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어느 봄날 이었다. 휴대폰에 모르는 전화번호가 떴다. 뜻밖에도 전화를 건 사람은 거의 1년 전 tv 등산 관련 프로그램 촬영차 야쿠시마를 같이 다녀 온 영화배우 손병호씨였다. 야쿠시마에 촬영을 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는데 만나서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1년 만에 통화를 한 손병호씨가 반갑기도 하고 야쿠시마 촬영이라는 말이 반가워서 약속을 잡았다. 약속장소에는 손병호씨와 함께 잘 생긴 청년이 먼저 나와 있었는데, 그가 바로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영화 '오직 그대만' 의 영화감독 송일곤이었다. 그렇게 야쿠시마를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영화 ‘시간의 숲’ 촬영은 시작되었다.
영화 시간의 숲의 줄거리는 일상에 지친 배우 박용우가 야쿠시마에서 열흘간의 여행을 통해서 10가지의 숙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여행의 동반자로서 일본인 여배우 다카기리나가 출연하며 두 사람은 야쿠시마의 숲과 공기, 야쿠시마의 사람, 그리고 죠몬스기와의 만남을 통하여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받은 내면을 치유해 간다는 내용이다. 영화에는 야쿠시마에 관련한 여러가지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야쿠시마의 민화에 전해 오는 야마히메(山姫)에 관한 것도 있다. 야마히메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야쿠시마 숲의 정령이라고도 하는데 숲 속에서 야마히메를 만나면 먼저 웃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피를 다 빨려서 죽음에 이른다고 한다. 숲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들의 무분별한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모노노케히메”도 이 “야마히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또 다른 영화 장면중에 야쿠시마의 자연을 노래하는 그룹 빅밴드의 연주장면이 나오는데 그 중에는 곡명이"사슴2만, 원숭이2만, 사람2만”이라는 노래가 있다.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 동물들과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며,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는 야쿠시마의 정신과 의미를 알려주는 노래이다. 그런데 야쿠시마가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후에 늘어나는 관광객으로 인하여 자연환경이 점차 훼손되어 이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다음의 기사가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야쿠시마 관광인가? 보호인가?> 동행한 산악가이드 기노시타상이 말했다. "세계자연유산이라고 하지만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습니다." 목제 등산로는 관광진흥과 자연보호라고 하는 상반된 목표의 양립을 추구해 온 섬을 상징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야쿠시마쵸(町) 사무소에 의하면 2012년에 섬을 방문한 사람은 30만명. 세계유산등록시점의 1.5배이다. 작년에 죠몬스기를 찾은 사람은 10년 전의 2배인 8만4천명이었다. 야쿠시마쵸에서 2011년에 죠몬스기 견학자수를 제한하는 조례를 제안했지만 지방의회에서 부결되어, 검토중이던 입산료와 입도세 도입에 관한 논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논의가 지지부진한 배경에는 과당경쟁에 고충을 겪고 있는 관광업계의 반발이 한 몫을 하고 있다. 섬의 자연을 계속해서 촬영해온 사진가인 히게타씨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된 지 20년이 된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공생의 방법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할 시점이다" 라고. 섬의 자연과 문화를 배우기 위해 ‘환경코스’를 개설한 야쿠시마고교에 들렀다. 3학년생인 우치다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향이 세계자연유산인 것은 도민의 자랑이다. 이것을 잊지 말고 필사적으로 논의해 가면 지혜는 반드시 나온다." 젊은이의 말에 세계자연유산의 섬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본 듯한 기분이다. <2013년 10월 21일 서일본신문>
야쿠시마의 존재가 한국에 알려지게 된 또 하나의 계기는 소설 "흑과 다의 환상" 이다. 일본의 인기 미스터리소설 작가인 온다리쿠(恩田陸)가 야쿠시마를 배경으로 쓴 소설로서 20년 가까이 친구사이로 지내온, 이제 곧 40살이 되는 4명의 주인공이 며칠동안 함께 숲을 거닐며, 각자 자신의 어두운 과거와 마주하고 화해해 간다는 내용이다.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되면서 소설을 읽은 독자들의 야쿠시마 방문이 늘었다고 한다. 영화감독 송일곤도 '흑과 다의 환상'(黒と茶の幻想)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고 했다.
