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순일목사
종순일 목사의 ‘빚 탕감 잔치’
이덕주(감신대 교수/ 한국교회사)
요즘은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 해방 전만 해도 세례 받은 기념으로 뭔가를 하는 전통이 있었다. 세례를 받고 정식 교인이 된 기념으로 교회에 필요한 물품을 기증하거나 예배당 마당에 나무를 심기도 했다. 세례를 일생에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하여 이를 기념하는 흔적을 남기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선교 초기에 세례를 받으면서 ‘이름을 바꾼’ 교인들이 있었다. 개신교회는 그 전통을 버렸지만 천주교회나 정교회, 성공회 같은 ‘가톨릭’ 전통의 교회들은 세례를 받으면서 성인(聖人)의 이름을 따 ‘프란체스코’, ‘베로니카’, ‘베네딕또’, ‘마리아’ 같은 서양식 이름으로 ‘본명’(세례명)을 지어 받았다. 그런데 이런 서양식 이름이 아닌, 한국식으로 이름을 바꾼 개신교인들이 있다. 강화도 북부 해안 마을, 홍의에서 처음 믿은 교인들이 그 주인공들이다.
예수 믿고 이름을 바꾼 사람들
홍의 마을에 복음이 들어간 것은 1897년 어간이다. 이 마을 서당 훈장이 이웃 서사면 다리목(지금 교산) 마을에서 복음을 접하고 돌아와 동네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서당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오늘 홍의교회 출발이다. 훈장의 전도를 받고 믿기로 결심한 홍의 마을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면서 개명(改名)하기로 하였다.
“우리가 예수 믿고 세례를 받는 것은 거듭난 증거다. 아기가 새로 태어나면 새 이름을 지어주듯 우리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이름을 새로 짓는 것은 당연하다.”
이들은 신생(新生)과 중생(重生)의 표시로 이름을 바꾸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서 같은 돌림자를 쓰기로 하였다.
“우리가 마을에서 처음 믿었고, 한 날 한 시에, 함께 믿어, 한 형제가 되었으니 한 일(一) 자로 돌림자를 쓰자.”
성은 부모님이 준 것이라 바꿀 수 없었고,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한 일자로 통일하였으니 가운데 자만 정하면 되었다. 그래서 신앙적으로 좋은 의미를 지닌 ‘애’(愛), ‘신’(信), ‘능’(能), ‘순’(純), ‘충’(忠), ‘봉’(奉), ‘은’(恩), ‘경’(敬) 같은 자를 적은 종이를 주머니에 넣고 기도한 후에 하나씩 뽑았다. ‘애’ 자가 뽑히면 ‘애일’, ‘신’ 자가 뽑히면 ‘신일’, ‘경’ 자가 뽑히면 ‘경일’이 되었다. 그런 식으로 홍의 마을에 처음 복음을 전한 훈장은 박능일(朴能一)이 되었고 김경일(金敬一), 권신일(權信一), 장양일(張良一), 주광일(朱光一) 같은 홍의 교회 개척교인들이 그렇게 해서 나왔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쓰는 명칭만 바꾼 것이 아니라 호적과 족보까지 새 이름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복잡한 문제가 생겼다. 같은 집안의 아버지와 아들, 삼촌과 조카가 같은 날 세례를 받은 것이다. 예외는 없었다.
“육적으로는 부모지간, 숙질지간이지만 영적으로는 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 같은 돌림자를 쓰는 것이 마땅하다.”
그 결과 부자간, 숙질간에 같은 돌림자를 쓰게 되었다. 권신일의 아들은 권충일(權忠一), 조카는 권혜일(權惠一)이 되었고 정천일(鄭天一)의 아들은 정서일(鄭瑞一), 김봉일(金奉一)의 아들은 김환일(金還一)이 되었다. 믿지 않는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전통적으로 돌림자는 친족 간의 촌수와 항렬을 알려주는 단서였다. 상하간의 서열이 분명하여 ‘윗대’의 돌림자를 ‘아랫대’에서 쓸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질서가 교회에서 깨졌다.
