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삼열 선교사
한국, 한국인을 사랑한 馬布 목사님"
마포삼열 목사에 대해 취재하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그가 한국 교회사에 알려진 대로 신병 치료차 귀국길에 올랐다가 별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마포삼열 목사는 일본 총독부의 암살 기도를 피해 아내 루시아 피시 마펫과 막내 아들 톰을 남겨둔 채 급히 귀국길에 올랐으며 한국 내의 사정이 더욱 악화되면서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몬로비아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취재 중에 만난 넷째 아들 헤이워드 마펫 박사(마포하열)는 이같은 새로운 사실을 증언하며 "아버지는 한국을 떠날 때 이미 돌아가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그의 이 말 한 마디에 마포삼열 목사의 절절한 한국 사랑이 묻어났다. 일본 총독부가 밀어부치던 신사참배 문제를 정면에서 반대하고 나선 마포삼열 목사는 한국 내에서 활동하던 외국선교사들 중 가장 중심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런 그가 일본 총독부로선 언제나 눈의 가시같은 존재였던 것. 일본 헌병에 의해 감시를 받아오던 마포삼열 목사에게 암살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정보를 가져다 준 사람은 뜻밖에도 일본 총독부 관리의 아내였다. 그녀는 독실한 크리스찬으로 자신이 우연히 듣게 된 정보를 평양 선교부에 급히 알려줬던 것이다. 그녀는 사태의 시급성을 알리며 어떠한 환송회나 모임 등을 일절 갖지 말고 무조건 떠날 것을 요청했으며, 마포삼열 목사는 일본 헌병의 검속을 피해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낮 시간을 택해 간단한 옷가지만 챙긴 채 황급히 평양역에서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어야 했다. 부산에서 요코하마를 거쳐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던 기선 안에서 친 전보를 받고서야 아버지의 귀국 소식을 알게 됐다는 헤이워드 마펫은 "아버지는 잠시 피신차 귀국한 미국에서 여러 번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도했으나 한국내 정세의 악화로 이같은 노력이 번번히 무산되면서 심장 질환이 악화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아내와 막내아들을 남겨두고 온 것 뿐 아니라 자신의 평생의 선교 사역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한국에 돌아갈 수 없게 된 상황에 더욱 절망했던 것이다.
마포삼열 목사의 귀국후 별세하기까지의 3년여 삶에 대해 담담히 입을 연 헤이워드 마펫은 아버지가 생활고에 시달렸다는 뜻밖의 사실을 털어놨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막내가 돌아온 후 로스엔젤레스 몬로비아에 있는 작은 집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 집은 당시 창고를 개조한 작고 허름한 집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그 집은 정식 번지 등록조차 안돼 00번지 2/1로 명기되었는데 아버지는 이 곳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사셨다고 헤이워드 마펫은 증언했다. 당시 형(마삼락)은 신학교 재학 중이었고, 자신은 의대 재학 중이었으며, 막내는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생활의 여유가 없었다고 털어놨다. 현재 몬로비아 제일장로교회 바로 옆에 있는 그 집은 찾아오는 이 하나 없이 역사 속에 묻혀있다. 그는 아버지 묘지에 최근까지도 한국인의 발길이 닿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것은 마포삼열 목사의 미국내의 행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탓도 있지만 언더우드 등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리 아버지가 주로 이북 평양에서 선교 사역을 펼쳤기 때문에 분단 이후 평양 선교에 대한 관심이 지속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최근에 셋째 아들인 마삼락 박사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전해 들은 서정운 목사가 현지를 답사하고 미국내 한인신문이 기사로 다루면서 미국내 한인 크리스찬들의 관심을 불러 모으게 됐고, 요즘은 가끔 묘소에 꽃을 놓고 가는 참배객까지 생길 정도가 됐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는다고 마펫 박사 부부는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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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布三悅, Samuel A. Moffett
마포삼열은 26세의 나이로 한국에 건너와 45년동안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초기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을 양성한 한국교회의 아버지이다. 그는 1889년 4월 15일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부터 한국선교사로 임명돼 1890년 1월 인천 제물포를 거쳐서 서울 마포강변에 역사적인 첫발을 내딛었다. 처음 6개월간은 한국어를 공부하였고, 언더우드로부터 경신학교의 전신인「예수교학당」을 인수하여 교육사업에 몰두하였다. 1893년부터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남북도, 황해도 일대를 순회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곳곳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1901년 평양에서 신학교육을 시작하였으며 1904년에 정식으로 평양신학교 교장(1904∼1924)에 취임했다. 그는 한국인을 각별히 사랑하여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격려하고 독립의 성취를 위해 기도하였다. 또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끝까지 믿음으로 이겨냈다. 1919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대 총회장으로 선임되어 혼란기에 처한 한국 교회를 이끌어가는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1893년 10월 마포삼열이 한국에 온지 9개월만에 평양 개척역사가 시작되었다. 개척 당시 평양은 인구 약 10만명의 도시였으며 복음의 불모지였다. 마포삼열은 한석진과 함께 최치향이란 사람이 경영하는 여관에 숙소를 정하고 여관 손님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여관주인 최치향은 술꾼이었으며 도박과 색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포삼열과 가까이 지내면서 점점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성경을 공부하고 가장 확실한 신자가 되었다. 마포삼열은 석달동안 낮에는 거리에서 밤에는 사랑방을 찾아다니며 전도했다. 그리고 주일 아침에는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처럼 사랑방 전도를 통해 3개월 후에는 7명이 세례를 받게 되었다. 한번은 깡패 청년 하나가 친구들을 동원하여 마포삼열이 살고 있는 방 창문으로 돌을 던져 넣었다. 그러나 집안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후 그는 장터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교를 하고 있는 마포삼열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오기가 생겨 다시 돌을 집어 그에게 던졌다. 날아간 돌은 마포삼열의 턱을 정통으로 맞추었고 그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러나 마포삼열은 이 청년을 향해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마포삼열은 이미 그를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하였다. 그는 마침내 마포삼열을 찾아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였다. 그가 바로 한국교회 초대 7인 목사 중의 한 사람이며 제주도 개척 선교사가 된 이기풍 목사이다. 이처럼 마포삼열의 사랑과 희생으로 인하여 평양 개척 역사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 미국 북장로회의 한국 선교 보고서에 따르면 평양에서 일어난 복음의 불씨는 점점 번져서 7명의 세례교인으로 시작하여 1949년에는 신도수가 7만여 명에 이르고 세례교인 수만해도 2만5천7백91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는 어떤 선교역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수 없는 아름답고 놀라운 일이라고 기록했다.
