였습니다(493).
① 연개소문의 권력 장악은 7세기 중반의 일입니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비롯한 대신들이 자기를 죽이려 하자, 정변을 일으켜 왕을 비롯한 여러 대신을 제거하고 왕의 조
카를 보장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대막리지가 되어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다(642).
② 2세기 당시의 일입니다.
고구려는 2세기 태조왕 때 동해안으로 진출하여 물자가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한 옥저와 동예를 정복하였으며, 요동 지
방으로도 진출을 꾀하였습니다.
③ 고국원왕의 전사는 4세기 후반의 일입니다.
백제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때에 마한 세력을 정복하여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결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하였습니다(371).
④ 4세기 초반의 일입니다.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5호 16국 시대의 혼란을 틈타 활발하게 대외 팽창을 꾀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미천왕 때에 낙랑군(313)을 완전히 몰아 낸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남쪽으로 대동강 유역까지
진출하였습니다.
⑤ 5세기 중반 이후 고구려의 장수왕이 남진 정책을 펴자,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어 이에 대항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6회 고급 3번 문제
3. 중원 고구려비 답②
문제에 제시된 비문에는 고(구)려 대왕과 신라 매금왕이 형제처럼 위아래로 화합하여 '수천'(守天)하자는 구절이 나와 있습니다.
수천은 천제(天帝)의 뜻을 지켜나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고구려왕이 남하하여 신라왕을 부른 뒤 신라왕과 그 신하들에게 의복을 하사하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가 신라에 대해 종주국을 자처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비문에서 고구려는 신라를 동이(東夷)라고 칭하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천하관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당시 고구려가 자신을 천하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주변 국가를 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군사 지휘관이 신라 영토 내에 주둔하고 있었던 사실도 비문 속의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구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때 고구려의 군사 지휘관이 주둔하고 있던 신라 영토는 중원 지방이 아니라 소백산맥 이남의 경상북도 지방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ㄱ, ㄴ - 광개토 대왕릉비에 대한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ㄷ, ㄹ로 묶인 ②번입니다.
2회 1급 4번 문제
4. 장수왕 시기 고구려의 모습 답②
문제에 제시된 유물은 광개토대왕릉비와 그 비문입니다.
이를 제작한 것은 장수왕 때로 보고 있습니다(5세기).
이 문제는 과거 고급 시험이 고급 문제다울 때 출제된 문제라 어렵게 느껴질 수 있으니, 스트레스 받지 말고 공부 차원에서 알아둔다고 생각하고 공부하세요.
장수왕은 중국의 남북조와 외교 관계를 맺어 둘 사이의 견제를 통해 국경을 안정시켰습니다.
414년에는 고구려 왕실의 신성성과 부왕인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한 광개토 대왕릉비를 건립하였습니다.
427년에는 국내성에서부터 평양성으로 천도를 단행합니다. 이를 통해 국내성 일대에 뿌리깊은 기반을 가진 고구려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죠.
ㄱ - 광개토 대왕릉비에 보이는 수묘인(묘를 지키고 관리하는 사람)의 출신을 보면 성과 곡이 등장하고 있어, 당시 고구
려가 성-곡-촌을 단위로 하는 지방 통치 체제가 정비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ㄴ - 대대로(귀족 관료의 대표, 수상) 선출에 국왕이 관여치 못하는 모습은 왕권 약화를 보여주는 예입니다.
ㄷ - 왕당(국왕 직속 부대)외에 대가(대부족장)의 사병의 존재는 중앙 집권을 확립하기 이전 초기 고구려 때부터 있던 모
습입니다.
ㄹ - 왕실의 권위를 위하여 시조인 추모(주몽)로 연결되는 천손 의식 왕계를 정립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ㄱ, ㄹ로 묶인 ②번입니다.
진흥왕과 관련된 문제
15회 고급 2번 문제
2. 신라의 화랑도 답①
'외모가 고운 남자를 뽑아 곱게 단정하게 하게 하고.....'라는 내용으로 보아 (가)에 들어갈 내용은 '화랑(花郞)'입니다.
따라서 (가)가 중심이 단체는 바로 진흥왕 때 국가적 조직으로 정비된 화랑도입니다.
화랑도는 원시 사회의 청소년 집단에서 기원하였습니다.
화랑도는 진골 출신의 귀족 자제 중에서 선발된 화랑을 지도자로 삼고, 귀족은 물론 평민까지 망라한 많은 낭도가 그를 따랐습니다.
