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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실/ mailmyungsim9443@naver.com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 강릉여고와 덕성여대 응용미술과 졸업.
졸업 후 덕성여대에서 재직.
국전작가
삼도물산 디자이너
염직공예가로 다수 전시회 출품
결혼하여 전업주부로 가사에 전념
인생 끝자락 칠십에 수필공부 시작 2019년 에세이스트 신인상 수상.
영서문학회 회원, 에세이스트 작가회의 이사.
화제작가 신간 특집
행복나무외 2편
최윤실
삼월 봄볕이 참 따뜻하다. 입춘이 지난 햇살에선 상큼한 봄 냄새가 난다. 창가에 앉아 한가하게 봄볕을 즐기고 있는데 베란다에 놓여 있는 화초들이 눈에 들어왔다. 군자란도 꽃대가 올라와서 주황색 꽃망울이 금방 터질 듯 부풀었다. 그 옆에 사시사철 푸른 잎을 가지고 있는 관음죽도 연록 기운이 살펴시 피어오르고 있다. 관음죽은 대나무를 닮았지만 잎이 크고 넓적하며 마디게 자라는 편이라 실내용으로 사랑받는 식물이다. 이 나무가 우리 집에 온 지도 40년이 넘었다.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그동안 여섯 번 이사를 했고 화분갈이할 때 다른 화분에 촉을 나눠 심어서 다른 집으로 분양한 것도 셀 수 없이 많다. 관음죽은 아들과 같이 나에게 행복을 가지고 온 행복나무다.
결혼하고 딸 둘을 낳자 시어른들은 조바심을 냈다. 쌍둥이인 아래 시동생이 먼저 아들을 낳았다. 시어머니는 더욱 조급증을 냈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어머니의 조바심은 나에게 슬픔을 안겨주었다. 시어머니와의 관계가 불편해지자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시아버님은 시어머니와 의논도 없이 우리의 분가를 결정하셨다. 오후에 외출한 시아버님이 집으로 전화를 했다.
“지금 압구정동으로 나와라.”
영문도 모른 채 둘째딸을 업고 시아버님이 기다리는 곳으로 나갔다. 부동산 사무실이었다. 그날 부동산에서 추천한 아파트를 계약하였다. 압구정동 한양 아파트 7동 401호. 처음으로 가져본 나의 집이다. 집으로 돌아오신 시아버님의 말씀을 들은 시어머니는 폭발하고 말았다. 이런 것이 시집살이구나 생각했다. 대번에 나는 아들을 빼앗아간 못된 며느리가 되었다. 어머니는 평생 아들과 같이 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분가를 한다니까 억울하고 분하다며 매일매일 울부짖듯 며느리 탓을 하였다. 식구들은 어머니의 불같은 성격을 꺾을 수가 없었다. 남편과 시아버님은 철저한 방관자였다.
이삿짐은 많지가 않았다. 결혼할 때 가져온 것만 싣고 육년 동안 살았던 시댁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분가를 했다. 남편은 이삿날에도 남의 집 이사하는 것처럼 평상시와 같이 출근했다. 아침 일찍 달려 온 동서들은 안방에 누워있는 시어머니를 위로하느라고 애를 먹었다. 전쟁이 따로 없었다. 나는 영락없이 전쟁에 패한 쓸쓸한 패잔병이었다. 육년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는데 그 시간과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두 딸과 대문을 나서자 시아버님이 따라나섰다.
밤 늦은 시간 이사한 집으로 온 남편은 먼저 어머니 집으로 갔었다고 했다. 금방 노여움이 사라지지 않겠지만 아들로서 불효했다는 자책으로 갔지만,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전박대를 받았다고 했다. 지쳐서 금방 쓰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이사한 집으로 들어선 남편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나를 원망하는 것도 아니었다.
답답하고 서글픈 마음과는 다르게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는 성수대교와 시원한 한강이 보여 만족스러웠다. 날마다 어머니와의 불편한 관계가 온통 머릿속을 헤집었다. 부모 자식 간에 불목(不睦)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삼일마다 시댁을 찾아갔다. 시어머니한테 어떤 수모를 받아도 참기로 했다. 이런 일을 치르면서 단 한 번도 친정을 찾지 않았다. 나의 괴로움이 친정부모님의 괴로움으로 번질 것 같아서다. 친정부모님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친정이 멀리 있어 다행이었다. 시아버님은 나를 믿어주었고 남편은 이편도 저편도 들지 않고 철저히 침묵을 지켰다.
나는 아들을 꼭 낳고 말겠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새해가 되자 나의 간절한 마음이 통했는지 꿈속에서 삼신할머니가 한강 물을 바가지에 떠주면서 마시라고 했다. ‘이번은 아들을 낳게 해주겠다’는 환청 같은 소리를 듣고 열 달 후에 아들을 낳았다. 나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힘든 줄도 몰랐다. 너무 좋아서 태어난 아기를 보느라고 밤에 잠도 잘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아들을 낳았으면 끝까지 시어머니와 관계가 좋아서 분가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종종 해본다. 40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나에게는 영원히 가슴 아픈 일이다.
관음죽은 아들이 태어나자 축하 화분으로 들어온 것이다. 많은 분들이 자기 일인 양 좋아하고 축하해주었다. 장손이 태어났다고 기뻐하시던 시아버님의 모습은 눈물겨울 지경이었다. 물론 시어머님과의 관계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시아버님은 수요일마다 아기를 보려고 아파트로 오셨다. 아들은 나에게도 가정에도 평화를 가져온 천사였다. 아들이나 딸이나 똑같은 자식인데 그 시절엔 장자가 아들이 없으면 대가 끊어진다고 생각했고, 조상님 제사도 못 지내는 불효자로 낙인이 찍히는 시대였다. 시어른들도 우리 부부도 밀린 숙제를 한 것처럼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그 시대엔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캠페인이 정부 정책이었다. 셋째아이는 의료혜택도 없었다. 매주마다 오시는 시아버님의 간절한 마음에 불효를 하는 것 같아서 우리 가족은 분가를 한 5년 후에 시부모님이 살고 있는 같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4월에 이사를 했고 7개월 후, 늦가을과 초겨울의 경계인 십일월 말에 시아버님은 뇌출혈로 운명하셨다. 향년 63세였다. 새벽 한 시에 우리 부부는 시아버님의 임종을 지켜드렸다. 간절하게 손주를 기다린 것도 우리와 일찍 작별할 것을 예감했기 때문일까. 얼마나 좋았으면 매주일마다 우리 집을 방문하셨을까. 요즘도 시아버님 생각을 하면 끝까지 나를 맏며느리라고 믿어주셨던 고마움이 사무친다. 관음죽을 볼 때마다 장년이 된 아들 생각을 한다. 사철 푸른 잎으로 있는 관음죽은 우리 가정에 평화를 가지고 온 행복나무다.
