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당고택·추사고택 답사 레포트
20155741 황나윤
Ⅰ.들어가며
늘 답사라고하면 먼곳을 시간들여 가서 간김에 이곳저곳 많이 둘러보는 것을 기준으로 삼았으나 이번 답사는 충청도 예산에 위치한 곳으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어 이동시간도 덜 들었고 두곳만 들려 여유있고 진득하게 볼 수 있었단 점이 좋았다. 평소 한옥에 대한 환상이 있던 나에게 고택의 구석구석 돌아보고 직접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기회였기에 설렘이 느껴졌다.
Ⅱ.수당고택
(1) 수당기념관
수당 기념관은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선생과 수당 4대라 불리는 이충구, 이승복, 이장원선생의 애국심과 호국활동을 소개하고 수당家의 사가살 불가욕士可殺 不可辱(선비를 죽일 수 있으나 욕보일 수는 없다.)의 고귀한 정신을 널리 알리고 이를 계승하기 위해 건립한 곳이다. 수당가의 얼이나 이남규 선생의 연보와 수당가의 계보, 그들의 애국과 독립활동, 국가로부터 받은 훈장, 수당가에 전해내려오는 유물과 고문서 등이 전시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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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수당 이남규 선생
이남규 선생은 1855년 11월 3일 서울 미동에서 부친 이호직과 모친 청송심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7세가 되던 해부터는 당시 기호유림의 대표적 성리학자인 허전의 문하로 들어가
국가와 민족의 문제 해결에 힘쓰는 실학적인 학문을 배워 이후 현실인식과 위정척사적 민족의식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고 그가 독립운동가로 이름 남기는데 영향을 주었다. 학문이 뛰어났던 선생은 1875년 고종 12년에 향시인 사마시 양과에 합격하고, 1882년 정시 춘당대시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1883년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오르게 되었다. 1885년에는 홍문관교리에 임명, 부수찬, 수찬을 역임하는 등 관리의 길을 걸었다. 동학농민운동을 기회삼아 일본군대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정권을 수립했다. 이에 분노한 이남규 선생은 즉각 '청절왜소'를 올려 일제를 토벌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미 친일정권이 성립된 상태에서의 선생의 상소는 정권과 일제에게 미움을 샀고, 이남규 선생은 이후 우승지 자리에서 밀려나 외직인 영흥부사로 부임되었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일본에 대항하며 매국노를 처벌하고 정권을 되찾고자 항일운동을 주장했다. 1907년 9월 26일, 일본군이 선생이 거처하던 평정원을 포위하고 선생을 포박압송하려 하였으나 선생은 선비사 불가욕이라는 말과 함께 포박을 거부하고 스스로 가마에 올라 집을 나섰습니다. 충남 아사군 송악면 평촌리 냇가에 이른 일본군이 마지막으로 선생을 회유하려 하자 선생은 조금도 굴복하지 않고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결국 이남규 선생은 그의 아들과 가마꾼과 함께 피살되어 순국하였다.
나라를 침략해온 일제의 사악한 칼날 앞에 꿋꿋하게 절개를 지켜나가며 죽음을 맞이한 이남규 선생과 그의 아들 이충구 외에도 손자 이승복은 국내외에서 언론,정당,신간회 등의 활발한 독립활동을 전개하며 선대의 정신을 계승해갔고, 증손자 이장원 또한 6.25전쟁 때 해병장교로 원산 황토도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전사하였다. 이렇게 4대에 걸쳐 독립정신을 빛내고 활동을 실천한 수당가의 모습은 길이길이 남고 본받을 만한 모습이다.
(3) 수당고택
수당고택은 다소 소박한 모습이었다. 대문조차 제대로 갖춰있지 않았고 작은 돌에 적힌 글이 대문을 대신하였다. 여기에도 큰 뜻이 있었다. 모든 사람을 맞이한다는 그런 따뜻한 정이 담겨있었다. 직접 마루에 앉아서 설명을 들으니 색달랐다. 마루에 앉아 앞을보디 마다의 경관이 훤히 들여다 보이고 시원하고 좋았다. 또한 지혜라고 해야하나 가리고 싶을 때 내려서 가리고 훤히 들어낼 때는 올릴 수 있는 창과 같은 장치가 있었다. 앞을 향해 앉아 해가 내리쬐는 마당을 보고 있으니 평화롭고 한적한 느낌이 들었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한옥스테이를 한번 해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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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추사고택
(1) 추사 기념관
추사 김정희 선생의 드높은 서예정신과 위대한 업적을 새롭게 조명하고 후세에 남긴 작품들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전시하여 추사선생의 다양한 면모와 그 위상을 재정립하기 위해 2008년 건립되었다. 그 외에도 당대의 명필가와 중국의 유명한 명필가 등과 문자 자체에 대한 정보도 있었다.
(2) 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선생은 1786년 6월 3일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영조의 부마이신 월성위 김한신의 증손이며,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김노영에게 입양되었다.
김정희 선생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며 이름날린 서예가로 높은 벼슬에 머물렀으며 당쟁에 휩쓸려 제주도와 함경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생부인 노경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과천에서 71세의 나이로 1856년 10월 10일 작고하였다. 그저 단순한 예술가가 아니라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이고 신문화 전개를 가능하게한 실학자이며 선각자이다. 그는 북학파의 거벽으로서 청조의 고증학풍을 도입하여 학문으로 경학,금석학,문자학,사학,지리학,천문학에 이르기까지 널리 섭렵하시고 많은 사람이 알고있는 북한산 기슭에 있는 비석이 진흥왕순수비라는 것을 고증하기도 하였다. 깊은 학문과 천부의 재질을 바탕으로 시, 서, 화, 전각 등 두루 뛰어났으며 추사체로 독자일문을 열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묵란도, 묵죽도, 세한도 등이 있다.
(3) 추사 고택
추사 고택은 53칸의 양반 대갓집으로 추사 김정희 선생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다.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 사당채가 있으며 ㅁ자형의 구조이다. 사랑채는 바깥솟을대문을 들어 ㄱ자형 구조로 3칸의 온돌방을 제외하고 모두 대청마루로 되어있는데 이는 김정희 선생의 예술적 활동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추사 고택의 앞서 갔던 수당 고택과는 차이가 있었다. 소박한 수당고택과 달리 규모도 크고 단아한 느낌이 났다. 그리고 ㅁ자형 구조로 폐쇄적이면서 차분한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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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나오며
이번 답사는 체력적으로 힘들지 않고 눈이 호강하는 답사였다. 수당가를 대표하는 이남규 선생과 이름만 많이 들어봤던 추사 김정희 선생에 대해 깊이 알 수 있었다. 인물들이 크고 자란 곳에서 그들에 대해 배우니 더욱 특별했다. 특히 이남규 선생은 이번에 처음 알게되었는데 그의 항일정신과 호국활동은 매우 본받고 존경할만했다. 죽음 앞에 자신의 신념과 정신을 굽히지 않는 그의 태도는 현실을 살아가는데도 본받고 따라야하지않나싶다. 햇빛이 쨍쨍하던 날씨가 더워서 불쾌하기보다는 고택의 고풍스러운 아름다움과 주변의 경관과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과 같아서 좋았다. 한옥에 대한 새로운 생각도 갖게 되었다. 답사가 그저 지식을 쌓아가는 학습적 활동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고택의 아름다움도 같이 볼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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