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1일
오늘의 말씀
① 시편 2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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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을 인하여 기뻐하며 주의 구원을 인하여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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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그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나이다(셀라) 요1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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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 정금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시5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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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주의 구원으로 그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으로 저에게 입히시나이다 시18: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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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저로 영영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의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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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극히 높으신 자의 인자함으로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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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네 손이 네 모든 원수를 발견함이여 네 오른손이 너를 미워하는 자를 발견하리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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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네가 노할 때에 저희로 풀무 같게 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진노로 저희를 삼키시리니 불이 저희를 소멸하리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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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네가 저희 후손을 땅에서 멸함이여 저희 자손을 인생 중에서 끊으리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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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대저 저희는 너를 해하려 하여 계교를 품었으나 이루지 못하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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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네가 저희로 돌아서게 함이여 그 얼굴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기리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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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칭송하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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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잠언 2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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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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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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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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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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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다니는 안개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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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악인의 강포는 자기를 소멸하나니 이는 공의 행하기를 싫어함이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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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죄를 크게 범한 자의 길은 심히 구부러지고 깨끗한 자의 길은 곧으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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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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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악인의 마음은 남의 재앙을 원하나니 그 이웃도 그 앞에서 은혜를 입지 못하느니라 잠14: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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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거만한 자가 벌을 받으면 어리석은 자는 경성하겠고 지혜로운 자가 교훈을 받으면 지식이 더 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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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의로우신 자는 악인의 집을 감찰하시고 악인을 환난에 던지시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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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혜자가 생각해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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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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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공의를 행하는 것이 의인에게는 즐거움이요 죄인에게는 패망이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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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명철의 길을 떠난 사람은 사망의 회중에 거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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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연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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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악인은 의인의 대속이 되고 궤사한 자는 정직한 자의 대신이 되느니라 사4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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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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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지혜 있는 자의 집에는 귀한 보배와 기름이 있으나 미련한 자는 이것을 다 삼켜 버리느니라 시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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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의와 인자를 따라 구하는 자는 생명과 의와 영광을 얻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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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지혜로운 자는 용사의 성에 올라가서 그 성의 견고히 의뢰하는 것을 파하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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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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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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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 이는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 함이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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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어떤 자는 종일토록 탐하기만 하나 의인은 아끼지 아니하고 시제하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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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악인의 제물은 본래 가증하거든 하물며 악한 뜻으로 드리는 것이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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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거짓 증인은 패망하려니와 확실한 증인의 말은 힘이 있느니라 잠1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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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
악인은 그 얼굴을 굳게 하나 정직한 자는 그 행위를 삼가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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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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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단상]
<고난은 사랑의 훈련>
" 고난은 나 자신이 하나님만을 사랑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훈련입니다"....................
사람들이 고난을 받을 때 다양한 반응을 보입니다.
몇 몇 사람들은 고통과 고난의 원인을 제공하는 사람이나 사건에 대해 강력히 분노하며, 더 나아가 자신의 인생에 대해, 그리고 가장 극단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일반적으로 고난을 겪는 사람들의 모습은 평화나 안정감보다는 분노나 슬픔을 동반하며 삶의 희망과 단절하며 사람과도 단절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면서 당하는 고난과 고통의 문제를 다양하게 극복하였고 해결하려 했습니다.
고난에 대한 이해와 접근에 따라 고난이 은혜가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저주가 되고 절망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방법입니다(예수의 사람들은 고난에 대한 예수님의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
예수님은 삶의 한가운데서 오히려 "나를 따르려면 고난의 십자가를 지어야만 한다.(마태16:24)“고 하시며 또한 "좁은 길로 가라(마태7:13)"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도 고난을 강조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고난도 달게 받으라고 하십니다.
고난과 고통은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가는 통로이며,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크게 소리치십니다.
동시에 우리 스스로 인간의 고난과 무거은 짐을 해결 할 수 없음을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며 하나님만을 바라라고 하시며, 신앙 공동체 안에서 고난 받는 자들과 함께 그 고난을 나누기를 원하셨고,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와 묵상 훈련은 다른 종교의 기도의 목적이 자기 자신을 위해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과는 다르게.. 자기 자신을 더 비움으로 자유함을 얻는 것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일치하며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으로 모든 고난과 고통을 넘어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양대학 병원에서 목회임상훈련을 받을 때, 암에 걸린 환자들을 정기적으로 만나는 기회를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그 중 한 분과 친해졌을 때, 그 분에게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크리스찬으로 이런 병에 걸린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가 대답하기를, "처음에 나에게 분노와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것 때문에 “왜 하필 나냐?”고 소리도 쳐봤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지 의문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고난을 통해 내가 예수님과 진실로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나의 고통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고통이 고통으로 그냥 끝이 아니라는 주님을 더 알고 사랑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 나는 평안 합니다.
암의 고통이 밀려올 때, 예수님의 고난을 더 잘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신앙이며 고난을 통한 승리자의 믿음이요 사랑의 완성인가요.
예수님도 고난 뒤에 이루어질 구원의 큰 역사를 보셨고, 그 십자가의 고난이 비록 처절한 고통을 동반함을 아셨지만 그 고난의 순간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암에 걸린 분도 인생의 고통과 고난의 무게는 측량할 수 없고, 고난이 주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는 어려울지라도 분명 고난은 무가치한 것은 아닌 것임을 믿고 영적인 대가로 거듭나 있었던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의 육적인 형상을 점점 깎아내며 더 깊이 하나님과의 교제로 나가게 하는 강한 훈련의 역할을 합니다.
그런 면에서 고난의 유익함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적인 모든 고통과 고난을 하나님께서 고의나 일부러 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그것에 대해 강력하게 분노를 표현하며 하나님을 부정하며 사느냐? 혹은 “ 고난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영적인 성숙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겪는 지금의 고난 속에도 하나님은 함께 계십니다.
고난 속에서 한 번도 하나님의 그 사랑이 약해진 적이 없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고난을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을 더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원하시며,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완성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신앙인들은 고난의 가치를 발견하며 예수님의 고난의 십자가 길을 함께 걸어가면서 우리자신을 더욱 견고히 예수그리스도의 사람들로 형성해 갔으면 합니다(예수그리스도인).
8월 21일
오늘의 역사
① 일본 군함 운양호, 강화도 침략, 약탈(1875) : 강화도사건이라고도 한다.
조선측의 대일문호개방(對日門戶開放)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에, 일본은 열강세력에 앞서 조선에의 진출을 시도한 계획이 지연됨에 따라, 그 타개책으로 무력시위로써 조선당국을 굴복시키고자 군함 30척을 조선연해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와 같은 무력위협정책의 일환으로 운요호를 조선연해에 파견, 8월 21일 강화도 동남쪽 난지도(蘭芝島) 부근에 정박하고 담수(淡水)를 구한다는 구실로 보트에 군인을 분승시켜 연안을 정탐하면서 강화도의 초지진(草芝鎭) 포대까지 접근하였다.
이에 초지진 포대에서는 포격을 가하고 운요호에서도 맹포격으로 응수하여 포의 성능이나 포술이 그들에 비해 떨어지던 초지진을 파괴하고, 영종진(永宗鎭)에도 맹포격을 가하고 그들의 육전대(陸戰隊)까지 상륙시켜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하였다.
