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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정치 전쟁 사회과학) 스크랩 서양사 신성로마제국의 출발점에 관하여
산책시간 추천 0 조회 24 06.05.16 02: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신성로마제국의 출발점에 관하여


이 경 구



      Ⅰ. 문제의 제기                                    2. 오토제국의 성격

      Ⅱ. 논의의 전개                                 Ⅲ. 논의의 마무리

        1. 샤를마뉴제국의 성격



Ⅰ. 문제의 제기


중세를 대표하는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신성로마제국에 관해서는 그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많은 연구를 해왔다. 이 제국을 지도하였던 황제들의 정책 및 사상, 황제들과 교황들간의 갈등관계, 그리고 하나의 제도로서의 제국의 의미, 성격 혹은 이념에 이르기까지 많은 연구들이 이루어져왔다. 본인도 그동안 신성로마제국의 대표적인 황제들의 정책과 그들의 제국이념에 관한 여러 편의 논문과 저서를 통해서 나름대로 이 제국의 성격을 규명하려고 노력해 왔다.

연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심각한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학자들이 이 제국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다양한 논의를 하고 또 매우 세부적으로 연구를 수행하면서도 정작 아주 기본적인 하나의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 제국의 출발점에 관한 것이다.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962년 오토대제가 교황 요한네스 12세로부터 황제로 대관한 사건을 신성로마제국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중등학교 교과서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으며,1) 대학의 문화사나 서양사 개론서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2) 심지어는 백과사전까지도 그 입장을 그대로 취하고 있다.3)

우리나라 학계의 경우 이렇게 962년 오토대제의 대관식을 신성로마제국의 출발점으로 보려는 입장이 일반화되어 있지만,4) 세계적인 차원으로 시야를 확대해 보면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이 문제에 관하여 외국의 학자들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 검색엔진 야후(Yahoo)를 통해서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이라는 주제로 서취를 해 보았다. 이 주제로 검색된 웹 사이트가 38만개 이상이나 되었다. 물론 그 중에는 이 주제와 간접적으로 관련된 사이트가 많이 있었고, 매우 간략히 이 문제를 취급한 사이트도 있었다. 이러한 사이트들을 제외하고 이 주제와 직접 관련된 대표적 사이트만을 골라서 검토를 해 보았다.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웹 사이트에 나오는 내용 중에서 거의 절반은 신성로마제국의 출발점을 800년 샤를마뉴 대관식 사건으로 보고 있으며,5) 나머지 절반가량은 그 출발점을 962년으로 설정하고 있었다.6) 그런데 문제는 그 사이트들을 작성한 사람이나 기관에서, 개인이나 단체의 입장에 따라서, 비판 없이 막연히 어느 쪽을 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성로마제국의 출발점은 하나일 것이고, 또 하나로 설정되어야만 할 것이다. 인터넷이 날로 큰 위력을 발휘해 가고 있는 세상이다. 잘못된 정보나 지식이 미칠 부정적인 파장이 얼마나 큰 것인가는 새삼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비록 시기적으로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학자들이 진지하게 논의를 거쳐, 신성로마제국의 출발점을 하나로 설정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 문제를 논문의 주제로 선정하였다.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결론을 도출해내는 방법은 비교적 간단하다고 생각된다. 먼저 신성로마제국의 본질적 성격을 파악한 후, 그 본질적 성격이 언제 어떤 사건을 계기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는지 알아보면 될 것이다. 만일에 그 특성이 샤를마뉴 대관과 더불어 형성되었다고 한다면 그 출발점을 800년 사건으로 설정하면 될 것이고, 오토의 대관과 더불어 형성되었다고 한다면 962년을 그 출발점으로 설정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결론이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지 검증하기 위해서는 샤를마뉴제국의 성격을 오토제국의 성격과 비교해 보면 될 것이다. 만일에 그 비교를 통해서 양자가 같거나 아주 흡사하다면 800년을 신성로마제국의 출발점으로 설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고, 양자가 아주 이질적이라면 962년으로 그 출발점을 설정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다행히도 본인은 박사학위 논문과 저서를 통해서, 중세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파악하기 위해 중세의 대표적 황제들의 정책과 이념, 그리고 제국의 성격에 관해서 그동안 꾸준히 연구를 해왔다. 그동안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이러한 비교의 방법을 통해서 신성로마제국의 출발점에 관해서 논의해 보기로 하겠다.


