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원머리 성지
간략설명원머리 출신 순교자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가 잠든 곳
지번주소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 231-1
대전교구 신평 성당 관할 구역인 원머리(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는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 두 분 순교자의 묘소가 있는 성지이며 초창기 박해 시대 때 많은 교우들이 피신하여 정착한 교우촌 지역이다.
원머리라는 지명은 바닷가 원을 막는 머리 부분이라는 뜻을 지닌 ‘언두리’가 원머리로 변형된 말이다. 이곳에는 1784-5년대 이존창 루도비코에 의해 주변 내포지역과 함께 삽교천 물줄기를 따라 신앙이 전해져 왔고, 그 당시 충청도 관찰사인 박종악의 수기(1791-2년)에 의하면 1790년대에 이미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원머리 지역은 아산만의 물줄기와 삽교천 하부의 물줄기가 만나는 곳이며 당시 밀물이 들어오면 사방이 바닷물로 둘러싸여 자연적으로 섬의 모양을 띄게 되었다. 따라서 천혜의 요지인 이곳으로 박해를 피해온 많은 교우들은 주로 염판(불로 바닷물을 지펴서 증유하여 소금으로 만드는 작업)과 옹기그릇을 구우며 생계를 유지했다.
오늘날 이곳은 제방과 둑을 쌓으면서 논과 밭이 만들어져 과거의 역사를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공소들뿐이지만, 얼마나 많은 교우들이 이곳에서 힘든 삶을 살아왔는지를 잘 엿 볼 수 있는 유서 깊은 교우촌 지역이다.
1929년 초창기 원머리 순교자 묘.현재 남은 것은 공소의 허름한 건물들뿐이지만 하느님과 진리를 위해 생명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장한 순교자들과 이런 오지에서 오랫동안 오고가는 사람 없이 황량한 바닷바람과 관아의 눈을 피해 살아온 많은 교우들의 삶의 흔적이 시대의 한파와 변화 속에서 그 참된 가치가 묻혀왔다. 그러다가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성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었고 그 해 전대사 성지로 선포되었다.
순교자 박 마르코의 아우 박 요셉은 1920년대에 형의 순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마르코 형은 모친의 뜻을 따라 착실히 수계하면서 모친과 함께 동네 교우들과 연락하고 지냈다. 신부님이 오시어 성사를 받으려 하면 부친이 금하는 고로 이를 마음속으로 꺼리더니 무진년(1868년)에 수원 포교에게 체포되어 잡혀 갈 때 그는 부모에게 하직하며 위로하되 거기 가서 죽으면 육정의 박절함이 없을까 만은 주 명대로 위주하여 죽는 것이 구령에 편한 일이라, 부디 염려마시고 훗날을 조심하십시오.”라고 한 다음 그의 사촌 형 박 마티아와 함께 수원으로 붙잡혀 끌려갔다.
모진 고문을 당할 때 사촌 형 박 마티아가 매를 못 이겨 배교하자, ‘천주를 배반하고 영벌을 어떻게 받으려 하느냐?’고 했고, 이에 박 마티아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15일 후에 같이 순교했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의하면 외교인 서덕행이 모진 매를 맞아가며 시신을 찾아 이곳 원머리로 운구하여 가족에게 넘겼고 현 묘역에 안치했다고 한다. 이때 박 마르코의 나이는 33세였고 박 마티아의 나이는 52세였다. 이후 서덕행은 순교자 박 마르코의 매제가 되었고, 사후 그의 공을 기리고자 후손들이 순교자 묘역 옆에 안장하였다.
2016년 현재 원미리 성지 모습.원머리 순교사적지의 신앙 유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순교자들의 무덤이다. 1868년 수원에서 순교한 두 분의 시신이 다행히 이곳 박씨 집안의 야산에 묻혀 큰 변고 없이 내려왔고,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묘를 관리해 왔기에 오늘날까지 보존되었다. 이렇게 보존된 두 순교자의 유해는 1989년 신평 성당 구내로 이장되었다가 2009년 본래의 진토가 있던 원머리 묘역으로 다시 이장되었다. 그 사이 원머리 묘역에는 순교자 유해가 없었음에도 빈 무덤을 보존하고 있었기에 원형을 회복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또한 이 땅이 교구에 기증됨으로써 명실상부한 교회 공동체의 유산이 되었고,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내려오는 순교자 묘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묘는 2009년부터 한국 교회에서 진행 중인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와 증거자’의 제2차 시복 추진으로 인해 그 가치가 더 주목받게 되었고, 2013년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에서 안건의 제목을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로 변경해 그해 4월 26일 교황청 시성성으로부터 예비심사 관할권 승인 교령을 받은 2차 시복 추진에 원머리 출신의 두 순교자가 대상자로 포함되어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출처 : 신평 성당 제공, 내용 일부 수정(최종수정 2016년 9월 5일)]
원머리 순교자들의 주요 행적
원머리 순교자들은 대부분 굳은 순교의 용덕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는 순수한 종말론적(終末論的) 영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훗날의 증언에 나타나는 순교 행적이 소략한 탓에 ‘열심히 수계 생활을 했다’는 사실 외에는 특별한 육화론적(肉化論的) 영성 내용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회장 소임을 맡아 활동한 양 도미니코 회장의 경우에는 “이웃 친척을 많이 권화하여 성교에 들어오게 하였고, 후에 회장 책임을 받아 교우를 잘 가르치며 위험 중이나 신부 영접을 편히 하여 교중(敎中)을 잘 다스렸다”고 한다. 또 양 아우구스티노의 경우에는 다음의 증언 내용과 같이 독실한 수계 생활을 위하여 산곡에 들어가 살기도 하였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는 여러 일가 친척들에게 천주 신앙을 전파하였다.