이 때문에 화랑도는 여러 계층이 같은 조직 속에서 일체감을 가지고 활동함으로써 계층 간의 대립과 갈등을 조절, 완화하는 구실도 하였답니다.
신라 청소년은 화랑도 활동을 통하여 전통적 사회 규범을 배웠습니다.
이들은 전국의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제천 의식을 행하고, 무술과 도의를 닦으며 사냥과 전쟁에 관하여 교육을 받음으로써 협동과 단결 정신을 기르고 심신을 연마하였습니다.
이러한 화랑도는 진흥왕 때 국가 차원에서 그 활동을 장려하여 국자적 조직이 확대되었으며, 원광은 청소년에게 세속 5계를 가르쳐 마음가짐과 행동의 규범을 제시하였습니다.
화랑도는 신라의 발전과 삼국 통일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① 진흥왕은 유능한 청소년을 양성하는 단체인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화랑도는 세속 5계를 지키며, 산천을 널리 돌아다니면서 무술과 도의를 닦고, 전쟁에서는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싸워 삼국 통일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② 백제의 귀족 회의인 정사암 회의에 대한 설명이다.
③ 고려 시대의 농민 조직인 향도에 대한 설명입니다.
④ 신라의 귀족 회의인 화백 회의에 대한 설명입니다.
⑤ 조선 시대 유향소(향청)와 향약에 대한 설명입니다.
■ 신라의 화랑도
기원 | 원시 사회의 청소년 집단에서 비롯됨 |
개편 | 진흥왕 때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 확대 |
구성 | 화랑(진골 귀족) + 낭도( 일반 귀족이나 평민) |
활동 | 제천 의식 거행, 무예, 사냥과 전쟁 학습 |
규율 | 세속 5계(진평왕 때 원광법사가 전수) ⇨ 유+불+선의 가치관 |
특징 | • 계층 간의 대립과 갈등 조절․완화 기능, 인재 선발 기능, • 국가 발전과 삼국 통일에 기여 |
14회 고급 4번 문제
4. 신라 진흥왕(540~576) 시기의 모습 답①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밑줄 친 왕이 누구인지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겠죠?
첫번째 자료를 보면 '백제 왕이 관산성을 공격하니 군주 김무력이 교전하였고, 고간 도도가 백제왕을 죽였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관산성을 공격하다 죽은 백제의 왕은 바로 성왕(523~554)입니다.
백제 성왕은 신라 진흥왕과 연합해 고구려가 공격해 한강 유역을 일시 회복합니다.
이때 신라는 한강 상류를 차지하였는데, 기습적으로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까지 공격하여 빼았습니다.
이에 백제 성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말죠(554).
그리고 김무력은 김유신의 할아버지이고,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셋째아들입니다.
금관가야는 법흥왕 때 신라에게 멸망(532)하였다는 거 아시죠?
두번째 자료를 보면 가야를 공격하여 정벌할 때 사다함이 가장 큰 공을 세웠다는 내용이 나오네요.
이는 대가야를 정벌(562)한 것을 뜻합니다.
위의 두 자료에 나타난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 전사(554), 대가야 정복(562)은 진흥왕 때의 사실이니 진흥왕(540~576) 시기의 사실을 고르면 됩니다.
진흥왕 시기의 주요 사실은 화랑도를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 불교 교단 정비, 황룡사 건축, 한강 유역 차지,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 고령의 대가야 정복,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순수비 건립 등을 들 수 있습니다.
② 신라의 불교 공인은 법흥왕 때(527)입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372), 백제는 침류왕 때(384) 불교를 공인하였는데 비해, 신라는 귀족들의 반발 때문에 법흥왕
때 들어서야 공인을 하여 삼국 중 가장 늦었어요.
③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은 지증왕 때(512)의 일입니다.
④ 관료전 지급은 신문왕 때(687)입니다.
신문왕은 귀족들에게 지급하던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하였답니다.
⑤ 국학 설립은 신문왕 때(682)의 사실입니다.
국학을 설립하여 유교 경전을 가르치고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11회 고급 5번 문제
5. 삼국의 여러 유물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 파악 답②
이 문제는 카페 <시험전 꼭보기방>에 올려놓은 삼국시대 비문 총정리 글을 읽은 분들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네요.
그 글을 안 읽었더라도 1점짜리 문제 수준이기에 대부분 맞았을 문제입니다.
유물 이름+설명까지 다 제시하고 있는데 고급 2점짜리 문제라면 유물 이름까지 제시하지 않았어야 하는 문제지요.
그럼 답지를 하나씩 알아볼까요?