증편 솥에 김이 오르면
최윤실
남편의 고희가 다가왔다. 남편은 무슨 잔치냐고 하면서 극구 사양했지만 43년을 같이 살아온 나는 남편의 속마음을 모른 척했다. 남편은 암이 발견되었을 때도 흔들림 없이 잘 이겨냈다. 아들과 딸들도 모두 결혼을 하였고, 자주 만나지 못한 친지와 형제들에게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었다. 한편으론 초대하는 분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앞섰지만, 자식들이 강력하게 권하니 못 이기는 척하면서 자식들 의견에 따르기로 작정하고 남편과 나는 못 들은 척 못 본 척했다. 호텔을 예약하고 초대하는 인원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다만 우리 부부는 초대하는 인원을 단출하게 하자는 뜻만 전했다. 우리와 깊은 인연들이 있는 형제, 조카, 사돈만 초대하기로 했다.
둘째딸 가족과 아들 가족들이 두바이에 나가 있는 상황이라 저희들끼리 연락을 하는 것 같았다. 호텔을 예약하고 진행 과정을 서로 조율하면서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한국으로 들어오는 날짜까지 잡은 눈치였다. 직장 생활을 외국에서 하는 자식들 생각을 하면 솔직하게 우리 부부의 속마음은 복잡하기도 하고, 요즘 시대에 맞지도 않는 것 같아 많이 망설였다. 그렇지만 나는 먼 훗날을 위해 후손들에게 가르침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이런 모습들은 훗날 자손들이 부모에게 해야 할 것은 꼭 하도록 규준이 되어 줄 것 같기도 했다. 이 행사를 꼭 해야 할 이유가 나한테는 또 하나 있었다. 두고두고 후회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시아버님의 회갑에 당신의 반대로 회갑연을 해드리지 못했는데 2년 후 돌아가시자 자식들은 정말 후회 막급이었다. 부모님은 자식 옆에 오래 계시지 않으므로 부모님의 중요한 기념일만은 정성을 다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바쁜 세상이다. 무엇이든지 간소하게 하는 시대다. 모든 것을 생략하다 보면 결국은 편한 것만 찾게 되어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게 마련이다. 세월이 흘러 후대의 자손들에게 올바른 예의범절이나 지켜져야 할 풍습들이 다 없어진다면 예부터 전해오는 좋은 풍습은 자취를 감추고 말 것이다. 남편의 고희가 다가오자 65여 년 전 할아버지의 회갑연을 위하여 가족들이 펼친 모습들이 내 기억 속에서 살아나기 시작했다.
65년 전 봄날 할아버지 회갑연은 온 동네가 떠들썩하게 치러졌다. 그때 나는 열 살이었다. 할아버지의 생신은 음력 2월 말일이기 때문에 봄볕이 따뜻했다. 한 달 전부터 변하지 않는 약과, 과질, 술 같은 음식 장만이 시작되었다. 할머니와 어머니를 중심으로 이웃에 사는 친척들이 매일 우리 집으로 모여 들었다.
뒷방 아랫목에는 커다란 독이 들어서고 술밥을 쪄서 누룩과 솔잎을 섞어 술을 담갔다. 커다란 독에서 술이 익어가는 시큼한 냄새가 나고, 며칠을 조청과 엿을 졸이는 작업으로 안방 아랫목은 장판이 갈색으로 변하고 발도 디딜 수 없이 뜨거웠다. 잔치 날이 다가오자 아버지, 어머니는 매일 읍내로 나가 생선이며 알록달록한 과자며 그릇들을 사왔다. 그것은 일꾼 아저씨들이 소달구지에 실어 날랐다. 두부를 만들고 감주와 수정과를 만드느라 모두가 분주했다. 남자들은 소와 돼지를 잡았다.
부엌 옆 곳간에는 노란색 분홍색 하양색 과질과 강정을 만들어서 소쿠리마다 그득그득했다. 할머니는 방에서 꿀로 반죽한 약과를 기름에 튀기고 여러 가지 꽃 모양의 송화다식을 다식판에 찍어내셨다.
한쪽에서는 증편을 빚어 솥에 안치고 있었다. 막걸리로 부풀린 하얀 쌀가루 반죽 위에 진홍색 맨드라미 꽃잎과 까만 석이버섯을 채썰어 꽃모양으로 올리고 미나리 잎을 따다 줄기와 잎을 만들면 금방 나비가 날아들 것만 같았다. 증편 솥에 김이 오르면 멀리 있는 친척들이 오기 시작했다. 솜씨 좋은 마을 아낙들이 몰려와 음식을 만드느라 우리 집은 북적댔다.
회갑연 전날부터 이웃이나 친척들이 만든 떡을 담은 함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쁜 일손을 덜기 위하여 이웃간에 손이 많이 가는 떡으로 서로 부조를 했다. 이십여 함지박이 들어왔다고 했다. 함지 하나에 쌀 한 말 정도의 떡을 만들어서 담았다니까 그 양이 얼마인가. 아버지는 읍내 중국집에서 요리사를 초청하여 그 많은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튀기고 볶고 하면서 그 당시엔 먹어 보지도 못한 중국 요리들을 내놓았다.
앞마당과 사랑채 마당, 텃밭에도 멍석이 깔리고 차일이 쳐졌다. 부족한 교자상 대신 사과 상자를 네 개씩 묶어서 일렬로 놓고 그 위에 하얀 종이를 씌웠다. 임시로 만들어진 상 위에 놓아야 할 음식들 이름들을 인쇄하여 붙여 놓았다. 떡을 놓아야 할 자리에는 떡이란 글자가 붙어 있었다. 백여 명이 한꺼번에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하였고, 일하는 사람도 일사분란하게 일을 할 수 있게 한 아버지의 지혜가 돋보인 장면이었다. 후일 많은 사람들이 일을 진행하는 아버지의 능력을 이야기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 가족 모두가 존경심을 갖고 과일과 음식들을 높게 쌓아놓은 교자상 앞에서 술잔을 올리고 절을 하며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다. 할아버지의 회갑연은 온 동네잔치가 되어서 일주일 동안 치러졌다. 친정아버지, 친정어머니의 지극한 효심이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음도 깊고 지혜도 넘치는 하늘이 내리신 통 큰 11대 종손과 종부였다. 시골 마을 종갓집에서 일어난 친정 부모님이 할아버지, 할머니를 위하여 회갑잔치를 치르신 풍경은 요즘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친정부모님은 효성이 지극하였다. 자손들에게도 항상 최선을 다하라는 가르침을 주셨다. 나에게 모범적인 행동으로 가르침을 주신 것에 감사한다. 100세를 다섯 달 남기고 떠나신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라.”
그날
최윤실
내 몸은 그날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기억하고 있다. 가슴 밑바닥에 숨겨 놓았던 슬픔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남편과 다시 만날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을 하고 혼자서 지낸 시간이 일 년이 되었다. 괜찮다고 다짐하면서 보냈다.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잊어서가 아니라 생각하지 않으려고, 생각이 날 때마다 머리를 흔들면서 눈을 감았다. 불경에 나오는 그럴듯한 좋은 말로 포장을 하였지만 모두 말뿐이란 것을 그날 깨달았다. 어쩔 수 없이 무너져 내렸다.