마포삼열은 한국의 독립과 발전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1919년 3월 17일 일본의 아사히 신문의 기사 내용이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외양으로는 그들(선교사들)이 사랑과 자비를 공헌하지만, 그들의 마음 속을 완전히 들추어 보면 술계와 탐욕으로 가득차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복음전도를 위하여 한국에 와있는 듯이 가장하고 있으나 정치적인 혼란을 은밀히 충동하고 있다. …그 무리의 괴수는 마포(마포삼열)라는 미국 선교사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께 복종하듯이 마포의 말을 잘 듣는다. 이곳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봉기의 중심지이다. 그곳은 서울이 아니라 평양이다" ―'평양 서문밖의 죄악촌'중 [朝日新聞] 1919년 3월 17일자] 이를 통해 3·1운동 당시 마포삼열이 지닌 한국인에 대한 공감과 한국인에 대한 사랑을 잘 알 수 있다. 마포삼열은 한국인들을 자기 민족처럼 사랑했다. 그는 한국인들과 가까워지고자 한국 고유의 예법을 익히고 한국 음식을 즐겨먹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한국인처럼 침밀감을 느끼게 했다. 이런 그를 한국 사람들은 "마포 목사님"이라고 부르기며 아버지처럼 섬겼다. 어느 한국인보다도 한국사람들과 한국을 더 사랑한 마포삼열목사는 196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과 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마포삼열 선교사
마포삼열(Samuel A. Moffett) 선교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 신학교인 평양신학교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선교사였다. 그의 수고와 노력으로 1901년에 그 학교가 세워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1901년부터 1924년까지 교장으로 재직할 때까지 그 학교에서 배출된 목회자만 해도 수 백 명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만으로 그는 한국교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던 걸출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물론 그는 학자가 아니었다. 선교사였기에 그가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력은 학적인 측면보다는 선교사적, 목회적 측면을 부각해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그의 배경을 중심으로 신학교를 비롯해서 교회사역, 그리고 사회적 영향력을 살피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리라.
1. 배경
마포는 1864년 1월 25일, 미국 인디아나 매디슨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배경을 가진 신실한 기독교 신자들이었다. 마포의 아버지는 엄격한 도덕적 확신을 가진 분이셨고, 어머니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명랑한 성품을 가진 온화 하셨다. 마포는 어릴 때부터 신앙적인 환경에서 영적 훈련을 받으며 자랐다. 그는 15세에 하노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 바로 하노바 대학(지금의 전문대학)에 입학하여 화학을 전공하였고, 대학시절 베어드(숭실대 초대교장)의 형 존 베어드(당시 대학교수)의 영향을 받아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 학교가 바로 그 유명한 맥코믹 신학교였다. 이때 한국초기 평양신학교의 교단이었던 이길함, 소안론, 곽안련을 만나 훗날에는 한국 선교의 동역자가 되었던 것이다.
맥코믹 신학교는 보수신학의 전당이었다. 당시 신학교는 독일의 비평신학의 강한 도전으로 신신학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맥코믹은 여전히 건재하였다. 당시 할세이, 크레이그 등의 보수적인 신학의 거장들이 포진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포는 학창시절 매우 활달한 성격으로서 수영, 댄싱, 야구 등의 스포츠를 즐겼다. 그리고 크레이그 교수의 영향을 받아 전도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선교사로 나갈 수 있도록 강력한 동기를 부여받은 것은 1886년 헐몬산 집회였다. 이때 강사는 19세기 미국 부흥기에 명성을 나타냈던 무디였다. 당시 그 집회를 100명의 해외선교사로 헌신했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1890년 1월 25일, 선교사로서 한국에 도착했다. 이때 그의 나이 26세 이었다.
2. 평양신학교
1901년 평양에 세워진 평양신학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 신학교였다. 이 신학교가 세워지기 전까지는 성경반, 신학반 등의 사경회 등을 통해 성경을 가르쳤다. 하지만 마포가 한국에 도착한 후 그가 평양을 중심으로 순회전도를 하면서 평양을 주요한 선교거점으로 삼고, 그는 신학교를 세워 교회 지도자를 양성해야 할 강력한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평양공의회에 자신의 신학교 설립 계획서를 제출하였고, 미북장로교 총회 선교부의 허락을 받아 평양신학교가 설립된 것이다. 이때 최초의 신학생은 방기창과 김종섭 두 사람뿐이었다. 마포는 신학교의 수장을 맡아 한국 교회 장래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학생들을 모집하였고,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미북장로교, 미남장로교, 호주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와 협력하여 신학교를 성장시켜 나갔다.
1907년은 한국 장로교회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해이다. 이때 최초의 평양신학교 졸업생 7명이 배출되었다. 그 명단은 길선주(40세), 한석진(41세), 송인서(40세), 방기창(58세), 이기풍(40세), 서경조(58세), 양전백(38세)이다. 이들 가운데 길선주는 마포와 이길함의 뒤를 이어 평양 장대현 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였고, 이기풍은 최초로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해에 장로교 독노회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이때 독노회장으로 마포가 선임되어 노회를 이끌기도 하였다. 신학교 교장으로 지내면서 마포는 연합운동에 있어서 많은 공헌을 하였다. 당시 여러 장로교 선교부가 한국에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처음에는 연합사역이 어려웠다. 하지만 1890년 채택한 네비우스 선교정책으로 <장로회공의회>라는 연합체로 인해 협력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연합사역을 가장 효과적으로 한 곳이 바로 평양장로회 신학교였다. 이 일을 바로 마포가 감당했던 것이다.
3. 교회설립 및 사역
마포가 한국에 도착하자 이미 서울(당시 경성)은 언더우드를 중심으로 사역이 시작되었다. 그는 1890년 9월 29일, 평양을 중심으로 제1차 선교여행을 떠났다. 이때 그는 평양이 한국북부지방을 선교하기에 적합한 곳임을 알게 되었다. 서울에서 가깝고, 아직 본격적인 선교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여러 가지 면에서 승산이 있는 곳이었다. 그는 다시 1891년 2월, 제2차 전도여행을 평양에서 의주까지 출발하였다. 목적은 전도하며, 언어와 습관을 배우고, 이전에 만났던 사람들을 관리하기 위함이었다. 이때 그는 평양을 제2의 선교거점으로 결정하였다. 마포는 1893년 1월, 이길함과 소안련 선교사와 함께 평양선교사로 임명을 받았고, 한석진이 살던 집을 구입하여 그곳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렸다. 이때 20여명이 참석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7명이 세례를 받고, 최초로 성찬식을 베풀었다.
