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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세 노모가 목숨 걸고 먼 길 나선 사연 살아있대? 만날 수 있대? 북쪽에서 우리 큰누님인 정혜누님이 우리가족을 찾는다는 소식을 적십자를 통해 듣고 어머니가 처음 한 말씀이다. 북한에서 남쪽의 가족을 찾는 200명 명단에 정혜누님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가족이 너무나 오랜 기간 찾고 싶었던 정혜누님이 우리를 찾는다니 생사조차 모르던 그 애절함 6·25의 혼란기 때 6명의 자식을 모두 거느리기 어려워 그중 첫째아들과 위의 두 딸을 아버지의 고향인 황해도 연백으로 보내게 되었다. '엄마, 아버지로부터 떨어지기 싫어 가지 않겠다며 발버둥치는 정혜, 덕혜에게 사탕까지 사주며 달래서 억지로 큰아들 영식이 편에 보낸 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정말 미안하고 미안하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서 우리를 찾아주니 너무 너무 고맙다는 우리어머니. 그렇게 북쪽의 신청자 200명 중 남쪽 가족이 확인된 수가 162가족이라는 보도가 있었고, 그중 100가족을 선정하는 절차를 거쳤다. 언론에서 선정기준이 고령자 우선, 부모 자식 간 우선의 원칙이 있다고 하니 우리가족이 선정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워낙 고령의(96세) 연세여서 바깥출입을 삼가 하신지 거의 5년이 되었기 때문에 북한의 금강산까지 가는 일이 어머니에게는 매우 무모할 수도 있는 무리한 일이었고 그래서 이번 여행은 몹시 걱정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린 딸들을 고향으로 억지로 보낸 미안함, 우리를 찾아준 고마움을 어찌 져버릴 수 있냐며, '가다 죽더라도 간다'고 목숨을 건 여행을 하기로 마음을 먹으셨다. 96세 노모, 딸 만나러 목숨 건 금강산 방북길에 오르다 10월 29일 드디어 금강산으로 출발이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일산의 어머니를 모시고 출발하였다. 춘천, 인제, 미시령을 거쳐 약 200km를 가면서 어머니께서는 어지럽고 가슴이 답답하시다며 가끔 차에서 내리셔서 길거리에 가만히 앉아 계시다가 또 다시 출발하곤 했다. 차에 오래 앉아 가시는 것이 힘드시는가 보다. 부쩍 걱정이 된다. 오후 2시까지 도착하도록 되어있었으나 생각보다 늦게 되어 가는 도중에 여러 차례 기자들로부터 언제 오시느냐는 문의 전화가 오곤 했다. 오후 3시 30분경 설악산 하나콘도에 도착하니 기자들이 몰려온다. 사진기자에 카메라 기자 등등 많은 기자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보통 시끄러운게 아니다. 이유를 들어보니 우리어머니가 이번 상봉단의 최고령이시면서, 부모 자식 간에 상봉하는 유일한 경우란다. 그래서 자연 기자들의 관심이 되고 있었다. 이미 상봉을 위해 모여든 많은 이들에게도 어머니는 그 고령 때문에 단연 관심을 받고 계셨다. '저 어른은 딸을 만나시려고 저리 오래 살으셨구나 96세의 어머니. 60년 전에 헤어진 딸을 만나보기 위해 5년간 두문불출하던 집에서 나와 힘든 방북길도 마다하지 않고 오신 우리 어머니 오시면서 차에서 쓰러지시기도 했던 어머니가 저렇게 신나 하신다. 잃어버린 딸을 보기 위해 오래 오래 사신 우리어머니가 오늘 정말 큰 사람으로 느껴진다. 오늘 어머니가 정말 자랑스럽다. 10월 30일 오후 3시부터 상봉행사를 갖기로 되어 있어서 숙소인 외금강호텔에서 서둘러 내려왔다. 남북 간의 관계가 나빠져있는 관계로 남측CIQ(남북출입사무소) 와 북측CIQ(남북출입사무소)를 거치며 상봉단에는 전체적으로 잔뜩 긴장한 분위기가 흘렀다. 아침부터 일찍 서둘러 출발한터라 어머니는 몹시 힘들어 하셨다. 그래도 면회소로 가는 버스 안에서 어머니 얼굴엔 긴장보다는 짙은 기쁨의 표정이 배어 있었다. 면회소로 들어가 74번 테이블을 찾으니 이미 기자들이 카메라를 준비해놓고 있었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어서자 북측 상봉단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아! 60년 만에 만나는 누나!' 나로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분이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두근거리기도 하고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부모와 떨어지고 졸지에 고아가 된 누님이 얼마나 애절한 세월을 보냈는지, 어린 동생 덕혜와 어린 자매 둘이서 어떻게 살아 왔는지, 어떻게 그 역경을 헤쳐 왔는지 그 흔적들이라도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나도 이런 정도인데 어머니는 어쩔까? 어머니의 얼굴을 살펴본다. 아무 말씀도 없이 무표정으로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그 심정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북측 상봉단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아! 저기 정혜다!" 큰형인 영식형은 낮은 목소리로 정혜누님을 금방 알아보고 있었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던 영식형이 바로 알아 본 것이다. 이게 혈육인가 보다. 정혜누님은 기자단 중 우리가족 전담마크맨인 내일신문 조승호 기자와 함께 오고 있었다. 정혜누나가 엄마 앞에, 그리고 우리 형제 앞으로 환한 얼굴로 다가 왔다. 60년 만에 모녀 간의 재회의 출발은 서로 끌어안으며 시작 되었다. 상봉장 여기저기서 큰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60년만의 재회가 사람들의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고 있었다. 상봉장에는 이제 막 만난 가족들이 끌어안고, 볼을 부비고, 울며 60년간의 한을 쏟아내느라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잠깐 어머니와 영식형을 번갈아 끌어안은 누님은 '우리 울지 맙시다'하며 자세를 고친다. 그리고 바로 누님은 그동안 받은 훈장과 각종 표창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붉은 천위에 한눈에 보아도 호화롭게 보이는 각종훈장 20여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훈장 천을 펼치면서 정혜누님은 '나는 이악스럽고 열심히 살아 이렇게 훌륭하게 살았다'며 자랑스러운 얼굴을 한다. 부모와 졸지에 헤어진 정혜, 덕혜누님이 어떻게 살아 왔을까 하는 궁금증이 많은 부분 해결되고 있었다. 