부부란 오백생과 오백생이 합쳐 천생연분이 된다고 한다. 부부의 인연은 결코 쉽게 만나지는 인연이 아니라는 뜻이다. 남편은 노래를 좋아했고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점잖다, 부드럽다는 칭송을 듣곤 했었는데, 나는 박력이 없다고 핀잔을 자주 했었다. 예민한 시아버지는 가끔 “아가, 너는 죽는 날까지 네 남편 속을 모를 게다” 하셨다. 그는 이 세상을 하직할 때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끝까지 나에게 괜찮다고 했다. 얼마나 무섭고, 보고 싶고, 할 이야기가 많았는지 내가 응급실에 들어갔을 때는 심장은 멈추었는데 눈을 감지 못한 모습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마지막 임종할 때 불러주면 극락세계로 간다는 아미타경 염불도 해주지 못했다.
나는 소리내어 마음 놓고 울지도 못했다. 나이가 든다고 감정까지 늙는 게 아니란 걸 절실히 깨달았다. 화장장 앞에서 영원히 다시 볼 수 없는 남편을 떠나보내면서,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남편을 배웅하면서 울고 있는 내 모습을 내려다보던 사람들 시선이 왜 부끄럽게 느껴졌는지. 다 나이 탓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마음 놓고 울지도 못하는 나이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으로 쓸쓸해졌다. 자식들 앞에서도 사람들 앞에서도 울음을 꾹꾹 눌러 참았다. 주위에서 빨리 적응한다고 걱정 아닌 안도의 표정들을 짓는 것을 보면서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다. 얼마를 혼자서 더 살아가야 되는지 알 수 없지만, 혼자 일어서야 한다고 수도 없이 나에게 최면을 걸면서 시간을 보냈다. 내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자식들 앞에서 거짓으로 호기를 부려 보았다.
그날 코로나로 환자들이 밀려서 응급실 밖에서 한 시간을 기다리지 않았다면, 다른 병원으로 갔더라면, 그날 내가 외출하지 않았더라면, 외출에서 조금만 더 일찍 집으로 돌아왔더라면, 수없는 가정으로 밤을 새웠다. 밤바다 검은 파도처럼 무섭게 밀려오는 상념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내 잘못이라는 자책으로 괴로웠다.
다시 그날이 돌아오자 꽁꽁 숨기고 지내왔던 내 몸의 세포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날카롭게 날을 세웠다.
일주기가 다가오자 그동안 참았던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그리움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며칠을 외출도 하지 않고 전화기도 꺼 놓고 동굴 같은 집에서 지냈다. 남편이 쓴 글을 읽어보고 같이 살면서 좋았던 일, 힘들었던 일들을 돌아보고, 그러면서 나는 남몰래 그리움을 토해냈다. 사진 속에 있는 당신은 행복하게 웃고 있다. 좀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해요, 말을 걸면 당신은 더 다정하게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나는 몸과 마음이 더 아팠다.
그날에 일어난 일들은 어제 일어난 것처럼 하나하나가 되살아났다. 나는 떫은 생감을 먹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눈은 생솔가지 내를 쐬듯 눈물이 나면서 맵다. 눈에 보이는 남편의 흔적들을 지우려고 일 년 동안 생살을 찢는 심정으로 버리면서 지냈다. 그럴수록 내 마음속에 짝 달라붙은 젖은 낙엽 같은 흔적은 더 선명해졌다. 이젠 손도 잡을 수가 없다. 같이 음악을 듣지도 못한다. 감미롭게 노래를 불러주던 모습이 미치도록 보고 싶다. 무인도에 나 혼자 떨어진 것 같은 적막에 휩싸이면 나는 하늘을 우러러본다.
“당신 보고 있어요?”
우린 영원히 헤어졌지만 추억은 내 가슴 속에서 더 견고하게 여물어가고 있다. 내 생이 끝나는 날 남편과의 삶을 되돌아본다면 행복하게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우린 불꽃같은 삶을 살아온 것도 아니고, 잔잔한 호수 같은 삶도 아닌, 길가에 핀 이름 없는 들꽃처럼 소박한 삶이었다. 무난했고 자족했으니 다시 만나도 또 그러할 것이다.
<작가론>
다양한 삶을 그린 동행론 김낙효(수필가, 문학박사)
1. 자연은 사랑을 품고
인간에게 주어진 최후의 희망과 보람은 글을 쓰는 것이 아닐까싶다. 작가 최윤실은 응용미술과를 나와 작품활동을 하다가 결혼했고 육십대후반에 글을 쓰기 시작해 중장년이 늘 품고 사는 꿈을 실현한 수필가이다. 평자는 그녀를 2019년 3월 봄학기에 서울교육대학 평생교육원 《내 글로 책쓰기》 수필교실에서 선생과 학생으로 처음 만났다. 그녀의 처음 인상은 반듯하면서도 푸근했다. 응용미술과를 나왔다는 소개를 듣고 예술적으로 감각이 뛰어날 것이라 예감했다. 글이 처음에는 서툴기도 했지만, 재기가 돋보이고 과제도 성실하게 제출했다.
수필공부를 시작한 지 8개월만에 격월간 『에세이스트』 신인상을 수상하고, 스스로 발화하듯 술술 읽히는 좋은 글을 일주일에 한 편씩 써냈다. 처음에 컴퓨터 사용 때문에 애를 먹더니 여러 곳에서 컴을 배워서 이제 선수가 되었다. 그녀는 강릉 친정에 남아있는 농가와 서해 당진에 마련한 전원주택을 오가며 관리하고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집안의 대소사를 다 겸하다 보니 활동하는 공간이 전국구였다. 처음에는 컴퓨터 적응조차 쉽지 않았는데 워낙 착실히 과제를 창작하다 보니 몇 년 만에 첫 수필집을 출간하게 된 재능과 열정의 작가이다.
2022년에 봄학기 종강 날 갑자기 사랑하던 남편을 하늘나라로 보내고 나서 잠시 혼란스러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평소 하던 불교 공부에 더 심취하면서 글쓰기에 몰입하여 충격을 견뎌내고 있으니 귀감이 될 만하다. 층층시하에서 어른을 공경하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실천하였으니 자기 삶에 기반한 그의 수필은 자연스럽고 진정성이 돋보인다. 미술을 전공한 만큼 문학적 상상력에 미술의 이미지를 접목하여 독특한 묘사의 비유법 등이 눈에 자주 뜨인다. 갈수록 독창성이 돋보일 것으로 기대한다.
「하늘을 품은 바다」는 서해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정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바다가 하늘을 닮아 넓고 깊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 서로를 품는다는 깊은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서해바다의 새벽”으로 시작되는 서술은 독자들을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 속으로 이끈다. 안개에 싸인 바다를 통해 현실과 이상, 과거와 현재가 중첩시키며 이야기를 전개하는 기법도 탁월하다. 이러한 묘사는 공감각적으로 풍부한 상상력을 자극하며, 바다가 지닌 신비로움과 그윽한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킨다.
작품은 바다를 통해 인간 삶의 연속성과 순환성을 보여준다. 또한 바닷가 마을 사람들이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은 자연의 일부로 동화된 모습으로 포착된다.