1894년에 한국 땅에서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마포와 이길함은 전쟁으로 인해 잠시 평양을 떠났었지만, 그 다음해에 다시 돌아와 평양을 중심으로 순회전도하며 사경회를 통해 교인들을 모으고, 성경을 교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때 평양에 중앙교회(우리에게 잘 알려진 장대현교회)가 조직되어 마포가 친히 목회하였다. 이때 이길함은 동사목사였다. 하지만 외국인으로서 한국인들을 목회하는 데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국인 가운데 적합한 인물이 있으면 교회를 맡기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그리하여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길선주에게 교회를 양도하고 본인은 신학교 사역과 전도사역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그는 1898년 의료선교사로 내한했던 엘리스 휘시와 그 다음해에 결혼함으로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된 지 10년 만에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3. 그 밖의 사역들
선교사 마포가 한국에 입국해서 40여 년 동안 사역을 하면서 수많은 사역의 열매가 있었다. 예를 들면, 1>그는 평양 장로회신학교 설립자요, 24년 동안 교장으로 봉직하였다. 2>1907년 장로교 독노회 초대 노회장을 역임하였다. 3>1901년 에딘버라 선교대회 한국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4>1919년 한국장로회 총회 총회장을 역임하였고, 5>1918년부터 1928년까지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장으로 섬겼고, 그 외에도 많은 경력을 가지고 있다. 이로 보건데 마포가 한국에 미친 영향은 결코 간단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가 오늘날 이처럼 철저한 보수신학에 기초한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마포와 같은 훌륭한 선교사가 있었기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평양신학교를 보수적인 신학교로 유지하기 위하여 교수들도 선별하여 세웠다. 예컨대, 성경신학, 조직신학 등의 교수진은 당시 보수적 신학교인 프린스턴, 맥코믹 출신이 아니면 안 되었다는 것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마포는 한국에서의 모든 사역을 마치고, 1934년 1월 25일, 그의 나이 70세, 모든 사역에서 은퇴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그는 1936년 10월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것을 약속하고 요양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갔지만 결국은 1939년 10월 24일, 그의 나이 75세의 일기로 캘리포니아 몬로비아에서 하나님 곁으로 가고 말았다. 그의 자녀가운데 아직 살아 있는 이는 그의 셋째 아들인 마삼락 박사이다. 그는 90세를 바라보는 나이지만 아직 프린스톤 신학교의 명예교수로 건재하게 인생을 마무리하고 있다. 마포가 한국과 한국교회 가운데 깊이 각인시겼던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얼마 전 서울 장로회대학교에서는 그의 삶과 사역을 기리기 위해 미국에 있던 유해를 한국으로 이장을 하였다. 이는 그의 족적이 얼마나 숭고한지를 말해 주는 좋은 예를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아버지 마포삼열 선교사
마포삼열(馬布三悅, Samuel Austin Moffett. 미국)
백여년전, 아무도 찾아오지 않던 미개한 나라에 벽안(碧眼)의 선교사들이 찾아와 이 땅에다 자신들의 삶을 송두리째 내던졌다. 이들은 우리 민족이 겪는 고통을 위로하며 또 고난에 함께 동참하며 이 땅에서 살다갔다. 이들은 이곳에 올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복음 하나로 이 땅에 와서 복음 때문에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오늘날 이 땅에 수많은 교회가 들어서고 어떤 비난의 소리가 쏟아져도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것은 복음을 증거하는 데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선교사들의 귀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초기의 개척 선교사로서 미지의 한국에 오직 말씀을 전하여 그들의 영혼을 살려야한다는 열정과 사명감으로 26세의 나이로 한국에 건너와 45년동안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초기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을 양성한 한국교회의 아버지 마포삼열 선교사에 대해 살펴본다.
사명의 땅 한국 (Korea)
한국교회의 아버지로 불리워지는 사무엘 오스틴 마펫(마포삼열)은 1864년 미국 인대애나주 매디슨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포목상을 경영하였으며 청교도적인 엄격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어머니는 좀 자유분방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경건한 신앙을 배웠으며 11세 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였다. 마포삼열은 하노버 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였으나 대학원에서는 화학을 전공,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러나 박사과정을 마친 뒤 그의 생각은 달라졌다. 그는 특별한 소명감을 자각하고 자신의 일생을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데 투자하기보다는 하나님께 헌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 보수주의 신학의 요람이자 많은 해외 선교사를 길러 낸 매코믹 대학에 1885년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한국 선교사로 일했던 베어드 (W, M. Baird)와 함께 공부하였다.
신학교를 마친 뒤 마포삼열은 주님을 알지 못해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기도 중에 한국을 선교지로 결정하였다. 마펫 선교사가 한국에 올 당시는 선교를 하러 간다는 사실은 곧 죽으러 가는 것이었다. 그때의 한국은 정말 오지였고 또 미개했다. 그러나 한국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땅으로 영접하고 한국백성과 한국을 위해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리기로 결단하였다.
당시 한국의 시대상황을 설명한 백과사전의 기사를 보자. “한국은 중국에 소속된 하나의 작은 왕국이며 깊은 산 숲 속에는 호랑이 곰 등이 득실대고 사람들은 미개한 야만인들이며 도전적인데다 해적과 같고 일부다처제가 일반화 되어있다. 또한 부패한 불교가 왕성한 종교적 나라이다. 외국인의 출입은 허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최초의 선교사였던 의사 알렌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거리거리에는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파리, 모기, 날파리들이 떼를 지어 득실거리고 있었으며, 더러운 개천에는 온갖 병균이 들끓고 있다. 또한 집집마다 파리, 빈대, 벼룩이 없는 집이 없다. 천연두, 매독, 회충 등은 흔해빠진 병이었고 종기나 무좀같은 피부병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걸려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랑과 희생으로 한국땅을 일군, 선교의 개척자
1889년 4월 15일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부터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가족들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혈혈단신으로 1890년 1월 인천 제물포를 거쳐서 서울 마포강변에 역사적인 첫발을 내디뎠다. 후에 결혼하게 된 부인 알리스 피셔는 한국에서 순교했다. 그는 한마디로 소명감이 투철하고 철저한 복음주의적 신앙을 지닌 성경중심의 사람이었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자.
“내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복음전도를 개시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결심한 바가 있었다. 그것은 사도바울이 결심했던 바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 외에는 다른 것은 전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으며 만일 다른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 결심했다.”
처음 6개월간은 한국어를 공부하였고, 그 해 8월에 평양으로 전도여행을 떠났다. 당시 평양은 인구 약 10만명의 도시였으며 복음의 불모지였다. 그는 낮에는 거리에서 밤에는 사랑방을 찾아다니며 전도했다. 처음에는 초기 교인 최치량의 주막에서 예배를 드리다 평양 중심지인 널다리골 기와집 한 채를 사들였다. 이 집이 평양 최초로 설립한 널다리골 교회가 되었다. 후에 장대현교회로 개칭, 발전하였다.
1893년 평양에 선교부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전도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처음의 어려움은 대단한 것이었다. 밤만 되면 불량배들로부터 돌세례로 곤혹을 치르곤 했다, 그 중 하나가 평양 깡패로 알려진 이기풍이었다. 그는 잔치집마다 찾아다니며 술과 떡을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리던 깡패였는데 마포삼열 선교사의 집에도 끈질기게 찾아와 돌을 던지고 불을 지르는 등 그의 행패는 말로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어느 때는 그가 던진 돌에 맞아 입원하기도 했다. 하루는 선교사의 집에 불을 지르고 도망하던 이기풍이 다치게 되었는데 선교사가 찾아가서 치료해 주며 사랑을 베풀었다. 이에 감복하여 회개하고 초대 목사가 되었고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마포삼열은 선교의 개척자답게 모든 어려움을 관용과 아량, 그리고 인내로 이겨나갔다. 이에 따라 점차 많은 이들로부터 ‘마포목사’로 불리며 존경과 칭송을 받게 되고 전도활동의 성과도 점차로 나아지게 되었다. 이처럼 마포삼열의 사랑과 희생으로 인하여 평양개척역사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 미국 북장로회의 한국 선교 보고서에 따르면 평양에서 일어난 복음의 불씨는 점점 번져서 7명의 세례교인으로 시작하여 1949년에는 신도수가 70,000명에 이르고 세례교인 수만 해도 25,791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은퇴할 때는 일천여 교회가 서게 되었으니 이는 어떤 선교역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답고 놀라운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교역자 양성을 선교목표로
마포삼열은 1901년 평양에서 한국인 교역자 양성에 뜻을 두어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창설하였고 1904년에 정식으로 평양신학교 교장(1904-1924)에 취임하였다. 처음에는 2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여 1907년 한석진,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 양전백 등이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숭실학교를 설립하여 1918-1928년에는 교장으로 시무하였다. 일제의 압력에 신사참배를 하면서라도 학교를 유지해야한다는 학생과 교직원들과 유지들 앞에서 “저는 신사참배하며 학교경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라는 한마디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마포삼열은 한국인을 각별히 사랑하여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격려하고 독립의 성취를 위해 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대 총회장으로 선임되어 혼란기에 처한 한국 교회를 이끌어가는 수완을 발휘하기도하였다.