양 아우구스티노는……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열심 수계하며, 본성이 양선하고 뜻이 정직하여 독실히 수계하기 위하여 고향을 떠나 산곡으로 이사하여 착실히 수계하더라. 후에 도로 본 곳에 와 살며 여러 일가를 권하여 성교에 들어오게 하고, 일가를 권하여 열심 수계하게 하며 본업을 극진히 하였다.
원머리의 박선진(마르코)의 경우는 먼저 천주 신앙을 받아들인 모친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되는데, 외교인이던 부친이 천주교를 엄금한 까닭에 어렵게 신앙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의 부친은 사제가 원머리에 와서 성사를 줄 때마다 가족이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금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그는 부친으로부터 가정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모친의 뜻에 따라 열심히 수계하는 모범을 보여주었고, 원머리 교우들과도 비밀리에 교류하면서 신앙을 굳게 지켰다. 이러한 내용과 함께 교회 순교록에는 그의 순교 행적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박 마르코는……무진년(1868년)에 수원 포교에게 잡혀 본래 세간이 있고 본읍에 권도(權道)가 조금 있으나, 수원으로 갈 때 그 부모께 하직하며 위로하되 “우리 가서 죽음이 육정에 박절함이 없으리이까? 그러나 주명(主命)대로 위주(爲主)하여 죽는 것이 구령(救靈)하기 편한 일이오니, 부디 과히 염려 마옵시고 훗일을 조심하라” 하고, 그 사촌(즉 박 마티아)과 한가지로 수원에 가 관장 추열(推閱)에 그 사촌이 배교함을 보고 민망히 생각하여 권하되 “네 이제는 배교하여도 죽을 것이니, 구태여 대주(大主)를 배반하고 죽어 영벌(永罰)을 받으려 하느냐?” 하매, 그 사촌이 마음에 깨달아 배교함을 뉘우치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성교함을 바로 설명하고, 옥에 있은 지 15일 후 그 종형제 한가지로 교(絞)하여 죽인 후……
위의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박 마르코는 수원 포교에게 체포되었을 때 이미 굳은 순교 원의를 지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수원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는 가운데 마음이 약해진 사촌 박태진(마티아)을 권면하여 순교의 영광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용덕도 보여주었다.
이들 밀양 박씨(密陽朴氏) 집안은 본래 삼형제였는데, 각각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서 살다가 한 명은 공주로 이주하고, 다른 한 명은 경기도 고량(포천)으로 이주했으며, 또 다른 한 명이 한정리(원머리)로 이주해 와 염전을 일구어 소금장수로 생활했다고 한다. 위의 증언에 나오는 박 마르코와 박 마티아가 바로 원머리에 정착한 박씨의 후손으로,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이들 집안에서는 양씨․최씨 집안보다 늦게 천주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박 마르코의 부친은 병인박해 때까지도 입교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원머리 순교자들 가운데는 처음 체포되었을 때 마음이 약해져 배교를 했다가 다시 체포된 뒤에는 용덕을 보인 뒤에 순교한 이들도 있었다. 우선 양 도미니코 회장은 석방된 뒤에 스스로 이전의 잘못을 뉘우치고 순교를 다짐했다고 하는데, 다른 증언에는 그가 뉘우치게 된 배경에 간양골 박 안드레아 회장의 권면이 있었다고도 한다. 또 원머리 홍 베드로닐라의 사촌인 내포 홍 베드로 회장은 배교하고 나온 뒤 딸의 권면에 힘입어 순교를 다짐하고 있다가 다시 체포되어 순교한 것으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그는 홍주 옥중에서 사촌 누이 홍 베드로닐라를 권면하여 그녀가 어린 아들에 대한 육정을 버리고 순교에 이를 수 있도록 인도하기까지 하였다.
자료: 당진 원머리 순교사와 교회사의 의의 차기진(양업교회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