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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 길잡이★ 유럽 배낭여행(http://cafe.daum.net/bpguide)
김국진 글
카루젤 개선문을 보고는 튈르리 정원에서 소매치기를 피해 달아나다! 파리의 루부르 박물관을 보고는 걸어서 카루젤 개선문 에 이르렀데 1871년 파리코뮌의 시가전때 불타 없어진 튈르리 궁전 이 있었던 자리이다. 카루젤 개선문 Carrousel Arch 은 드골광장의 에투알 개선문과 함께 파리에 있는 2개의 개선문 가운데 하나로 나폴레옹이 1805년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1808년에 세웠다. 상젤리제 대로 너머 일직선상에 1806년의 승전을 기념해 세운 에투알 개선문에 비해 규모는 작아 높이는 15m, 너비는 20m인데 문 위에는 네 마리의 청동 마상 이 있다. 이 네 마리 말의 양쪽에서 전차를 몰고 있는 병사와 승리의 여신 이 말고삐를 잡고 있는데 말 고삐와 병사 및 여신은 금빛이고 문 정면 윗부분에는 네 명의 인물상이 보인다. 에투알 개선문이 웅장하고 남성적인데 비해 로마 포로 로마노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모방한 여기 카루젤 개선문 은 우아하고 여성스러워 보인다. 건설 당시에는 베네치아 에서 가져온 황금색으로 빛나는 4마리 말의 청동 조각이 장식되어 있었다는데 나폴레옹 실각후 1,815년에 돌려준 것일까? 나폴레옹 몰락후 집권한 루이 18세때 왕정복고의 상징으로 마차를 탄 여신상 이 서 있는 모습을 보는데 4마리 황금색 말을 베네치아에서 강탈해 왔었다면 베네치아 산마르코 성당 지붕위에 서 있는 네마리 황금 청동말 과 같은 것일러나? 1,096년 제1차 십자군 은 터키를 횡단하고 시리아를 거쳐서는 3년후 예루살렘왕국 을 건설하지만, 예루살렘을 뺏긴후인 1,204년의 제4차 십자군 은 이슬람의 근거지 이집트를 공략하기 위해 베네치아 배를 타기로 계약을 한다. 하지만 인원이 적게 모이는 바람에 자금이 부족하여 수송비를 완납하지 못하자 베네치아의 늙은 원수 단돌로의 꼬임에 넘어가 기독교 도시인 이탈리아 맞은편 아드리아해 크로아티아의 자라 Zara 를 공격해 함락하고는 살륙전 끝에 약탈을 하여 보충을 하게된다. 이 일탈로 교황 인노켄티우스로 부터 파문을 당하자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창건한 기독교 비잔틴(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을 공격한다. 성을 급습해 함락하고 약탈을 행하니 도시는 불타고, 십자군 기사들은 라틴제국 을 세우고는 고생스러운 십자군 원정일랑 포기하고 호의호식하며 주저 앉아 버린다! 이 전쟁에서 베네치아는 제노바등 경쟁 도시를 몰아내고 흑해교역의 전매특허 를 받고 콘스탄티노플의 금은 보화와 도시의 상징인 4마리 황금색 청동말 등을 강탈해 온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묻혀있던 마가복음의 저자인 성마르코(마가)의 시체 를 파내어 이슬람 지배자들의 눈을 속여 그 위에 돼지고기로 덮어 위장해 베네치아로 가져온다. 이 마가의 시체를 안치하기 위해 베네치아에 성마르코 대성당 을 건축하고 성 마르코(마가) 를 상징하는 날개달린 사자상과 4마리 황금 청동말 조각상을 세웠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북이탈리아를 침략해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베네치아를 점령한후 전리품으로 저 4마리 말 을 강탈해 와서는 여기 카루젤 개선문 위에 앉혔던 것이라! 이런저런 회상에 잠겨 카루젤 개선문 사진을 찍고 있는 사이에 성미 급한 울 마눌은 혼자 튈르리 정원 Jardin des Tuileries 으로 먼저 들어가 버렸네? 튈르리 궁전은 1871년 파리 코뮌의 시가전에서 불타 없어져 현재는 정원밖에 남지 않았다. 