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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世 社稷署令公(諱;純福)派 - 霧隱公(諱;之虎)后
滄海公(諱諱瀾1725-1791)
정란(鄭瀾, 1725~1791)으로, 본관은 동래(東萊), 호는 창해일사(滄海逸士)이다. 경상도 군위 사람이다.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의 문인이다. 조선 최초 전문산악인으로 불리는데 전국의 산을 두루 유람하며 다수의 유산기를 남겼다.
癡庵先生文集卷之九 / 傳
鄭滄海傳 b101_738b 편목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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滄海先生者。姓鄭氏名某字某。自號曰滄海。滄海先生者。一國兒童走卒之言也。其先出東萊。東萊之鄭。甲於東方。名公鉅人。史不絶書。三世隱德而先生出。先生狀貌枯奇異衆。性亢傲好箕踞。不䂓䂓於禮法。詞藝夙成。又不肯屈首爲公車業。弱冠從申靑泉遊。聞文章大旨。已而喟然歎曰。大丈夫生於海東。縱不能如司馬子長之爲。觀盡海東名山大川足矣。於是b101_738c備一匹驢。蕭然獨行。凡國中形勝之地恢譎之觀。靡不歷究。北登白頭。觀三大水所從出。臨大漠之野。望萬里之城。南登漢挐絶頂。極目吳越琉球之間。此其大畧也。尤好楓嶽。屨四及於毘盧之上。作畫以資翫賞。崔七七所寫也。惠寰之贊。豹庵之筆。並稱三絶。嘗從楓嶽而東。歷覽八勝。所騎驢病死陟州。埋之路左。爲文以祭之。人號其地爲靑驢洞。先生非無意於物者也。好法書名畫。藏之家者甚富。所常以自隨者。楓嶽圖與豹庵五露所寫二卷。二卷皆先生眞也。或坐或立或行。或騎驢獨去。或孤舟獨倚。或携杖遙指。或b101_738d脫冠箕踞。面面殊狀。不可盡擧。而曲盡其妙。卷之終只見鏗鏘切切然令人有遺世獨立造物爲徒之意。先生之爲先生。其在是歟。先生不肯與俗士交。富貴非所尙。然所與傾盖促膝者。多名公卿。豈古所謂無獻子之家者歟。嘗謁樊巖相公。相公欲拜。先生擧手長揖曰何用拜爲。相公謝曰汲長孺簪纓中人。不若以滄海爲揖客。今日知宰相之重也。盖先生之交。無富貴貧賤。惟瑰奇不俗者是視。然多在荒閒寂寞之濱。與癡庵善。
癡庵曰滄海以衣冠之族。挾不覊之才。使少留意於b101_739a功名。誰之不如。顧此之不肯。而蕭然自放於物之外。盖輕世肆志似魯仲連。曠達不撿似阮步兵。衣敝褞袍不恥。或似孔門儒者。時時論古今人成敗得失。慷慨激烈。又似燕趙悲歌之士。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10
訥菴先生文集卷之七 / 遺事
從遊諸賢遺事 b103_172b
鄭滄海諱瀾字幼觀。東萊人。霧隱之虎玄孫。居善山海平。卓犖不覊。從申靑泉維翰遊。讀斑馬左柳書。不屑擧業。
b103_174d申晦屛諱體仁字子長。鵝洲人。梧峰先生之悌后。居義城龜尾。出入大山門。自少有儒望。子鼎辰端雅有父風。早中司馬。不幸短折惜也。
靑泉先生續集卷之十二 / 挽
挽[門人東萊鄭瀾] a200_571c 편목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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間世英才自有期。文昌歸後復吾師。三宵吉夢來仙鶴。七日神祥降釋麒。山海千年餘氣數。騷壇諸子任驅馳。竗齡名價龍門上。秉節危忱馬島郵。天地猶嫌多局促。經綸未展大施爲。善治已達重宸陛。淸頌爭騰衆口碑。義檄孤忠當亂日。雲齋至樂育英時。蠻酋珍誦金紗幅。華選弁登屈宋辭。三世源流鳴海國。百年淸望頌樵廝。聖聰尙愛詞a200_571d華菀。朝議昭陳宦數奇。孝感天心延母壽。誠由公頌返親輀。衿期竦立三秋鶴。氣槩長驅萬里騏。神思超然離俗隊。肚皮苟不合時宜。晩年淸福圖書案。小屋閒情水竹籬。道講春秋欽魯聖。圖搜河洛問包羲。寶鞘誰識靑萍價。窮道空傳白雪詩。宿願獲登眉老宅。壯遊遐想史遷基。達人從古多蹇屯。世道如今遽乖隳。恩敎纔承淸路選。眞遊旋促玉京。直緣妖孛晦奎采。倐化晴虹衝漢湄。顧念平時操几地。慇懃貽誨砭愚詞。吾門遽抱山樑慟。後學從何德業資。誰爲頹波能警發。堪憐吾道益a200_572a孤衰。雙蘭趾美由仁善。古宅脴光厚報施。俯仰斯林宗匠闕。重歎世敎哭吾私。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7
