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여행과 함께한 필암서원 여행
때는 2021년 11월 중순, 대한민국 중부지방은 이미 초겨울이었고, 남부지방은 단풍이 끝물인 시기였다. 단풍으로 유명한 내장산의 단풍도 끝나고 이제 단풍을 볼 수 있는 곳은 한반도 남서쪽 끝에 있는 두륜산이었다. 두륜산의 단풍도 아름답지만, 두륜산에 있는 대흥사 또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정도로 아름다운 절이었다. 예전에 두륜산을 찾았을 때는 날씨도 흐리고 단풍도 이미 진 상태라 등산할 생각이 저절로 사라졌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두륜산의 단풍 상태가 절정에 다다른 것을 확인하고 아무 고민 없이 해남으로 향했던 것이다.
해남의 두륜산 단풍을 감상하고 미황사 템플스테이를 하며 남도의 풍류를 느낀 뒤, 다시 경기도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해남에서 수도권으로 가는 유일한 방법은 서울로 가는 직행 버스를 타는 것이다. 하지만 남쪽 지방으로 내려오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중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서원에도 가보기로 했다. 호남지방에서 '한국의 서원'으로 등재된 두 서원은 장성의 필암서원과 정읍의 무성서원이고, 장성과 정읍 모두 기차가 다니는 길에 있으므로 필암서원, 무성서원을 차례로 들린 뒤 수서역으로 가는 SRT를 타기로 했다.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이야기 56 - 필암서원 (筆巖書院)
필암서원은 1590년(선조 23) 호남 유림들이 김인후(金麟厚)의 도학을 추모하기 위해 장성읍 기산리에 사우(祠宇)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것이 그 시초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어 1624년 복원하였으며, 1662년(현종 3) 지방 유림들의 청액소(請額疏)에 의해 ‘필암(筆巖)’이라고 사액(賜額) 되었다. 1672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1786년에는 양자징(梁子澂)을 추가 배향(配享) 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毁撤) 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신문(神門)·동서 협문(夾門)·전사청(典祀廳)·장서각(藏書閣)·경장각(經藏閣)·진덕재(進德齋)·숭의재(崇義齋)·청절당(淸節堂)·확연루(廓然樓)·장판각(藏板閣)·한장사(汗掌舍)·고직사(雇直舍)·행랑·창고·홍살문·계생비(繫牲碑)와 하마석(下馬石) 2개 등이 있다.
사우의 중앙에는 김인후의 위패가, 왼쪽에는 양자징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전사청은 향례(享禮) 때 제수(祭需)를 마련해 두는 곳이다. 경장각에는 인종이 하사한 묵죽판각(墨竹板刻)이 보관되어 있고, 진덕재와 숭의재는 동재(東齋)·서재(西齋)로 수학하는 유생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청절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원내의 모든 행사와 유림의 회합, 학문의 토론 장소로 사용되었다. 장판각에는 『하서집(河西集)』 구본 261판과 신본 311판을 비롯한 637판의 판각이 보관되어 있으며, 장서각에는 인종이 하사한 묵죽과 『하서집』 등 1300여 권의 책, 1975년 보물로 지정된 노비보(奴婢譜) 외 문서 69점이 소장되어 있다.
확연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 팔작기와집으로, 낮은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원기둥)을 세워 주두(柱頭)·첨차(檐遮)·소로[小累]·쇠서[牛舌]로 결구한 이익공식(二翼工式)을 이루고 있다.
필암서원은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명칭으로 다른 8곳의 서원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노란 은행나무가 서 있던 필암서원
필암서원에 가기 전 날 광주에 묵었다. 필암서원이 위치한 장성은 광주와 가까워 시내버스로 연결되기도 하지만 시외버스도 자주 있어 가기가 편했다. 광주라는 광역시와 인접한 위치에 있지만 장성은 한적한 시골 농촌이다. 전라남도에서 바다와 접한 다른 지방은 유명한 관광지도 많지만, 광주와 인접한 지자체는 대부분이 평야인 농촌 지대라 담양을 제외하면 관광지도 얼마 없다. 장성도 그 지자체 중 하나라 내장산 국립공원의 백양사와 필암서원을 제외하면 특별히 볼거리가 없다.