궁전과 정원은 앙리 2세의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 가 1560년대에 건축가 들로름을 시켜 세웠다고 하는데 앙리 4세 때에도 공사는 겨우 정면의 절반이 끝날 정도였다고 한다. 루이 14세는 건축가 르보를 시켜 정면 건축을 완성시키고 정원에 많은 조각을 배치하였으나 1682년 궁전을 베르사유로 옮기게 되어 그후로는 오랫동안 방치 상태에 놓였다. 1789년 루이 16세가 궁전으로 돌아왔으며 혁명 후에는 나폴레옹이 황제의 거처로 삼았는데 1830년 왕위에 오른 루이 필립은 퐁텐을 시켜 증축을 하였고 이후 나폴레옹 3세는 개축공사를 하였건만 불타버렸으니 그리스신화를 모티프로한 조각들만 남아 있는 것이네? 내가 마눌을 뒤따르면서 보자니 왠 여자가 마눌에게 접근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때 내 앞에도 왠 청년이 나타나 종이와 볼펜을 내밀며 "설문조사" 에 좀 응해 달라네? 거절했더니 웃으면서 다시 강권하는데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어 큰소리로 “NO" 라고 외치니 이번에는 아예 앞을 막아서면서 다시 부탁해온다. 저멀리 마눌쪽을 보니 마눌은 볼펜을 받아 허리를 굽히고 설문을 작성하고 있는 모양인데 다른 여자들이 접근하는 것이 보이니 이들은 바로 "집시 소매치기" 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침 이른 시간인지라 카르젤 정원 우리 근처에는 관광객이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서 두발을 벌리고 주먹을 불끈 쥐고는 태권도 자세를 취하면서 저멀리 있는 관광객들이 들으라고 매우 큰 소리로 “NO" 라고 외치면서 주먹을 내지른다.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주먹으로 내리칠듯하며 앞으로 나가는데 그래도 젊은 녀석은 얼굴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설문에 제발 좀 응해 달라네?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녀석을 밀치고 나가니 그제사.... 울 마눌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했는지 설문지를 돌려주고는 뛰어온다. 둘이 달리듯이 현장을 벗어나는데 저 앞에 있던 다른 일행들이 다시 우리 앞을 가로 막아서며 볼펜을 내미는데 격렬히 저항하며 내달리니 뒤에 처졌던 녀석들 일행이 달려오는데 마침 일단의 다른 관광객 무리속에 이미 우리가 섞인걸 보고는 애통해하는 모습 을 돌아본다. 울 마눌에게 눈을 흘기며 도대체 정신이 있는거냐, 없는거냐? 파리 에서는 소매치기 를 극히 조심해야 된다고 그만큼 일렀거늘 어째 그리 어리숙하니 설문에 응하냐고 나무랜다. 하지만 울 마눌 단 한마디도 대꾸가 없네? 하기사 여자들이란 어떤 경우에도 잘못했다든지 미안하다는 언어를 사용하는 법이 없거늘 내가 너무 순진하고 어리석었나? 이 집시들은 로마등 이탈리아에 많았다는데 이탈리아가 집시를 추방 하니 스페인으로 몰려갔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는데 실제로 지금 이탈리아에는 15만 정도만 있다. 반면에 스페인은 75만이고 영국 23만, 독일 11만에 이 나라 프랑스에는 40만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금년부터 로마 Roma (유럽의회가 승인한 집시들의 새로운 명칭) 가 몰려온다고 유럽에 비상이 걸렸으니 동유럽인들에게 EU 국경이 개방된 것이다.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등 동유럽은 2,007년에 EU에 가입한후 유럽 어느 나라에나 가서 노동할수 있는 권리 가 생겼지만 독일등 서유럽 9개국은 그 권리를 7년간 유예했던 것이다. 집시 아니 로마는 체코 20만, 슬로바키아 49만, 세르비아 60만, 헝가리 75만 불가리아 75만에 루마니아는 무려 190만 이나 거주하고 있단다. 