Ⅱ. 논의의 전개


논의에 앞서 먼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용어의 개념에 관해서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현대의 사가들이 중세의 제국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신성로마제국’(sacrum Romanum imperium)이라는 정식 라틴어 명칭은 실제로는 콘라트 4세(1254년)에 이르러서야 나타났다.7) 정식 명칭은 이렇게 뒤늦게야 나타났지만, 그 제국을 특징짓는 용어들은 이미 샤를마뉴시대부터 사용되었다. 800년 대관식에서 고대 로마황제들이 사용하던 ‘존엄한 황제(Imperator Augustus)’라는 칭호가 샤를마뉴에게 부여되었으며, 대관 이후에 그는 공문서에서 ‘로마제국’(Romanum imperium)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8) 962년에 오토 역시 샤를마뉴와 동일하게 ‘존엄한 황제’라는 칭호와 ‘로마제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으며, 이 표현은 이후의 독일황제들에게 전통이 되었다.9)

그 이후에 프리드리히 바바롯사는 교황과의 투쟁에서 제국의 신성한 성격을 강조할 필요에 따라서 1157년에 최초로 ‘신성한 제국’(sacrum imperium)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10) 마침내 콘라트 4세에 이르러서 로마제국이라는 표현과 신성한 제국이라는 특성이 결합되어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이라는 용어가 정식으로 출현하였다.

사실 콘라트 4세 이후에 이 제국은 볼테르의 표현대로 신성하지도, 로마적이지도, 제국도 아니었던 유명무실한 제국으로 전락하였다.11) 16세기 초 칼 5세 때에 이르러 반짝 영광을 누리기는 하였으나, 16세기에 신성로마제국은 이미 중세제국이 지니고 있던 유일한 보편제국으로서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였다. 이웃에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국가적 통합을 이룩한 프랑스가 유럽의 패권에 도전하였으며, 영국도 역시 절대왕정을 중심으로 민족적 통합을 이루고 왕권 중심의 강력한 국가로 도약하고 있었다. 이 때의 독일제국은 그 영토 면이나, 세력 면에서 중세의 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현저히 축소되어 있었으며, 또 유럽의 일부인 독일지역을 중심으로 그 제국의 역사가 전개되었다. 이러한 시대상황의 영향을 받아서 1512년에는 ‘독일인의 신성로마제국’ (Heilige Römische Reich Deutscher Nation)이라는 명칭이 나타났다.12) 이렇게 그 제국의 명칭은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제국의 역사와 함께 하였다. 30년 전쟁의 결과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독일은 사실상 영방국가로 전락하면서 제국의 실체는 사라졌다. 그러나 형식상으로 그 명칭과 명맥은 합스부르크가의 최후 황제인 프란츠 2세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렇게 볼 때, 이 제국이 쇠퇴한 시점은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다. 즉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프리드리히 2세 시대를 마지막으로 이 제국은 중세적 제국의 특성을 대부분 상실하였다.13)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가 시작되면서 이 제국은 극도로 쇠퇴하였으며, 베스트팔렌 조약을 계기로 역사적 실체로서의 신성로마제국은 지상에서 사라졌다. 유명무실한 존재로 지속되던 이 제국은 1806년 나폴레옹의 라인동맹으로 해체되면서 종말을 고하였다.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은 이렇게 분명하다. 문제는 출발점이다. 서론에서 문제로 제기한 바대로, 이 제국의 출발점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기 위해서 먼저 샤를마뉴 대관의 의미와 그 대관과 더불어 수립된 제국의 성격에 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다.