소아리 중학교 5년 마치고 재령경재 전문학교 4년을 마치고, 해주공업대학에서 4년 6개월 공부하고 지금은 연안군 직매점 지배인으로 현재까지 25년간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전에는 은행을 다녔다고 설명하는 모습에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가득차 있는 모습이었다. 한마디로 차돌과 같이 단단하게 단련되어 있는 누님 그리고 준비해온 가족사진을 꺼내 이미 명을 달리한 남편 사이에 얻은 2남2녀의 아이들을 자랑스럽게 소개해 나갔다. 또한 북에 계시는 또 다른 누님인 두 번째 덕혜누님은 황해도 재령에 있고 73세의 남편과 2남3녀의 아이들 두고 잘 살고 있다고 전한다. 참으로 다행이다. 두 누님 모두 북한에서 잘 살고 계시다니 정혜누님은 말을 이어가며 자나 깨나 한시도 아버지, 어머니, 영식오빠를 잊은 적이 없다고 눈물을 쏟는다. 처음 우리에게 "울지 맙시다" 하시던 정혜누님의 모습이 차츰 어머니를 애절하게 찾던 어렸을 때의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정혜누님의 손을 붙잡고 한손으로 누님의 손등을 두드려 가며 "너를 만나니 너무 너무 좋다" 하시고는 두 분이 다시 끌어안고 볼을 비비고 뽀뽀하기를 몇 차례 반복하고 있었다. 정혜누님은 절을 드려야 한다며 번쩍 일어나 큰절을 올린다. 60년만의 어머니에게 큰절을 올리는 정혜누님의 눈이 다시 충혈 되었다. 6·25 이후에 태어나 얼굴도 모르는 난혜누이, 천식형 그리고 나에게도 안부를 묻고 하는 일을 차근차근 물어가며 혈육을 확인해 갔다. 나도 처음 보는 누님이지만 서로 많이 닮아서인지 전혀 낯설지가 않다. 분명 다른 체제에서 살았고 생각이 많이 다름에도 우리 누나는 역시 누나다. 이내 누나로, 동생으로 정을 나누고 손잡고 있는 우리는 누가 뭐래도 형제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누나의 손이 몹시 거칠다,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나는 정혜누나의 손이 그래도 참 고맙다. 이렇게 거친 손이지만 건강하게 생존해 있고 자식들 낳아 훌륭하게 가정을 꾸렸으며 황해도에 남아 있던 늙으신 친척들의 뒷바라지를 다하며 가장으로서 역할을 다한 누님이 너무도 자랑스럽다. 정말 그 거친 손이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어느덧 약속된 시간이 모두 지났다. 오후 5시경 사회자가 상봉을 중단해 줄 것을 알렸고 첫 번째 상봉은 그렇게 마무리 되고 있었다. 오후 6시부터는 저녁을 함께 먹는 상봉만찬이 진행 된단다. 북측 상봉단이 나가면서 정혜누님도 함께 우리의 곁을 떠났다. 긴장을 많이 했는가 보다 첫 번째 상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그렇게 힘이 없을 수 없다. 팔, 다리가 모두 쑤시고 몸살기까지 갑자기 온다. 나도 이런데 어머니는 오죽할까!! 이렇게 첫 상봉이 끝났다. 아! 저녁에는 식사도 함께 할 수 있단다. 주량, 귓불, 무좀발 닮은 게 많은 우리 형제들 아무리 오래 헤어져 있어도 형제는 형제인가 보다. 단 한번 얼굴을 보지 못했어도, 다른 형제와 이념 속에 살았어도 혈육은 역시 혈육이었다. 차츰 차츰 만남을 거듭할수록 우리 형제 간의 공통점을 우리는 하나씩 하나씩 발견해가고 있었고 그런 발견은 큰 기쁨이었다. 함께 둘러앉은 어머니와 5형제는 우선 귓불이 모두 도톰한 형상이었다. 어머니는 이를 발견하고 "어쩜 너희들의 귀 모양이 그리 똑같냐"며 감탄을 연발한다. 우리 다섯 형제는 일제히 서로 귀를 바라보고 도톰한 귓불과 동그란 귀의 생김을 확 하면서 역시 우리는 형제인 것을 기분 좋게 확인했다. 두 번째로 정혜누님의 간단치 않은 주량이 우리 형제임을 확인해 주고 있었다. 첫날 저녁 식사를 하며 정혜누님이 맥주, 소주를 여러 잔 하시길래 혹시 헤어지고 나서 무슨 실수라도 없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점심 때에 물어보니 '일없다'고 하신다. '일없다'는 말의 뜻은 '걱정 없다' '괜찮다' 는 뜻이다. 그러시면서 30도의 술을 포도주잔으로 10잔 정도를 마셔도 끄떡없다고 취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우리 3형제는 명절날 둘러앉으면, 큰 정종병 4병 정도는 거뜬히 해치우곤 하는데 우리들의 대단한 주량과 정혜누님의 대단한 주량이 꼭 닮아 있었다. 우리는 서로 이 대단한 주량을 자랑하며 둘째 날 점심공동식사에서 왁자지껄 시원하게 술 한 잔 했다. 실로 생애 최초의 정혜누님과의 통쾌한 술자리였다. 더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 형제의 얼굴 생김과 신체구조는 아버지형과 어머니형으로 나뉜다. 아버지를 닮은 형제는 관혜누님, 천식형이고, 어머니를 닮은 형제는 영식형,인식형, 난혜누나와 나다. 이번에 상봉을 통해 정혜누님은 어머니형, 덕혜누님은 아버지형이었다. 그런데 어머니측의 신체구조를 결정적인 약점이 한 가지 있다. 손과 발이 도톰한 게 예쁜 형인데 발가락이 모두 다닥다닥 붙어있어 발가락 사이에 습기가 많아 무좀에 무척 취약한 형세다. 그래서 나도 군복무 시절부터 악성무좀에 무척 고생을 해왔다. 그래서 어머니형의 신체구조가 갖는 무좀 발에 관한 이야기를 정혜누님께 들려드리고 정혜누님의 사정을 물어보니 '나도 꼭 그렇다' 며 화들짝 반가워하신다. 그렇다 정혜누님은 어머니측의 얼굴생김과 신체구조를 갖고 있는 형상이며 무좀발의 공통점을 갖고 있는 나의 누님이 분명히 확인 되고 있었다. 아 사랑하는 우리 정혜누님. 귓불도, 주량도, 발가락도 모두 닮은 우리는 형제다 당신 관속에 넣어갈 반지, 딸에게 건네신 우리 어머니 반지를 낀 누님과 어머니 반지를 낀 누님이 어머니를 힘껏 끌어안고 있다. 어느 누구의 감시도 받지 않는 유일한 시간인 개별 상봉이 10월 31일 두번째날 오전 9시부터11시까지 이루어 졌다. 북측이 운영하고 있는 금강산호텔 715호가 우리가족의 개별 상봉 장소였다. 공개적인 면회소 상봉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우리끼리 만의 내밀한 이야기도 가능하니 말이다. 방에 누님이 들어왔다. 누님은 들어오자마자 옷매무새를 고치고 어머니께 큰절을 한다. "어머니 살아계셔서 고맙습니다." "정혜야 네가 이렇게 잘 있어서 고맙다. 우리를 이렇게 찾아주니 정말 고맙다. 너를 떼어 놓아 미안하다." 사실 정혜누님이 북측에서 상봉신청을 할 때, 정혜누님이 찾고자하는 명단에는 어머니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이미 96세가 된 어머니가 살아계실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측에서 정혜누님을 만나겠다고 보낸 명단에 어머니가 포함된 것을 알았을 때의 감동이란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정혜누님의 두 아들과 두 딸은 밤을 밝히며, 이미 평양으로 떠난 정혜누님을 쫓아와 함께 기쁨을 나누었다고 한다.