그 결과 조선군은 전사자 35명, 포로 16명을 내고 첨사(僉使) 이민덕(李敏德) 이하 400~500명에 이르는 수비병은 모두 패퇴하였고 대포 35문, 화승총 130여 정과 그 밖에도 무수한 군기 등을 약탈당하였으나 일본측은 2명의 경상자를 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이 포격전의 책임을 조선측에 씌워 전권대사를 파견해서 힐문함과 아울러 무력을 배경으로 개항을 강요하였다.
이에 따라 양국 간에는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의 개국이 이루어졌다.
강화도의 연무당(鍊武堂)은 1876년 운양호사건 결과 어영대장 신헌(申櫶)과 일본군 육군 중장 구로다와의 12개조 조항에 달한 조약을 체결했으니 인천, 원산항의 개항, 해안 측량권, 해도 작성권 인정, 영사관 설치와 치외법권 인정 등 사실상 일본의 침략마수는 이때부터 국 권을 침탈하는 악마의 손길이 되었던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1907년 군대해산이란 무장해제를 당한 강화진위대(江華鎭衛隊) 선임하사관 연기우(延起羽), 하사관 하정도(河正道)에 의해 주도된 강화의병진의 결사항전은 국민합작으로 전개된 항일구국운동의 찬란한 금자탑이었다.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 간부 정경수가 피살되고 일본군 2개 중대를 섬멸 하는 전과를 거두며 연기우 의병장은 강화도를 거점으로 통진, 풍덕, 연안, 해주방면에서 의 병장으로 활약 국권회복에 진력하다 1908년 13도 의병진의 서울진공작전에 참가했으나 이해 6월 총대장 허위가 체포되어 9월 27일 구국의 포부를 펴지 못하고 처형되는 비극으로 생애 를 마감하게 된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추서되었고 위패는 국립묘지의 현충사 제1 위패실에 모셔져 있다
병자수호조약은 우리나라가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다. 1875년 9월 일본군함 운양호는 수로를 조사한다는 구실로 서해안을 거슬러 올라왔다.
이에 강화도에 있던 초지진 수비군이 운양호를 향해 포를 쏘았다. 운양호에서도 포를 쏘며 영종도에 상륙하여 ,군인과 백성을 죽이고 무기와 그 밖의 물자를 빼앗아 돌아갔다.
일본은 이 듬해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는 다는 구실로 8척의 군함을 앞세우고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였고 1876년 , 마침내 그들이 노리던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조약은 표면상 개항과 통상을 앞세운 것이었으나 참 목적은 청국으로부터 한국의 자주권 탈취를 노린 것이었다.
이 조약으로 우리나라는 원산 부산 제물포 의 삼포를 개항하고 서울에 일본의 공사관 설치를 허락하게 되었는데 , 이로부터 우리 근대사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 난지도(蘭芝島) : 1875.8.21 일본 군함, 강화도와 난지도에 침입 함.
당시 난지도는 경기도 서해상에 있는 섬였다 !
연안 일대는 바다가 얕아 좋은 산란장을 이루며,산란기인 봄과 여름에는 난류의 북상에 따라 난해성 어족이 많이 모여들어 어획기에 일대 성황을 이뤘다.
* 정한론(征韓論;1873) : 일본에 내각회의가 벌어졌다.
총리대신 주재하에 여덟명의 참의(參議)가 참석한 이 각의에 서 사이고 다카모리를 우두머리로한 정한파(征韓派)가 6명 이요, 반대파는 3명으로 약세였다.
약세에 몰린 3명의 참의가 사표를 제출한 것이 도화선이 되어 엎치락 뒤치락하다가 이 정한론은 극적으로 결렬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후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은 그 3년후 운양호(雲揚号) 포격사건을 유발시켜 출병으로 이어지고 조선 침략의 도화선이 되고 있다.
곧 조선침략의 길을 닦은자가 사이고 다카모리요, 조선침략을 성사시킨자가 이토 히로부미다.
* 1999.8.21현재의 난지도 : 한강 하류에 발달한 하중도(河中島).
서울.마포구 상암동에 속한다.
한강과 수색 샛강 사이에 위치한 섬이었으나, 윤중제(輪中堤)가 도로로 개수되면서 하안(河岸)과 연결되었다.
서울특별시의 쓰레기 버리는 곳으로 이용되다가,지금은 다각도로 개발을 계획중이다.
② 충장사(忠壯祠) : 전남 광주시 북구 금곡동 무등산 소재.
조선 선조 때(1592년) 임진 왜란의 의병장으로 활약, 영남의 곽재우 장군과 협력하여 여러 차례 왜적을 무찌른 충장공 김덕령(1567-1596.음8.21) 장군을 모신 사당.
지금 광주의 충장로는 공의 시호를 딴 이름이다.
장군의 출생지인 광주시 충효동은 영조께서 내린 이름이다. 부인 이씨 역시 왜적이 처들어오자 담양 추월산에서 자결하였고 뒤에 정경부인으로 추증되었다.
옛 소설 <김덕령전>이 있다.
③ 경기여자기술학원 방화(1995) : 1995년 오늘 !
경기도 용인군에 있는 경기여자기술학원에서 불이나 원생 서른일곱명이 숨집니다.
당시 기숙사에 있던 원생들은 백서른일곱명. 원생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출입문과 창문이 모두 잠겨 있어 인명피해가 더 컸습니다.
경찰에 화재 원인 조사결과 기술학원에 수용된 원생들이 처우에 불만을 품고 불을 지른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가출 청소년들의 기술교육을 위해 경기도의 자금지원을 받아 종교재단에 위탁 운영되던 경기여자기술학원. 양재, 요리, 미용, 자수기술 등을 가르친다고는 하지만 운영과 관리체계가교도소와 비슷해 원생들의 탈출이 잇다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경기여자기술학원 방화사건은 선도보호시설에서의 인권침해 시비와 교육과정에 실요성에 대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④ 국립중앙박물관 개관(1986) : 1908년 조선왕실박물관으로 출발하여 1945년 광복 후 경복궁에서 국립박물관이 정식으로 개관되었다.
그 후 몇 차례의 이전을 거쳐 1986년 부터 박물관으로 사용하여 오던 구 조선총독부 건물을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경복궁 복원을 위해 철거함에 따라, 1996년 말 사회교육관을 증개축하여 새로 단장한 현 건물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을 개관하고 있다.
2003년에 용산구 가족공원 자리에 새 박물관이 건립될 때 까지 약 4,500 여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⑤ 상해판 독립신문 창간(1919) : 8월 21일 창간된 '상해판(版)독립신문' 창간호(연세대학교 도서관 소장).
우리 근.현대사에서 독립신문의 제호를 사용한 신문은 다섯 종류나 된다.
서재필과 개화파가 창간한 독립신문(1896년), 장기영 등이 블라디보스톡에서 창간한 독립신문(1919년), 광복후 서울에서 발간된 독립신문(1945년), 청년 신혜식이 창간한 인터넷 독립신문(2002년)과 1919년 8월21일에 임시정부가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기관지로 발간한 상해판(版) 독립신문이 그것이다.
상해판 독립신문은 상하이에 망명중인 독립지사들이 자신들의 공동관심사와 독립운동 관련 소식을 모아 발행하던 등사판 신문 우리 소식을 모태로 출발했다.
사장 겸 주필은 이광수가, 편집국장은 주요한이 맡아 타블로이드보다 조금 작은 크기로 주 3회 발행을 원칙으로 했다.