그는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위기였던 일제 말기에 있어서 한결같은 자세로 신앙의 지조와 신학의 정통성을 지키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마포삼열은 병을 얻고 요양을 위해 귀국하였다가 1939년 10월 24일 캘리포니아 몬로비아에서 별세 하였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한국의 북서지역 개척자로서, 특히 평양을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변화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또한 한국장로교회의 초석을 놓았고 우리나라의 기독교교육과 문화발전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특히 신학교육 즉 목회자양성에 힘썼다. 그리고 또한 한국의 독립과 발전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한국인들을 자기민족처럼 사랑했다. 한국인의 아픔을 자기아픔으로 여겼다. 그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교회가 있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땅 끝까지 전파하라는 말씀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과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사도바울처럼 고백하며, 이 땅에 복음을 전하며 한 평생을 산 마펫 선교사의 그러한 정신은 진실로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 마포삼열 선교사야말로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불멸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뛰어난 인물임에 틀림없다.
순교지 평양을 새 예루살렘으로 변화시킨 마포삼열 선교사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딤후4:2)
A. 마포삼열 선교사의 성장과 선교사 결단 배경
마포삼열(Samuel Austin Moffett)은 1864년 1월25일 미국 인디아나주 메디슨 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청교도적 장로교 신앙을 지닌 아버지 슈만 모펫 (Shuman Moffett)과 우아한 성격이면서 또한 성경을 즐겨 읽던 어머니 마리아 제인 메키(Maria Jane Mckee) 사이의 중산층 가정에서 6남매 중 4번째로 태어났다.
“그는 11살 때에 메디슨 제일 교회에서 그의 형 윌(Will)과 하워드( Howard)와 함께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였다. 그는 이 신앙고백을 배신하지 않고 그가 고백한 대로 삶을 살았다.” 장로회 신학 대학에서 30여년 이상 신약학을 가르치고 총장을 지냈던 박 창환 박사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부흥집회에 나가 설교를 듣던 중 하나님을 만나고 부르심에 순종하여 신학교를 가게 되었고 자신을 자신되게 하였다. 는 신앙 간증과 비슷하다.
마포삼열은 15세 때에 하노버 대학에 입학하였다. 야구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하고 때로는 친구들과 함께 춤을 추고 즐겁게 놀기도 했지만 과학 중에서도 화학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그는 1884년 6월 졸업식 때 우등상을 받았다. 마포삼열은 이 하노버대학에서 장차 세계의 개척자로서의 꿈을 안고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노버 대학의 신학과는 후에 시카고로 이전하여 오게 되었고 현재는 멕코믹 신학교로 널리 알려졌다. 1885년 맥코믹 신학대학에 입학할 때에 그는 21세 되던 해였다. 맥코믹 신학교는 1829년에 설립된 학교로 미국에서도 보수주의 신학의 온상지로 세계적인 선교사 양성소로서 유명했다.
졸업 후 존 합키스 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준비하던 그가 과학 분야에서 기독교 선교사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전환한 것은 대학 기독청년 운동(YMCA)에서 받은 영향이 컸다. “맥코믹 신학대학 출신으로 다른 나라로 간 사람은 제하고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만도 상당수에 달한다. 마포삼열을 위시하여 배위량(Williams baird), 사무엘 기포드(Samuel Gifford), 이길함(Graham Lee),스안론(William Swallen), 에드워드 아담스(Edward Adams), 방위량(William Blair), 그리고 찰스 알렌 클라크( Charles Allen Clark)등이 있다. 이들은 한국 장로교 선교사로서 사실상 한국 장로교의 개척자요 역군으로서 희생적으로 봉사한 분들이다. 멕코믹 신학교가 설립 된지 55년 (1829-1844)동안에 617명의 졸업생 중 단 17명의 선교사 밖에 파송하지 못했으나 그 후 3년(1886-1888)동안에 17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며 그중 한 학생이 마포삼열이었다. 아무튼 이 신학교에서는 1885년에서 1929년까지 235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마포삼열은 신학교에 입학한 후 4년 동안‘선교’라는 주제에 큰 관심과 열정을 가졌는데 그가 이처럼 선교사로서 헌신하기로 결심한 배경에는 첫째로 메코믹 신학대학이 창설당시부터 갖고 있었던 선교신학의 영향을 받았음을 무시할 수 없고 둘째로 1886년 여름에 25일 동안 251명의 학생들이 헐몬산에서 수련회를 갖고 유명한 부흥사 무디와 함께 이야기 하며 연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것이었다. 이 모임에서 이들 중 21명이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대각성 운동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1888년 맥코믹 신학을 졸업한 마포삼열은 곧 미조리주 애플튼시의 제일 장로교에서 약 1년간 시무하다가 1889년 3월 26일에 미국 장로교 해외 선교부의 문을 두드렸다.
"그는 1889년 4월 15일에 선교부로부터 허락을 받고, 12월에 미국을 떠나 일본 요꼬하마를 거쳐 1890년 1월 20일, 그의 25세 생일날 아침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그 당시 한국에 대한 정보는 다음과 같았다. “한국은 중국에 소속된 하나의 작은 왕국이며 깊은 산 숲에는 곰과 호랑이들이 득실거리고 사람들은 미개한 야만인들이며 도전적인데다가 해적과 같고, 일부다처주의가 일반화 되어있고, 부패한 불교가 왕성한 종교적 나라이다. 또한 외국인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첫 번째 부딪친 어려움은 한국말을 익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어느 누구나 선교사로 오면 6개월은 한국말을 익히는데 소요되었다. 마포삼열에게 한국말을 가르친 어학선생은 서 상륜으로 그는 한글 성서번역자요 한학에도 조예가 깊은 한국의 석학이었다. 그러나 그의 선교적 열정에 비하면 한국어를 익히는 데는 무척 애로가 많았다. 그는 마지막 날까지도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한국의 정치정세에 신경을 많이 썼었는데 그 이유는 대원군의 가톨릭교회 박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원군의 재집권을 몹시 두려워했다. 그가 서울에 왔을 때 선교사들은 선교사의 집에서 모여 숨을 죽이며 예배를 드렸다. 정식허가는 없었지만 예배의 자유는 그런대로 있었고 스케줄에 따라 설교와 기도와 사회를 번갈아 가면서 예배를 인도하였다. 1890년까지는 선교사들은 서울을 중심한 주변에서 활동을 하였는데 그 이유는 한국정부가 공식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허락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적은 수의 선교사들이 분산되지 않은 것이 선교에 더 바람직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B. 순교지 평양을 선교본부로 정한 마포삼열
그가 도착한 1890년 2월까지 한국에 온 개신교 선교사는 21명이었다. “마포삼열이 평양에 선교본부를 세우려할 때 평양 인구는 약 10만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는데" 선교 본부를 설치하기 까지 실로 소설 속의 이야기와 같은 모험적인 도전과 수난을 여러 차례 걸쳐 당하게 되었다. 마포삼열이 1892년에만도 평양을 6번이나 방문한바 있었고 한국에 있는 북장로교 선교사회의 결의에 따라 마포삼열과 이길함과 소안련이 평양에다가 선교본부를 개설하기위한 준비회의를 가진바 있다.