반지를 낀 누님과 가족들
아이는 입양 엄마는 자퇴 미혼모가 전염병 환자? 미혼모 후회와 눈물에 젖은 어린 엄마와 입양이 떠오르시나요? 그러나 여기, 스스로 선택해 자신의 아이를 키우는 양육 미혼모들이 있습니다. 저출산이라는 시기적 이슈 때문에 국회나 포럼 등에서 편견의 장막에 가려 투명인간 취급받던 이들을 부르기도 하지만, 현실적인 지원책은 아직 미약하기만 합니다.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을 만나 그동안 가슴에 담아뒀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지난 8일 서울 광화문 인근에 위치한 한국미혼모가족협회 사무실을 찾았다. 19층 사무실 창 밖으로 북악산과 인왕산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목경화 대표가 부드럽게 말을 건네왔다.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참고1)와 같이 사무실을 쓰고 있어요. 저희가 얹혀 지내는 거죠."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 차분하고 나직한 말소리. 참으로 온화한 인상이었다. 반갑습니다 대표님. 어떻게 협회를 만들게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2005년에 미혼모가 되었어요. 그런데 막상 아이를 낳고 나니 정부의 지원정책에 대해서 미혼모의 입장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단체가 없더군요. 시설을 통하든, 사회복지사를 통하든 꼭 누군가를 통해야 했어요. 우리도 우리 목소리를 내고, 연대하기 위해 당사자 조직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했어요." 목 대표는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한 뒤, 정부의 여러 정책을 검토해 보았다고 했다. 양육비 지원, 보육료 무료에 한부모 가정을 위한 임대주택 입주도 가능하다고 판단(참고2)하고 아이 하나 정도는 키울 수 있으려니 했단다. 그러나 아이를 낳은 후, 정작 서비스를 직접 신청해야 할 입장이 되어 대면한 현실은 달랐다고 했다. "2005년 당시 기준으로 그런 서비스 신청 자격 요건이 월 급여 80만 원 이하였어요(2010년 현재기준은 110만 원). 그때 제 급여액이 100만 원 남짓, 세금 제하면 90만 원이 조금 넘는데 신청 기준 금액이 초과되어서 그 모든 지원혜택을 신청할 수 없었어요. 한 달에 80만 원 이상은 웬만하면 받거든요. 한마디로 현실성이 없었죠." 엄마 혼자 키우면 5만원, 입양가정에는 10만원 지원 그래도 목 대표는 자신은 소득이라도 있으니 일할 수 없는 엄마들이 받으면 되겠지라며 스스로를 위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2009년 복지예산을 검토하는 과정에서였다. "원래 NGO 활동을 하며 각종 정책 비교를 많이 하는 편이었는데, 2009년 보건복지부의 입양 예산과 미혼모 예산을 비교하고는 너무 놀랐어요. 미혼모가 속하는 한부모 가정에는 양육비가 월 5만 원인데, 입양 가정에는 월 10만 원이었어요. 지원기간에도 차이가 났어요. 한부모 가정은 아동이 만 8세가 될 때까지 지원해 주는 반면, 입양 가정은 만 12세 미만까지였죠." 2010년이 되면서 한부모 가정 자녀도 만 12세 미만 까지로 연령은 동일하게 확대되었지만 양육비의 차이는 여전하다. 엄마가 직접 키우면 저소득 가정에 한해 5만 원 양육수당을 받지만, 엄마와 헤어져 다른 가정에 입양돼면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10만 원을 받는다는 것은 아동 복지에 대한 국제규범(참고3) 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목 대표는 '미혼모는 아이를 키울 수 없다'고 여기는 전반적인 사회 인식이 정부의 정책을 양육보다는 입양 지원을 우선시하게 만들었다고 봤다. 이 모든 것이 당사자의 목소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게 목 대표의 생각이다. 그럼 언제부터 결성되어 활동을 시작하셨나요? "2008년에 시작해서 조금씩 진행해 오다 2010년도에 본격적으로 사무실에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어요. 협회라는 이름을 걸고 활동한 것은 2010년부터라고 할 수 있지요." 본격적인 활동은 2010년, 올해부터였는데 공무원 교육도 하고, 언론 인터뷰도 많이 하고, 영화도 찍으시는 등 활동이 많으신 것 같아요. "신생조직인데도 불구하고 '저출산'이라는 시기적 이슈로 인해 많은 언론에서 미혼모에 관심을 가져주셨어요. 또 정부나 학회 쪽도 마찬가지고요." 지금 협회 활동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일단 협회를 정식단체로 등록하는 것이죠. 후원회원이 100명 이상 되어야 하는데, 현재는 임의단체로 활동 중이에요. 정부로부터 인증 받은 단체가 아니라고 해서 신빙성, 투명성 같은 부분들을 미심쩍어 하기도 해요. 사업계획서 등을 제출할 때 선정되는 기준에 영향이 있기도 하고, 활동 범위에 제약도 받아요. 통장도 협회 이름으로 만들 수 없어서, 회원 개인의 실명을 이용한 통장을 활용하고 있답니다." "학교 그만두고, 직장서 잘리고 미혼모가 전염병 환자인가요?" 현재 대한민국 '한부모 가정'은 약 10%에 이른다. 그러나 그에 대한 지원은 미미하다. 사진은 미혼모를 소재로 한 영화 과속스캔들 앞으로 추진하실 사업 계획으로 어떤 게 있나요? "이번에 16개 시·도의 미혼모 담당 공무원 교육을 통해 교육의 효과와 중요성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래서 내년엔 복지사 대상으로 교육을 해보고 싶고, 욕심을 내 본다면 중·고등학교를 대상으로 한 교육도 해보고 싶어요. 왜냐하면 미혼모에 대한 제일 심한 편견, 배척을 가진 곳이 바로 '학교'거든요. 선생님들 말씀인가요? "그렇죠. 임신한 학생이 학교에 다닐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자퇴 아니면 퇴학이거든요. 