상하이에 한글 활자가 없어 성경에서 한글을 오려내 자모를 만들만큼 제작환경이 열악했지만 일제를 통렬하게 비판할 때는 지면을 아끼지 않았고, 국내 일간지가 친일쪽으로 기운다 싶으면 반박 사설로 문제점을 지적했다.
재정난과 일제의 간접적인 탄압으로 1925년 9월, 189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할 때까지 獨立 獨立新聞 독립신문으로 제호가 3번 바뀌었다.
⑥ 고려인 강제이주 : ‘극동 국경지대 조선인들을 내지로 추방한다.’
1937년 8월21일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결정문(지령 N-1428-326)의 골자다.
명분은 간첩행위 차단.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켜 용모가 비슷한 일본인들의 스파이 활동을 원천 봉쇄한다는 것이었다.
연해주 일대에 뿌리내린 한인공동체에는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강제이주가 시작된 9월 중순 이전에 지식인 2,800여명이 남몰래 처형된 데 이어 한인 17만1,781명 전원이 4,000-6,000㎞ 떨어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쫓겨났다.
바람도 막을 수 없는 화차와 가축열차에서 40여일을 보내는 동안 어린이들의 60%가 얼어죽고 굶어죽었다.
도착한 중앙아시아의 동토에 땅굴을 파거나 움막을 세우고 겨울을 난 한인들은 굶어죽으면서도 간직했던 씨앗을 뿌려 허허벌판의 황무지를 옥토로 만들어냈다.
옛 소련의 ‘노력영웅’ 1,200여명 중 750여명이 ‘고려인’으로 불린 이들에게서 나왔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다시금 유랑하고 있다.
각 공화국에 민족주의 바람이 일면서 배척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도 러시아어와 공화국언어ㆍ민족어를 익혀야 하는 삼중고를 겪고 있다.
3ㆍ4세대에서 한국어는 거의 사라져가는 형편이다.
항일 독립군을 키우고 먹이며 무기 살 돈을 대줬던 고려인들에게 조국은 무엇을 주었을까.
독일이나 그리스ㆍ이스라엘 같은 민족귀환 프로그램은커녕 국가 차원의 지원책도 없다.
조국에서 받은 것이 없어도 55만 고려인들은 여전히 민족의 보배다.
고려인 네트워크 덕분이다.
자원의 보고로 떠오르는 중앙아시아에 보다 용이하게 진출할 수 있고 연해주의 식량기지화도 가능하다.
‘고려인’이라는 존재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민족의 아픔이고 영광이며 채무이자 미래를 위한 자산이다.
(권홍우.2008.서경.인터넷한국일보)
⑦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號) 사건은 1866년(고종 3년) 음력 7월 12일(양력 8월 21일)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던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를 평양 군민(軍民)들이 반격하여 불에 태워버린 사건이다.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⑧ 대구 유니버시아드 개막(2003) : 스포츠 체전인 제22회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가 2003년 오늘 대구에서 개막돼 11일 동안의 열전에 돌입했다.
개막 사흘 전 불참을 선언했던 북한이 우여곡절 끝에 대회에 참가해 우리 선수단과 함께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입장해 세계 만방에 남과 북의 하나됨을 알렸다.
태권도와 수영, 육상 등 13개 종목 183개의 금메달을 놓고 벌인 열하루 동안의 열전 결과 한국은 중국과 러시아에 이어 종합 3위를 기록해 역대 최고의 성적을 거뒀다.
특히 남북한은 공동출전으로 이념을 초월해 스포츠 정신을 구현한 공로를 인정받아 페어플레이상을 공동 수상했다.
⑨ 알 아크사 회교사원 방화(1969) :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점령한 예루살렘 !
1969년 오늘 예루살렘에 있는 알 아크사 회교사원이 화염에 휩싸입니다.
예루살렘의 회교신도들은 이스라엘이 고의적으로 사원에 불러 질렀다며 폭동을 일으킵니다.
이스라엘은 폭동진압에는 성공하지만, 이 사건 이후 이스라엘과 아랍국들 사이에 테러와 보복테러의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⑩ 칠레 대규모 폭동 발생(1973) : 1973년 오늘 !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 대규모 폭동이 일어납니다.
5주전 임금문제로 시작된 운수업계의 파업이 정치쟁점으로 비화되면서 폭동으로까지 발전했습니다.
폭도의 진압과정에서 여섯명이 숨지고 수십명이 크게 다칩니다.
칠레에는 3년전인 1970년 피노체트 장군이 이끄는 우익 군부 쿠데타로 아옌데 공산정부가 붕괴됐으나 극심한 인플레를 겪어 왔습니다.
⑪ 중국 주석 화궈펑, 유고 방문(1978) : 중국의 화궈펑 국가주석이 1978년 오늘 유고슬라비아의티토 대통령을 방문합니다.
자주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걷고 있던 유고슬라비아 !
화궈펑 주석과 티토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비동맹국가들의 우호방안을 논의합니다.
티토 대통령은 중국과 소련의 화해르 촉구하지만 화궈펑 주석은 소련이비동맹 국가의 단결을 해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⑫ 파리 루브르 박물관 모나리자 그림 도난(1911) : 8월 21일. <모나리자>가 없어졌다.
당시 루브르는 월요일마다 휴관이었다.
그러나 특별한 허가를 얻은 사진작가나 미술사 사가 또는 관내의 건축기사, 작품 수리사들은 예외였다.
범인은 어떤 형태로든 특별허가증을 지니고 박물관에 잠입했음에 틀림없었지만 단서가 보이지 않았다.
루브르 책임자 호모레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다. 다른 그림이라면 몰라도 <모나리자>는 워낙 유명한 명품이었기에…….
많은 용의자가 체포되고 파리경찰은 전시민에게 협조를 요청했으나 세로 77㎝, 가로 53㎝의 이 소품은 2년3개월간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모나리자>는 1913년 12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발견됐다.
이보다 조금 앞서 피렌체의 화상(畵商) 알프레도 지에리는 묘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발송인은 레오나르데이고 <모나리자>를 팔 용의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 지에리는 그 편지를 무시했다.
그러나 다시 그 편지를 읽은 지에리는 편지발송인이 <모나리자>를 훔친 범인이라는 심증을 갖게 되었다.
프랑스 파리 발신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나는 이탈리아인이다.
나는 조국 이탈리아에게 충성을 바칠 의무가 있다.
나는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갖고 있다.
그 옛날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가 나의 가난한 이탈리아로부터 유혹한 <모나리자>를 되찾아 온 것은 작으나마 조국을 위해 보탬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에리는 우피치미술관장과 상의한 뒤에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당신 편지는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이탈리아는 <모나리자>의 구출자에게 마음으로부터 깊은 감사를 할 것이다.
작품 가격에 대해 당신 뜻에 맞도록 따를 것이며, 당신의 <모나리자>가 진짜라면 값은 나중 문제일 것이다.
빨리 연락주기 바란다."
레오나르데로부터 즉각 답장이 왔으며, 다시 한 번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위험을 무릅쓰고 밀라노에서 만나기로 했다.
12월 9일 레오나르데는 밀라노에 도착했다는 전보를 쳐서 지에리에게 피렌체의 화랑으로 찾아가겠다고 했다.
다음날 오후 지에리의 화랑에 30세 가량의 작고 깡마른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는 목소리를 맞춰 말했다.