1892년 봄 마포삼열은 한 석진과 함께 평양에 와서 ‘여자 성경 학원’ 자리인 대지를 매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인과 관리들의 극성스런 반대로 다시 물려주고 대동문 안에 있던 큰집 한 채를 사게 되었다. 그가 평양을 선교본부로 잡은 이면에는 그의 조수가 될 한 석진의 조언과 설득에 힘입은 바가 많았다고 한다.
"1893년 2월 말엽에 마포삼열 목사는 이길함 목사와 함께 평양으로 떠나 선교를 위한 준비를 하다가 1893년 11월에 평양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한 석진과 마포삼열은 최 치량과 의논한 끝에 당시 평양의 중심이라고 하는 널다리골에 있는 큰 기와집 한 채를 사게 되었다. 바로 이 지역에 새로 구입한 기와집에서 7명으로 교회를 시작한 곳이 평양 최초의 교회요 후에 장대현 교회의 전신이었던 것이다."
1894년 4월 마포삼열은 앞으로 같이 선교할 이길함 목사의 부인이 한국에 왔으므로 그를 환영하기 위해 서울에 와 있었던 때에 평양에 대박해가 일어났다. "1894년 5월 8일 수요일 저녁에 평양의 대 박해는 터지고 말았다. 마포삼열이 서울에 와있는 사이에 수요기도회 저녁 예배는 한 석진과 김 찬식 전도사와 몇몇 교인들이 기도회를 드렸다. 이날 기도회가 끝날 무렵 돌연 포졸들이 예배당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와 기도하던 모든 교우들을 결박하여 관찰사로 끌어갔다. 감사는 ‘국법을 어기고 양놈들이 전하는 사교를 전파시키는 너희들의 죄를 용서 할 수 없다. 하면서 하나님을 한번 욕하면 석방하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한 석진은 감사에게 주먹질을 하면서 도리어 감사에게 욕을 하니 감사는 격분하여 한 석진과 감 창식은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 홀 의사는 마포삼열과 고종황제의 어의로 있던 알렌과 같이 일하던 스크랜톤에게 급히 전보로 알리었다."
이 보고에 접한 마포삼열은 미영 양국 공사에게 청원하여 고종황제에게 교섭한 결과 고종께서 내가 허락하는 것을 그대가 어찌 금하느냐라는 내용의 칙령을 평양감사에게 내렸다. 평양감사는 이미 이 칙령이 전달되었는데도 이를 외면하고 형장으로 끌어가 형장에서 다시 하나님을 욕하고 배교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그들은 배신하지 않았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을 죽이려는 사형도구인 목 칼이 그들의 목에 씌워져 있었다. 이 위기일발의 순간에도 한석진은 변절하지 않았다. 서울로부터 이들을 석방하라는 황제의 칙령이 올라온 까닭에 죽일 수는 없어 석방하였다. 귀가한 이들은 굳게 서서 기도와 성경공부를 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모이며 굳건히 일어섰다.
마포삼열은 이 일은 하나님께서 폭풍가운데서 그의 이름으로 백성을 불러내셨다고 증언하였다. “후일 고종황제는 5백냥을 한 석진에게 보내어 박해에 대한 보상금으로 전해주었다."“한 석진은 백 홍준 전도사의 소개로 1890년 마포삼열 목사를 만나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했고 1891년 4월 23세 때에 마포삼열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1894 봄 의주에서 가족들을 평양으로 이주시키고 마포 삼열 목사를 도와 주님의 일을 감당하였다.
반면 개인의 신분으로 마포삼열의 평양선교 활동에 가장 아픔을 준 사람은 이 기풍이라는 청년이었다. 이 기풍은 1865년 12월 23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마포삼열이 평양에 정착하던 1894년에는 27세의 청년이었다. “이때 이 기풍은 평양시내 깡패의 두목이었고 아무도그를 당해낼 자도 없었지만 그 성격이 고약했다. 그는 마포삼열에게 한두먼 돌을 던진 사람이 아니었다. 수없이 던졌고 돌로 마포삼열 목사를 쓸어뜨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마포삼열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아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후 이 기풍은 장터에서 마포삼열을 보고 큼직한 돌 한 개를 주어 마포삼열의 턱을 정통으로 들어 맞혔다. 마포삼열의 턱에서는 붉은 피가 낭자했고 그는 의식불명이 되어 길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순교자 토마스 목사의 흘린 피에 이어, 두 번째로 흘러내리는 피였다.
그런데 마포삼열을 쓰러뜨리고 돌아가는 이 기풍의 마음속에 이상한 느낌이 싹터오고 있었다. 자기가 강하고 승리자로 생각했던 도취감은 패배의식으로 바꿔지는 것 같았다. 그 후 1894년 7월 1일 청일전쟁이 터졌다. 평양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고 수백 구의 시체가 눈길이 닿지 않는 곳까지 늘어져 있었다. 이 기풍도 전쟁을 피하여 원산으로 피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거기서 복음을 전하는 소안련 선교사를 보았는데 갑자기 정신이 아찔해지면서 평양에서 때려눕힌 마포삼열이 생각되었고 꿈에도 나타나 양심에 괴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도대체 예수가 누구이기에 저 사람들이 저렇게 떠들며 야단법석일까? 이때부터 예수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이 기풍은 머리가 띵해오는 느낌이 들어 자리에 누워 잠이 들었다. 순간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미워하느냐?”하는 음성이 가냘프게 들려왔다. 깜짝 놀라 눈을 뜨고 살펴보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일찍이 눈물을 모르고 살던 이 기풍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가 왜 그 선량한 사람을 돌로 때려 눕혔을까? 자기 혼자서 남모르게 뉘우치며 후회되는 심정을 막을 길이 없었다.
청일전쟁이 끝나자 평양으로 돌아온 그는 먼저 마포삼열 목사를 찾아가서 자기가 집에 돌을 던진 사람이라는 것과 턱에 상처를 입힌 장본인이라는 것을 고백하였다. 이 말을 듣고서야 마포삼열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 기풍은 이 자리에서 마포삼열이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다짐을 하였고 그후 약속대로 마포삼열이 세운 신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자신을 핍박하고 돌로 치던 사람을 자신의 신학교에 입학시키고 철저한 교육으로 한국 최초의 7인 목사 중 가장 연소한 졸업생으로 졸업하게 했으며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한 특이한 사건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선교사례가 되었다.
C. 마포삼열 선교사의 평양 신학교 창설
평양장로회 신학교는 증가 일로에 있는 교회의 요청에 의해 교역자 양성이라는 지상과제에 의하여 시작되었다.1890년 마포삼열이 한국에 온 그해 6월 중국에서 사역하던 네비우스(Nevius)를 초청하여 선교방법론을 듣던 해이기도 했다. 네비우스의 많은 강의 내용 중 ‘사경회’를 강조한 내용이 있었는데 한국교회는 이것을 받아들여 교인들을 위한 성경공부반이 시작되었고 1892년에는 서울에서 ‘사경회’의 성격으로 신학 공부반을 조직하여 1달 동안 지도자 양성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때의 선생은 언더우드, 마포삼열, 기포드, 헤론 의사였고 학생은 의주의 백홍준, 김관근, 솔내의 서경조, 최명오, 서울의 서상륜, 정공빈, 홍정후 등 7명이었다. 1892년 신학반은 규모가 커져서 학생이 16명으로 늘어났고 이들을 ‘전도인’이라는 명칭을 주어 각각 지방으로 보내어 교회 설립을 강조하고 그 방면으로 가르친 사람이 마포삼열이었다.