1. 샤를마뉴제국의 성격


800년 12월 25일에 로마의 성 베드로 교회에서 교황 레오 3세는 손수 샤를마뉴를 황제로 대관하였다. 그러자 크리스마스 미사에 참석한 로마인들은 ‘신으로부터 대관한 아우구스투스’라고 샤를마뉴를 환호하였다.14) 이렇게 하여 고대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새로운 로마황제가 출현하였다. 이 사건에 임하여 샤를마뉴의 궁정시인 모도인(Modoin)은 고대 ‘로마제국의 부활’(renovatio Romani imperii)을 선언하였다.15) 물론 476년에 이미 사라진 서로마제국이 부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샤를마뉴 궁정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고대 로마제국의 부활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 때에 출현한 제국은 사실은 프랑크인들의 제국이었다. 800년 당시에 샤를마뉴는 실제로 유럽대륙에서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으며, 그는 로마를 포함한 이탈리아, 고올지방, 독일지역에 이르기까지 고대 로마황제들이 지배하던 유럽대륙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어느 면에서 샤를마뉴는 황제가 될 수 있는 외형적인 자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고 할 수도 있다.16) 그러므로 그 제국은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바대로 샤를마뉴제국 혹은 프랑크제국이었다. 그런데 교황은 왜 샤를마뉴를 로마황제로 대관하였으며, 샤를마뉴는 왜 이렇게 수립된 제국을 로마제국이라고, 그것도 고대 로마제국의 부활이라고 선언하였을까?

그것은 교황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라서 800년 샤를마뉴 황제대관식 사건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17) 우선 교황은 이 사건을 통해서 비잔틴황제들의 황제교황주의(Caesaro-Papism)로부터 벗어나기를 기대하였다.18)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에 교황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서서히 이탈리아인들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6세기 후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에 일시적으로 이탈리아가 비잔틴의 지배 하에 들어가기는 하였지만, 그의 사후 비잔틴인들의 세력이 콘스탄티노플로 축소되었고, 이탈리아에서는 라벤나 지역과 시칠리아 섬, 남부의 칼라브리아 일부 지역만이 제국의 세력 하에 남아있었다. 비잔틴황제는 라벤나 태수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이탈리아를 지배하였을 뿐이다. 특히 북부 이탈리아 지역에 거점을 확보한 롬바르드족이 본격적으로 세력의 팽창을 기도하기 시작한 8세기 초반부터 이들의 침략에 맞서 이탈리아인들의 정치적 지도자 역할을 담당한 실질적 인물은 교황이었다.19)

그러나 비잔틴황제는 고대 로마황제의 정통 계승자 자격으로서,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황제의 정치적 지배권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라벤나 태수를 통해서 그 권리를 행사해 오던 황제는 8세기 중엽(751년)에 라벤나 지역이 롬바르드 지배 하에 들어가 이탈리아에서 근거지를 상실한 후에는 교황을 통해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려고 하였다. 즉 교황을 라벤나 태수와 같은 황제의 행정관리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황제는 세속적인 권리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권리까지도 주장하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래 비잔틴황제들의 항구적 전통이 되어왔던 황제교황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기독교 세계의 최고 지배권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비잔틴인들의 황제교황주의 하에서 교황은 비잔틴 교회의 수좌대주교와 같은 지위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물론 세속적인 분야에서도 이탈리아에서 독립적인 지위를 누리고자 하는 교황과 교속 양면에서 최고의 통치권리를 주장하는 황제 간에는 필연적으로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그 갈등은 8세기 초에 성상숭배문제를 계기로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와 3세 때부터 노골적으로 표출되었다.20)

비잔틴황제의 지배 하에서는 이탈리아는 물론 기독교 세계에서 실질적인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 교황은 황제교황주의의 구속에서 벗어날 방도를 물색하였고, 그 최초의 결과로 나타난 사건이 바로 8세기 중엽에 교황 자카리아스의 피핀의 쿠데타에 대한 지원이었다. 부당한 쿠데타를 교황이 지원한 이유는 당시에 서유럽에서 유력한 인물로 부상하던 프랑크 지도자를 교회의 보호자로 세우려는 것이 근본 목적이었다. 교황은 유력한 인물을 보호자로 세워 비잔틴황제의 법률적 구조로부터 벗어나 서방교회의 독립을 누리고, 그 교회에서 실질적인 수뇌가 되고자 하였던 것이다.21)

