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6: 1-7
출애굽기 32:7-10
민수기 14:11-12
찬양: 나의 피난처 예수 의지해요.
지난 주일에
힐링코드 기도문을 소개했는데요, 이 기도문은 저자들의 풍부한 임상효과를 가진 기도문입니다.
주께서 이 기도를 통해 놀랍게 역사하셔서
많은 기적적인 치유들이 일어났습니다.
꼭 활용해보시길 빕니다.
그리고 몇 주 전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우리 수준에서 우리를 상대하신다는 사실의 영적 의미에 대해,
두 주간에 걸쳐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놀라운 겸손과 사랑에서 우러나온 행동입니다.
우리를 하나님 다음 수준으로 높여주시기 위해서요.
그토록 우리를 존귀하게 높여주기 원하시는 주님의 이 겸손과 사랑의 깊이는,
우리 인간의 두뇌로도, 가슴으로도 측량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주님은 자신을 그토록 낮추시기 때문에
우리를 상대하실 때 자기백성의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시는 것처럼
종종 말씀하십니다.
또한, 우리의 모든 고통과 고난에 주님이 친히 동참하시며 이것을 다 경험하십니다.
이처럼 주님이 자신을 낮추시는 것은,
사실 주님의 놀라운 지혜와 계획에서 나온 것이며,
우리는 그 주님을 믿고 신뢰하고 따라가면 됩니다.
이와같은 주님의 낮아지심과 관련해,
오늘은 인간 창조와 인류경영 가운데서,
특히 택한 백성을 경영하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큰 곤경과 아픔과 눈물을 겪는지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아보려고 합니다.
그 일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님의 아픔의 눈물을 생각하면
우리는 울지 않을 수 없고,
우리 주님, 우리 아버지를 기쁘게 하려고 애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이지,
우리로 인한, 우리를 위한, 주님의 그 모든 노고와 고통과 아픔과 슬픔은
우리의 찬양을 억만년, 영원토록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주님이 억지로 찬양받고 싶어 우리를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43:21.
우리를 지으신 후
우리가 주를 찬양할 수 밖에 없는 엄청난 아픔의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습니다.
1.
"오직 그[하나님]만이 불사不死[죽지않음]를 지니고" 계십니다.
딤전 6:16
천사도 죽는 단 말입니까?
사도의 말은, 하나님만이 사멸할 수 없는 영원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천사도 인간의 영혼도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사나 우리는 모두 피조물이므로
하나님이 그 생명을 거두시면 모두 무無로 돌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
그런 불사의 하나님이 죽고 싶어하실 수 있을까요?
불가능하겠죠?
지난 주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종종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을 당하셨다고 이야기했죠.
주님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으로 사셨으니까,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통을 다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후,
특히 자기 백성을 지으신 후
인간적으로 표현해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고 고통스러운, 질투의 분노를 느끼신 때는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성경에 그 사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읽었듯이 노아 홍수 때,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때 2차례에 걸쳐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타락하자,
하나님은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고 고통스러워 도무지 견디고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노아 시대에 하나님은,
그 고통을 참지 못한 나머지(?) 근심하고 한탄하고 후회하시며 전인류를 멸절시키셨던 것입니다.
우리 상식으로 생각해보면,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모두 멸망시키려면 왜 만들어요?
그러나 하나님께는 말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양육하실 때도, 그들은 두 차례에 걸쳐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첫째, 모세가 시내산상에서 40일동안 금식기도를하며 율법을 받을 때 금송아지 우상 숭배를 저질렀고,
둘째, 가나안땅 진입 직전, 12정탐꾼의 보고를 받고
하나님을 불신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울며불며 난리쳤습니다.
이 우상숭배와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의 불같은 질투심이 폭발해
(인간적으로) 죽고 싶을 정도의 엄청난 분노 가운데 그들을 모조리 죽이려 했습니다.
다행히도 두 번 다 모세의 지혜로운 중보기도로 그들은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실은 주님이 그들을 일부러 살려주려고
모세와 상의해, 모세의 중보기도를 유도하신 것입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마워
(노아가 만일 모세처럼 하나님께 하나님의 아들들을 멸망시키지 말아달라고
눈물로 중보기도를 올렸다면,
주님이 들어주셨을까요?
쓸데없는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2.
옛 시대 내내 그토록 큰 아픔을 겪으시다가,
인간적으로 말해,
우리 주님은 자신이 직접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이 되어 죽기로 작정하십니다.
물론 이 작정은 창세 전에 이루어졌다고 사도는 말합니다.