1893년 마포삼열은 선교본부를 평양으로 이주하여 ‘사경회’를 통하여 교인들의 성경공부와 전도인들을 훈련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다가 1900년 마포삼열은 서울에서 실시해오던 신학반을 정규적 신학교로 승격시켜볼 생각으로 선교본부에 교역자 양성의 필요성을 역설한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를 받은 선교본부에서는 신학교 설립을 허락함과 동시에 필요한 기금을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해주었다. 그리하여 평양공의회는 1900년 가을에 회의를 열고 지금까지 교회 일을 보아오던 한국사람 중에서 몇 사람을 선정하여 평양에서 신학교육을 실시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하여 1901년 평양 장대현 교회 장로 방기창, 김 종섭 두 사람을 목사후보로 선발하여 우선 마포삼열 목사의 집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1902년 신학교 교수는 마포삼열, 배위량, 소안론, 이길함, 한위렴, 편하설 목사 등으로 이들 신학과정 위원들은 5학년의 교육과정을 만들고 지방 공의회에 신학생들을 보내달라는 요청서를 보내었다.
1903년 초기 신학교육은 6명의 학생을 3달 동안 교육하고 9개월 동안에는 집에서 공부할 내용을 주고 자습하게 하고 자습한 것을 시험하였다. 1904년에는 전년에 공부한 6명과 새 입학생은 다른 공의회에서 추천해준 학생 15이 되었으며 그리고 한석진과 서경조는 벌써 ‘조사’ 예비과를 마쳤을 뿐만 아니라 교회시무 경험이나 학력으로 처음 입학한 학생들보다 손색이 없었으므로 2학년에 편입하였다. 평양공의회는 마포삼열 목사를 신학교 교장으로 추천하여 제 1대 교장이 되게 하였다. 1906년 평양공의회 이 외의 다른 공의회의 선교사를 교수로 선정하여 언더우드, 전위렴, 왕길지, 이눌서를 취임케 하였다. 이들은 교단이 다른 출신도 있었지만 이것은 평양신학교가 처음부터 에큐메니칼한 정신에 입각하였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1907년 6월20일 첫 졸업식이 있었고 9월 17일 오후 2시 첫 노회가 창립되는 시기에 노회석상에서 가장 중요한 절차의 하나로 7인의 한국 첫 목사 안수식이 거행되었다.
1908년 마포삼열 교장은 본교의 대지를 구입하고 교사를 건축하기 위하여 사방으로 맹활약을 하고 있었다. “이 무렵 미국 시카고에 거주하던 맥코믹( Mrs. Nettie F. McComick) 여사로부터 5500불(1만1천원)의 기부금을 보내주었고 그녀는 이전부터도 한국의 선교사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재정적으로 돕고 있었다. 교장은 평양하수구리 100번지 언덕에 5천평을 마련하고 정초예배를 드리고 몇 달 만에 완공되어 마포삼열의 집에서 이곳으로 학교를 옮겼다. 맥코믹 여사는 기숙사를 지을 때에 1910년에서 1912년 사이에 10.000불을 보내 주었고 1920년부터 학생수는 날이 갈수록 더해 현재 신학교가 협소하여 가르칠 수 없게 되자 이 실정을 듣고 맥코믹 여사는 1922년 35.000 불(7만여원)을 보내주었다. 그 녀의 큰 지원으로 1922년 5월 15일 정초식을 가지고 새로운 양식의 신학건물을 새로 지을 수 있게 하여 평양의 대소집회가 이곳에서 열릴 수 있게 하였다.” 마포삼열은 초대 교장으로 임명을 받고 회갑을 맞던 1925년까지 24년간 목회자 양성에 전력을 쏟아부었다.
1935년 3월 야쓰다께가 평안남도 지사로 부임하면서 기독교 학교에 먼저 신사참배를 요구하고 나섰다. 오히려 그는 신학교에 대하여 더 강하게 요구함으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평양신학교뿐 아니라 숭실 전문학교와 숭실 중학교, 숭의 여중학교를 설립하고 이사장인 마포삼열에게 집요하게 요구하여 왔다. 그리하여 그는 마포삼열의 뒤를 이어 신학교 교장이 된 나부열선교사와 윤산온 선교사와 밤깊도록 협의한 끝에 폐교가 되더라도 신사참배는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맺고 말았다. 그런 일로 고민한 끝에 심신이 쇠약해지고 식음을 전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는 그 이상 견디지 못하여 35년간 섬겨오던 신학교 이사장 직을 사면하고 말았다. 폐교된 평양신학교를 바라보면서 한없는 비통을 금할 길이 없었다.
D. 거리의 사도 마포삼열
몰라서 하나님을 등진 백성이고, 알지 못하여 하나님을 서양귀신이라고 하였고 찾아오던 그날엔 여리고의 도성이었고 예수를 믿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던 평양이었지만 그가 평양을 떠날 때에는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변화되었다. 주일 아침이면 평양은 교회당 종소리가 하늘을 치솟았고 평양을 중심한 주위에는 천여교회가 별과같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가 은퇴할 무렵 15만 명의 신자가 있었고 1천여 교회에 졸업한 학생이 800명에 달했고 졸업생들은 그를 영적 아버지로 모셨다. 그는 세계 선교에 찾아보기 어려운 놀라운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놀라운 업적은 모두 마포삼열의 도보전도의 열매였다. 한국의 예루살렘, 평양을 예루살렘으로 만든 마포삼열박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잊을 수 없는 은인이요, 개척자요, 선각자였고 그의 도보전도는 한 영혼을 사랑한 사랑의 발걸음이었다. 그는 거리를 걷는 것뿐 아니라 언덕 위에 단칸집에 사람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면서도 지칠 줄 몰랐던 한영 혼을 사랑한 사랑의 사도였다. 그는 비단 한국 교회사뿐만 아니라 한국근대사에 있어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장본인이다. 그는 한사람이라도 지나쳐버리기를 아쉬워하며 같이 걸으면서 예수를 전하였고 아무리 협소한 골짜기나 오솔길이라도 거기에 인가만 있으면 두발로 걸어서 찾아들어갔다고 한다. 그는 걷기를 좋아했는데 건강을 위해서도 아니었고 한국의 산천을 구경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오직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면 걸어야만 한국인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그를 ‘거리의 사도’,‘사랑의 사도’라고 불렀다. 그의 삶의 목적은 자신의 역사를 기록하는데 있지 않았고 부르신 소명 하나님의 역사를 이룩하려고 노력한 충성된 종으로 사는 것이었다.
그는 토마스 목사가 순교당한 평양을 찾아가 고난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한 영혼이라도 더 만나서 복음을 전하려고 산넘고 물을 건너며 복음을 전한 복음의 사자였다. 그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우리가 항상 힘 쓸 일이 무엇인지 행동으로 가르쳤으며 어렵고 힘들지만 말씀을 전파할 때에 나타나는 능력을 보여준 선교사였다. 그가 이 땅에 남긴 것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었다.
E. 자신과 마포삼열 선교사와의 영적인 만남
1. 그의 생애를 살피면서 느껴지는 것은 무엇인가?
2. 이기풍이 회개하는 과정에서 성령의 어떤 역사를 볼 수 있는가?