"안전합니다.
<모나리자>는 피렌체에 도착했습니다.
나는 우물쭈물하는 것은 질색입니다.
당신은 사겠습니까 말겠습니까?"
"사고말고요.
상대는 우피치미술관입니다.
어떻습니까.
내일 당신 호텔에서 작품을 봅시다.
물론 값은 달라는 대로 50만 프랑입니다."
12월 11일,
지에리는 우피치미술관장과 함께 호텔로 찾아갔다.
레오나르데는 침대 밑에서 흰 트렁크를 꺼내 열었다.
트렁크 속에는 삼류화가들의 잡다한 소지품이 나왔다.
드디어 트렁크 밑바닥에서 두껍게 포장된 작은 짐이 나왔다.
포장을 푸니 <모나리자>가 예의 그 미소를 보였다.
살펴보니 진품이 틀림없었다.
다행히 상처가 없었다.
캠퍼스 뒷판에는 루브르의 분류번호도 붙어 있었다.
레오나르데는 체포됐다.
본명은 베루지아.
32세의 방랑자라는 게 밝혀졌다.
그는 다음과 같이 경위를 털어놓았다.
"그날 아침,
나는 루브르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입장하는 것을 보아 기회를 틈타 이들과 함께 들어갔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급히 <모나리자> 앞으로 다가섰다.
액자째 떼어내려니까 너무 시간이 걸렸다.
나는 나이프로 액자를 벌리고 그림만 빼냈다.
미술관을 빠져나오는 것은 간단했다.
관내 청소관계로 사람들은 부산했고 수위는 물을 뜨러 가고 없었다.
나는 작업복을 벗어 그림을 싸 갖고 나왔다."
공판이 열렸다.
베루지아는 어디까지나 애국주의적 입장에서 <모나리자>를 훔쳤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수첩이 발견됨으로써 진상이 드러났다.
베루지아는 9개월전부터 판매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대상에는 록펠러․카네기, 모르간 등 미국의 백만장자가 올라 있었고 또한 독일․이탈리아의 유명한 화상(畵商)들 주소도 적혀 있었다.
사건 후, <모나리자>는 유리틀 속에 진열되고 특별 경호원이 배치되었다.
<모나리자>는 1913년 12월 크리스마스날 아침, 다시 옛집에 돌아왔다.
⑬ 하와이, 미국 50번째 주로 편입(1959) : 친미 백인세력의 지배하에 있던 하와이는 1898년 스페인 미국전쟁의 발발로 그 군사적 중요성이 인정되어 같은 해 8월 21일 합병안이 미의회를 통과했으며 그후 1900년 정식영토가 되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전쟁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하와이를 더욱 세계에 알리고 관광의 중심지로 급속히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드디어 1959년 8월 미국의 50번째주로 승격되었다.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州)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1959년 8월 21일,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하와이를 준(準)주에서 정식 주로 승격시키는 법안을 공포하자 하와이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활발하게 주 승격 운동을 벌여 온 하와이 주민의 환호 속에 성조기의 별은 50개로 늘어났다.
미국의 속령이 된 지 59년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하와이는 이미 하와이인의 땅이 아니었다.
당시 56만 명의 주민 가운데 60%가 백인과 일본인이었다.
여러 부족이 평화롭게 공존하던 하와이 제도는 1778년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 도착한 뒤 격변기를 맞았다.
카메하메하 1세는 향료와 맞바꾼 서양식 총포를 앞세워 다른 부족을 하나씩 정복했다.
1795년 왕국을 세워 스스로 대왕이라 칭한 그는 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하와이의 전통 신앙을 유지해 평화로운 왕국의 틀을 다졌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순조로울 수는 없었다.
서양인과의 교류는 하와이 원주민에게 독(毒)이 되어 돌아왔다.
전염병으로 20여만 명의 원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재배를 위한 대형 농장이 생겨나면서 원주민의 입지는 좁아졌다.
1800년대 중반 농업 이민이 급속히 늘어나고 토지 매매가 허용되면서 하와이인은 백인에게 토지를, 아시아인에게 일자리를 빼앗겼다.
토지와 자본을 앞세운 백인들은 왕권까지 위협했다.
제7대 칼라카우아 왕은 일본을 끌어들여 백인 농장주들을 견제하려 했지만 민병대의 총칼 앞에 결국 왕권을 제한하는 헌법에 서명했다.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은 원주민의 권리를 강화하는 새 헌법을 만들었지만 민병대가 이올라니 궁전을 봉쇄하자 1893년 왕위를 포기했다.
백인 농장주들이 세운 임시정부는 이듬해 하와이 공화국을 수립했다.
대통령이 된 샌퍼드 돌은 활발한 교역을 위해 미국에 합병을 요청했고 1900년 미국은 이를 승인했다.
돌 가문이 만든 과일유통회사인 ‘돌(Dole)’은 세계적인 상표가 됐다.
세계적인 석학 놈 촘스키는 이를 두고 “무심코 돌 파인애플의 깡통을 따는 것은 미 제국주의의 승리를 축하하는 것”이라는 독설을 내뱉었다.
‘검은 구름 하늘을 가리고 이별의 날은 왔도다.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고 서로 작별하여 떠나리.’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연인을 보고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이 지었다는 하와이의 대표적인 노래 ‘알로하오에’는 사랑하는 조국을 버리고 떠났던 그의 한 맺힌 ‘하와이 아리랑’일지도 모른다.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2007)
⑭ 링컨-더글러스 논쟁 시작(1858) : 미국 일리노이 주 딕슨에 는 링컨 기념 주립기념비가 잇다.
1858년 8월 21일 에이브러햄 링컨과 스티븐 A. 더글러스가 노예제 확대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1854년 더글러스는 북위 36°30′ 이북 준주의 노예제 금지조치를 해제하고, 대신 '주민주권'의 원칙을 적용하는 내용의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을 제안했다.
이 법안의 요점은 노예제의 채택 여부를 해당 준주의 주민들이 결정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 법안이 통과되자 노예제를 확대하는 데 반대하는 사람들은 공화당을 결성했다.
그러나 1857년 대법원에서 미국 의회나 준주의 입법기관은 준주에서 노예제를 배제할 권한이 없다고 판결(드레드 스콧 판결)함으로써 양쪽의 주장은 모두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그러다가 1858년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 상원의원인 더글러스와 공화당 후보 링컨이 맞붙으면서 노예제 확대 문제가 주요 쟁점으로 다시 부각되었다.
링컨은 이 문제를 놓고 더글러스에게 토론을 제의했다.
토론은 8월 21일~10월 15일 일리노이 주의 7개 선거구에서 각각 3시간씩 모두 7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토론 결과 더글러스는 남부 민주당원들의 지지를 잃었다.
그러나 선거에서는 더글러스가 링컨을 간신히 물리치고 상원의원에 재선되었다.
한편 2년 뒤 벌어진 대통령 선거에서는 링컨이 더글러스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⑮ 미국, 터너의 노예반란사건 발생(1831) : 8월 21일 미국 버지니아 주 사우샘프턴에서 냇 터너가 7명의 노예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터너는 어려서부터 노예제에 대해 강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다. 1820년대초에 그는 가난한 이웃 농장에 팔려갔으며, 이후 10년 동안 거의 광신에 가까울 정도로 종교에 매달렸다.