① 칠지도는 백제에서 만들어 일본에 보낸 것으로, 강철로 만든 칼에 금으로 글씨를 상감해 새긴 것입니다.
이는 백제와 왜의 관계를 알려주는 유물이죠.
② 중원(충주) 고구려비는 장수왕 때 고구려가 남한강 유역 죽령~남양만까지 영토를 확장했음을 알려주는 비석입니다.
③ 임신서기석 은 신라의 두 청소년이 유교 경전을 학습하기로 한 맹세를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도교 사상이 반영된 유물로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 그려져 있는 사신도, 백제의 금동 대향로, 산수무늬 벽돌,
사택지적비를 들 수 있어요.
④ 북한산 순수비는 신라가 진흥왕 때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음을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광개토 대왕의 왜구 격퇴 내용은 광개토 대왕릉비에 나타나 있죠.
⑤ 호우명 그릇은 경주의 호우총에서 발굴된 것입니다.
이 그릇 밑바닥에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을묘년 국강상 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당시 신라가 고구려의 정치적 영향력을 받았음을 알려주는 유물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8회 고급 8번 문제
8. 진흥왕(540~576)의 업적 답②
문제에 제시된 자료는 진흥왕 순수비 중 ‘북한산비’의 비문 내용입니다.
교과서 사진 자료를 꼼꼼히 살펴 알아둔 분들은 북한산비임을 쉽게 파악하였을 겁니다.
(북한산비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용산)에 보관중입니다. 조선 후기의 금석학자였던 추사 김정희가 이 비를 판독하였다는 것도 알아두세요.)
신라는 법흥왕(514~540) 때 국력을 강화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한 후 진흥왕 때에 이르러 내부의 결속을 더욱 강화하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였습니다.
그리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꾀하였으며, 황룡사를 짓고 대규모의 불교 집회를 열어 국가의 평안과 발전을 빌기도 하였어요.
이를 토대로 영토 확장에 나서 영토를 크게 넓혔습니다.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쳐서 한강 상류의 땅을 점령하고, 다시 백제가 되찾은 한강 하류의 땅마저 빼앗아 한강 유역의 땅을 모두 차지하였습니다. 이어서, 가야 연맹의 맹주인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였고, 동해안을 따라 함흥 평야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진흥왕은 새로 차지한 영토를 기념하기 위하여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진흥왕 순수비를 세우죠.
그리고 자신을 황제에 비겨 '태왕' 또는 '짐'이라 하였으며, '개국' 등의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 의식을 나타내었습니다.
특히, 이 시기 한강 유역의 장악은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는데, 이는 이후 신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① 신라가 율령을 반포한 것은 법흥왕(514~540) 때입니다.
③ 신라가 우산국(울릉도, 독도)을 정벌한 것은 지증왕(500~514)때입니다.
④ 만주 지방에 대한 대규모의 정복 활동을 통한 영토 확장은 고구려 광개토 대왕(391~412)에 대한 설명입니다.
⑤ 장인인 김흠돌 모역 사건을 빌미로 대대적으로 귀족을 숙청하고 전제 왕권을 강화한 이는 신문왕(681~692)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5회 고급 7번 문제
7. 진흥왕(540~576) 시기의 사실 답④
문제에 제시된 비석의 내용 중 서두에 나와 있는 '짐은 하늘의 은혜를 입고......사방으로 영토를 개척하여'라는 내용을 보고 광개토 대왕릉비로 착각하는 분도 있었을 것 같네요.
그렇게 헛갈린 분은 ①번을 답으로 체크하는 우를 범하였겠네요.
그러나 비석의 내용 끝에 나와 있는 '관경(管境)을 순수(巡狩)'라는 내용를 통해 이 비석이 진흥왕 순수비라는 것을 유추해 낼 수 있습니다.
신라는 법흥왕(514~540) 때 국력을 강화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한 후 진흥왕 때에 이르러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였습니다.
그리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꾀하였으며, 황룡사를 짓고 대규모의 불교 집회를 열어 국가의 평안과 발전을 빌기도 하였어요.
이를 토대로 영토 확장에 나서 영토를 크게 넓혔습니다.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쳐서 한강 상류의 땅을 점령하고, 다시 백제가 되찾은 한강 하류의 땅마저 빼앗아 한강 유역의 땅을 모두 차지하였습니다. 이어서, 가야 연맹의 맹주인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였고, 동해안을 따라 함흥 평야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진흥왕은 새로 차지한 영토를 기념하기 위하여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진흥왕 순수비를 세우죠.