학생이 학업을 원하는 경우에도 일방적으로 학교를 그만두는 방향으로 유도하는데, 미혼모가 무슨 전염병 환자인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학생은 학교를 그만둬야 하고, 직장인들은 회사를 그만두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죠." 목 대표는 미국이나 호주 등지에서는 미혼모 학생들이 학교를 다니는 것을 보며 오히려 미혼모 학생의 비율이 줄었다는 보고가 있다고 주장했다. 무조건 배척하고 숨길 것이 아니라, 공개해서 학생 신분에 아이를 가진 상태로 학업과 병행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학생들이 직접 보게 되면, 힘들다는 인식과 조심해야겠다는 의식을 불러일으키게 돼 발생 비율을 더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무조건 나쁜 거다라는 생각 물론 그렇다고 어린 나에에 임신한 것이 좋은 건 아니죠. 하지만 아이의 존엄성을 묵살해 버리는 제도와 학교의 인식은 좀 없어져야 하지 않겠나 하는 뜻으로 청소년 대상 교육을 계획하고 있어요." "G20 개최국이고 경제대국인데 아직도 아이 수출해야 하나요?" 지난 2009년 6월 9일 오후 서울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린 '아이낳기 좋은세상 운동본부' 출범식에서 이명박 대통령 부부가 다문화 가정, 다자녀 가정, 입양 가정, 맞벌이 부부 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목 대표는 장애인을 위한 NGO에서 일하던 중, 사내 커플로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일반 회사보다는 편견이 덜하다 했지만 역시 그곳에서도 둘 다 계속 근무하기는 곤란하니 어느 한쪽이 그만두기를 종용했다. 다른 책임은 지지 않았지만 남자 친구가 먼저 사표를 써준 것 하나는 고맙다고 했다. 그 덕분에 그녀는 아이를 낳고도 계속 직장을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회사의 여직원들과 관계 기관 사람들로부터 무수한 낙태와 입양 권유를 받는 등 차별적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사회의 많은 이들은 미혼모들이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해요. 미혼모는 아이를 낙태해야 하고, 만약 낙태할 수 있는 시기가 지났다면, 아이는 낳아서 입양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돌이켜보면 입양의 역사는 한국전쟁 이후 가난한 형편에 아이 하나 건사할 여력도 없던 그 시절, 아이를 위해서는 능력 있는 양부모가 키워주는 것이 더 좋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지면서 시작됐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1980~90년대를 전후할 즈음엔 어마어마한 규모의 입양산업으로까지 확대됐다. "예전에야 그렇다고 쳐요. 그런데 이제는 OECD 12위 경제대국이고 G20 회의도 개최하는 나라잖아요. 그런 나라가 아동수출국으로 1~3위를 왔다 갔다 해야 하나요? 아직까지도 우리나라가 내 아이 하나 키울 수 없는 그런 곳인가요?" '생모증후군'이라고 아시나요? EBS 지식채널에 <어떤 외출>이라는 영상이 있는데, 입양 보낸 엄마의 우울증 이야기예요. 아이의 생일날, 길가다 듣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엄마가 미쳐 버린대요.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그 심정을 알까요?" 어느새 목 대표의 목소리가 떨리고 눈가가 촉촉해졌다. "해외 입양아들을 여럿 만나 봤지만 모두들 가슴에 구멍이 하나씩 뻥 뚫려 있었고요. 입양기관에 보냈다고 해서 100% 입양되는 것도 아니에요. 입양 갔다가도 적응기간인 6개월 전에 입양부모가 달리 결정하면 다시 기관으로 돌아오게 돼요. 그건 파양도 아니에요. 아이가 장난감도 아니고….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입양되지 않은 아이들은 보호시설, 즉 고아원으로 가게 되는 거죠." 입양에 관련된 그 모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알려준 상태에서 미혼모에게 결정을 하도록 해야지, 지금처럼 입양이 최선인 것처럼 독려하는 사회 분위기는 입양기관과 입양부모, 책임지지 않는 미혼부에게만 도움이 될 뿐 생모와 아이에게는 결코 최선이 아니라고 목 대표는 힘주어 말했다. "사회 편견 속에서 아이 지키며 키우는데 국가에서 상을 줘야죠" 취재를 시작하기 전까지 나 역시 이 땅의 미혼모에게는 입양이 최선이라 여겼다. 텔레비전으로 어쩌다 보게 되는 양육 미혼모의 사연은 하나 같이 가슴을 시리게 하는 얘기뿐이었다. 일하느라 아이는 종일 어린이집에 맡기고 주말에만 잠시 데리고 있으면서도 보일러를 틀지 못해 한겨울에 옷을 있는 대로 껴입고 부둥켜 안고 자고, 라면에 달걀 하나 넣어 끓여 먹이는 것도 부담스러워하는 젊은 엄마 이야기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던가. 그러나 이제 미혼모의 발생 양태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결혼연령이 높아지고 여성의 사회활동이 일반화되면서 자신의 일을 가진 미혼 여성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었을 때 양육을 선택하는 비율이 늘어나는 추세다. 그들이 단지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가졌다고 해서 그녀를 직장에서 내치거나 혼자 아이를 기른다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은 20~30년 전 상황에서 비롯된 시각일 뿐인 것이다. "누구든지 미혼모가 될 가능성이 있어요. 합법적으로 혼인하지 않고 아이를 키우는 사람은 누구나 미혼모죠. 우리들은 그저 아이를 키우는 여성가장일 뿐이에요. 이 사회적 편견 속에서 자기 아이를 스스로 지키면서 키우는데 국가에서 상을 줘야죠. 올해 초 유러피언드림 프랑스 취재에서 만났던 당당한 미혼모 니꼴이 떠오른다. 시청 공무원으로 아이가 생긴 후 직장 동료의 배려와 국가 보조금으로 혼자 살 때보다 더 살 만하다며 빙그레 웃던 그녀 목 대표와 협회회원들은 그 기사를 보며 "프랑스로 이민 가고 싶다"고 서로 얘기했다 한다. 당장 그렇게 변할 수는 없더라도 조금이라도 상황이 달라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나는 기사를 쓰고, 독자는 이 글을 읽으며 미혼모의 상황을 인식하고 생각을 달리하게 된다면 일단 작은 성공의 시작이다. 나와 당신의 자그마한 관심, 그것이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원동력이기에