자신의 종족을 노예의 굴레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기까지 했다.
마침내 그는 군청소재지인 예루살렘의 무기창고를 점령하고 신병을 모은 뒤, 디즈멀 대습지로 이동해 백인들을 몰살시킬 계획을 세웠다.
1931년 8월 21일 밤 터너는 추종자들과 예루살렘으로 행진하면서 백인 60명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주 민병대가 진압에 나섰으며, 반란군은 예루살렘에 도착도 하기 전에 모두 죽거나 사로잡혔다.
터너는 6주 동안 도망다닌 끝에 붙잡혀 11월 11일에 교수형을 당했다.
이후 흑인들의 소요가 잇달아 일어나자 백인들은 흑인의 교육, 활동과 집회의 자유를 금지하는 더욱 억압적인 법률을 통과시켰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남부의 노예제 지지론자들은 더욱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는데, 이러한 분위기는 남북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⑯ 중국 홍위병 북경가두 진출(1966) : 중국 최고지도자 마오쩌뚱이 중국 혁명정신의 재건을 내걸고 추진한 문화혁명 !
1966년 오늘 !
홍위병이라고 이름붙여진 문화혁명의 전위대가 처음으로 북경거리에 진출합니다.
마오쩌뚱의 초상화와 마오쩌뚱의 사상이 담긴 붉은 책을 들고다니는 홍위병들 !
이들 홍위병은 중국 전역을 떼를 지어다니며 문화혁명을 전파함으로써마오쩌뚱 독재체제 확립에 크게 기여합니다.
⑰ 프리다 칼로,21세 연상 디에고와 결혼(1929) : 그녀는 보기 드문 품위를 지녔고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눈에는 기묘한 불길이 타오르고 가슴은 봉긋 솟아오르기 시작해 아이 같지 않은 매력을 갖고 있었다.
벽화주의 운동의 세계적인 거장인 멕시코 화가 디에고 리베라(1886-1957). 1923년 멕시코시티 국립 예비학교에서 벽화작업을 하던 서른일곱 살의 리베라는 우연히 마주친 16세 소녀를 이렇게 묘사했다.
훗날 멕시코 미술계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여성화가 프리다 칼로(1907~1954)다.
이들은 6년 뒤인 1929년 8월 21일 결혼했다.
당시 22세이던 칼로는 21년 연상인 리베라의 세 번째 아내였다.
리베라의 지독한 여성편력 탓에 두 사람은 별거, 이혼, 재결합을 거듭했다.
하지만 이들은 부부이자 미술 동료로 갈라설 수 없는 사이였다. 칼로는 자신의 내면에 담긴 욕망과 좌절의 풍경을 그렸고, 리베라는 멕시코 농민 등 민중을 소재로 한 역사적 풍경을 벽화로 표현했다.
칼로는 자화상 속 자신의 이마에 디에고의 이름을 새겨 넣을 정도였다.
이런 칼로의 47년 인생은 스러져가는 육체와의 싸움이었다.
6세 때 소아마비에 걸려 왼쪽 다리가 불구가 됐고, 18세 때인 1925년에는 교통사고로 척추와 골반을 심하게 다쳐 30여 차례나 외과수술을 받아야 했다.
칼로가 이 참담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것이 그림이다. 그는 평생 2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어머니의 출산 장면을 담은 나의 탄생을 비롯해 교통사고, 유산, 몸을 쇠로 고정한 흉측한 자신의 몸 등 자화상이 많았다.
칼로는 살아오며 나 혼자일 때가 많았고 내가 가장 잘 아는 소재가 나이기 때문이라고 자화상을 많이 그린 이유를 말했다.
칼로가 양성애자이자 공산주의자로 활동한 것을 두고 찬반이 엇갈리긴 하지만 그가 자신의 장애를 예술로 승화시킨 여성이라는 데 이견을 달기는 어렵다.
멕시코 정부는 1984년 칼로의 작품을 국보로 지정했다.
이런 칼로의 모습에는 서른두 해를 뜨겁게 살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전혜린(1934-1965)이 겹쳐진다.
전혜린은 자신의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78)에서 이렇게 읊조렸다.
누구나 자기의 쥐덫 속에 살고 있다.
개인의 쥐덫과 인류의 운명이라는 역사성, 시간성의 쥐덫이 놓여 있다.
… 죽음을 내포한 존재인 인간에게는 자신의 내부에 파고드는 것, 내적 관조에 의해 어떤 체념적인 긍정을 얻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것이다.
(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2006)
⑱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 : 드디어 올 게 왔다.
1998년 8월21일,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가 5억5,000만달러를 잃었다.
투자자들은 귀를 의심했다.
LTCM이 어떤 곳인가.
단기투자를 표방하지만 1994년 설립된 이래 해마다 40% 이상의 수익률을 올리던 시장의 총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두 명의 경제학자가 자금을 운용하는 꿈의 펀드 아니었던가.
평가가 여기서 엇갈린다.
운용자금 1조달러가 넘는 펀드가 손실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긍정론과 LTCM의 손실은 시장 시스템의 위기로 직결된다는 시각이 맞선 것. 결론은 후자 쪽으로 났다.
LTCM 사태는 시장을 경색시켰다.
LTCM 위기의 원인은 러시아의 채무불이행 탓이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학자들과 대자본가들이 모은 투자금액만 약 1조2,000억달러. 당시 한국 예산의 10배에 가까웠다.
러시아 채권에 주로 투자하며 승승장구한 LTCM은 학문(노벨 경제학상)과 시장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주목 받았지만 결국 돌부리에 걸리고 말았다.
더 이상 수익을 올릴 투자 대상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LTCM 위기가 터지자 미국은 공황으로의 파급을 막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금융기관을 욱질러 35억달러에 이르는 협조융자 재원을 마련해 신용경색과 위기 확산을 막았다.
바로 1년 전인 1997년 외환위기를 겪었던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덕분에 당장의 파산을 모면한 LTCM은 2000년까지 존속했지만 시장은 멍들 대로 멍들었다.
문제는 LTCM 사례가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 최근 프랑스에서 시작돼 전세계로 확산된 서브 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와 LTCM은 유사성이 적지않다.
시장은 과연 구조적으로 불황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소름이 돋는다.
(권홍우 편집위원.서경.2007.한국아이닷컴)
⑲ 제3의 물결 : 미국의 인기 저술가 ‘앨빈 토플러’는, 전쟁은 그 시대의 문명을 반영한다고 했다.
그는 그의 저서 <전쟁과 반전쟁>에서 유사 이래의 인류사회를
제1의 물결 (농경사회),
제2의 물결 (산업사회),
제3의 물결 (정보사회)
등 3단계로 분류하고 21세기의 전쟁은 제3의 물결 전쟁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의 예측대로 21세기에 채 들어가기도 전에 미국은 정보(컴퓨터)전쟁(cyber war)의 개발에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타임지 최근호(8월 21일자)의 보도다.
타임지는 미래의 전쟁은 오늘날의 공상 과학 소설과 비슷할 것이라고 하였다(*주(註) : 1995.8.21, 한국 일보).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 ; 1928 ~ ) : [요약]
미국의 미래학자이다.
대표작 《제3의 물결》에서 처음으로 재택근무·전자정보화 가정 등의 새로운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외에도《미래의 충격》, 《권력 이동》 등이 있다.