어느 면에서 800년 샤를마뉴 대관식 사건은 이미 8세기 중엽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로마교회와 프랑크 왕국 간 제휴의 완성이었다. 800년 사건은 비잔틴황제의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교황의 사전 치밀한 계획의 결과였다. 교황이 로마황제를 세운 것도 비잔틴과의 관계를 단절하기 위한 계획적인 것이었다. 교황의 계획은 성공하였다. 800년 사건과 더불어 실제로는 프랑크 군대를 힘의 배경으로 삼고 있던 샤를마뉴 왕은 로마황제가 되었으며, 샤를마뉴가 지배하는 영토는 왕국에서 제국으로 바뀌었다. 이제 이 제국은 단순한 새로운 제국이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수립된 제국은 이념상으로 로마제국이었다.22)

서부에 새로운 로마제국이 출현하였다는 것은 단순히 교황이 비잔틴황제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문제를 넘어서 새로운 차원의 문제를 야기하였다. 당시에 제국의 동부지역에는 콘스탄티노플에 중심을 둔 비잔틴제국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 제국은 고대의 로마제국을 단절 없이 계승하는 정통의 로마제국이다. 정통의 제국이 버젓이 존재하는 현실 속에서 교황이 새롭게 로마제국을 세움으로써 두 개의 제국이라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것은 하나의 보편제국만이 존재한다는 고대 로마인들의 제국이념에 정면 위배되는 일이었다.

교황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을까? 이 문제에 대한 결정적 해결책으로 제창한 이론이 ‘제국의 이전’(translatio imperii) 논리이다. 800년에 신의 뜻에 따라서 제국의 중심이 콘스탄티노플로부터 로마로 이전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비잔틴제국에 이레네(Irene) 여제가 불법적으로 황제자리에 올라있었다는 사실이 이 이론에 타당성을 부여해 주었다.23) 아니 교황이 계획적으로 이 시점을 택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그렇다면 제국의 중심을 이전하게 만든 장본인은 누구일까? 샤를마뉴일까? 교황일까? 아니다. 만일에 그 장본인이 인간이라고 한다면, 설득력도 약하고 비잔틴인들의 더 큰 반발을 초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교황은 신을 끌어들였다. 신의 뜻에 따라서, 제국의 중심이 다시 로마로 이전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교황은 신의 뜻을 끌어들여 샤를마뉴제국의 수립을 정당화함으로써 비잔틴인들의 공격에 대응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신의 개입이라는 교황의 논리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였다. 샤를마뉴 대관에 신의 개입을 강조할수록 샤를마뉴의 권위도 동시에 상승하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제국의 수립에 임하여 비잔틴의 반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신의 논리를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었고, 신의 개입을 강조하면 교황과의 관계에서 황제의 권한이 높아진다는 문제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후의 중세역사에서 교황이 안게 되는 하나의 큰 딜레마였다.

하지만 교황의 이론에 따라서, 결과적으로 샤를마뉴는 신에 의해서 세워진 황제, 즉 신성한 황제가 되었고, 그의 제국은 신성한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었기 때문에 신성한 제국이 되었다. 그러므로 800년에 수립된 제국은 성격적으로 제국 내에서 기독교라는 종교가 중심역할을 하는 기독교제국이었다.24) 앞서 설명한 대로 교황의 의도에 따라서 800년에 수립된 제국은 고대 로마제국의 부활로서의 로마제국이었으며, 동시에 제국의 이전과 수립을 주도한 장본인은 하나님 신이었기 때문에 이 제국은 신성한 제국이었다. 실제로 황제가 된 이후에, 샤를마뉴는 로마황제로서의 역할과 신성한 군주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겸하였다. 로마황제의 자격으로 세속사에 있어서 최고의 수뇌로서 신민을 지배하였으며, 신성한 군주의 자격으로 종교에 관한 문제를 직접 관장하였다. 따라서 샤를마뉴 대관과 더불어 수립된 제국은 이론상이나 이념상으로 신성한 로마제국이었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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