감각적인데다 언어가 풍부하여 깊은 여운을 남기는 글이다. 평소의 산문보다 섬세하게 선택된 단어와 표현을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며 바다의 향기와 소리, 색감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와 같은 언어의 힘은 독자로 하여금 강렬한 이미지와 감정을 경험하게 만들어 준다.
파도는 사랑하는 연인을 끊임없이 그리워하듯 춤을 추며 떠오르는 해를 바라본다. 멀리 산기슭은 힘이 센 장정들처럼 검푸른 청록색의 산 그림자를 만든다. (…)
또렷한 해는 옅어지면서 하늘로 올라가 지상의 생명체들을 따스한 손길로 어루만진다. 바다는 끝없이 넓고 한없이 깊어, 철들지 않는 자식이 투정을 부려도 다독여주는 어머니의 품속 같다. 하늘은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자란 자식처럼 사랑으로 품어주는 바다가 있어, 장난꾸러기 바람과도 심술쟁이 구름과도 모난 데 없이 어울리며 마음껏 재주를 부리는 것이 아닐까?
「아 바다시여」, 1990년대 초, 고향도 아닌 당진 장고항리에, 사이가 좋았던 시댁 삼남매가 퇴직하면 같이 살기로 합의하여 전원주택지를 장만했다. 집은 10여 년 뒤에 지어졌고 처음에는 대가족이 모이는 의미 있는 장소가 되었지만 세월이 흘러 함께하던 가족들이 떠났다. 그렇다고 집을 방치할 수는 없어 관리를 위하여 작가가 오가면서 느끼는 소회를 적은 것인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타나는 아이러니 구조가 매우 상징적으로 인생이란 테제를 투영한다. 작가는 바다에 대한 서정적 위안을 전면에 내세우며 실치 등 그 바다의 풍요를 얘기하면서도 전원주택 유지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서해인데도 특이하게 그곳은 바다의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 수 있다. 가족의 뭉침과 흩어짐을 동시에 겪은 공간이라는 서사의 흐름과 절묘하게 맞닿아 있다. 어쩔 수 없이 이르게 된 고독의 시간을 그는 이곳을 찾아가 추억하는 것으로 달래고 있다. 그에게도 바다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것이다.
「달멍 불멍」은 아들과의 관계가 조망된다. 공부 때문에 외국 생활을 한 아들은 평생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그 아들이 이제 부모와 시간을 자주 함께 보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아들 곁엔 며느리가 있고 며느리 입장에선 시어른과 함께하는 시간이 그리 평안한 휴식이 될 리는 없다. 게다가 작가 부부도 이제 나이가 들어 밤늦도록 한데서 불을 쬐기엔 버겁다. 모처럼 아들네와 여행을 왔고 아들은 불멍하자고 제안하지만 방으로 들어가 눕고 만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간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잠은 달아나 버렸으니 창밖을 기웃거리는 달을 바라보며 작심한다. 그래 오늘 밤은 달멍이다. 불멍은 아들과 함게라는 의미가 있고 달멍은 혼자라는 의미를 지닌다. 모두 함께 왔지만 자리를 떠서 혼자의 시간 속으로 침잠하는 사태, 이 또한 아이러니다.
「하늘을 품은 바다」, 「아 바다시여」, 「달멍 불멍」 등은 인간과 바다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각각 다른 시각과 감성으로 바다와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있다. 바다의 다채로운 풍경을 배경으로 인간의 삶, 감정, 그리고 자연과의 교감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으며, 자연을 통한 인간 내면의 치유와 성찰을 그리고 있다.
「달멍 불멍」과 「텃밭이여 안녕」에서는 인간 삶의 한계를 주제로 다루며, 이를 통해 사랑과 그리움 등을 생각해 보게 한다. 특히 「텃밭이여 안녕」에서는 텃밭이라는 공간을 통해 가족과의 관계, 세월의 흐름, 그리고 그 속에서 엄청나게 자라는 풀처럼 삶의 다채로운 감정을 표현하고, 자연의 순환을 통해 인간의 감정과 기억이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도 보여준다. 저자는 바다를 전면에 내세우며, 그 바다가 주는 위안과 동시에 전원주택 유지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드러내어 절대 공감하게 한다.
2. 님을 보내고
「그날」은 남편과 사별 후 겪는 깊은 슬픔과 그로 인한 심리적 변화를 세밀하게 다룬 작품이다. 이 수필은 사별 경험을 통해 개인이 겪는 애도 과정을 탐구하면서, 슬픔이 인간의 신체와 정신에 미치는 영향도 깊이 있게 살펴본다.
작가는 “내 몸은 그날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기억하고 있다”라고 서술하며 시작한다. 사별과 같은 극적인 사건은 단순한 정신적 충격을 넘어 신체적 반응과 감각에 깊이 새겨질 수 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독자는 사별이라는 극한의 경험 속에서도 인간의 내면이 어떻게 변화하고 적응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혼자 남겨진다는 것」은 사별의 고통과 그 이후에 따르는 심리적 변화를 극도로 세밀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작가는 자신을 “바람 부는 한겨울에 앙상한 가지만 남아서 추위에 떨고 있는 겨울나무”로 비유하며, 배우자와의 사별 후 겪는 고립감과 적막감을 강렬하게 표현한다.
사별은 가장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 중 하나로 분류된다. 이 수필에서 저자는 사별 후 겪는 깊은 슬픔과 외로움을 직면하고 있으며, 저자는 사별 후 “무기력하게 벌레처럼 웅크리고 있다”고 표현하며, 이는 상실감과 허무감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준다. 심리학적으로 이는 정상적인 반응이며,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을 재정립해야 하는 과정을 나타낸다.
「물처럼 바람처럼」은 개인의 자아 발견과 변화의 여정을 탐색하면서, 자신의 존재와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공한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과 자아실현의 과정을 문학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며, 개인의 내면 여정과 자기 이해를 향한 길을 그려내고 있다.
작품의 주된 주제는 자아 재발견과 그 과정에서의 해방이다. 저자는 자신의 삶에서 여러 사회적, 가족적 역할에 얽매여 살아왔다고 회고하면서, 이 과정에서 저자는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며, 진정한 자유와 자기실현을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
작품에서 물과 바람은 중요한 상징적 요소로 작용한다. 물과 바람은 유연성과 변화의 상징으로, 저자가 자신의 삶에서 추구하는 자유와 유동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의 이미지는 저자가 자신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변화시키며, 새로운 삶의 방식을 상징적으로 은유한다.
지금까지 나를 잃어버리고 살아왔다. 내가 아닌 내가 살아온 것이다. 나는 없었다. 누구의 아내, 누구의 딸 아니면 누구의 며느리. 엄마, 나를 표현하는 말은 셀 수가 없이 많았다. 수없이 많은 시간에 왜 나는 나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을까? 지금 와서 의문을 제기해 보지만 관습에 묻혀서 내가 누구인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남편이 떠나고, 자식들이 떠나고 내 등에 짊어진 짐들을 내려놓자, 이제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3. 무의식의 시원 유년의 기억
유년의 기억은 순수한 아름다움이며 무의식의 시원이다. 그것은 견고하게 자신을 지탱해주는 정체성의 뿌리로 작용한다. 「증편 솥에 김이 오르면」은 남편의 고희를 준비하면서 유년 시절에 있었던 할아버지의 회갑연을 회상한 글이다. 할아버지의 회갑연 때 온 동네가 잔칫집 같았다.