뒷차가 하도 빵빵 갓길로 피했어요 '959전960기' 면허 딴 차사순 할머니 초보 1년간 사고 4번 "더 잘해야죠" "초보 운전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요." 지난해 5월 960차례 도전 끝에 운전면허증을 따내 '959전 960기 신화'를 쓴 차사순(70·사진·전북 완주군 소양면) 할머니가 면허증 취득 1년을 맞아 그동안 운전하면서 겪은 에피소드를 털어놨다. 차 할머니는 "운전하다가 뒤차가 하도 빵빵거려서 갓길에서 쉬었다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며 "아직 우리 사회가 초보 운전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것 같다"고 멋쩍게 웃었다. 그는 지난해 8월 한 자동차회사의 광고모델로 나서 받은 승용차를 타고 있지만 지금껏 네 번이나 교통사고를 냈다. 다행히 모두 인명피해는 없었다. 지난해 11월에는 집 근처에서 주차하려고 후진 기어를 넣으려 했으나 순간 착각해 운행 기어를 넣는 바람에 벽을 들이받아 수백만원의 차량 수리비가 나왔다. 감나무를 정면으로 들이받는 아찔한 사고도 경험했다. 잦은 사고 때문에 단골 공업사까지 생겼다. 차 할머니의 안전을 걱정한 자녀들은 '풀옵션'으로 운전자 보험을 들어놨지만 아직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다. 차 할머니는 "처음엔 자신있게 운전했으나 자꾸 사고가 나고 다른 운전자들이 싫은 소리를 하니까 위축되는 건 사실"이라며 "그러나 사고가 나면 날수록 운전을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밤마다 마음속으로 운전연습을 한다"고 말했다. 그는 "평생의 목표이자 소원이던 운전을 시작했으며 앞으로는 빵 만드는 기술을 배워 손자들에게 직접 만든 빵을 선물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2005년 4월부터 운전면허증 취득에 나선 차 할머니는 필기시험에서 949번이나 떨어지는 등 모두 960번의 도전 끝에 면허증을 손에 넣었다. 차 할머니의 소식은 '의지의 한국인'이란 이름으로 세계 통신사를 통해 타전되면서 뉴욕타임스 등 해외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는 국내 자동차회사 광고에도 모델로 등장해 '올해의 광고모델상'을 받았고 흰색 승용차를 선물받았다.
정혜인 어머니 공민주씨 무명가수로 밤새 야간 혜인이 뒷바라지 넉넉지 않은 살림 10년간 홀로 키워 외롭게 자란 딸 선수생활 만류도 이젠 잠자는 모습만 봐도 힘이 절로 "혜인아, 엄마 응원소리 들리지?" 무명 가수 엄마와 무명 여자축구 선수. 소설이나 드라마 속 주인공이 아니다. 바로 우리에게 뜨거운 감동을 안겨준 U-20 여자월드컵에 출전한 한 소녀의 집안 얘기다. 소녀는 어릴 적부터 또래들과 달랐다. 인형보다 장난감 총을 더 좋아했고, 순정 만화보다 운동장에서 뛰는 공놀이를 훨씬 즐겼다. 그래도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식을 미워할까. 대표팀에선 맏언니지만 스트라이커 정혜인(20·현대제철)은 어머니 공민주(50) 씨에게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예쁘고 착한 딸일 뿐이다. "조금 선머슴처럼 보이죠? 옛날에는 정말 늘씬했는데" 공 씨와 대화하는 동안, '늘씬' '날씬'이란 단어가 쉼 없이 반복됐다. 공 씨는 야간 업소에서 주로 활동하는 무명 연예인이다. 예전에는 유명 개그맨 구봉서, 배삼용, 백남봉 등과 함께 종종 코미디 공연을 함께 했지만 지금은 주로 노래를 부른다. 또한 미사리 개그 클럽에서 매니저로도 활동하고 있으니 소위 '프리랜서' 연예인이다. 살림살이는 넉넉지 않다. 수입이 많지 않아 하루 8∼9군데씩 뛰어야 한다. 저녁 6시쯤 출근해 새벽 4시나 돼야 퇴근하니, 정혜인이 합숙을 끝내고 가끔 집에 와도 자는 모습 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 씨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 바로 그 때였다. "딸이 오랜만에 집에 와서 곤히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쌓인 피로가 싹 풀리는 느낌이죠. 요즘 우리 딸이 축구하는 걸 알아서인지, '너 참 딸을 잘 키웠다'라고 칭찬해주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공 씨는 10년 째 딸을 홀로 키웠다. 2000년 혜인이 아빠와 이혼했으나 앞서 수 년 간의 별거 생활까지 합치면 '강산이 한 번 이상 바뀌는 시간'을 모녀 둘이 함께 지낸 셈이다. 그래서일까. 공 씨는 외롭게 크는 딸에게 힘든 운동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축구에 대한 집념과 열정, 재능은 숨길 수 없었다. 딸은 엄마 몰래 홍제초등학교에서 남자 선수들과 공을 찼다. 고민이 깊어질 무렵, "여자도 축구로 성공할 수 있다"고 일러준 이가 당시 오주중을 이끌었던 최인철 감독이다. 오랜 제자와 인연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시련도 많았다. 오주중-동산정보고-한양여대를 거쳐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WK리그 현대제철에 입단했으나 작년 3월 왼발 피로골절이 왔다. 하지만 재활에 성공, 다시 그라운드에 선 정혜인은 독일 무대를 누볐다. "엄마로서 부족한 게 많아요. 딸이 뛰는 시합도 많이 가지 못했죠. 가끔 가뭄에 콩 나듯 찾을 때가 있었는데, 사실 제 목소리가 엄청 크거든요. 이름 없이 '잘한다'만 외쳐도 혜인이는 '엄마가 왔다'고 알 수 있데요. 이번에도 멀리서나마 제 목소리가 전해졌으면 좋겠다.