𢾡𢿜集 / 雜著
題鄭逸士遊白山錄後 a223_023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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逸士遍遊域內諸勝。猶以未見域外名山爲恨。余謂譬之慕絶艶者。一
覯則心便懈。不如長時懸想。冀其或遇也。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9
𢾡𢿜集 / 雜著
送鄭逸士入海遊漢挐山 a223_023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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丈夫生世。當卓然自立。以行其志。豈忍將此七尺。埋沒於帖括冊錢糓簿中耶。鄭逸士盡觀三韓佳山水。將泛海入耽羅遊漢挐山。聞者笑
之。此事。俗根入髓者。笑固也。然數百年後笑者在耶。見笑者在耶。我不能知。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9
여암유고 제2권 / 편지(書)
백두산으로 들어가는 정창해 란 에게 주다〔與鄭滄海 瀾 入白頭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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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에 여행 중의 안부가 평안하신지요? 누차 찾아와 글을 구한 바 있는데, 지난 몇 해 동안 병들어 누운 바람에 벼루에 먼지가 석 자나 쌓일 정도여서 부응할 수 없으니, 매우 부끄럽습니다. 그대의 발걸음이 장차 백두산(白頭山)으로 향한다는데 그 산은 변방의 북쪽인 숙신(肅愼)의 경계에 있으니 아득히 먼 곳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백 리 길을 가는 사람이 문을 나섰다면 절반은 간 것이다.” 하였고, 또 “백 리 길을 가는 사람은 구십 리를 왔어도 절반쯤 온 것이다.”라는 말이 있으니, 그대는 힘쓰기 바랍니다.
나는 젊었을 때에 자주자(子朱子 주희(朱熹))가 주석한 《참동계(參同契)》를 읽다가 “철기마가 매우 굳세다.〔鐵驥孔蹻〕……”라는 시 한 구절을 얻었습니다. 백두산 꼭대기에 큰 못이 있고 못가에는 사슴 떼가 많으니, 혹여 흰 사슴을 탄 사람을 만나 이 시를 보여주면 반드시 말이 있을 것입니다. 나머지는 이만 줄입니다. 여행길에 신중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주-D001] 정창해(鄭滄海) : 정란(鄭瀾, 1725~1791)으로, 본관은 동래(東萊), 호는 창해일사(滄海逸士)이다. 경상도 군위 사람이다.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의 문인이다. 조선 최초 전문산악인으로 불리는데 전국의 산을 두루 유람하며 다수의 유산기를 남겼다.
