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쓰기 상상 테마 4
Daum카페 https://cafe.daum.net/sangjupoet/
고급문장수업 - (408) 시 쓰기 상상 테마 3 - ③ 부품 또는 도구로 상상하며 시 쓰기/
중앙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교수 하린
③ ‘○○의 세계’들로 상상하며 시 쓰기
ⓐ ‘○○의 세계’를 상상에 적용할 때
어떤 세계는 익숙하지만 어떤 세계는 낯설다. 물의 세계, 불의 세계, 꿈의 세계, 어린이의 세계, 어른의 세계. 웃음의 세계, 울음의 세계는 많이 들어본 세계이지만, 기억이 없는 저수지의 세계, 뜨거운 얼음의 세계, 꿈을 벗어난 꿈의 세계, 어른만 모르는 어른의 세계. 어른을 뒤집어쓴 어린이의 세계는 묘한 느낌을 풀기는 낯선 세계다. 이렇게 1차원적인 세계를 다른 방향으로 뒤틀거나 이질적인 것을 결합하면 익숙함을 벗어난 나만의 세계를 가질 수 있다.
다음에 제시한 세계들도 바로 그런 세계들이다. 허무의 세계, 맹인의 세계, 묵음의 세계. 마우스의 세계, 소품의 세계, 치욕의 세계, 비굴의 세계, 남겨진 것들의 세계, 만약의 세계, 웃고 있는 이별의 세계, 알약이 모르는 밤의 세계, 허공을 걸어 다니는 뿌리의 세계, 살아있는 인형들의 세계, 오른쪽을 사랑한 왼쪽의 세계, 타인을 위한 가면의 세계, 날개를 벗어난 새의 세계, 애인을 벗어난 애인의 세계, 소심한 방의 세계, 슬픔이 춤을 추는 다정의 세계 등.
필자의 시를 바탕으로 그것이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상자 속 상자의 세계
방 한가운데에 상자를 놓고
상자 속에 또 상자를 넣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한다
취급주의가 써져 있으면 좋으련만
열 때 울지 마, 열고 나서 웃지 마, 라고 써져 있으니
도대체 연인은 무엇을 보낸 걸까
돌아온 것이
베개가 기억하던 한숨이라면
옆구리가 갑자기 갖게 된 광장이라면
머뭇거릴 필요 없었을 게다
차라리 죽은 이가 죽기 이틀 전에 보낸 상자라면
심호흡을 하고 죄책감을 품에 안으면 된다
그런데 상자 안에 상자라니
감정 안에 감정이라니
내가 당신에게 보낸 건
시나 일기 같은 가벼운 것들뿐인데…
흔들고 귀를 대보면 기척이 난다
만약 돌멩이가 들어있다면
기꺼이 난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을 내어줄 것이고
음산한 분위기를 먹고 자란 음지식물이라면
식물이 화를 내도 다 받아줄 텐데
자학과 자책이 튀어나올까 봐 두렵다
아침까지 당신이 누웠던 침대에 그대로 둔다
상자와 함께 잔다
개봉을 또다시 하루 더 미룬다
―《열린시학》 2021년 가을호
<1단계> 스스로 점검하기- 메시지 분명히 하기+내 시만의 장점 찾기
필자는 어느 날 상자 속에 상자를 넣어서 보낸 사람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상자를 뜯었는데 그 속에 또 상자가 있고 어떤 암시적인 메시지가 써져 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상상을 했다.
그럴 경우 상자 속 상자와 메시지는 시를 펼쳐나가는 힘이 된다. 처음엔 상자 속 상자에 아무것도 안 써져 있는 경우를 상정했다. 그럴 경우 궁금증이 무한대로 증폭되는 장점이 있었지만 시를 노련하게 끌고 가지 않으면 이미지가 흐려지는 단점이 발생했다. 그래서 메시지가 써져 있는 경우를 상정하고 시를 전개해 나갔다. 독자들의 마음속에 선명한 심상이 자리하도록 한 것이다.
상자 속 상자라는 1차적 설정으로 인해 추론적 궁금증이 유발되게 만들었고, 묘한 문구로 인해 선명한 심상이 꼬리를 물도록 했다. 그래서 옛 애인과 관계성을 ‘구체성 + 암시성’ 상황에 놓이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이 시가 품고 있는 메시지는 이별 후 후회와 미안함 속에 놓여있는 화자의 초조한 심리 상태다.