한쪽에서는 증편을 빚어 안치고 있었다. 막걸리로 부풀린 하얀 쌀가루 반죽 위에 진홍색의 맨드라미 꽃잎과 까만 석이버섯을 채 썰어 꽃모양으로 올리고 미나리 잎을 따다 줄기와 잎을 만들면 금방 나비가 날아들 것만 같았다. 증편 솥에 김이 오르면 멀리 있는 친척들이 오기 시작했다. (…)
백여 명이 한꺼번에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하였고, 일하는 사람도 일사분란하게 일을 할 수 있게 한 아버지의 지혜가 돋보인 장면이었다. 할아버지의 회갑연은 온 동네잔치가 되어서 일주일 동안 치러졌다.
증편이란 떡이 이토록 아름답게 그려진 글은 처음 보았다. 작가는 기억을 끌어내는 방식이 회화적이다. 친정부모님이 할아버지의 회갑연을 위해 정성을 기울이던 모습은 어린아이였던 저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평생동안 지침이 되었다. 자, 이제 남편의 고희다. 아이들이 고희연을 열자고 한다. 어떻게 할까.
직장 생활을 외국에서 하는 자식들 생각을 하면 솔직하게 우리 부부의 속마음은 복잡하기도 하고, 요즘 시대에 맞지도 않는 것 같아 많이 망설였다. 그렇지만 나는 먼 훗날을 위해 후손들에게 가르침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이런 모습들은 훗날 자손들이 부모에게 해야 할 것은 꼭 하도록 규준이 되어 줄 것 같기도 했다. 이 행사를 꼭 해야 할 이유가 나한테는 또 하나 있었다. 두고두고 후회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시아버님의 회갑에 당신의 반대로 회갑연을 해드리지 못했는데 2년 후 돌아가시자 자식들은 정말 후회막급이었다. 부모님은 자식 옆에 오래 계시지 않으므로 부모님의 중요한 기념일만은 정성을 다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요즘은 많은 사람을 초대해 음식을 나눠 먹는 잔치가 드물어졌다. 모두 편리 위주로 간소화되고 있다. 고희라 해도 누굴 초청하기보다 부부가 조용히 해외여행이나 다녀오는 추세다. 자식들은 돈만 대면 된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추세가 걱정스럽다.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밥을 먹으며 가족의 유대는 깊어진다. 아이들은 고희연을 벌써 준비하고 있다. 번거롭더라도 고희연을 열면 자식은 물론이고 손주들과 친지가 모일 것이고, 아마 어린 손주들은 이러한 잔치를 오래 기억하며 가족이라는 의미를 두고두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모든 가문은 그렇게 이어져 왔다. 작가는 시아버지의 회갑연을 열고자 했으나 당사자의 반대로 열지 못했다. 그런데 2년 후 갑자기 돌아가시고 말았다. 많이 후회했다. 아이들은 남편의 고희연을 멋지게 치렀다. 그리고 몇 년 지나 남편 또한 갑자기 영면에 들었다.
작가는 그 깊은 슬픔과 상실감을 달래기 어려웠다. 그때 「증편 솥에 김이 오르면」과 같은 유년 시절의 행복한 기억들이 큰 위로가 되었다. 그는 글쓰기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잠재된 무의식이 분출되듯 기억들이 몰려나왔다. 융의 집단 무의식에 비추어 볼 때, 공동체와 전통은 개인의 무의식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이는 개인의 창작 활동에 영감을 주는 중요한 원천이 된다.
「과수원집 사람들」도 유년의 이야기다. 과수원이라는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한 공간에서 가족 구성원은 각자 역량만큼의 일을 해야 한다. 아이들까지 새벽 일찍 일어나 과수원 일을 도와야 한다.
우리 집은 방학이면 새벽부터 바빴다.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아이들까지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났다. (…) 내가 떠지지 않은 눈을 비비면서 밍기적거리고 있으면 아버지는 방으로 들어와 이불을 젖혔다. 새벽 공기가 방안 가득 들어오면서 더 이상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 아버지는 과수원으로 갈 때 시냇물에 세수를 하게 한다. 시원한 냇물로 세수를 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아버지는 내가 세수하기를 기다렸다가 전날 밤 언니가 공부한 영어 단어를 묻고 언니는 답을 하면서 나란히 신작로 길을 걸어서 산모퉁이를 돈다. 언덕 위에 있는 과수원을 향하여 언덕을 오르면 솔밭에서 시원한 소나무 향기가 난다.
아이에게 이러한 노동은 놀이이며 공부이다. 당연히 유년의 무의식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과수원을 중심으로 펼쳐진 자연경관과 가족들의 모습에 대한 서술은 단순하면서도 동화적인 서사를 품고 있다. 독특한 감각으로 과거를 생생하게 재현해내는 기법이 탁월하다. 과일을 심고 가꾸며 수확하는 일련의 과정은, 생각을 키우고 구체화하여 작품으로 완성시키는 창작의 과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 가족 간의 사랑과 연대, 자연과의 교감은 자체로 인간다움이라는 자연스런 미학성을 드러낸다. 이 글은 동화적이어서 공감의 폭이 크다. 독자들을 각기 다른 유년의 세계로 이끌어줄 것 같다.
「운명」은 그보다 더 어린 시절, 즉 기억조차 할 수 없는 갓난애였을 때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글을 통해 저자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가족 간의 연대와 목숨 건 모성애를 그린다. 자신이 기억하진 못하지만 자신은 두 번이나 엄마의 놀라운 용기와 결단에 의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전설처럼 전해지던 그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자기 생명의 귀중함을 깨달았고 또한 생명체를 존중하는 법을 배웠다.
이 작품은 개인의 무의식적 기억이 어떻게 창작의 원동력이 되는지, 특히 인간의 본능적인 생존 욕구와 사회적 상황이 어떻게 내면의 심리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본능적인 생존 욕구를 재조명하는데 어머니가 아기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행동은 이러한 본능의 극명한 표현이다. 또한 전쟁은 개인의 무의식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다. 이러한 트라우마는 종종 창작의 주요 주제로 등장하며, 작가는 가족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쟁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는 자신의 생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어머니는 전쟁 중 약이 없어 아들 둘을 홍역으로 잃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난 것이다. (…) 해산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어머니도 허겁지겁 갓난아기를 포대기에 싸안고 토굴로 정신없이 뛰어갔다. 하지만 토굴 속에 도착한 어머니 품에는 아기는 없고 빈 포대기뿐이었다. 사색이 된 어머니가 폭격 속으로 나가려고 하자 토굴 속에 있던 집안 어른들이 어머니를 붙잡았다. (…)
서른 살의 젊은 새댁은 혼이 나간 채 뛰어가서 차디찬 아기를 안고 돌아왔다. 핏덩어리는 포대기 밑으로 빠져서 차가운 부엌바닥에 사색이 되어 있었다.