국적 미국
활동분야 저널리즘
출생지 미국 뉴욕
주요저서 《미래의 충격)》(1970),《제3의 물결》(1980), 《권력 이동》(1991)
[본문] 1928년 뉴욕에서 출생하였다.
1949년 뉴욕대학교를 졸업한 뒤 중서부 공업지대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면서 노동조합 관련 잡지에 글을 기고하여 문필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저널리스트가 되었다.
처음에는 백악관 담당 정치·노동 문제 기자로 일했으나 차츰 비즈니스 분야로 활동의 터전을 넓혀 1959년부터 1961년까지 《미래(未來)》지의 부편집자로 활동하였다.
1964년에 쓴 《문화의 소비자》에서 날카로운 통찰력이 주목을 받았으며, 《미래의 충격》(1970)으로 그 위치를 확고하게 다졌다.
1980년에 출판된 대표작 《제3의 물결 The Third Waves》은 고도 정보화사회에 대한 시나리오로 돌출적인 사회현상을 신문 잡지식으로 다루어, 그 저류(底流)가 되는 사회의 변혁방향을 교묘하고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그는 미래사회를 정보화사회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제1의 물결인 농업혁명은 수천 년에 걸쳐 진행되었지만, 제2의 물결인 산업혁명은 300년밖에 걸리지 않았으며, 제3의 물결인 정보화혁명은 20~30년 내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책에서 처음으로 재택근무·전자정보화 가정 등의 새로운 용어가 사용되었다.
1991년에 출판된 《권력 이동》에서는 권력의 세 가지 원천을 폭력(暴力)·부(富)·지식(知識)으로 규정하고, 폭력을 저품질 권력, 부를 중품질 권력, 지식을 고품질 권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21세기의 전세계적 권력투쟁에서의 핵심문제는 지식의 장악이며, 이 지식이야말로 진정한 권력의 수단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또한, 지식은 결코 소진되는 법이 없으며 약자나 가난한 자도 소유할 수 있는 지식의 생산성으로 폭력과 부의 파괴적이고 편향적인 비민주성의 낭비와 횡포를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뉴욕대학교·마이애미대학교 등 5개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고, 코넬대학교 객원교수를 역임하였다.
⑳ 덤버튼 오크스(Dumbarton Oaks) 회의 개최(1944) : 개최 기간은 1944.8.21 - 9.26.
1944년 10월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의 4개국 대표들이 모여 워싱턴 외곽에 있는 덤바턴오크스에서 '전반적 국제기구 설립에 관한 제안'이 작성되었고 이것이 국제연합헌장의 초안이 되었다
㉑ 미국 배우 영화 성공 자축연(1939) : 미국 헐리우드 청춘스타 미키 루니와 주디 갈런드 !
1939년 오늘 미키 루니와 주디 갈런드는 자신들이 출연한 영화 앤디 하디 시리즈의 성공을 축하하는 자축연을 엽니다.
1938년부터 제작된 영화 앤디 하디시리즈 ! 미키 루니와 주디 갈런드는 이 영화에 남녀주연으로 출연해 헐리우드의 스타대열에 올라섭니다.
여배우 주디 갈런드는 같은 해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서 주인공 도로시역을 맡아 아카데미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합니다.
㉒ 냇 터너(Nat Turner) 폭동 : 어둠이 깔리자 흑인 노예 7명이 행동에 나서 백인 농장주 가족을 죽였다.
1831년 8월21일 밤, 미국 버지니아주 사우샘프턴 카운티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주모자는 냇 터너. 당시 31세였다.
흑인 노예였지만 타고난 영민함으로 어깨 넘어 글을 배우고 성경을 익힌 그는 흑인 사이에서 ‘예언자’로 불렸던 인물. 신비주의에 빠져 일식현상을 하늘이 내린 흑인해방의 계시로 여기고 백인들과 노예들이 쉬는 주일에 거사를 일으켰다.
‘모든 백인의 소멸’이 목표였던 터너는 1차 목적지를 카운티의 수도이자 무기고가 있는 예루살렘으로 잡고 진군했으나 문제에 봉착했다.
봉기와 동시에 수백명이 합류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가세한 흑인은 불과 70여명. 이틀 동안 백인 57명을 살해하며 예루살렘 외곽에 당도한 터너 일행 앞에는 민병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폭동은 바로 진압되고 터너는 도주했으나 3,000명으로 불어난 민병대의 수색작전 끝에 체포(10월)돼 교수형(11월)에 처해졌다.
진압과정에서 폭동과 무관한 흑인 200여명이 학살 당했다.
이틀 만에 끝난 터너의 폭동은 미국사회에 광풍을 몰고 왔다.
‘운명에 만족하거나 비굴한 노예근성에 젖어 있기에 흑인들의 무장봉기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남부 백인들은 흑인을 더욱 탄압하는 법률을 만들었다.
노예에 대한 교육과 노예 3인 이상의 회합, 흑인의 설교가 금지됐다.
노예제도를 둘러싼 북부와 남부의 간극이 더욱 벌어져 결국 남북전쟁으로 이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완전한 참정권을 1960년대 중반에야 획득한 흑인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시대가 됐지만 미국의 흑백 간 차이는 여전히 존재한다.
최근 30년 동안 인플레이션으로 흑백 간 소득격차가 더욱 벌어졌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인터넷한국일보, 2009/08/20)
㉓ 기타 오늘의 역사
0568(신라 진흥왕 29) 진흥왕, 황초령,마운령에 순수비 세움
1545(조선 명종 1) 을사사화 일어남
1903 일본 정부, 한만(韓滿)보호 기본타협안을 러시아 정부에 제 시
1908 대도 창간.미국 샌프란스코 한인감리교회에서 창간된 월간지.
1909 도수(屠獸)규제 반포
1909 도량형법 공포
1912 총포화약류 취췌(取締)령 공포
1934 한강 인도교 공사 준공
1937 남경에서 중.소 불가침조약 조인
1949 서독 점령군, 군정 종식
1951 미국, 세계최초 핵잠수함 건주 지시
1952 인도-파키스탄, 국경선 획정에 관한 협정에 조인
1968 소련군, 체코에 침입
1969 안성군에서 세기항공의 파이피기 추락, 국회의원 조창대 등 5 명 사망
1969 미, 쿠바 외교관 2명 추방
1970 경부고속도로 추풍령서 한진고속버스 참사. 25명 사망, 22명 중경상
1976 UN군 판문점 문제의 미루나무 절단
1976 청계천 하수처리장 준공
1978 태풍 칼멘호 강타, 44명 사망, 피해액 92억원
1980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전두환 장군을 국가원수로 추대하기로 결정
1981 경제기획원, 제5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
1982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 레바논 철수 개시
1986 국립중앙박물관, 옛 중앙청을 개조해 이전 개관
1986 카메룬서 화산가스 분출로 1천7백여명 사망
1991 정부, 과학기술처산하 19개 과학기술계 정부출연연구기관을 통폐합
1991 21-24 제1차 감리교 선교사 세계대회 개최
1991 소련 쿠데타 실패, 고르바쵸프 크레믈린 귀환
1993 영호남 등 남부지방에 집중호우. 12명 사망, 재산피해 206 억여원
1994 성신양회 그룹 김상수 명예회장 사망
오늘의 인물
① 김대건(金大建 ; 1821.8.21 - 1846.9.16) : 충청도 내포 솔뫼(지금의 전남 당진)에서 출생.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외국에 유학하여 당시의 봉건주의 계급 제도와 쇄국 정책을 타파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한국 최초의 신부이기도 한 김대건「안드레아」는 1846.9. 16 새남터에서 순교했는데, 1925.7.5 로마교황으로부터 「복자」칭호를 받았다.
