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대종사님 최후 법설
[선종사주(先宗師主)의 최후 법설]
계미(癸未)년 5월 16일, 익산 총부 대각전에는 남녀 대중이 운집하여 예회 순서를 집행할 새, 종사주 법좌에 오르시사 법장(法杖)을 세 번 울리신 후 일반 청중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내 지금 조실(祖室)에서 나와 대각전을 향하여 오는데, 여러 아이들이 솔밭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재미있게 놀다가 나를 보더니, 한 놈이 썩 나서서 소리를 높여 “기착(氣着)”을 부른즉, 일제히 모여 서서 손을 들어 경례를 하더라. 만일 그것들이 우치한 금수의 새끼라면 아무리 가르쳐도 그와 같이 어른을 보고 경례할 줄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만물 가운데 최령(最靈)하다는 사람의 자식인지라 학교에 다니며 배웠기 때문에 예절을 알아서 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의 자식이라도 어려서 배움이 없고 철나기 전에는 예절은 고사하고 부모·형제의 내역도 알지 못하여 실례하는 일이 종종 있나니, 예를 들면 그 조모(祖母)가 손부(孫婦)보고 “아기 어미”라 하면, 저도 따라서 형수보고 “아기 어미”라고 부르다가 장성하여 촌수를 가릴 줄 알게 되면 “형수”라고 바로 부르게 되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도 어릴 때에는 아버지 어머니가 다정히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면, ‘저이들 사이는 무엇이 되어서 저와 같이 사는고?’ 하고 궁금한 마음을 여러번 가졌다가 내종(乃終) 철난 후에야 의심을 풀게 되었었다.
그러면 우리가 진리 공부를 하여 견성을 하는 것도 흡사 그와 같나니, 공부가 미숙하여 견성을 못하였으면 철모르는 아이 시절과 같고 공부를 많이 하여 견성을 하면 슬기로운 어른과 같다 하리라.
대저, 성품이라 하는 것은 우주만유의 근본으로써 생사고락이 돈공(頓空)하고 언어명상(言語名相)이 끊어진 자리건마는, 가령 현재 본회의 최고 선생을 ‘종사(宗師)’라고 이름 짓듯 사람들이 강연히 이름지어 ‘성품(性品)’이라 하였나니, 저 지혜 발달된 불보살로서 견성 못한 범부 중생을 볼 때에는 마치 부모 형제의 촌수도 모르는 어린아이와 같아서 심히 우치해 보일 것은 불가피의 사실이니라.
우리 불가(佛家)의 견성법은 만고의 대도며, 인생의 대 철학이건마는, 견성의 필요도 느끼는 자 귀하니 실로 답답한 일이며, 뿐만 아니라 각자 자신 거래(去來)의 내역도 알지 못하여, 누구든지 모태 중에서 나오면 명(命)타고 난대로 일생을 살다가 죽으면 그 육신은 청산에 매장하고 그 영식(靈識)은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되는지 한번 생각해 보는 일도 없으니, 어찌 한심지 아니하랴.
『음부경(陰符經)』에 운(云)하되, ‘생자사지근(生者死之根)이요, 사자생지근(死者生之根)이라’ 하였다. 그러면 생사 윤회는 마치 개미 쳇바퀴 도는 것과도 같고 또는 일월(日月)이 동서로 내왕하여 주야가 번복되는 것과도 같아서 생과 사는 서로 뿌리하고 바탕하여 언제나 무시간단(無時間斷)으로 돌고 있나니, 이것이 이른 바 우주 자연의 운전 법칙이요, 천지만물의 순환 진리니라.
자고로 수도하는 사람이 견성을 해야 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를 알아야 인과인연법(因果因緣法)도 알아지고 취사심(取捨心)도 생겨나며 친소심(親疎心)도 없어져서 자타 없는 삼매행자(三昧行者)가 된다.
비컨대 우리가 견성을 하는 것은 대목(大木)이 집을 짓는데 먹줄과 잣대 같아서 인도(人道)를 밟아 가는데 없지 못할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니, 어서 부지런히 배우고 닦아서 견성 도인 되기에 노력할지어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와 같이 예회에 내참하는 것은 마치 장꾼이 장 보러 온 것과 같나니, 기왕에 장을 보러 왔으면 내 물건을 팔기도 하고 남의 물건을 소용대로 사기도 하여야 장에 온 효력이 있을 것인데, 만일 내 물건 내놓지도 않고 남의 물건을 사가지도 않으면 장에 온 목적이 무엇인가?
그러면 제군이 열흘동안 집에서 모든 경계를 지내는 가운데 처리(處理) 잘한 일이 있다거나 혹은 인간 생활에 필요한 법을 알았다거나 또는 교과서 보다가 의심나는 곳이 있다면 잘 기억하여 두었다가 예회날이 되거든 와서 유익될 말은 대중에게 알려도 주고, 의심건은 제출하여 한가지 한가지씩 배워도 가며 또는 연사들의 말을 잘 들어 두었다가 일상생활에 보감을 삼는다면 공부가 자연히 잘 되어서 견성 도인도 무려(無慮)히 될 수 있을 것이거늘, 그 쉬운 길을 알지 못하고 예회날이면 바쁜 가운데 좇아와서 이렇게 우두커니 앉아서 졸기나 한다면 그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그래서 나는 예회날 건성으로 다니는 사람을 건달장꾼이라 하나니, 여러분은 지금 나의 한 말을 범연히 듣지 말고 각골명심하였다가 매 예회날마다 공왕공래(空往空來)가 없도록 주의하는 동시에 막대한 효과를 나타내기를 재삼 부탁하노라.」하시더라.
세사(世事)란 허망하고 인생이란 무상(無常)한 것이다. 유아(唯我)종사주, 이 법설을 하옵시고 들어오셔서 곽란이란 평범한 증세로 비롯하여 회춘(回春)치 못하옵시고 열반 피안에 드옵시사, 이 말씀이 과연 최후 마지막 법음(法音)이 되실 줄이야 그 누가 꿈엔들 상상이나 하여 본 일이랴. 오호, 애재(哀哉) 통재(痛哉)로다.
구타원 이공주 수필
‘부촉품 14장’으로 정리되어 《대종경》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