[주-D002] 숙신(肅愼) : 기원전 5세기경에 중원(中原) 북계(北界)를 비롯한 산동 반도 및 만주 동북부 지역에 살았던 종족이다. 식신(息愼)ㆍ직신(稷愼)이라고도 하며, 호시(楛矢)와 석노(石砮)를 사용하는 종족으로 알려져 있다.
[주-D003] 백 리 길을 가는 사람이 …… 것이다 :
목표 지점에 가까이 다가올수록 일을 제대로 마무리해야 한다는 뜻으로, 《전국책(戰國策)》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4] 참동계(參同契) : 동한(東漢) 위백양(魏伯陽)의 저서로, 《주역》의 효상(爻象)을 빌려 도가(道家)의 연단양생법(鍊丹養生法)을 논한 것이다. 연단술(鍊丹術)을 논하는 서적의 비조로 일컬어지며, 송대(宋代) 이학(理學)에도 영향을 미쳤다.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ㆍ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 장안영 안동교 이덕현 (공역) | 2019
입재집 제7권 / 시(詩)
정창해 란 에 대한 만시〔輓鄭滄海 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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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기이한 기상을 이 어른에게 모아 주었으니 / 天將奇氣鍾斯翁
성격의 괴벽함이 어찌 세속 사람과 같으랴 / 性癖何曾與俗同
천지의 만사에 마음에 두지 않았고 / 萬事乾坤心不管
일생토록 산수에 발자취를 둠이 무궁하였네 / 一生山海跡無窮
짐 꾸러미는 간략하고 노새는 달빛에 우는데 / 行裝脫略驢嘶月
신세는 표표히 해오라기가 바람을 좇듯 하였네 / 身世飄颻鷺逐風
국토를 그리는 것을 아직 완료하지 못한 채 / 畫得方輿猶未了
홀연히 푸른 구름 속으로 돌아갔구나 / 倐然歸去碧雲中
[주-D001] 정창해(鄭滄海) : 정란(鄭瀾, 1725~1791).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유관(幼觀), 호는 창해거사(滄海居士)로 군위에 거주하였다. 신유한(申維翰)의 문인이다. 30세부터 유람을 시작하여 금강산과 백두산 등 전국을 유람하며 전국 지도를 그리려고 하였다. 최북(崔北), 강세황(姜世晃), 김홍도(金弘道), 김응환(金應煥) 등과 교유하고, 금강산을 같이 등반한 후 자신의 모습을 그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8
청노새 타고 산천 누비는 조선의 산악인 정란
20세기 이전에 여행가로 손꼽을 만한 사람에는 누가 있을까? 대부분 김정호 같은 지도학자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그도 지도를 제작하기 위한 목적에서 여행을 한 사람이다. 진정으로 여행을 자신의 삶으로 생각하고 즐긴 여행가는 누구일까? 18세기 후반에 창해일사滄海逸士란 호를 사용한 정란鄭瀾, 1725~1791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종縱으로는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횡橫으로는 대동강에서 금강산까지, 산천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천생 여행가였다. 정란은 경상도 군위 사람으로 동래 정씨 명문가 출신이었다. 고조부 이래로 큰 벼슬을 하지는 못했지만 사대부가의 지체를 이어간 가문 출신이었다. 이런 사대부가 젊은이가 전국토를 샅샅이 뒤지는 여행가가 된 동기는 무엇일까? 그도 처음에는 다른 사대부들처럼 경서와 문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스승은 당시 경상도가 배출한 최고의 문사인 신유한申維翰이었다. 그의 문하에서 문학을 공부하던 정란은 나이 서른에 접어들자 공부를 접고 여행길을 떠났다. 