① 광개토 대왕(391~412) 때의 고구려의 영통 확장 내용입니다.
② 장수왕(412~491) 때의 남한 강 유역 점령 내용입니다.
③ 지증왕(500~514) 때의 우경과 순장 금지 내용입니다.
⑤ 문무왕(661~681) 때의 민족 융합 정책에 대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5회 고급 12번 문제
12. 6세기 전반 고구려의 내분과 신라의 한강 유역 차지 답③
이 문제는 고구려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문제이나, 신라는 고구려의 정치적 혼란 상황을 이용해 진흥왕이 백제와 연합해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으니 한번 같이 풀어보자구요.
문제에 제시된 자료에서 고구려 안원왕(531~545)이 나타나 있네요.
그리고 고구려가 이 당시 왕위를 둘러싸고 내분을 겪고 있다는 내용도 나와 있죠?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 말이 있듯, 고구려가 내정 불안을 겪고 있던 이 시기 국가를 새롭게 중흥시킨 백제 성왕(523~554)과 신라 진흥왕(540~576)은 연합해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공격합니다.
신라는 한강 상류를, 그리고 백제는 한강 하류를 공격하여 차지하게 되죠.
그런데 연합을 맺었던 신라가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를 공격하여 이를 빼앗는 일이 벌어집니다.
화가난 성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맙니다(554).
이 사건으로 120여 년 간 유지되었던 나·제 동맹(433~554)도 깨지게 됩니다.
① 고구려는 고국원왕 때에 서북쪽의 전연의 침입, 그리고 남쪽으로는 백제의 공격을 받습니다.
결국 백제(근초고왕)의 공격을 받아 고국원왕이 전사(371)하는 등 국가적 위기 상황을 맞게 됩니다.
② 고구려는 고국천왕(179~197) 때 먹을거리가 모자란 봄에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가을에 추수한 것으로 갚게 하는 진대
법을 실시하였습니다(194).
④ 고구려 보장왕(642~668) 때 당 태종이 연개소문의 정변을 트집잡아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합니다.
고구려는 국경의 여러 성이 함락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안시성을 중심으로 민·군이 협력하여 당군을 물리
쳤습니다(645).
⑤ 고구려는 고국천왕 때에는 부족적인 전통을 지녀 온 5부를 행정적 성격의 5부로 개편합니다.
왕위 계승도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바뀌었으며, 족장들이 중앙 귀족으로 편입되는 등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화
가 더욱 진전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4회 고급 4번 문제
4. 삼국 시대 세워진 신라의 비석 답①
(가) 영일 냉수리비(경북 포항)입니다.
이 비의 건립 연대는 신라 지증왕 4년(503)으로 추정되는(눌지왕 27년인 443년설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비에는 이 지역에서 발생한 재산권 분쟁을 각부의 귀족들이 참여하는 중신 회의에서 합의하여 처리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비문에는 중국 문서에서 발견되는 신라의 옛 국명인 사라(斯羅)가 최초로 나오고, 또 최초로 임금(지증왕)의 본명이 '지도로'라는 이름으로 나타났으며, 훼부(喙部), 사훼부(沙喙部) 등 신라의 옛 지명과 아간지(阿干支), 나마(奈麻) 등의 관등명이 나타나 있어 신라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나) 울진 봉평비(경북 울진)입니다.
신라가 동북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건립한 비로, 법흥왕 11년(524)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문에는 당시 신라가 영토 확장으로 동해안 지역에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이곳 지역을 새로 편입할 때 주민들의 항쟁 사태가 일어나자, 이를 응징하기 위해 6부 회의(六部會議)를 열고 대인(大人)을 파견하여 관련자를 벌을 주고, 다시 대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이 비가 건립되기 이전인 6세기 초 이전에 이미 신라에 6부가 성립되었다는 것, 법흥왕 때의 율령 반포 등을 파악할 수 있답니다.
(다) 단양 적성비(충북 단양)입니다.
이 비는 진흥왕 때인 551년 전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며, 이 지역 점령에 대한 포상과 이 지역 주민에 대한 회유의 목적으로 건립되었습니다.
이 비를 통해 신라가 진흥왕 당시 고구려가 차지하였던 한강 상류까지 장악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답니다.
(라) 북한산비(서울)입니다.
이 비는 진흥왕 때인 568년 경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가 한강 하류까지 진출했음을 보여줍니다.
이 비는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의 고증에 의해 진흥왕 순수비임이 밝혀졌다는 것, 그리고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아두세요.