원래는 백양사가 위치한 내장산 국립공원 남부의 단풍을 구경하고 필암서원도 함께 보려고 했지만 시간 상의 이유로 실패했다. 장성 농어촌버스를 탔는데 백양사로 들어가는 도로 곳곳에 불법 주차한 차량이 워낙 많았고, 그중 한 대가 버스가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애매하게 주차해 버린 것이다. 차주가 하산을 마치고 올 때까지 버스에 탄 모든 승객이 기다려야 했으며, 필암서원에 들리려고 한 내 계획 또한 무산되고 말았다.
두 번의 시도 끝에 방문한 필암서원은 정말 아름다웠다. 정문인 확연루 앞에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서 있는 모습은 과연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필암서원을 지키고 있는 확연루의 ‘확연(廓然)’에는 ‘김인후의 마음이 맑고 깨끗하며, 확연히 크게 공평무사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확연루의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휴식공간인 ‘확연루’를 지나면 강당인 ‘청절당’이 나온다. 인종에 대한 청렴결백한 절개를 지켜 벼슬길을 끊은 김인후의 정신이 담긴 공간이다. 청절당의 처마밑에는 윤봉구가 쓴 ‘필암서원’ 현판이 걸려있고, 대청마루에는 동춘 송준길이 쓴 현판이 달려있다.
‘청절당’ 뒤로는 유생들의 기숙사인 ‘진덕재’와 ‘숭의재’가 동・서쪽으로 마주 보고 있다. 그 왼쪽 위에 ‘왕과 조상의 유물을 공경해 소장하라’라는 뜻을 담은 ‘경장각’이 있다. ‘경장각’ 현판은 정조가 손수 써서 하사한 것이라고 한다. 팔작지붕 아래 네모서리에 3마리의 용머리가 돋보이는데, 임금이 내린 유물이 간직되어 있다는 뜻이다. 34세 때 김인후는, 뒷날 인종 임금이 되는 세자를 가르쳤다. 이때 세자는 김인후의 학문과 덕행을 높이 사서 대나무 그림 ‘묵죽도’ 한 폭을 손수 그려주었다고 한다. 김인후가 하사 받은 ‘묵죽도’는 ‘경장각’에 소중하게 보관했으며, 김인후의 후손들이 묵죽도 원본을 기증하여 지금은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청절당 뒤편의 내삼문을 들어가면 제향공간 ‘우동사’가 있다. ‘하늘의 도움으로 동방에 태어난 김인후 선생이다’라는 뜻의 ‘우동사’에는 김인후를 북쪽 가운데, 그 동쪽에 사위인 양자징의 위패를 모셨다.
필암서원 또한 지금까지 본 다른 서원처럼 강당과 동・서재가 모두 북쪽의 사당을 공손히 바라보며, 선현에 대한 예를 담은 평지 서원의 대표적인 구조다. 이에 더해 ‘우동사’의 흙담 동쪽 밖에는 유생들이 배우는 책을 찍는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이 있다. 강학공간, 제향공간, 부대시설이 엄격하게 담장으로 나눠져 있으나, 크고 작은 문을 통해 편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일본군에 저항한 전라도 사림의 의병활동 중심지였던 필암서원은 정유재란 때 불타서 1624년 황룡면 증산동에 다시 세웠다. 1659년 지역 유생들이 사액을 바라는 상소를 올리자, 효종이 ‘필암서원’이라고 직접 쓴 현판을 내려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름을 ‘필암(筆巖)’이라 지은 것은 김인후의 고향마을 앞에 ‘붓처럼 생긴 바위’가 있기 때문이라 하며, 1672년에 현재의 자리에 다시 옮겨 지었다.
필암서원을 혼자 걷고 있으니 관리사무소의 아저씨께서 반갑게 인사하며 혼자 서원 보러 왔냐고 물어보신다. 아저씨와 이야기하면서 필암서원이 배향하고 있는 인물인 김인후가 훌륭한 선비였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경장각을 보면 처마 밑에 용머리 조각이 동쪽, 서쪽, 남쪽으로만 조각되어 있고 북쪽에는 없음을 알 수 있는데, 북쪽에는 임금이 살고 있어 용을 따로 조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필암서원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고 있으니, 젊은 사람이 이렇게 서원을 탐방하는 것이 대견하다며 하서 김인후와 관련된 책 두 권을 선물로 주셨다. 비록 아직 읽지는 못 했지만 필암서원에서 내가 받은 친절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으며, 언젠가 책을 읽으며 김인후의 사상에 대해 공부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