3. 한석진의 순교적 신앙에서 자신이 느끼는 영성은 무엇인가?
4. 그가 세운 학교를 폐교할 때의 심정은 어떠했다고 느끼며 그의 최후의 결단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5.평양을 새 예루살렘으로 변화시킨 배경에는 그의 '한 영혼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되었다.
자신에게 그런 사랑이 있는가?
6. 마포삼열 선교사를 통하여 배우고 싶은 영성은 무엇인가?
마포삼열박사 전기 편찬 위원회, 마포삼열 박사 전기, 총회교육부, 1973. p.390
경력 및 활동 비고
1889. 3. 26. 미국 북장로교회 해외선교부에서 한국 선교사로 임명
1890. 1. 25. 한국에 도착
1893. 9. 평양선교지부 설립 및 장기체류 선교사역 시작
1899. 6. 1. 의료선교사 메리 앨리스 피쉬(Mary Alice Fish)와 서울에서 결혼
1901. 2. 6. 김종섭 방기창 두 사람을 데리고 자기 사랑방에서 신학반 시작
1901. 하노버대학으로부터 명예신학박사(D.D.) 학위 받음
1903. 평양신학교 초대 교장(1924년까지 봉직), 숭의여학교 설립
1907. 9. 17.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회장 역임. 한국인 최초의 목사 7명에게 안수
1912. 7. 12. 부인 앨리스 피쉬 마펫 순직
1915. 6. 30. 루시아 피쉬(Lucia Fish 본부인 앨리스의 사촌)와 재혼
1918~1928. 평양 숭실대학 학장
1919.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1934. 1. 25. 70세로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회로부터 은퇴
마포삼열은 1864년 미국 인디애나주 매디슨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포목상을 경영하였으며 청교도적인 엄격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어머니는 좀 자유 분방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경건한 신앙을 배웠으며 11세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였습니다.
마포 삼열은 하노버 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였으나 대학원에서는 화학을 전공,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그러나 박사과정을 마친 뒤 그의 생각은 달라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생을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데 투자하기가 아까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미국 보수주의 신학의 요람이자 많은 해외 선교사를 길러낸 맥코믹 대학에 1885년 입학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한국 선교사로 일했던 베어드(W, M. Baird)와 함께 공부하였습니다.
당시 한국의 시대상황을 설명한 백과사전의 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은 중국에 소속된 하나의 작은 왕국이며 깊은 산 숲 속에는 호랑이, 곰 등이 득실대고 사람들은 미개한 야만인들이며 도전적인데다 해적과 같고 일부다처제가 일반화 되어있다.
또한 부패한 불교가 왕성한 종교적 나라이다. 외국인의 출입은 허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않다." 또한 최초의 선교사였던 의사 알렌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거리거리에는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파리, 모기, 날파리들이 떼를 지어 득실거리고 있었으며, 더러운 개천에는 온갖 병균이 들끓고 있다.
또한 집집마다 파리, 빈대, 벼룩이 없는 집이 없다. 천연두, 매독, 회충 등은 흔해빠진 병이었고 종기나 무좀 같은 피부병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걸려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포삼열은 이러한 한국의 실정을 알고도 기도 중에 한국을 선교지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한국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땅으로 영접하고 한국백성과 한국을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희생하였습니다. 그는 1889년 4월 15일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부터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었습니다.
1890년 1월 인천 제물포를 거쳐서 서울 마포강변에 역사적인 첫발을 내디었습니다.
처음 6개월간은 한국어를 공부하였고, 언더우드로부터 경신학교의 전신인「예수교학당」을 인수하여 교육사업에 몰두하였습니다.
1893년부터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남북도, 황해도 일대를 순회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곳곳에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1901년 평양에서 신학교육을 시작하였으며 1904년에 정식으로 평양신학교 교장(1904∼1924)에 취임하였습니다.
그는 한국인을 각별히 사랑하여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격려하고 독립의 성취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또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끝까지 믿음으로 이겨냈습니다. 1919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대 총회장으로 선임되어 혼란기에 처한 한국 교회를 이끌어가는 수완을 발휘하기도하였습니다.
그는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위기였던 일제 말기에 있어서 한결같은 자세로 신앙의 지조와 신학의 정통성을 지키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마포삼열은 병을 얻고 요양을 위해 귀국하였다가 1939년 10월 24일 캘리포니아 몬로비아에서 별세하였습니다.
1893년 10월 마포 삼열이 한국에 온지 9개월만에 평양 개척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개척당시 평양은 인구 약 10만명의 도시였으며 복음의 불모지였습니다. 마포 삼열은 한석진과 함께 최치향이란 사람이 경영하는 여관에 숙소를 정하고 여관 손님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관주인 최치향은 술꾼이었으며 도박과 색을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마포 삼열과 가까이 지내면서 점점 변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경을 공부하고 가장 확실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마포삼열은 석달동안 낮에는 거리에서 밤에는 사랑방을 찾아다니며 전도했습니다. 그리고 주일 아침에는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사랑방전도를 통해 3개월 후에는 7명이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음해 5월, 평양교회는 큰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당시 평양감사는 국법을 어기고 양놈들이 전하는 사교를 전파하는 자들을 용서할 수 없다는 지엄한 호령과 함께 예배를 보고있던 7명의 신도들을 포박하여 끌고 갔습니다.
그들 중 5명은 다시는 예수 안믿겠다고 말하여 풀려났으나 한석진과 김창식 두 사람은 끝까지 버티다가 순교할 지경에 이렀습니다. 마포삼열은 난감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양들이 죽으면 함께 죽겠다는 마음으로 붙잡힌 양들을 구해내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습니다. 그 결과 고종황제의 칙명을 받아내었고 위기에 빠진 두 양들의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한번은 이기풍이란 깡패 청년이 친구들을 동원하여 마포삼열이 살고 있는 방 창문으로 돌을 빗발치듯 던져 넣었습니다. 그러나 집안은 고요할 뿐이었습니다. 그 후 그는 장터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교를 하고 있는 마포삼열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오기가 생겨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돌을 집어 그에게 던졌습니다.
날아간 돌은 마포 삼열의 턱을 정통으로 맞추었고 그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마포삼열은 이청년을 향해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아습니다. 마포 삼열은 이미 그를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돌을 던진 이기풍의 마음 속에는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마포삼열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날 그가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순간 "기풍아! 왜 나를 미워하느냐?"는 음성이 가냘프게 들려왔습니다. 그는 마침내 마포삼열을 찾아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 후 이기풍은 변화되어 초대 7인 목사중의 한 사람이 되었고 제주도 개척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도 제주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돌팔매에 맞아 쓰러진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마포 삼열의 사랑과 희생으로 인하여 평양개척역사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미국 북장로회의 한국 선교 보고서에 따르면 평양에서 일어난 복음의 불씨는 점점 번져서 7명의 세례교인으로 시작하여 1949년에는 신도수가 70,000에 이르고 세례교인 수만해도 25,791명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는 어떤 선교역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수 없는 아름답고 놀라운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포삼열은 한국의 북서지역 개척자로서, 특히 평양을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변화시킨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한국 장로교회의 초석을 놓았고 우리나라의 기독교 교육과 문화발전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북장로회 선교사였던 마포삼열은 1890년 26세의 나이에 선교사로 파송돼 평양을 중심으로 교회 개척 등 선교사역을 펼치다가 1903년 현재 장신대 전신인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세워 1907년에는 7명의 한국인에게 최초로 목회자 안수를 했습니다.