두 번째 목숨을 잃을 뻔했던 것은 1.4후퇴 때였다. (…) 연기를 마신 애기 얼굴은 잿빛이 되었다. 주위 사람들은 애기가 죽었다고 단정하고 애기를 버리고 가자고 하였지만 어머니는 고향에 가서 묻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러한 극한의 경험은 종종 창작의 중요한 원천이 된다. 작가는 이 경험을 통해 개인적인 치유와 의미의 재구성 과정을 추구한다. 문학은 이러한 개인적 및 집단적 트라우마를 재해석하고 공유함으로써 치유의 과정을 촉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여기 3부를 관통하는 메시지(「증편 솥에 김이 오르면」, 「과수원집 사람들」, 「운명」의 세 작품은 인간의 심연에 잠재된 심리의 원형을 문학적으로 탐구)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 라는 통렬한 질문이다. 가족과 전통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사람들은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배우고 익힌다. 이제 우리는 핵가족 시대를 넘어 가족 해체의 시대를 맞고 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우리는 저렇듯 개인이기 이전에 공동체의 일원이었으며 전통적 관습의 계승자였다. 그곳엔 절망적인 열패감이나 고독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
4. 그리움의 원천 부모의 손길
「박꽃 어머니」에서 저자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회고하며 어머니의 삶이 어떻게 자신에게 영향을 끼쳤는지를 고찰한다. 이 작품에서도 무의식이 어떻게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가족 내의 역할을 수행하게 하며 전통적 가치를 전승하는가, 하는 심리적 요소들이 깊이 연결되어 있다.
어머니의 영향력은 저자의 무의식 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이는 자신의 행동양식과 가치관 형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그분이 남긴 물리적 유품들은 저자에게 어머니의 성품, 가치관, 그리고 삶의 방식을 상기시키며, 이는 저자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이러한 기억의 재구성은 칼 융의 무의식 이론에서 말하는 개인의 무의식 속에 내재된 원형(archetypes)과도 연결될 수 있다. 원형은 공통된 인류 경험의 일부로서 개인의 행동과 반응에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적 이미지이며 동기이다.
저자는 어머니가 한복을 입었던 모습을 회상하며, 이를 통해 한국의 전통문화와 그 의미를 내면화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전수는 심리학에서 보는 정체성의 연속성과 맞닿아 있으며,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에서 이야기하는 심층 심리와 무의식의 계층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어머니의 유품들, 특히 보자기에 싸인 유품들은 저자에게 심리적 영향을 미치며 어머니의 삶을 재구성하는 재료가 된다. 무의식 속에 저장되어 있던 기억들이 특정 상황에서 강하게 떠오르는 순간을 포착한 글이다. 어머니를 통해 경험한 사랑과 교훈을 상기하는 것으로 저자는 자신의 내면세계와 감정 상태를 성찰하게 되는 것이다.
「잃어버린 생일」은 가족 관계의 역동성과 사회적 역할이 어떻게 개인의 정체성과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탐구한 글이다. 특히 가족 내에서의 역할 분담과 개인적 희생, 그리고 그로 인한 감정적 반응을 세밀하게 다룸으로써 가족 문화와 개인적 욕구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단지 생일이라는 오브제 하나로 가족이라는 작은 사회의 위계질서의 틀이 어떻게 개인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며 변화시키는지를 고찰한다. 작품 속에서 생일을 잃어버린 것은 누구의 요구도 아닌 자발적 헌납이었다. 하필 시어머니 생신과 하루 차이였으므로 며느리인 자신은 어머니 생신 준비에만 최선을 다한 것이다. 어머니로서, 며느리로서, 그리고 아내로서의 역할이 개인적 욕구보다 우선이었던 것은 누가 가르쳐주어서가 아니고 친정 집안의 전통적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익혀온 것이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저자는 사회적 맥락을 원만하게 이해하는 세련되고 지혜로운 시어머니 역할을 수행한다.
나는 결혼하면서 내 생일은 잃어버렸다. 시어머니와 같이 있었던 날이 40여 년은 되었지만 내 생일이라고 특별히 챙기지 않았다. 시어머니의 생신이 내 생일 다음날이라 항상 생일날 시어머니 생신 준비로 바쁜 날이었다.
결혼과 함께 자신의 생일을 ‘잃어버린(잊어버린 것이 아니다)’ 것으로 묘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생일은 사물화되었다. 생일을 그저 어떤 하루가 아니라 ‘내 것’이며 ‘나의 소유물’ 같은 사물로 치환시킴으로써 친정이라는 세계와 시댁이라는 세계 또한 추상이 아닌 명백한 현실임을 암시한다. ‘생일을 잃어버린 곳’인 시댁은 자신을 잃어버린 곳인 것이다. 가족 내에서 맏며느리로서의 역할이 자기 개인적인 존재보다 우선시되었음을 암시하는 이 글에서의 상황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에서 말하는 자아와 초자아의 갈등을 반영한다. 여기서 초자아는 사회적 규범과 도덕적 가치를 내면화한 측면으로, 개인이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자신의 욕구나 감정을 억제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아들과 며느리의 불편한 관계가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오래간만에 외국에서 들어온 딸과 사위가 형제들이 모여 운동을 하려고 연락을 하였는데 며느리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서 가지 못한다고 한다. 며느리 눈치를 보는 아들의 입장이 아주 난처한 것 같았다.
(…)
며느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생일 못 챙겨 준 우리 아들 용서해 줘라.”
“호호, 어머니 아셨어요?”
“동네에 소문이 쫙 났어.”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아들이 아빠가 엄마 생일 챙겨 주는 것을 못 보아서 그런가 보다. 내가 잘못 가르쳤으니 내년부터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개인이 사회적, 가족적 역할 속에서 겪는 감정적 갈등과 정체성의 변화를 구체화한 기법이 탁월하다. 자신의 감정과 경험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가족 내의 역할과 개인의 감정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과 긴장을 깊이 있게 전달한다. 독자는 비슷한 경험을 떠올리며 자신의 감정과 갈등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이해력을 확장시킬 수도 있겠다. 이야기의 힘이다.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 아버지가 결혼하는 딸들을 위해 준비한 ‘참을 인(忍)’이 새겨진 반지는 부성애의 완곡한 표현으로 복합적인 심리가 내포되어 있다. 아버지는 이 반지를 사위에게 선물한다. “내 딸이 많이 부족하니 참고 잘 살아 달라는 아버지 마음의 징표”이면서 또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가족을 위한 희생과 인내가 따른다는 가르침이다. 남남이 만나 ‘함께 잘 산다는 것은 서로 잘 참는다는 것’과 맥락적으로 동일시하고 있다.