원조 간장게장 놓고 벌인 두 자매의 '7년 전쟁'서 동생 승리 '프로 간장게장'이란 가게 상호 문제로 자매가 7년간 벌인 법정 다툼에서 법원이 "언니가 유죄"라는 판단을 내렸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5단독 서정현 판사는 "같은 상호를 사용해 자기 가게가 원조인 것처럼 꾸몄다"며 간장게장 업주 서모(61)씨가 언니(70)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언니가 동생 가게의 영업을 방해한 것이 맞다"며 언니 서씨에게 벌금 200만원을 선고했다고 2일 밝혔다. 재판부는 "언니 서씨는 국내에 널리 알려진 '프로 간장게장'이란 동생 가게 상호를 사용, 동생 가게와 자기 가게가 혼동되게 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언니 서씨는 한 스포츠신문 기자가 취재요청을 했을 때에도 자기 식당이 동생의 식당인 '프로 간장게장'인 것처럼 행세해 기사가 나가게 했다"며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방법으로 동생 식당의 업무를 방해한 점이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동생 서씨는 1980년부터 서울 잠원동에서 간장게장 장사를 시작했다. 프로야구 선수들이 자주 방문하는 등 가게가 유명세를 타자 1988년 가게 이름을 '프로 간장게장'으로 바꿨다. 이후 가게는 언론에 수차례 '맛집'으로 보도됐으며, 일본에까지 이름을 알렸다. 자매 간 갈등은 언니 서씨가 간장게장 가게를 열면서 시작됐다. 언니는 2005년 동생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30m 떨어진 곳에 'S 프로 간장게장'이란 상호로 식당을 열었고, 자기 가게가 1980년부터 장사를 한 '원조집'인 것처럼 홍보했다. 결국 2011년 동생은 언니를 고소하면서 2억원을 청구하는 민사소송도 냈다. 앞서 7월 법원은 민사소송에 대해 "앞으로 언니는 '프로 간장게장'이라는 상호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화해권고결정을 내렸다.
드라마 같은 얘기 한번 들어 보세요 남편의 바람을 용서하고 정리 한다기에 믿고 기다리던 중 남편에게 온 한통의 문자를 봤네요. 상간녀의 홀랑 벗은 몸뚱아리 나 섹쉬하지 오늘밤 이거 보구 잘자 이런 문자와 사진 한장 참 어이 없엇네요 남편과 그날밤 무지 싸웠어요 치고박고 담날 그 여자한테 전화를 햇어요 통화 하면서 다 녹음 했구요 제가 그랬죠 어떻게 애 엄마가 그런 사진을 보내냐구 그 여자 왈 자기는 협박당해서 무서워서 보내라구 하두 그래서 보냈다구 하더군요 제 남편이 너무 자기 한테 집착한다고 무섭다고 자기도 벗어나고 싶다고 그래서 그럼 방법은 3자 대면뿐이다 둘이 말이 너무 반대니 함 보구 이번에 다 정리 하자 그랫더니 좋다구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 여자 언니랑 저랑 남편 4명이 만났네요 황당한건 그여자 남편 보자마자 자기야 자기야 이러면서 앵기더군요 황당하더이다 내게 한말과 행동이 넘 다르고 그여자 언니도 거들더이다 남편도 그여자 편되서 거들더이다. 참 서럽고 내가 또 당햇구나 싶더군요 죽여 버릴라다가 간신히 참았네요. 다 필요 없구 제가 그랫죠 니 아들 학교에 니 동네에 사진 다 뿌릴테니까 어디 함 해보자구 그랫더니 지가 더 큰 소리 치더라구요 그래봤자 잡혀 가는건 나라구 초상권 침해라구 웃기고 있네 그 낮짝에도 초상권 운운하냐 그리 벗고 싶으면 창녀촌에나 기어가라구 제가 참 말도 안나오구 황당해서 차에 앉아서 시동 걸라니까 문을 확 열더니 핸들을 잡아 버리네요 그래서 한마디 했죠 그여자 언니한테 저 걸래좀 치우라고 그랬더니 달려들더이다 저 막 웃었네요. 그날 집 나왔어요 셋이 만났을때 그 여자 편들던 남편도 우습고 지 동생 그따구로 하는거 보면서 가만히 보구 있떤 그여자 언니도 우습고 이게 뭔가 싶기도 하구 괜한짓 햇나보다 하는 후회도 하고 다음날 친정 언니 데리구 남편 만나러 가서 그냥 이혼하자구 햇어여 그러자구 하더군요 그래서 양육권 위자로 다 합의 봣습니다. 그런데 더 웃기는게 오늘 아침에 저한테 그러더이다 그런일 또 생겨두 그여자 편 들수 밖에 없다구 난 마누라고 그 여자는 안보면 그만인 여자니까 이러더이다 그래서 한마디 했죠 개 잡소리 하지 말라고 평생살 마누라 편 들어야지 안보면 그만인 년 편드는 니가 또라이다 라고 했어여 이혼하자고 바락거리던 놈이 오늘 아침부터 제가 정말 변호사랑 통화 하구 이런 저런 준비 하니까 여태 살아왔는데 어떻게 이혼하냐구 주절 주절 합디다 주디를 째 버리고 싶더군요 변호사 말은 애들 학교나 동네에 사진 유포는 범죄가 되지만 그 여자 남편이나 식구들한테 보내는건 범죄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제가 어떻게 해야 될까요 남편말로는 그여자가 너무 자기한테 집착하고 각자갈길 가자고 말하면 알아 듣고 몇일 연락 안하다가 술마시면 또 보자구 연락 하구 한다구 하더라구요 이말도 진실로 들리지는 않구요 사진 문제도 그래요 니가 협박 해서 그런 사진 보냈다구 하더라 하니까 협박해서 사진찍는 년이 웃으면서 그런 사진 찍어서 보내냐구 그년 완전 또라이라구 저한테는 그러더군요 자기도 벗어나고 싶다고 첨에는 좋아서 만났는데 이젠 겁이 난다나 어쩐다나 그래서 제가 한마디 햇어여 첨에 좋아서 만났을건데 애들도 아니고 니들일에 니들이 책임을 져야지 니 책임 나한테 넘기지 마라 그말 한마디 하구 말 한마디도 안하구 있어여 이혼 변호사랑 준비 중이구요 사진은 어쩔까 생각중이네요.