이처럼 파격적으로 이름을 바꾼 교인들을 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절도, 촌수를 모르는 상것들이라”며 “검정개”(그 때 교인들은 검은 옷을 입고 다녔다)라고 조롱했지만 ‘육적 질서’ 대신 ‘영적 질서’를 따르기로 한 교인들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오히려 홍의 마을에서 시작된 개명 전통은 강화 전 지역으로 확산되어 선교 초기 ‘일’자 돌림으로 개명한 강화 일대 교인들은 60여명에 달한다. 이들 개명한 교인들은 이름을 바꾼 만큼 신앙에서도 철저하였다. 홍의교회 개척 교인 종순일(種純一)이 대표적이다.
마을 빚을 탕감해준 부자 교인
종순일은 예수 믿기 전 ‘마을 부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재물에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그 마을 사람 가운데 그에게 돈을 빌려 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세례 받고 이름을 바꾼 그는 교회 속장이 되어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였다.
하루는 마태복음 18장 23절 이하에 나오는 비유 말씀을 읽었다. 1만 달란트 빚진 신하가 임금에게 빚을 탕감 받은 후 나가다가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 빚을 갚으라며 감옥에 가두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임금이 화가 나서 빚 탕감을 취소하고 그 신하를 감옥에 가두었다는 이야기였다. 이 구절을 읽은 종순일은 며칠 고민하다가 자기에게 돈 빌려 간 마을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자신이 읽은 마태복음 말씀을 들려주었다.
“오늘 내가 예수 믿고 죄 사함 받은 것이 천만 냥 빚 탕감 받은 것보다 크거늘, 여러분에게 백 냥, 천 냥 돈 빌려주고 그걸 받으려 한다면 이는 성경 말씀에 나오는 악한 종이라 할 것이요. 이 시간 후로 여러분이 갚을 빚은 없소.”
그는 문갑에서 빚 문서들을 꺼내 보는 앞에서 불태워 없앴다. 행여나 빚 독촉을 받는 것인 아닌가, 두려운 마음으로 왔던 마을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요즘 없는 빚도 있다고 우겨서 남의 돈을 빼앗는 세상인데 어찌하여 예수교 하는 사람은 자기 돈까지 버려 남을 도우니 참 갸륵한 일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홍의 마을의 복음화는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1900년 4월에 일어난 일이었다.
거기서 끝난 것은 아니다. 종순일은 ‘부자 청년’에 대한 말씀(마태 19:16-30)을 읽은 후 자기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남은 것은 교회에 기부하였다. 그리고는 부인과 함께 고향을 떠나 전도 길에 나섰다. 종순일은 전대도, 식량 주머니도 차지 않은 ‘가난한 전도자’가 되어 남이 가지 않는 ‘땅 끝’(행 1:7)을 찾아 전도하였다. 아직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강화 남부 길상면으로 가서 전도한 결과 길직, 길촌, 온수, 선두, 넙성, 덕진 등지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나서 석모도와 주문도, 영종도 같이 교통이 불편한 섬들을 찾아다니며 전도하고 목회하였다.
재현된 빚 탕감 잔치
종순일은 1917년 감리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강화 남쪽 주문도 진촌교회(현 서도중앙교회)에 부임했다. 주문도에는 1893년 성공회 신부가 와서 복음을 처음 전했고 1902년 김근영 전도사가 와서 감리교회를 설립했는데, 주문도를 호령하던 ‘밀양 박씨 충헌공파’ 집안의 박두병 ․ 박순병 형제가 교회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그런 진촌교회에 박두병 ․ 박순병과 같은 집안사람으로 아버지가 박두병에게 ‘2천원’(현 시가로 1억 원 정도) 빚을 진 채 별세하여 그 빚을 고스란히 유산으로 물려받은 가난한 교인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 빚을 갚기 위해 8년 동안 쓸 것을 쓰지 않고, 먹을 것을 먹지 않고 절약하여 16원을 모았으니 그런 식으로 하면 평생 가도 갚을 수 없을 것은 분명했다. 그가 하루는 교회 목사와 박두병 ․ 박순병을 비롯한 박씨 문중 교인들을 집으로 초청하였다.