반지를 통해 전달된 아버지의 사랑과 기대는 딸들의 삶 속에 깊이 스며들었고 그들의 결정과 행동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작가는 참음과 기다림이라는 개인의 절제가 가족 구성원에게 미치는 영향을 문학적으로 섬세하게 재현하였다. 재현적 기법이 공감과 감동을 일으키며, 가족 내에서 개인의 심리와 행동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 평화로운 전원의 풍경, 고향의 풍요로움 등 유년 시절의 경험은 작가의 삶에 버팀목이 되었다. 순수한 유년의 추억은 지치고 힘들 때마다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으며, 온전한 자신으로 회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5. 다양한 도전과 삶의 모습
「행복나무」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났을 때 선물로 받은 화분 이야기다. 관음죽은 가족의 역사와 함께 성장하며, 가족 구성원 간의 관계 변화와 감정의 흐름을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나무가 겪는 변화는 가족 구성원들이 경험하는 삶의 주요 사건들―이사, 분가, 그리고 세대 간의 갈등과 화해―과 병행하며, 가족 구성원들의 삶의 변화를 반영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가족의 유대를 강조한다.
관음죽은 작품에서 ‘행복나무’로 불리며, 이는 가족에게 행복과 안정을 가져다주는 상징적 요소로 기능한다. 이 나무는 중요한 순간에 가족에게 힘과 위안을 주었기 때문이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나무는 안정감과 연속성의 원천으로서, 가족 구성원들이 겪는 변화와 위기의 순간에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작품에서는 시어머니와의 갈등과 그로 인한 가족의 분가, 그리고 나중에 다시 화해하는 과정이 중요한 맥락을 이룬다. 갈등과 화해의 과정을 통해 가족 구성원 각자의 심리적 성장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며,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결정적 단초가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4월에 이사를 했고 7개월 후, 늦가을과 초겨울의 경계인 십일월 말에 시아버님은 뇌출혈로 운명하셨다. 향년 63세였다. 새벽 한 시에 우리 부부는 시아버님의 임종을 지켜드렸다. 간절하게 손주를 기다린 것도 우리와 일찍 작별할 것을 예감했기 때문일까. 얼마나 좋았으면 매주일마다 우리 집을 방문하셨을까. 요즘도 시아버님 생각을 하면 끝까지 나를 맏며느리라고 믿어주셨던 고마움이 사무친다. 관음죽을 볼 때마다 장년이 된 아들 생각을 한다. 사철 푸른 잎으로 있는 관음죽은 우리 가정에 평화를 가지고 온 행복나무다.
「아들」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특히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기대와 희생, 그리고 교육 방식에 대한 사회문화적 흐름이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구체화했다. 한국 사회에서 자녀, 특히 아들에 대한 기대와 부담이 어떻게 부모의 행동과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 주며, 또 개인의 경험은 사회문화적 가치와 규준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아들을 정신이 올바르게 키워야겠다는 생각에 걱정도 되고 겁도 났지만 겉으로는 초연하게 행동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때 겨울 방학 동안 국토순례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1월 1일부터 1월 20일까지 우리 국토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걷는 극기 훈련이었다. 동해안 소돌 해수욕장에 있는 초등학교를 출발하여 인천에 있는 맥아더장군 동상 앞까지 걷는 강행군이었다.
한겨울에 얼음을 깨어서 세수를 하고, 초등학교 교실에서 잠을 잤다. (…)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 행군이 큰 도움이 되었는지 잘 모르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귀하게 얻은 아들이지만 극기 훈련을 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엄격하게 교육하면서 애정 표현을 절제하는 모성의 깊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글이다. 자식을 향한 깊은 사랑과 희생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결과로, ‘다가올 미래’를 위하여 ‘지금 현재’의 감정을 절제한 어머니의 기원은 결국 아들을 건강한 사회인으로 키워냈다. 해피앤딩이다.
「별명이 두바이 단군」은 사위 이야기다. 사위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외국으로 진출하여 성공한 모범적 사례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국제무대로 나가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사례를 통해 시대의 변화를 반영했다.
「손자와 자개장」, 보통 손자 얘기라면 식상한 것이 많은데 관점이 달리해서 참신하게 접근했다. 시어머니가 무척이나 아끼던 자재장을 누구도 원치 않았지만 손자는 갖고 싶어 한다. 손자와 자개장이라는 소재가 신선했다. 사물이 기억에 의해 왜곡되는 현상을 천진한 아이의 편견 없는 시선을 통해 환기시키고 있다. 노인과 어린아이, 과거와 미래, 기억의 고집과 무심의 순수를 대비시키며 인간의 시선과 감각의 순수성을 묻고 있다. 자개장은 가족의 역사와 정체성을 상징하지만 손자는 아직 어떤 편견도 없는 순수한 상태다. 따라서 자개장은 손자에 의해 본연의 순수한 가치를 획득하는 것이다. 훗날 손자는 증조모의 존재를 전설처럼 듣게 될 것이지만, 혈연이므로 또 자개장을 갖고 있음으로써 할머니와 연결하여 자기 정체를 찾아갈 것이다. 이러한 유물의 전달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인식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가문의 자긍심으로 작용한다.
다섯 살인 손자는 머뭇거리면서 내 방으로 들어왔다. 어색한 표정으로 나전칠기 자개장을 만지면서 나를 쳐다본다. (…)
“너 갖고 싶니?”
“할머니 저 줄 수 있어요?”
고개를 끄떡이면서 나를 바라본다. 그 모습이 너무 앙증맞았다. 또 손자의 천진난만한 까만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앞뒤 잴 것 없이 약속을 해버렸다.
“할머니가 잘 간직하고 있다가 네가 크면 줄게.”
손주는 얼굴에 함빡 웃음을 머금고 다시 자개장에 박혀 있는 그림들을 만지작거렸다.
「축제의 한마당 연등회」, 외손녀와 함께한 등불행사의 현장을 실감나게 표현한 것이 좋았다. 역사가 오래된 연등회 축제가 열리는 거리의 모습이나 여대생의 반응 등 참가자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축제의 열기를 잘 나타내고 있다. 사회참여는 어떤 구호나 저항적 시위만은 아니다. 이렇듯 우리의 자긍심을 높여줄 행사에 참석하고 함께 즐기는 것이 더 적극적인 사회참여일 수가 있다.
불교의 전통 행사인 연등회는 사회문화적 의미와 공동체의 중요성을 호소하는 글이다. 연등회는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사례로, 개인에게는 지혜와 평화를 기원하는 시간을 제공하며, 공동체에게는 함께 모여 축하하고 기원하는 사회적 결속의 장이 된다.
연등회는 공동체의 집단 무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린 문화적 상징으로, 개인과 집단에게 정체성과 안정감을 제공한다.
「사막 캠프와 히타 호텔」은 사막이라는 원시적이고 광활한 자연의 세계를 서정적인 필치로 묘사하면서 현대 도시의 각박한 생활 환경을 투영시킨 작품이다. 자연을 통해 심리적 안정과 자아 성찰의 기회를 얻는 과정이 점진적으로 전개되는데 배경을 묘사한 솜씨나 인물들의 캐릭터 포착이 흥미롭다.