평양 숭실대 학장을 지냈으며, 1919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8대 총회장을 맡았습니다.
그는 일제의 탄압에도 한국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애쓰다가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해 1936년 미국으로 도피했다가 1939년 남가주 몬로비아에서 죽었습니다.
초기 한국장로교회가 서는 데 절대적인 공헌을 한 마포삼열 선교사(Samuel Austin Moffett) 부부의 묘소가 70년 만에 한국으로 이장되었습니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1936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다가 추방된 뒤에도 한국을 위해 기도하면서 시신이라도 한국에 묻히기를 희망했다고 합니다
지난 5월 9일 장로회신학대학교(총장 김중은)에 유골이 안장됨으로써 뒤늦게 망자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장신대는 이상조 기념도서관 앞동산에 마포삼열 선교사의 묘지를 마련하고 유해를 안장, 묘지 앞에 그의 반신상을 세워 ‘설립자이며 초대 교장인 마포삼열’이라는 한국 이름을 영어와 함께 새겼으며, 개교 105주년 기념일을 맞아 이장예배를 드렸다
< 한국인의 영적 아버지 마포삼열 >
마포삼열(Samuel A. Moffett)은 1864년 미국 인디애나주 매디슨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포목상을 경영하였으며 청교도적인 엄격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어머니는 좀 자유 분방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경건한 신앙을 배웠으며 11세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였습니다.
마포삼열은 하노버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였으나 대학원에서는 화학을 전공,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그러나 박사과정을 마친 뒤 그의 생각은 달라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생을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데 투자하기가 아까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미국 보수주의 신학의 요람이자 많은 해외 선교사를 길러낸 맥코믹 대학에 1885년 입학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한국 선교사로 일했던 베어드(W, M. Baird)와 함께 공부하였습니다.
마포삼열은 기도 중에 한국을 선교지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한국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땅으로 영접하고 한국백성과 한국을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희생하였습니다. 그는 1889년 4월 15일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부터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었습니다. 1890년 1월 인천 제물포를 거쳐서 서울 마포강변에 역사적인 첫발을 내디었습니다. 처음 6개월간은 한국어를 공부하였고, 언더우드로부터 경신학교의 전신인「예수교학당」을 인수하여 교육사업에 몰두하였습니다.
1893년부터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남북도, 황해도 일대를 순회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곳곳에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1901년 평양에서 신학교육을 시작하였으며 1904년에 정식으로 평양신학교 교장(1904∼1924)에 취임하였습니다. 그는 한국인을 각별히 사랑하여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격려하고 독립의 성취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또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끝까지 믿음으로 이겨냈습니다. 1919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대 총회장으로 선임되어 혼란기에 처한 한국 교회를 이끌어가는 수완을 발휘하기도하였습니다.
그는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위기였던 일제 말기에 있어서 한결같은 자세로 신앙의 지조와 신학의 정통성을 지키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마포삼열은 병을 얻고 요양을 위해 귀국하였다가 1939년 10월 24일 캘리포니아 몬로비아에서 별세하였습니다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마포삼열
*馬布三悅, Samuel A. Moffett
마포삼열은 26세의 나이로 한국에 건너와 45년동안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초기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을 양성한 한국교회의 아버지이다.
그는 1889년 4월 15일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부터 한국선교사로 임명돼 1890년 1월 인천 제물포를 거쳐서 서울 마포강변에 역사적인 첫발을 내딛었다. 처음 6개월간은 한국어를 공부하였고, 언더우드로부터 경신학교의 전신인「예수교학당」을 인수하여 교육사업에 몰두하였다. 1893년부터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남북도, 황해도 일대를 순회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곳곳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1901년 평양에서 신학교육을 시작하였으며 1904년에 정식으로 평양신학교 교장(1904∼1924)에 취임했다. 그는 한국인을 각별히 사랑하여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격려하고 독립의 성취를 위해 기도하였다. 또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끝까지 믿음으로 이겨냈다. 1919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대 총회장으로 선임되어 혼란기에 처한 한국 교회를 이끌어가는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1893년 10월 마포 삼열이 한국에 온지 9개월만에 평양 개척역사가 시작되었다. 개척 당시 평양은 인구 약 10만명의 도시였으며 복음의 불모지였다. 마포 삼열은 한석진과 함께 최치향이란 사람이 경영하는 여관에 숙소를 정하고 여관 손님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여관주인 최치향은 술꾼이었으며 도박과 색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포 삼열과 가까이 지내면서 점점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성경을 공부하고 가장 확실한 신자가 되었다. 마포삼열은 석달동안 낮에는 거리에서 밤에는 사랑방을 찾아다니며 전도했다. 그리고 주일 아침에는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처럼 사랑방전도를 통해 3개월 후에는 7명이 세례를 받게 되었다.
한번은 깡패 청년 하나가 친구들을 동원하여 마포삼열이 살고 있는 방 창문으로 돌을 던져 넣었다. 그러나 집안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후 그는 장터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교를 하고 있는 마포삼열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오기가 생겨 다시 돌을 집어 그에게 던졌다. 날아간 돌은 마포 삼열의 턱을 정통으로 맞추었고 그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러나 마포삼열은 이 청년을 향해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마포 삼열은 이미 그를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하였다. 그는 마침내 마포삼열을 찾아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였다. 그가 바로 한국교회 초대 7인 목사중의 한 사람이며 제주도 개척 선교사가 된 이기풍목사이다.
이처럼 마포 삼열의 사랑과 희생으로 인하여 평양 개척 역사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 미국 북장로회의 한국 선교 보고서에 따르면 평양에서 일어난 복음의 불씨는 점점 번져서 7명의 세례교인으로 시작하여 1949년에는 신도수가 7만여 명에 이르고 세례교인 수만해도 2만5천7백91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는 어떤 선교역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수 없는 아름답고 놀라운 일이라고 기록했다.
마포삼열은 한국의 독립과 발전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1919년 3월 17일 일본의 아사히 신문의 기사 내용이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외양으로는 그들(선교사들)이 사랑과 자비를 공헌하지만, 그들의 마음 속을 완전히 들추어 보면 술계와 탐욕으로 가득차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복음전도를 위하여 한국에 와있는 듯이 가장하고 있으나 정치적인 혼란을 은밀히 충동하고 있다. …그 무리의 괴수는 마포(마포삼열)라는 미국 선교사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께 복종하듯이 마포의 말을 잘 듣는다. 이곳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봉기의 중심지이다. 그곳은 서울이 아니라 평양이다" ―'평양 서문밖의 죄악촌'중 [朝日新聞] 1919년 3월 17일자]
이를 통해 3·1운동 당시 마포 삼열이 지닌 한국인에 대한 공감과 한국인에 대한 사랑을 잘 알 수 있다. 마포삼열은 한국인들을 자기 민족처럼 사랑했다.
그는 한국인들과 가까워지고자 한국 고유의 예법을 익히고 한국 음식을 즐겨먹었다. 그는 어디가든지 한국인처럼 침밀감을 느끼게 했다. 이런 그를 한국사람들은 "마포 목사님"이라고 부르기며 아버지처럼 섬겼다. 어느 한국인보다도 한국사람들과 한국을 더 사랑한 마포삼열목사는 196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과 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