“여러 어르신, 아버님께서 지신 빚을 갚기 위해 8년 동안 애써 모았으나 16원 밖에 모으지 못했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제가 죽기 전에 빚을 다 갚지 못하게 될뿐더러 빚 때문에 도무지 제 맘이 편치 못하여 기도도 할 수 없으니 어찌 하면 좋습니까? 여러 어르신의 처분을 따르겠습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것은 종순일 목사였다. 그는 성경을 펴서 마태복음 18장 20절 이하 말씀을 읽고 나서 ‘두 세 사람이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과 ‘1만 달란트 빚 탕감 받고도 1백 데나리온 빚을 탕감해 주지 않은 신하가 받은 형벌’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깨고 동생 박순병이 입을 열었다.
“형님, 오늘 이 자리에서 이 문제가 난 것도 하나님의 뜻인 듯 합니다. 형님은 그 돈을 받지 않아도 사는데 지장이 없지 않습니까? 받아야겠다는 형님 마음과 갚아야 된다는 저 사람의 근심이 서로 다르니 어찌 합심하여 기도가 되겠습니까? 기도 할 때 서로 거리낌이 없어야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박두병이 무릎을 치며 대답했다.
“그럼세. 그렇게 함세. 자네 부친이 내게 진 빚은 아니 갚아도 되네.”
박순병이 다시 이어 받았다.
“형님이 2천원 빚을 탕감해 주었으니 저 사람 부친이 내게 진 빚 60원을 어찌 받겠소? 나도 그 빚을 탕감해 주렵니다.”
아버지 빚을 물려받았던 가난한 교인은 물론이고 그 자리에 있던 마을 사람들 모두 감동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주문도 섬사람들이 교회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오래지 않아 당시 섬 주민 181호 가운데 134호가 교회에 나오게 되었으니 전 주민의 75%가 교인이 되는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된 것이다. 지금도 면소재지인 주문도가 ‘술집과 다방이 없는’ 성역(聖域)으로 남게 된 데는 이러한 감동적인 복음 역사가 크게 작용하였다.
이런 감동의 연극을 연출한 장본인은 종순일 목사였다. 그는 17년 전 고향(홍의)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연극을 이제 목회자가 되어 주문도에서 재현한 것이다. 그 때 ‘빚잔치’ 주연배우였던 그가 지금 같은 내용의 ‘빚잔치’ 연극의 연출자가 되었다. 17년 전의 감동이 장소만 바꾸어 그대로 재현된 셈이다. 은혜는 은혜를 낳는 법이다. 그런 그에게 ‘성자’ 목사 칭호가 붙여진 것은 당연하다.
부요한 양반 집에서 태어났으나 예수를 믿으면서 이름을 바꾸고, 마을 빚을 탕감해 주고,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난한 전도자가 되어 ‘땅 끝’을 찾아 복음을 전하는데 일생을 바친 종순일 목사는 1926년 목회 일선에서 은퇴한 후 주문도에서 조용한 말년을 보내다 별세하였다.
( p. s. 종순일 목사님은 2남 1녀을 두었고 장녀 종보희(평양신학교 졸업) 장남 종명원 차남 종명준이었다. 종명준과 그의 부인( 인천 창녕교회의 반정순 권사였음)은 1남 6녀를 두었고 자녀들 모두 믿음 생활을 잘 하고 있으며 장녀 종광순은 현재 필라델피아 새한장로교회를 담임하는 고택원 목사의 사모이다. 고목사의 장녀(정한나)와 사위(정피터)는 둘다 Main Line Health Care의 내과의사로 일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