서쪽의 사막지평선에 해가 넘어가자 동쪽의 사막지평선에 달이 떴다. 한국에서 보는 달보다 크고 색이 선명하다. 불빛이 없어서 어둡고 캄캄한 사막에서는 하늘의 별들이 뚜렷하고 선명하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온통 어둠, 사막의 능선은 어둠에 묻히고 별빛 달빛만이 오연하고 도도하다. 큼지막한 별들이 눈앞에 빼곡하게 쏟아진다.(…) 손녀만 했던 내가 할머니와 별을 보았는데, 지금은 내가 할머니가 되어 손녀와 같이 멍석 위가 아닌 중동의 사막에서 별을 쳐다보고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달의 모양은 한국에서 보는 달의 모양과 반대라고 한다.
6. 세상에서 만난 인연
수필이 감동을 주는 이유는 거대한 담론이기 이전에 소소한 인간들의 만남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만난다면」에서 작가는 고부간의 복잡하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관계를 통해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시어머니의 기일(忌日)이 다가왔다. 어머니와 나는 다시 만난다면 서로를 품을 수가 있을까?”로 시작하는 이 글에서 작가는 과거를 회고하며, 어머니 사후에도 계속되는 미해결된 감정을 표현한다. 치매 증상이 있는 시어머니는 며느리 탓을 하면서 홀로 아파트에서 지내는 것으로 맏며느리와 기묘하게 대치하고 맏며느리인 작가는 그러한 시어머니에 의해 정신적으로 상당한 압박을 겪는다. 시어머니가 맏아들에 대한 애착이 유난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면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아들을 빼앗겼다는 피해의식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며느리와 시어머니라는 관계에는 가족이면서 동시에 타인이라는 미묘한 거리가 존재한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고부간엔 엄격한 위계적 질서가 내재해 있었다. 하지만 이 집안 환경은 그렇게 고루한 경우는 아니다. 즉 남편과 시아버지는 특별할 정도로 민주적인 캐릭터이다.
매일 아침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위해 음식을 만든다. 그런데 그걸 시어머니께 갖다 드리는 사람은 아들이다. 시어머니는 음식보다 아들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며느리 혼자 시어머니 집에 가면 환영받지 못하기에 시어머니를 뵈러 갈 땐 당신께서 그리도 사랑하는 아들을 대동해야 했다. 그래서 남편이 쉬는 주말에나 남편을 따라 어머니를 뵈러 갈 수가 있었다. 그러던 중에 시어머니가 낙상사고를 당했고 그 사건을 계기로 어머니는 아들 집으로 오셨다. 기이하게도 그때부터 시어머니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리도 좋아하는 맏아들의 시중을 받으며 아기 같은 표정으로 순한 양처럼 7년을 함께 살았다는 것이다. 이때 시어머니에게 며느리는 어떤 존재였을까.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중심으로 식단을 짜는 등 최선을 다해 모셨지만 관계가 개선된 것은 아니었다. 고부간의 갈등과 시어머니의 치매라는 모티프는 매우 상징적이다. 작가는 해결되지 않는 상실로 인한 정서적 공백을 어떻게 메울지 고민하며 인연에 대해서 숙고한다.
서로에게 어떻게 위로와 치유를 제공할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하게 한다. 단순한 사랑과 미움의 감정을 넘어서는 다양한 심리를 교착시킨 이야기 구성은 경험을 토대로 했기에 깊이 다가온다.
아무 성과도 없이, 아무 실속도 없이, 나는 고부라는 미묘한 관계를 화두 삼아 탐색하고 몰두하는 데 인생의 대부분을 바쳐온 것 같다. 이런 환경 탓인지 아이들은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없었다. (…) 어머니는 점점 치매가 심해지면서 넘어지는 횟수가 많아졌다. 급기야 낙상으로 엉덩이뼈에 금이 갔다. 하필 그날은 친정 오빠의 장례식 날이었다. 급히 상경하여 병원에 입원시켰다. 20일 동안 입원 치료 후 어머니께는 여쭤보지도 않고 우리 집으로 모셔 왔다. 남편은 날마다 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우고 동네 공원으로 나가 재활을 도왔다.
그렇게도 맏며느리하고 살기를 꺼리시더니, 어머니는 당신 집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렇게 좋아하던 맏아들과 같이 7년을 애기 얼굴이 되어 순한 양처럼 사셨다. (…) 한집에 7년을 살면서 그 세월만큼 어머니와 가까워진 것은 아니다. 내게 어머니는 여전히 조심스럽고 어려웠으며 난해했다. 어머니가 떠나신 다음에 내가 깨달은 건 최선이란 없다는 것이었다.
「아들 바라기들의 만남」은 어렵게 아들을 얻게 된 어머니들의 모임 이야기이다. 아들의 고등학교 시절에 결성된 모임으로 23년이나 지속하고 있다. 아들 사랑과 열망을 공유함으로써 결사적인 감정 지지 네트워크가 형성된 것 같다. 만날 때마다 이야기는 변화하고 생생해진다. 자녀와 관련된 스트레스나 기쁨의 공유가 통쾌 지수가 높이는 걸까. 그 아들들이 자식을 낳을 나이에 나타난 변화와 시대의 흐름까지, 성토하는 모습에 공감하는 독자도 많을 것으로 기대된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엄마들의 도전에 어긋나는 아들을 성토하는 모습도 재미있다.
각자 간절한 기도로 아들을 낳았지만 이젠 그런 행동들이 소용없이 되었다고 한탄한다. 엄마의 아들이 아니라 며느리의 남편이 된 아들들을 생각하면서 첫사랑을 그리워하듯이 애꿎은 막걸리만 들이켰다.
엄마들은 아들을 낳으려고 마음고생도 많이 했지만, 자식을 낳지 않겠다는 아들도 있고, 시험관 시술로 나이 마흔에 딸 쌍둥이를 낳은 아들도 있다. 엄마들은 이런 아들 앞에서 말도 못 하고 냉가슴 앓듯이 지낸다고 한다. 너무 많이 급속도로 변해 버린 세월 때문에 아들을 낳으려고 애를 쓴 세 엄마는 세월만을 탓하면서 할 말도 못 하고 지낸다고 한다. 이젠 아들보다 딸을 선호하는 세상이 되었다.
「거울 앞에 서 있는 여자」는 하루 종일 햇빛도 들지 않는 건물 지하 미장원에서 50년간 머리 매만지는 일을 한 일흔다섯 살 원장님 이야기다. 1년 전부터 치매 증상이 나타났지만, 본인은 증상을 인지하지 못하고 고집을 부렸다. 자녀들이 설득을 하다못해, 작가에게 응원을 부탁하여, 긴 이야기를 들으며 어루만져서 원장님이 미장원을 떠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작가는 자신이 이제 ‘치매상담가’로 나서야겠다고 했다. 시어머니의 치매 증상을 오랫동안 겪으면서 뛰어난 공감 능력이 생긴 덕이 아닌가 한다.
최윤실은 이 책을 통해 우리 사회의 상실과 희망을 남다른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삶에 대한 진솔한 태도와 단아한 문체, 회화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첫 수필집이지만 경륜에 걸맞은 완숙한 사유가 깊이를 더하였다.
첫 수필집으로 이제 본격적인 창작의 길에 들어섰으니 그간의 체험을 바탕으로 더욱 정진하여, 늘 그랬듯 언제나 최선을 다하여, 제2, 제3권의 좋은 작품을 많이 쓰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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