그러나 또한 시간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를 창세 전에 선택하신 하나님이,
또한 우리가 태어난 후 우리의 시간 속에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구원하셨듯이 말이죠.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서 나온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무한한 아픔, 인간적인 표현으로 죽고 싶은 아픔에서 나온 결정임을
우리는 알아채야 합니다.
하나님은 죽으실 수가 없지만,
그 놀라운 자비와 사랑 때문에, 우리 인간을 차마 다 멸망시키실 수가 없어서,
주님은 자신이 친히 죽기로 작정하십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 인간수준으로 한없이 낮추셨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그런 결정의 배후에 숨은, 주님의 무한한 아픔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뭐가 부족해서, 그런 아픔을 겪어야 합니까?
뭐가 부족해, 인간을 창조하시고,
사서 고생을 하셔야 합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은 스스로도 무한히 행복하고 만족하셨습니다.
아무 부족함이 없는, 완전충만, 완전행복, 완전무결 상태에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적인 표현으로,
사서 고생을 하시고자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살고 싶어 하셨던 거죠.
그 사랑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 우리도 아버지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찬양: 거기서 우리 영원히 내 아버지 함께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그토록 사서 고생을 하신 것은,
전에도 말했듯이,
우리 인간에게 자신의 그 놀랍고도 기이하고도 완전한 행복과 부요와 권세와 모든 영광을
나누어주어,
그것을 우리와 함께 세세토록 누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그 놀라운 선물들을 주실 때,
하나님 자신이 아무런 고통 없이, 쉽게 주실 수도 있었지만,
굳이 자신이 무한한 아픔과 죽음을 경험하시고 그 대가로 주시는 쪽을 선택하셨습니다.
주 하나님의 능력은,
이것을 단시간에도 이룰 수 있고,
돌멩이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지만,
일부러, 인간 수준으로 낮아지셔서 고생, 고생하는 쪽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모릅니다.
단지 한없는 사랑과 겸손 때문이라는 것 외에는.
하나님 자신의 속성, 사랑과 겸손이
하나님을 그런 상태로 내몬(?)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찬양:
나 위하여 십자가의 중한 고통 받으사.
3.
그리하여 알다시피,
우리 주님,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께서는
친히 인간의 모습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이사야 9:6
모든 고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그 어떤 사람도 겪을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의 극치였습니다.
십자가 상의 죽음 자체는,
십자가상 처형을 당한 수많은 로마 죄수들이 공통적으로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고 겪으신 그 사랑의 슬픔과 아픔과 고통과 공포는
어느 인간도 경험하지 못한 유일무이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지옥의 처절함을 능가하는 것이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찬양: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4.
아, 그토록 큰 사랑으로 그토록 엄청난 고난을 겪으신 우리 주님이
지금도 얼마나 노심초사하시는지,
그 엄청난 질투심으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를 위해 얼마나 애쓰시는지,
우리의 영원한 복지를 위해 헤아릴 수 없는 배려로 얼마나 우릴 위하시는지,
시편 40:5,
얼마나 놀라운 눈물과 고통 속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우리가 안다면,
우리는 스랍 천사들처럼 날마다 시간마다 분초마다 찬양을 쉴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그 아픔은 당연히 우리를 향한 엄청난 사랑과 질투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주님이 질투심을 전혀 느끼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삶을 산 인생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주 예수님만을 제외하고.
모세도, 엘리야도, 요나도, 사도들도 모두 불완전한 인간들이었으니까요.
찬양: 아버지 찬양, 아버지 찬양, 아버지를 찬양하리, 아버지 찬양
5.
그럼에도 한편으로 우리 주님은, 한없는 행복과 기쁨과 부요와 영광 가운데 계십니다.
이 반대감정 병존, ambivalence를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쁨과 행복은,
하나님 자신의 모든 슬픔과 아픔을 상쇄하고, 뒤덮어버리고, 영원히 없애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신의 이 기쁨과 행복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시며
경험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기쁘든지 슬프든지,
날마다 주님을 찬양합시다.
주님의 눈물과 아픔을 생각하면, 우리는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나 사회적으로 철이 들어야 하듯이,
신앙적인 면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철이 들어야 합니다.
철이든 신앙이 좋은 신앙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아픔과 마음과 사랑과 배려를 알고 깊이 신뢰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
철든 신앙입니다.
철든 자녀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철든 학생은 선생님의 가르침을 잘 따르며
철든 남편과 아내는 배우자를 아끼고 사랑할 줄 알 듯이,
철든 신앙인은 하나님 아버지를 깊이 사랑하며 찬양하며
기쁘게 할 줄 압니다.
찬양: 변찮는 주님의 사랑과...
샬롬.
2023. 9. 17. 초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