현지 코디네이터로 영화 촬영에 참여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시인 야마오산세이의 생가를 방문하여 그의 부인 하루미씨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추억이다. 야마오산세이(山尾三省)는 1938년에 도쿄에서 태어나 현대문명에 대항하여 자연과 하나가 되기를 꿈꾸는 대안 문화 공동체를 시작하였으며, 1977년에는 온 가족이 야쿠시마의 시라코(白川 ) 마을로 이사하였다. 이곳에서 버려진 마을을 다시 세우며, 그곳의 산과 바다, 그리고 그 안의 모든 생명체를 스승으로 삼아서 구도자로서의 삶을 사는 한편 농사일 틈틈이 시와 글을 쓰는 문필활동을 하다가 2001년에 운명하였다. 사슴 같은 눈망울로 담담하게 생전의 야마오산세이 시인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려주던 하루미씨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시라코마을 주민회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나그네를 위한 숙소도 있다고 하는데 언젠가 꼭 한번 들러서 천천히 머물면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 시인의 마음을 느껴보고 싶다.
야쿠시마가 생각날 때면 야마오 산세이의 시를 읽으며, 야쿠시마의 숲을 떠 올려 본다. “ 왜 너는 도쿄를 버리고 이런 섬에 왔느냐고 섬 사람들이 수도 없이 물었다 여기에는 바다도 있고 산도 있고 무엇보다도 수령 7천 2백 년이나 된다는 죠몬 삼나무가 이 섬의 산 속에 절로 나서 자라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지만 그것은 정말 그랬다 죠몬 삼나무의 영혼이 이 약하고 가난하고 자아와 욕망만이 비대해진 나를 이 섬에 와서 다시 시작해 보라고 불러 주었던 것이다 <’왜-아버지에게‘ 시 중에서> 여주인공 다카기 리나씨는 얼마 전 한국인 방송관계자와 결혼을 해서 뉴스에 보도되었다. 밝고 아름다운 그녀가 한일간의 우호를 돈독히 하는데 좋은 역할을 하길 기대해 본다
지금까지 10여 년간 수 십 차례 야쿠시마를 방문하였지만 이 때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굉장히 들떠 있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왜 그랬는지 의문이다. 영화배우와 함께 한다는 사실 때문에? , 영화제작에 참여한다는 흥분 때문에? , 현지 코디네이터를 맡고 있다는 책임감에? ,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야쿠시마와 인연을 맺고 여러 해가 지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야쿠시마의 일부가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야쿠시마가 본격적으로 한국에 알려지는 계기가 될 영화 촬영에 참여하면서, 잠시 영화인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 몸과 마음이 공중에 붕 떠 있었나 보다. 개봉결과 아주 많은 관객이 찾아 주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영화를 본 관객들의 평은 대체로 긍정적인 듯하다. 야쿠시마의 숲을 꼭 한 번 찾아보고 싶다는 반응들이 많았다고 한다. 보다 많은 분들이 야쿠시마의 숲을 통해서 시간과 기억을 잘 정리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기를 바란다. 야쿠시마의 숲은 앞으로도 그 모습 그대로 있을 테니까. |
첫댓글 오늘 당장 '흑과 다의 환상'
책부터 읽어 봐야 겠어요
제주도 사려니숲 삼나무가 생각나네요.우리도 삼나무,편백,주목 등 산에 많이 심어 힐링공간을 늘려야겠네요.
으~~~~~~ 고문수준
일본에서 현재 골칫거리인 스기 (삼나무-알러지때문). 몇천년의 역사를 이끼로 안고있는 나무자태로 압도되는듯..이끼에 감싸인 이삼천년 스기를 보는것만으로 이미 힐링!!!
가보고싶은곳 인데요 숲속이 궁금합니다 ~^^
죠몬스기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야쿠시마 정보, 감사합니다^^
유익한 정보, 고맙습니다.
저 곳에서 천년이 넘는 삼나무 냄새만 맡고 와도 힐링이 될 것 같습니다.
언젠가~~죠몬스기 만나러 가야겠네요.
캘리포니아 요세미티공원의 삼나무숲과 비교해보고싶네요.지름이 두팔을 벌린 거리보다 더 큰 나무들이 즐비한 신비스러운 곳이리라 믿어요.계곡의 물도 많이 흐르고 귀신도 나올 것같은 곳으로 심신을 편하게 해줄 것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