스승 신유한이 죽은 지 3년 뒤의 일이다. 정란은 세속적 성공에 관심이 없었고, 주어진 틀에 안착하여 살기를 거부했다. 기질적으로 자유분방한 정신의 소유자인 그는 온통 과거에 눈이 멀고, 이욕利慾에 이전투구泥田鬪狗하는 악착같은 세상을 떠나 드넓은 세계를 동경하였다. 여행가로서의 삶은 그에게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당시 누구도 선택하지 않은 인생이었다. [b]사람들은 제 둥지만 돌아보는 새와 같이 떠나려다가도 다시 망설이며 빙빙 돌건만 그대는 절세絶世의 용맹함 지녀서 단칼에 세상에 묵인 그물 끊고 벗어났네. 수만의 베개 위에서 함께 코를 골며 한창 부귀를 꿈꾸는 사람들, 그대 등반한단 말을 듣고선 되레 흉보네. “무리와 다른 짓을 하는군.”[/b] 이용휴李用休가 백두산으로 떠나는 정란을 배웅하며 써 준 연작시의 일부다. 부귀와 공명을 위해 주어진 인생을 꾸려가는 것이 조선조 선비의 길이었지만 정란의 인생목표는 달랐다. 정란에게 여행은 무엇이었을까? 채제공은 여행에 몰두한 정란을 두고 “천하 만물 어떠한 것도 그의 즐거움과 바꿀 수 없다.”고 평했다. 여행의 즐거움! 그것이 처자를 버리고, 벼슬도 버린 채 전국을 주유周遊한 동기이다. [b]타박타닥 먼 길 오르는 세 개의 그림자 [/b]
정란은 서른 살부터 20여년간 조선 팔도를 구석구석 탐방했다. 남으로는 낙동강, 덕유산, 속리산, 월출산, 지리산을 엿보고, 서로는 대동강을 굽어보고, 동으로는 태백산과 소백산, 금강산을 올랐다. 지리산이나 금강산을 그저 앞마당으로 간주할 만큼 조선의 산천을 돌아다녔다. 그가 여행한 행적의 백미는 백두산과 한라산의 등반이다. 쉰다섯 되던 해, 정란은 백두산과 한라산 등반계획을 세워 등반하였다. 당시 백두산은 오지 중의 오지로 등산이 아니라 탐험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였다. 개인의 의욕만으로는 오를 수 없는 산이었다. 백두산과 한라산 등반은 여행가로서 그의 삶을 완성하는 목표였다. 집을 나선 창해가 동반한 것은 청노새 한 마리, 어린 종 한 명, 보따리 하나, 이불 한 채였다. 18세기에는 명산을 등반하는 열풍이 불어 등산하는 인구가 많이 늘었다. 그들의 등산은 호사롭고 떠들썩하기 그지없었다. 친구를 불러 모으고, 때로는 기생과 악공까지 대동하며, 말을 타거나 남여뚜껑 없는 가마를 타고 산을 올랐다. 그러나 정란은 단출한 여장으로 고독하게 자연과 대면했다. 남경희의 <정창해전>에는 정란이 전국을 여행할 때 타고 다닌 청노새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충직한 청노새는 주인을 태우고 금강산을 오르고 관동팔경을 두루 구경하며 내려오다 그만 삼척 땅에서 병들어 죽었다. 정란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길가에 묻고 제문을 지어 애도했다. 그 제문은 처절하여 읽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여정을 동반한 벗 중의 벗이 바로 이 청노새였으니 그럴 법도 하다. 사람들은 청노새가 죽어 묻힌 곳을 청려동靑驢洞이라 불렀다. 그의 쓸쓸하고 지루한 여행길을 함께 한 것은 청노새 한 마리와 종 한 명이었다. 야윈 청노새를 타고 다녔다는 사실에서 그의 여행의 멋을 엿볼 수 있다. 타박타박 먼 길을 걷는 세 개의 그림자가 눈에 선하다. 자동차로 순식간에 산 바로 밑, 절 코앞까지 들이닥치는, 오늘날 여행객의 행태와는 큰 차이가 있다. [b]가정까지 포기한 산수벽山水癖 [/b]