동상 제막은 1972.5.14.
⇨5월 14일.
② 이 직(李稷 ; 1362 -1431.8.21) : 고려 말기와 근세 조선 초기의 문신.
16세란 어린나이로 문과 시험에 합격하여 고려 공양왕 때에 「예문관 제학」을 지냈다.
이성계가 근세 조선을 세울 때, 그를 도운 공로로 개국 공신 3등이 되었고, 1403년 판사평 부사로서 왕의 명령으로 「주자소」를 차리고 구리 활자인 「계미활자」를 만들었으며, 1405년 6조의 제도가 정해졌을 때, 처음으로 이조 판서를 경유 영의정이 되었다.
③ 이제마(李濟馬 ; 1838 ~ 1900.8.21) : 조선 후기의 한의학자.
《주역》의 태극설인 태양·소양·태음·소음의 사상을 인체에 적용, 기질과 성격에 따라 인간을 4가지 형으로 나누어 그에 적합한 치료방법을 제시한 사상의학을 창안하였다.
본관 전주(全州).
호 동무(東武).
자 무평(務平).
함남 함흥 출생.
1888년(고종 25) 군관직에 등용되었으나 이듬해 사퇴하고, 1892년 진해현감(鎭海縣監)이 되었다.
다음해 사직하고 1896년 최문환(崔文煥)의 반란을 평정하여 고원군수(高原郡守)로 추천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주역(周易)》의 태극설(太極說)인 태양(太陽) ·소양(小陽) ·태음(太陰) ·소음(小陰)의 사상(四象)을 인체에 적용, 기질과 성격에 따라 인간을 4가지 형으로 나누어 그에 적합한 치료방법을 제시한 사상의학(四象醫學)을 창안하였다.
이 학설은 종래의 음양오행설의 철리적(哲理的) 공론을 배척하고 임상학적인 방법에 따라 환자의 체질을 중심으로 치료방법을 제시한 점에 의의가 있다.
저서로는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 《격치고(格致藁)》 등이 있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EnCyber.com)
④ 정수창(鄭壽昌 ; 1919.8.21 ~ 1999.10.24) : ⇨10월24일. 실업가.
전문 경영인으로서는 최초로 그룹 회장이 되었다.
자택에서 별세했다.
정 전 두산그룹 회장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80~88년)과 아시아-태평양 상공회의소 연합회장(84~86년) 등을 역임한 재계의 거물이다.
별세 전까지도 아-태 상의연합회 명예회장과 전경련 원로자문위원, 두산그룹 연강재단 이사 등을 맡아왔다.
경북 영덕 출신인 정씨는 경성상업학교(현 서울대 상과대학)를 나와 지난 1945년 동양맥주에 입사했으며, 삼성물산 사장, 동양맥주 사장에 이어 두산그룹 회장을 두 차례(77~81년, 91~93년) 지냈다. 정씨는 박두병 두산 선대회장 타계 후 재계 최초로 전문경영인 출신 회장으로 그룹회장에 올랐다.
다른 나라 외교관들이 '포도주 없는 한국'을 비아냥거리는 얘기를 듣고 '마주앙'을 생산해 내기도 했다.
30년 이상 아침 산책을 즐기면서 남산 등산로 쓰레기 줍기를 해왔으며, 벙거지 모자를 쓰고 담배꽁초를 줍는다고 거지 할아버지라는 별명까지 얻었다고 한다.
1980년 환경보전협회 회장을 맡는 등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983년 골드 머큐리 개인부문상, 1984년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⑤ 팔미로 톨리아티(Palmiro Togliatti ; 1893.3.26 ~ 1964.8.21) : ⇨3월 26일.
이탈리아의 정치가.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
71세 향수.
톨리아티는 40대에 죽은 친구 안토니오 그람시와 함께 20세기 이탈리아 공산주의 운동을 이끈 사람이다.
제노바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톨리아티는 토리노 대학 법학과에 재학 중에 이탈리아 사회당에 가입했고, 1921년 그람시 등 급진파 동료들과 함께 사회당을 탈당해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건했다.
1926년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공산당을 불법화하자 그는 국외로 망명해 공산당과 코민테른 활동을 지도했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터졌을 때는 국제 의용군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파시스트 정권 아래서 지하조직을 통한 레지스탕스 운동에 주력하던 이탈리아 공산당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뒤 톨리아티의 지도 아래 서유럽 최대의 공산당이 되었다.
종전 직후 잠시 연립 정권에 참가한 것을 빼놓고는 냉전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정권을 잡아보지 못했지만, 이탈리아 공산당은 선거 때마다 우익 정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만큼 이탈리아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한 1956년, 이탈리아 공산당은 부르주아 정치 권력의 토대를 이루는 시민사회 내부에 진지전의 거점을 구축해 부르주아 헤게모니에 지속적으로 도전한다는 구조개혁의 전략을 선언했다.
그람시의 이론에서 끌어낸 이 구조개혁 전략은 톨리아티가 죽은 뒤 이탈리아 공산당이 러시아파와 이탈리아파로 나뉘어 갈등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그의 후배 지도자 엔리코 베를링구에르가 1975년 나라와 지역의 특수성에 따라 공산주의 원칙들을 융통성 있게 조정할 권리를 내세우며 유러코뮤니즘을 제안하는 바탕이 되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냉전이 끝난 뒤인 1991년 2월 대중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하며 좌익민주당으로 바뀌었다(고종석,2002)
⑥ 에드워드 허버트(Edward Herbert ; 1583 - 1648.8.21) : 영국의 사상가.
자연 종교의 건설을 위하여 힘을 써서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정치적으로도 활약하였다.
저서 <진리론〉등.
⑦ 드뷔시 출생(1862) : ⇨ 3월 25일.
⑧ 아키노(Benigno Simeon Aquino Jr. ; 1932.11.27 ~ 1983.8.
21) : ⇨ 11월 27일.
필리핀 야당지도자.
1983년 오늘 !
필리핀의 야당 지도자인 아키노 전 상원의원이 마닐라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 트랩을 내리는 순간 괴한의 총격을 받고 숨을 거둡니다.
아키노 전 상원의원은 3년간의 미국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이었습니다.
아키노의 살해범도 현장에서 경호원들에 의해 사살됐습니다.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 대통령의 최대 정적이었던 아키노 전 상원의원은 필리핀의 민주회복을 위해 투쟁해왔습니다.
아키노 전 상원의원이 피살되고 열흘이 지나 거행된 장례식 !
장례식에 운집한 백만여명의 필리핀 국민들은 아키노 살해의 배후로 마르코스대통령을 지목하며 분노를 감추지 못합니다.
아키노가 피살된 후 불붙기 시작한 민주화 시위로 마르코스 대통령의 21년간의 장기독재는 3년후인 1987년 마침내 무너지게 됩니다.
⑨ 코시(Baron Augustin Louis Cauchy ; 789.8.21 - 1857) : 프랑스 수학자.
오귀스탱 루이 코시가 파리에서 태어났다.