<2단계> 객관적 상관물(현상)을 찾기+관찰과 조사 정밀하게 하기
이 시의 객관적 상관물은 당연히 상자 속 상자다. 상자는 밀봉을 했을 때 안쪽이 보이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특징을 최대한 살려서 시의 분위기와 정황을 주도하도록 했다. 상자는 옛 애인의 마음을 대변하는 동시에 ‘옛’이 되기 전 상황을 환기시킨다. 옛 애인이 보내온 ‘감정 속 감정’을 느끼게 하면서 간접적으로 두 사람이 가진 관계적 맥락을 유추하게 만들었다. 상자에 들어있는 것이 “베개가 기억하던 한숨” “옆구리가 갑자기 갖게 된 광장” “죽은 이가 죽기 이틀 전에 보낸 상자” “돌멩이” “음산한 분위기를 먹고 자란 음지식물이라면” 화자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옛 애인의 마음과 태도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열 때 울지 마, 열고 나서 울지 마”라는 문구가 써져 있으니 여는 것이 두려워질 수밖에 없다.
<3단계> 확장하기 – 상상적 체험을 섬세하기 극적으로 하기
이 시에서 상상적 체험은 두 가지에 의해 이루어졌다. ‘A가 들어있다면 B할 텐데’라는 상상이 첫 번째이고, “열 때 울지 마, 열고 나서 웃지 마”라는 문구에 의해 끝내 상자를 열지 못하게 한 것이 두 번째 상상이다.
옛 애인은 상자 속 상자를 화자에게 보내 ‘감정 속 감정’ 상태를 추론하게 했다. 그런 후 의도나 목적에 쉽게 닿을 수 없도록 독특한 문구까지 적어놓았다. 그래서 ‘A가 들어있다면 B할 텐데’ 하는 행위적 상상은 한계를 드러내게 되고 심리적 갈등을 부추기게 된다. 헤어지기 전 상황과 관계를 더욱 무겁게 되뇌도록 만든 것이다. 그런 무거운 압박감 때문에 화자는 끝내 상자를 열지 못한다. 자신 때문에 형성된 옛 애인의 “자학과 자책이 튀어나올까 봐” 두려워한다.
이런 상상적 체험으로 인해 독자들은 단순하지 않게 이별 감정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감정의 문양과 감정의 층위를 만나게 될 것이다.
※ 또 다른 예문 (예문 내용의 기재는 생략함 – 옮긴이)
· 서영처의 ‘장미의 세계’ (《현대시》 2020년 8월호)
· 고주희의 ‘뒷모습의 세계’ (『우리가 견딘 것들이 사랑이라면』, 파란, 2019)
· 황주은의 ‘향수의 세계’ (『불의 씨』, 한국문연, 2021)
< 직접 써 보세요 >
* 아래에 제시하는 구절처럼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설정하시오, 그런 다음 그 세계 속에서 상상을 마음껏 펼치시오. 이제 시 쓰기 3단계를 채워 넣은 다음 한 편의 시를 창작하시오.
- 제시 구절: 기억이 없는 저수지의 세계, 뜨거운 얼음의 세계, 끔을 벗어난 꿈의 세계, 어른만 모르는 어른의 세계, 어른을 뒤집어쓴 어린이의 세계, 허무의 세계, 맹인의 세계, 묵음의 세계, 마우스의 세계, 소품의 세계, 치욕의 세계, 비굴의 세계, 남겨진 것들의 세계, 만약에 사는 세계, 웃고 있는 이별의 세계, 알약이 모르는 밤의 세계, 허공을 걸어 다니는 뿌리의 세계, 살아있는 인형들의 세계, 오른쪽을 사랑한 왼쪽의 세계, 타인을 위한 가면의 세계, 날개를 벗
어난 새의 세계, 애인을 벗어난 애인의 세계, 소심한 방의 세계, 슬픔이 춤을 추는 다정의 세계 등.
| 시 쓰기 3단계 적용 |
1단계 스스로 점검하기 (메시지 분명히 하기 + 내 시만의 장점 찾기) |
|
2단계 객관적 상관물(현상) 찾기 + 관찰과 조사 정밀하게 하기 |
|
3단계 확장하기 (상상적 체험을 섬세하게 극적으로 하기) |
|
<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하린, 더푸른출판사, 2021)’에서 옮겨 적음. (2023. 4.19. 화룡이) >
첫댓글 객관적 상관물을 현상이라고 하는군요
감사합니다^^^
새로 배우는 재미는 언제나 쏠쏠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