정란은 여행가이지만 본래 시와 문장을 잘한 문인이었다. 그는 여행의 의미를 예술적으로 담는 일에도 주목하여 각지에서 산수유기를 썼고, 화가와 문장가들로부터 자신의 산행을 묘사한 그림과 글씨를 받았다. 그리고 썩어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을 지닌 ‘불후첩不朽帖’ 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또한 그는 예술적 심성의 소유자였다. 그가 교유한 화가는 강세황, 최북, 김응환, 허필 등이었다. 화가 김홍도와 맺은 인연은 특별하다. 김홍도의 그림 가운데 대표작인 <단원도檀園圖>는 사실 정란을 위해 그린 그림이다. 서른 이후 정란이 본격적으로 여행에 빠지면서 그는 세속적 성공을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가정까지도 거의 버린 듯하다. 채제공蔡濟恭은 화첩을 들고 찾아온 정란을 평하여 “처자식을 버리고 명산대천을 여행하기를 좋아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정란의 사돈인 조술도는 정란에게 “쓸쓸한 방에서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아내가 가슴을 치며 장탄식하고, 과부가 된 며느리가 벽을 등지고 몰래 한숨 쉬는 것을 생각하여” 빨리 돌아오라는 편지를 내기도 할 정도였다. 가정에 무책임한 정란을 대신한 사람은 외아들 정기동鄭箕東, 1758~1775이었다. 아들은 18세 소년 시절에 요절하였다. 소년으로 죽었으니 그에게 기록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다만 이용휴가 쓴 묘지명에 “슬프다! 산길에 사람의 발길 끊어지고 숲에 걸린 해가 저물어갈 때면 문에 기대어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들의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가정을 돌보지 않으며 여행을 즐긴 정란의 삶은 시대를 앞서는 것이었다. 성대중은 한 가지 삽화를 들어 정란이 불후의 이름을 남길 것을 예언했다. 창해옹이 일찍이 내 집을 찾았는데 손님 가운데 옛일에 해박한 사람이 있어 그를 보고 내게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자네는 이마두利馬竇를 본 적이 있는가? 저 노인이 그와 흡사하네그려!” 그 손님은 한 번도 창해옹을 본 적이 없는 분인데도 창해를 그렇게 보았다. 창해옹은 그 말을 흔쾌히 받아들이며 좋아하였다. 이마두는 천하를 두루 구경하였고, 창해옹은 동국을 두루 구경하였다. 크고 작음에서 비록 차이가 있으나 두루 구경한 점은 같다. 그들의 모습이 비슷한 것이 마땅하다. 진실 여부는 판명하기 어렵지만 사람들은 정란의 풍모에서 마테오 리치와 같은 위대한 여행가의 모습을 찾아내었다. 정란은 여행에 인생을 바친 선비다. 온 나라 안의 어린아이들과 종들조차 그를 ‘창해선생’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대적인 개념으로 보자면 여행가, 산악인이라 이름 지어 부를 만큼 열정적 산수벽의 소유자로 18세기 문화계에 한 마니아로 기억될 인물이다. ▶글·사진_ 안대회 성균관대 문과대학 한문학과 교수
13世賜-14世蘭宗15世光輔-16世漢龍- 17世純福-18世象信-19世凝遠-20世之虎-21世行一 -22世演周-23世震瑞 -24世彦休 -25世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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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창해공(滄海公) 휘(諱) 난(瀾)은 군위출신으로 여행가로 전국을 누비며 여행중 애마(愛馬)가 죽었고 김홍도의 단원도(檀園圖)는 공를 위한 작품이었다는 것은 차음 알게 되었습니다.
창해일사(滄海逸士)공 자료가 생소하네요. 새로 등재합니다. 귀한자료 감사합니다.
군태님의 좋은정보글 잘공유하고 갑니다
청노새 타고 산천 누비는 조선의 산악인 정란의 여행기 잘 읽어 보았습니다.
등산가인 창해 정란(滄海 鄭瀾), 백두산(白頭山)에 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