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숙에게 미안했다. 그러나 그녀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관계를 지속할 수 없었다. “가기 전에 사랑해 줘요.” 허정숙이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이재영은 눈을 끔벅거렸다. 그녀가 또 원하고 있었다. 보내주기는 하되 또 사랑을 하자고 말한 것이다. 차에서의 사랑이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인가. 여자가 원하는데 거절할 수 없었다. 이재영은 허정숙과 다시 사랑을 나누었다. 이번에는 더욱 뜨겁고 격렬했다. 허정숙은 처음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이재영을 받아들이면서 소리를 지르고 몸부림을 쳤다. 이재영은 비로소 그녀를 소유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뜻밖에 욕심이 많은 여자구나.’ 이재영은 속으로 웃었다. 나츠코는 생선초밥과 유부초밥을 만들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재영은 초밥을 먹고 청주까지 마셨다. 나츠코는 식사를 하면서 조그만 카페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술을 팔겠다는 거요?” “아니요. 커피만 팔려고 해요. 서울에 몇 군데 있어요. 제과점은 맞지 않는 것 같아요.” “내가 알아보겠소.” 나츠코가 카페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나츠코는 이름을 이진자(李津子)로 바꾸었다. 나츠코는 나루터에서 낳은 아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에 이름은 그대로 두고 성만 이재영의 성을 따른 것이다. 해방이 되었으나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남자들은 대부분 돌아갔으나 한국 남자와 결혼한 일본 여자들은 남자들과 아이들 곁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식사를 한 뒤에는 목욕을 했다. 그녀가 욕실에 들어와서 이재영의 몸을 씻어 주었다. ‘일본인들은 목욕을 좋아하니….’ 나츠코와 목욕을 하는 것이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그녀와 사랑을 나누는 것은 은근해서 좋았다. 나츠코는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그에게 안겨왔다. “아아, 나는 당신이 너무 좋아요.” 나츠코가 이재영을 껴안고 단내를 뿜어댔다. “나도 나츠코가 사랑스럽소.” 이재영은 나츠코와의 사랑이 흡족했다. 이튿날 날씨는 화창했다. 이재영은 백화점으로 출근했다. “사장님, 경제가협회가 만들어지는데 참여하시죠.” 사무실에서 결재를 마치자 이철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경제가협회?” 이재영은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셨다. 창으로 보이는 남산에도 희고 붉은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봄이 완연했다. “우리나라의 재벌들이 참여하는데 사장님도 참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초대장이 와 있습니다. 제가 좀 알아 봤습니다.” 이철규가 초대장을 내밀었다.
이재영은 천천히 초대장을 살폈다. 초대장의 내용은 조국의 해방을 맞이하여 사업기반을 유리하게 조성하기 위해 협회가 필요하니 경제가협회 결성을 위해 참석을 앙망한다고 되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이 참여하는가?” “화신 박흥식, 박승직 상점 등 재벌들이 많습니다.” “그럼 가 볼까?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어서 나쁠 것은 없겠지.” 이재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차를 마신 뒤에 이철규와 함께 백화점을 둘러보았다. “부사장은 출근했나?” “양조장 일로 바쁩니다.” 부사장 변영태는 대구에서 양조장을 하고 있었다. 배급제가 실시되는 바람에 한동안 고난을 겪었으나 해방이 되면서 사업에 활기를 띠고 있었다. 대구에서 돈이 가장 많은 사람으로 꼽히고 있었고 영남 갑부였다. 땅도 경상도 일대에서 가장 많이 갖고 있었다. 만석꾼 변영태로 불리는 인물이었다. 성품이 무골호인이었다. 매국노 이완용과 먼 친척이 된다고 했다. 이재영과는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그가 나이가 많아 형님이었고 이재영이 동생이었다. 일 년에 몇 번씩 만나 대구의 요정에서 술을 마시고는 했다. 그는 양조장에서 번 돈으로 땅도 사고 학교도 설립했다. 일주일에 한 번 내지 두 번씩 서울에 올라와 백화점에 출근했다. 서울에 올라오면 이재영을 데리고 요정에 갔다. 그는 요정을 좋아했다. “사장님, 사장님 일을 돕는 비서가 있어야 합니다.” 사무실에 돌아왔을 때 이철규가 말했다. “여직원이 있지 않나?” “여직원은 커피나 끓이고 전화나 받지 사장님을 보좌할 수 없습니다. 사장님을 보좌할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보좌하는 사람이 진짜 비서입니다. 제가 좋은 사람을 뽑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이재영은 이철규와 함께 백화점을 둘러보았다. 백화점의 상품 진열과 영업 준비를 살핀 뒤에 낙원동에 있는 요정 오진암으로 갔다. 조계사 뒤의 안국동과 낙원동에는 요리집과 요정이 많았다.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요정도 이제는 모두 조선인들이 경영하고 있었다. 오진암에는 이미 많은 사업가들이 모여 있었다. 경제가협회 모임을 주도하는 사람은 흥진방직 사장이었고 일처리는 전무라는 사람이 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재영과 이철규에게 자리를 배정해 주었다. 이재영은 충주 제사공장 사장과 평양에서 온 창학석탄 사장의 가운데에 앉았다. 제사공장 사장의 이름은 최명진이었고 석탄공장 사장 이름은 오진행이었다. 오진행은 중절모자에 두루마기 차림이었고 최명진은 양복 차림이었다. 오진행은 반백의 신사였으나 최명진은 몸이 뚱뚱하고 대머리였다. “평양은 소련군이 군정을 하고 있고 공산당이 인민위원회를 설치하고 있습니다.” 인사를 나누자 오진행이 근심이 많은 표정으로 이재영에게 말했다. “이북에도 나라를 세운답니까?” 글:이수광 그림:김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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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보았읍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요~~~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