지금 이 상황에 할 수 있는 일? 대학 커플로 만나 7년 연애하고 결혼 15년차 딸하나 키우고 살고 있어요. 지금남편41 저는40 이예요 나름 가정에 충실하고 성실하게 살고 있었고 너무나 믿었던 남편인데 작년에 뜸금 없는 카톡을 봤어요. 몇개월 전부터 귀가 시간이 늦고 외박도 하곤 했지만 회사가 워낙 멀고 술은좋아하지만 믿음 있게 행동하는 사람이라 의심 한번 안했는데 (제가 너무 믿은거죠) "12시간 잠적? 나 삐진다" 카톡여자는 10년전 옛날 직장여자라 저도 알고 있는 이름이였거든요.( 우리집 집들이 애기 돌잔치에도 다온) 이게 무슨뜻이야 둘이 사귀는 거야 했더니 잘 못 보낸거고. 스마트폰 바꾸면서 카톡에 떠서 카톡 몇번하긴했다고 그여자랑도 통활 했더니 자기 남친한테 보낸 건데 자기가 덜렁대다 잘못 보냈다구 죄송하다구 하더라구요. 그걸 믿고 끝냈는데 일주일뒤 여잘 만나고 있는 느낌이 나서 집에 왔을때 핸폰 빼서서 여기저기 전화해보니 전직장 회사동료들 만난거라는 거짓말이 들통나게 되었구 저한테 잘 못했다구 노래방 도우미 여자 만났다구 술술 불더라구요. 2번 따로 만났다구 미안하다구 용서해달라구 용서하기로 하고 1년이 지났어요 그 일 있은후 남편에 대한 믿음이 깨졌구 가끔 이런저런 일로 싸우기도 많이 하게 되구 제가 핸폰 몰래 검사하곤 했어요. 그러다 어제 그 카톡여와 대화한게 있는 거예요. (여태 잘 삭제해오다 못했나봐요) 우리 걸린지 1년 됐나? 딱 1년 왜? 그건 왜 물어? 그냥 우리 만2년 이네 "만 2년 선물사죠?" "그래" "커플티" 와 제가 감쪽같이 속구 너무 바보같이 이것들을 믿고 넘어간거예요. 차라리 노래방 도우미였다면 그냥 스치는 바람이겠거니 하는데 저한테 걸려 노래방도우미라고 둘러대놓곤 또 만난거잖아요. 그카톡여는 37살 결혼 안하구 혼자 산다는데 이번엔 확실한 물증을 잡아야 겠어서 피가 꺼꾸로 치솟는걸 참고 있어요. 우선 카톡내용은 제 폰에 찍어놨는데 근데 제가 할 수 있는게 없어요 그여자 전화번호는 알고 있는데 남편은 지난달에 음주단속걸려 면허 취소되서 차도 두고다녀 위치추적도 못하구 머리만 복잡하구 심장만 벌렁대구 미칠껏 같아요. 일요일 출근한다고 하곤 그여자 만났나보더라구요 카톡 내용보니 지금 전 뭘 어째야 하나요? 더 확실한 증거 나올때 까지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는데 미칠껏 같아요. 잠도 한숨 못자고 밥이 목구멍에서 넘어가질 않아 먹지도 못하겠구 둘이 같이 있는걸 붙잡고 싶단 생각만 드네요. 그래서 간통으로 고소하고 싶은 마음이치솟다가도 울딸 생각하면 지금처럼 모르는척 살까? (남편은 늘 변함없이 가정엔 충실하니) 저 어떡해야 해요? 이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그여잘 만나고 그여잔 유부남 인줄 알면서 왜 그러는 거죠? 둘이 너무 사랑하나봐요. 저도 다른여잘 사랑하는 남편 붙잡고 싶진 않아요. 근데 또 이혼하면 둘은 잘먹고 잘살꺼같아 억울하고 이런상황 전 어째야 하나요? 괴롭고 우울하고 증오스럽고 울딸 불쌍하고 미안하고 저좀 조언해주세요.
바람난 남편 개가웃겟다 매번 눈팅만하다 답답한맘에 글을 올립니다. 저희신랑이 얼마전에 나이트에 가서 바랍이 났네요 5살이나 많은 연상이랑 나이트에서 춤추고 놀며 2차노래방으로 옮겼고 그런가운데 그여자가 사람들 눈을 피해 갑자기 키스를 하더랍니다. 첨에 어떨한맘에 받아들였고 헤어진다음날 전화번호를 알게되어 전화는 신랑이 먼저해서 그다음부터 만남이 이어쩟네요 첫만남은 찻집에서 이야기를하며 자기말도 잘들어주고 모든말이 맞다해주니 편안했고 두번째만남은 친구랑나와 돈이야기를 하더랍니다. 신랑은 자기이야기가 아니니 듣고만있고 친구가 간후 인적드문 곳에 차를 세우자고 하더라네요 그러면서 슬쩍돈이야기를 하다 신랑이 무슨문제있냐고 물어보면 아니라고 하면서 키스를 하더랍니다. 그런만남이 여러번 만날때마다 돈이야기는 빠지지않았고 식사후에는 항상 인적드문 곳에 차를 세우고 그짓을 하고 신랑이 실망스러운건 차를 인적드문 곳에 세우라고 할때마다 이야기를 하는줄 알고 세웄다네요 항상 차안에서 그짓을 했는데도요 그러면서 자기는 쾌락이아닌 그여자가 이야기하는것이 좋아서 세웠다네요 이해가 가세요 저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않네요 자기는 아니라는데 왜 이해를 못하냐고 나를 더 이상하게 생각하네요 그러던중 가족여행을 가게되었고 그때도 그여자랑 카톡하고 여행뒷날 하루쉬는날 그여자랑놀러갔고 그여자가 그때 본격적으로 금액을 제시하며 친구가 급한데 현금서비스 받아서 빌려주면 안되겠냐고 하더랍니다. 그때 제가 대충 눈치채고 따지고 물으니 저를 의부증 환자취급까지 하면서요 저 졸지에 정신병자 되었네요 그다음날 다음날 또만날려다 저한테 완전히 들켰고 신랑하는말 그날 헤어질려고 만날려고 했다는말 듣고 더실망스럽고 가증스럽네요 들킨후 하는말 꽃뱀한테 걸린것같다며 작정하고 덤비는데 어떡게 피하냐고 모든 남자들이 다그런건지 그럼 만날때마다 돈이야기를 했어면 꽃뱀인줄알았을텐데 왜만남을 계속했는지 이해가 안가고 답답하네요
일부일처제의 불편한 진실 결혼을 꼭 해야 하나요? '결혼'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다. 크게 꼭 해야만 한다는 입장과 남들이 하니까 뒤쳐지지 않으려면 하는 게 좋다는 입장, 그리고 굳이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라는 입장으로 극명하게 나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평생 함께 살겠다고 선언하는 사회적 약속인 결혼은 현대사회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결혼이라는 제도는 현대사회가 정한 '일부일처제'를 유지시키는 가장 큰 역할을 한다. 하지만 여러 진화생물학자들은 이미 인간도 동물이기 때문에 다른 포유류와 마찬가지로 일부다처제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본능적 '일부다처제'를 버리고 '일부일처제'를 선택한 것일까. 여기엔 여러 동물과 다른 인간만의 생물학적 요인이 존재한다. 침팬지와 인간을 비교해보자. 침팬지는 번식기가 되면 암컷의 체외 생식기가 커다랗게 부풀면서 번식할 준비가 됐음을 널리 알리지만 인간 여성은 언제 배란을 하는지 본인 자신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아무리 남편이라도 자기 아내가 언제 배란을 하는지를 알려면 날짜를 세는 수밖에 없다. 