(마) 마운령비입니다.
마운령비(568)는 황초령비(568)와 함께 진흥왕 때 신라가 함경남도 지역까지 진출했음을 보여줍니다.
① 울진 봉평 신라비에 대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3회 1급 9번 문제
9. 삼국의 한강 유역 쟁탈 과정에서의 기념비 답①
문제에 제시된 비석을 세운 공통적인 배경을 묻는 문제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제시된 비석이 어느 나라에서 언제 만든 것인지 파악해야 합니다.
충주(중원) 고구려비는 고구려 장수왕 때, 단양 적성비와 북한산비는 신라 진흥왕 때 세운 것입니다.
하나씩 살펴볼까요.
충주(중원) 고구려비는 장수왕 때 고구려가 이 지역을 차지하고 이를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비의 건립 연도는 여러 설이 있으나 481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 비의 내용과 존재를 통해 장수왕 때 고구려가 남한강 유역까지 진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단양 적성비는 진흥왕 때인 551년 전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며, 이 지역 점령에 대한 포상과 이 지역 주민에 대한 회유의 목적으로 건립되었습니다.
이 비를 통해 신라가 진흥왕 당시 고구려가 차지하였던 한강 상류까지 장악하였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어요.
그리고 북한산비는 진흥왕 때인 568년 경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가 한강 하류까지 진출했음을 보여줍니다.
이 비는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의 고증에 의해 진흥왕 순수비임이 밝혀졌다는 것도 알아두세요.
결국 이를 종합해 볼 때 세 개의 비석들은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세운 기념비임을 알 수 있지요?
당시 삼국 간의 항쟁에서 한강 유역을 장악한다는 것은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한강을 차지한 국가가 국가적 전성기를 맞이하였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겠지요?
백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을 당시 전성기를 보였고, 고구려는 장수왕 때, 신라는 진흥왕 때 이 지역을 차지하면서 가장 전성기를 보였습니다.
② 신라와 고구려와의 동맹 관계는 중원고구려비에만 해당됩니다.
이 밖에 호우명 그릇과 광개토 대왕릉비를 통해서도 파악해 볼 수 있습니다.
③ 제시된 비석의 내용에 불교적인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④ 도교와 관련된 삼국의 문화유산으로는 고구려의 사신도와 백제의 금동대향로, 산수무늬 벽돌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비문으로는 백제의 사택지적비가 있어요.
⑤ 삼국 시대에 유학을 공부하였던 내용을 알려주는 금석문으로는 임신서기석을 들 수 있습니다.
임신서기석을 통해 신라에서도 청소년이 유교 경전을 공부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풀이 장난아니네요 우와왕~~
오늘 방금 공부한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한 해설을 보게 되니 더 이해가 잘되네요 ^^
자세한 풀이 감사합니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자세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한 시대씩 나누어 공부해야겠어요. 전체를 공부하고 하려니 허거걱.. 감사합니다.
자세한 설명과 안내 감사합니다.
냉수리비 봉평비 어려워요 고급은 확실히 좀더 세세히 공부해야겠어요 심오한 해설 감싸드립니다 한국사짱 짱!!!!!!
고급은 역시...쉽지 않겠지만 열심히 할게요.!!
역시 고구려 신라 전성기때 왕이라 시험출제율이 높군요....
자세한 설명 너무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됩니다.
섬세하신 풀이에 이해가 절로 됩니다^_^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비석에 대한 공부를 했네요.
중원고구려비, 광개토대왕비...ㅠㅠ
그리고 영일냉수리비, 울진봉평신라비..ㅠㅠ
어렵네 ㅎㅎ
비석을 시대별로 잘 알아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당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당!
감사
감사합니다.
속도가 더디다는 체감을 하지만 뒤로 갈수록 겹치니 빨라지겠죠?^^
감사합니다!!
많이 알고있다고 생각하고 풀었는데 자만이었네요ㅠㅠ 감사합니다!
정말 상세하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와 ㅎ 해설 엄청나네요 감사합니다.
해설 좋네요..
굿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고구려 장수왕과 신라 진흥왕에 대한 문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깔끔하게 풀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꼼꼼히 해설을 보니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차곡차곡 쌓이면 실력이 되겠죠??
유사기출문제 굿입니다~~
진짜 짱! 짱! 짱!입니다.
정말 정리가 잘 되어있어요
와우 꼼꼼한 풀이 정말 많은 도움 감사합니다^^
와 이거 어려웠다 전 5번 골랐음.. ㅠㅠ
공부 잘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