코시가 태어난 1789년은 프랑스 대혁명이 터진 해다.
그 해부터 1871년의 파리 코뮌까지 프랑스는 당대의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역사를 창조해냈다.
혁명의 밀물이 들이치는가 하면 어느새 반혁명의 썰물이 빠져나갔고, 그 반혁명의 썰물에 적응할 만하면 다시 혁명의 해일이 몰아쳤다.
프랑스사의 흔한 이미지인 혁명과 반동은 주로 대혁명의 해부터 파리 코뮌의 해에 이르는 연표에 신세지고 있다.
그런데 이 격동의 시대는 프랑스에서 수학자들의 연대이기도 했다.
라그랑주, 라플라스, 몽주, 푸리에, 퐁슬레, 코시, 갈루아, 에르미트 등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수학자들 다수가 우연히도 프랑스인들이었다.
호사가라면 여기서 혁명과 수학의 함수 관계에 대해 따져보고 싶은 유혹을 느낄 만도 하다.
이 수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혁명 때문에 신세를 망쳤고, 다른 일부는 혁명 덕분에 크게 출세했다.
코시는 혁명으로 괴로움을 받은 쪽에 속한다.
코시의 아버지는 구사일생으로 단두대를 피한 구체제의 경찰 간부였는데, 코시는 아버지로부터 거의 광신적이라 할 만한 가톨릭 신앙과 부르봉 왕가에 대한 충성심을 물려받았다.
1815년부터 1830년까지의 왕정복고기가 코시에게는 가장 마음 편한 시절이었으리라.
1830년 7월 혁명으로 샤를10세가 쫓겨나고 루이 필립이 즉위하자, 코시는 이 시민의 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해 소르본대학에서 쫓겨났다.
뒷날 나폴레옹3세는 코시에게 충성 서약을 면제해주고 그를 복직시켰는데, 그것은 이 오만한 독재자의 치적에 속한다고 할 만하다. 오늘날의 수학도들이 배우는 미적분학은 뉴턴이나 라이프니츠의 미적분학이 아니라 코시의 미적분학이기 때문이다(고종석,2003).
⑩ 엡스타인(Jacob Epstein ; 1880.11.10 ~ 1959.8.21) : 영국의 조각가.
⇨11월10일.
⑪ 미슐레(Jules Michelet ; 1798.8.21 - 1874.2.9) : 프랑스의 역사가․문학가.
미슐레는 <프랑스사 Histoire de France>(1833~67)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민족주의 역사가이다.
미슐레는 역사 형성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을 강조한 잠바티스타 비코의 사상에 공감해, 역사를 숙명에 대한 인간 자유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파악했다.
이러한 생각은 1830년혁명을 겪으면서 더욱 확고해졌고 이후 <보편사 서문 Introduction al'histoire universelle>(1831)을 비롯한 그의 저술의 밑바탕이 되었다.
미슐레는 역사가의 궁극적인 목표가 과거를 재창조하는 데 있다고 확신하면서, 정치뿐만 아니라 예술․종교․경제 등 과거를 이루는 모든 요소들을 취합해 생생하게 재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31년 <로마사 Histoire romaine>(2권)를 쓴 후에는 중세사와 근대사에 몰두해 1833~43년에 중세말까지를 기록한 <프랑스사> 제1부 6권을 썼다.
1847~53년에는 집필 순서를 바꾸어 제3부인 <프랑스 혁명사 Histoire de la revolution francaise>(7권)부터 완성했고, 이어서 1855~67년에 르네상스부터 대혁명 직전까지의 제2부 11권을 집필했다.
미슐레가 주장한 역사 재창조는 때로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낭만적인 해석을 낳기도 했는데, 특히 그리스도교와 국왕에 대한 적대감이 심했던 까닭에 이들과 관련된 사건에 있어서는 왜곡된 서술이 발견되기도 한다.
⑫ 월트 체임벌린(Wilton Chamberlain :1936.8.21 - 1999.10.13) : 본명 Wilton Norman Chamberlain.
사망 1999년 10월 12일(미국시간)
미국 프로농구 선수.
⇨10월 13일.
⑬ 비아즈리 출생(1872) : ⇨ 3월 16일.
⑭ 기타 오늘의 인물
1567 프란체스코 출생.살레스의 성인.유명한 설교가이자 경건문학 가.1665년 시성되었으며 1878년 공교회의 박사로 선언됨.
1583 페타비우스 출생.프랑스 예수회 회원.고전문학과 교부학의 연 구를 통하여 페타비우스는 수년동안에 걸쳐 연대학을 연구하 게 됨.
1801 그룬 반 프린스테러 출생.네덜란드의 보수적인 정치가 및 종 교지도자며 반혁명파를 창시하고 그 지도자가 되었다.
1805 레트베르크 출생.독일을 루터교 목사.1838년 이후에는 야곱교 회의 부목사로 재직했다.
1813 마인홀트 출생.독일의 루터교 목사.그는 당시 그가 속한 시노 드의 성직자들처럼 합리주의자였다.
1832 그레고리 출생.장로교도며 뉴저지대학,프린스턴신학교서 공부 함.뉴욕의 남부 살렘에서 목회함.
1838 독일 시인 샤미소 사망
1880 차미리사 출생.조선여자교육회 창설자. 기독교인,여성운동가, 교육가,일명 김미리사.
1923년 한국에서 최초의 한국연극단을 구성,전국을 순회하며 모금운동벌임.
1882 핸킨스 출생.미국 남감리회 여선교사,목사,교육가.한국명 행 길 혹은 행길아다.1911년 내한 배화여학교 교사로 취임.
1887 이순라 출생.남감리회 여전도인.
1896 최창근 출생.장로교 목사.대영성서공회 권서가 되어 황해도에 서 활약함.
1930 - 2002 영국공주 마거릿 출생
1938 미국가수 케니 로저스 출생
1943 덴마크의 사실주의 작가 폰토피단 사망 - 1917년 노벨문학 상 수상
1964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 팔미로 톨리아티 사망
1986 변호사 이병린 세상 떠남
오늘의 샘터
① 쥘 미슐레의 말 : "가난에 대해 아는 사람은 모든 것을 안다. "
②③④⑤⑥
한국나다나엘선양회의 요약<총합>소개
의 졸저<원저 편저자 (1973년도 초판)> 평택 소통 김평탁입니다.
1973년 초판 이래 조선일보를 비롯 각 신문들과 각방송국 특히 ytn 을 비롯하여 컴퓨터 인터넷.......오늘까지도 각 방송들과 신문 인터넷의 덕택으로 원저자의 보람을 온 국민들과 함께 만끽하며 감사 만족해 하고 있습니다.
소생은 하나님의 말씀<성경>과 개인<일기>를 60여년 동안 지금까지 쓰고 보존해 오면서,
오늘의 국민 소통 운동과 우리 한민족 한가족 소통 운동을 제창하게 되었으며 다행히도 박근혜정부<한민족미래창조과학기술부>의 탄생을 한없는 기쁨과 소원<소망>을 기대하고 있답니다.
국민 여러분 !
그리고
국내외 동포<가족> 여러분 !
어서빨리 동서남북 우리나라 남북 평화 통일을 이루십시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샬롬 !
2013년 08월 13일 광복절을 앞두고
CCCC C-man 평택 소통 김 평 탁 올림
(국민소통운동본부.017-727-3863,(031)692-3650.경기평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