이른바 '은폐된 배란 (concealed ovulation)'이라고 불리는 이 독특한 진화 현상이 인간으로 하여금 일부일처제를 채택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침팬지 수컷들도 여러 암컷에게 관심을 보이다가 암컷의 배란 시기를 놓칠 수 있다. 따라서 인간도 비슷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인간 남성이 택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전략을 세운 것이 바로 '결혼'이다. 결혼을 통해 한 여성과 되도록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되도록 자주 관계를 맺게 되면 여성의 배란기에 맞춰 짝짓기를 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그만큼 자신의 2세를 낳는 확률이 높아진다는 원리이다. 두번째 이유는 인간은 무력한 새끼를 낳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침팬지 아이가 나무를 탈 때 인간의 아이는 몸도 스스로 뒤척이지도 못하며 생후 1년이 돼서야 겨우 걸음마를 배울 정도로 약하게 태어난다. 따라서 이런 무기력한 아기를 키우는데 가장 효율적인 체제가 바로 일부일처제이다. 부부가 힘을 합쳐 아기를 키워야지만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조건을 가진 동물인 '새'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인간을 제외하고 부부가 함께 자식을 기르며 '일부일처제'를 지키는 대표적인 동물인 새는 약하게 태어난 자식을 암컷이나 수컷이 혼자 기르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둥지에 알을 놔둔 채 먹이를 구하러 나가는 일 또한 위험천만한 행동이기 때문에 항상 부부가 교대로 알을 품는다. 결혼과 이혼의 반복, 결국은 일부다처제! 하지만 이런 갈매기들도 인간과 같이 이혼을 할 수 있다. 그것도 성격차이로 말이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심리학과 교수 핸드(Judith Hand) 박사에 따르면 캘리포니아 바닷가의 갈매기가 네 쌍 중 한 쌍이 일년을 넘기기 무섭게 갈라서며, 그 이유가 자식을 키우는 과정에서 너무 마음이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갈매기 부부는 집안일과 바깥일을 12시간 마다 교대하는데 서로 위험한 바깥일은 덜 하려 하고 집에 더 있겠다며 버틸 경우 자주 다투고 헤어지기까지 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부부가 서로 맞지 않을 경우 이혼할 수 있으며 전세계적으로 그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혼 후 다른 이성과 재혼하는 비율이 여성보다 남성에게서 훨씬 높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결국 헤어지는 여성과 남성이 많지만 둘 중 남성의 재혼율이 높다는 것은 '일부일처제'보단 사실상 '일부다처제'의 성격이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경우를 연속일부일처제(serial monogamy)라고 불리며, 어느 특정한 순간에는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더라도 평생 여러 번 결혼을 하면 결국 일부다처제의 효과를 얻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은 20대 후반부터, 남성은 30대 초반부터 주변 사람들로부터 결혼에 대한 압박을 받는다. 이혼과 재혼이 늘면서 진정한 '일부일처제'의 의미가 흐려진 요즘, 인간 스스로 만든 '결혼'이라는 틀 안에 갇혀 스트레스 받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남자들의 유흥업소란 대체 뭔가요 안녕하세요. 얼마전에 결혼한 새댁입니다. 궁금한게 있어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신혼여행 다녀오고 얼마 안되 바로 남편이 회사사람들과 술약속이 잡혔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휴가도 끝나고 회사 나가고, 또 신혼이니까 가볍게 먹고 오라고 했습니다. 오후 6시에 나가서 8시 지나서 연락 한 번 준 후 다음날 아침까지 연락 한 통 없었습니다. 7시 넘어서야 저한테 카톡으로.. 회사 상사집에서 술 먹다 자버렸다고 말하고 정말 미안하다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남편이 집에 와서 제가 어떻게 된거냐고 화내고 따지자, 저한테 경로를 설명하더군요. 사람들이랑 밥 먹고 이차로 맥주 마시고 11시 반쯤 나와 상사집으로 가 술 먹다 기억이 끊겼다고 이상하다고 여겼지만 여러말이 오간 후 풀기로 했습니다. 다음 날 남편이 잠시 핸드폰을 놔둔후 자리를 비웠는데.. 전 날 이상한 마음을 거둘 수 없어 회사사람들과 카톡한 것을 봤습니다. 역시나 이상한 데 간 거 들켰어요? '2차 간데 아니고 빠 간거 들켰어요' '마지막 축제였어요. 이런 이야기들이 오가더라구요. 이거 말고 더 오갔는데 유추해보면 정말 이상한데 간거 아니야 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한테는 빠 이야기도 안 해놓구선 보니까 빠 가서 돈을 많이 쓴거 같더라구요. 그런데 빠가 이상한데도 아닌데, 돈 많이 썼다고 제가 그걸로 오래 갈 사람 아니거든요. 더 웃긴건 들켜서 저한테 통장 뺐겼다고 카톡으로 써놨더라구요. 어이가 없어서 저한텐 빠 갔단 말조차 안 했으면서 그리고 '2차 간데' 라는 말이 자꾸 걸리네요. 이 단어가 여러가지를 떠오르게 하잖아요.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건전한 빠가 아닌 이상한 빠도 있나요? 그리고 방석방인지 이건 정확히 뭔가요? 이건 게시글과 무관한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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