헝가리 집권당은 로마(집시)들의 출산제한 정책을 내놓았고 다른 국가들도 대도시에서는 “집시들을 가스실로!” 라는 극단적인 구호 마저 나오는 형편이다. 집시들에게 여러차례 소매치기 시도를 당한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어떤 대책이라도 내놓아야 한다는 생각인데, 이들은 유럽에 모두 1,200만이 산다. 35% 가 실업 상태이며 20% 는 의료보험이 없고 90%는 빈곤층 이하 수준이라고 한다. 소매치기를 피해 도망을 치다보니 문득 옛날에 여기 튈르리 정원을 산책하는체 하다가 세느강변을 통해 파리에서 도망쳤던 앙리 3세 가 떠오른다. 그는 앙리 2세와 피렌체의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개신교도를 탄압한 위그노전쟁에 참가해 눈부신 활약으로 1573년 폴란드왕 이 되었다. 이듬해 형 샤를 9세가 죽자 폴란드 왕위를 포기하고 프랑스로 돌아와 종교내란 와중에서 프랑스 왕 이 되었는데 총신에게 좌우되어 국민에게 중세를 부과하였다고 한다. 또한 네덜란드의 독립을 도와 에스파냐와의 싸움에서 패하는 등 실정이 많으니 1588년 가톨릭 동맹 의 세력이 강한 파리 시민은 기즈공작을 중심으로 국왕에 반대한다. 위험을 느낀 국왕은 교외에 주둔하던 군대와 스위스 용병을 파리성내로 불러들이는데 가톨릭 파리 시민들이 봉기해 시내에 바리케이트를 쌓고 이들을 포위한다. 거리의 바리케이트에 갇힌 근위군과 스위스 용병이 가톨릭 시민군에게 항복하자 앙리3세는 이 튈르리 정원을 산책하는체 눈을 속이고는 말을 타고 강변으로 해서 도망친다. 파리에서 도망친 국왕은 투르에 도착해서는 가신들을 불러모은후 블루아에서 삼부회를 개최하고 그곳에서 가톨릭 세력의 거두 기즈 공을 암살 한다. 이에 격분한 파리의 가톨릭 동맹군이 반격해 왔기 때문에 개신교인 위그노 영수 나바르 (뒤의 앙리 4세) 에게 접근하여 그를 왕위계승자로 정하고 파리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앙리3세는 1589년 8월 가톨릭 수도사 클레망의 칼에 찔려 죽으니 14세기 이래의 발루아 왕조는 멸망하는데, 그 전에 어머니인 카트린은 기즈공작의 가톨릭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딸을 적인 위그노 영수 나바르에게 시집보낸바 있었던 것이니 사위가 된 것이라! 이후 나바르는 앙리 4세 로 프랑스 국왕에 오르는데 그의 아버지는 발루아 왕조의 방계이고 어머니는 스페인접경 바스크 지방 나바르의 왕비이니 핏줄로는 모자람이 없었다. 파리 시민과 귀족들을 무마하기 위해 자신은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낭트칙령을 발표해 개신교 위그노를 인정하니 부르봉 왕조의 시조 로 루이 14세로 이어진다! 그러고는 오랑주 미술관 Musee de l'Orangerie 을 지나 콩코르드 광장 Pl. de la Concorde 에서 상젤리제 대로 Ave. des Champs Elysees 를 잠시 살피고는.... 세느 강변으로 나가 콩코르드 다리를 지나니 강 건너편에 그리스 신전풍의 국회 Assemblee nationale 가 보이는데..... 경찰 이 많이 보여 의아하네? 드디어 알렉상드르 3세 다리 에 도착하는데 기둥 꼭대기에는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와.... 과학에 예술, 산업, 상업을 나타낸 금박을 입힌 조각상이 얹혀 있으니 잠시 구경하고 다리를 건너 군사박물관 앵발리드 로 향한다. 나의홈페이지 : cafe.daum.net/baikal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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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항상 조심스러운 여행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