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타 나카쓰2 - 아오노도몬을 지나 농촌 노인 집에서 키위와 감을 따다!
11월 5일 오이타현 북쪽에 나카쓰 中津(중진) 에 도착해서 호텔에 체크인후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20분을 달려 산국천 강변 에 있는 아오노도몬 靑の洞門(청노동문) 에 내립니다.
아오노도몬 靑の洞門(청노동문) 은 키쿠치칸 의 소설 은원의 저편 恩雙の彼ちに
에 나오는 무대인 데.... 젠카이 라는 승려가 마을 사람들을 위해
30년에 걸쳐 혼자 "끌과 망치" 로 강변이 절벽을 파서 1,764년에 완성했다고 합니다.
버스도 다니는 터널이야 신식 공법으로 새로 뚫은 것이고 그 안에 강변쪽으로 개인
이 수십년간에 걸쳐 끌과 망치 로 뚫었다는 옆 터널 에는 부처님 도 보입니다.
터널을 지나니 왼쪽으로 경수봉 이라 불리는 높은 산이 보이는 데.... 기암절벽 이며
독수리 가 나는 모습이 산수화 라도 보는듯 하여 마치 깊은 산속에 들어온 듯 합니다!
그리고 강변 옆에는 아주 넓은 주차장 이 있고 식당이며 기념품 숍 이 있는 것을 보니
관광버스들이 터널입구에서 사람들을 내리고 걸어서 터널을 지나도록 하는 모양이네요?
우동을 파는 가게가 없어 좀 더 걸어서는 앞을 살피는데 마눌이 강둑 으로 오르더니
보이지 않아 급히 되돌아 가서는 강둑에 올라서니..... 저기 길에 내려가 있네요?
말도 않고 멋대로 다닌다고 불평을 하고는 다시 길을 더듬어 앞쪽으로 30여미터
를 가니..... 거기 왼쪽에 羅漢寺(나한사) 절로 들어가는 입구를 발견합니다.
골목길 로 들어서니 보기에도 아담한 정겨운 농촌 주택가 인 데 단층 집
들이 나무며 꽃을 잘 가꾸어 놓은 모습이 참 보기에도 좋습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농촌의 집 들을 보며 걷는데 골목길을
빠져나오니 갑자기 앞이 탁 트이는게 논 이 나오고.....
좁은 도로 옆에 물이 흐르는 도랑이 참 정갈하게 관리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데 건너편으로 멀리 탑 이 하나 보이나 저건 나한사 는 아니라?
왼쪽 산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을 따라 걷노라니 귤나무 와 감나무 가 연이어
나타나는데 어느 집 마당에 키위(참다래) 가 탐스레 달려 있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가 키위 사진 을 찍는데..... 주인 할아버지 가 나와 먼저 말을 걸어오기로
“ 소노 키위가 오이시이 소우데스네 ? 그 키위 맛있어 보이네요?”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웃으며 장대를 가져와 키위 한 개를 따 주어 울마눌이
달려가 받으니... 이번에는 아예 장대를 내게 건네 줍니다. 무슨 뜻?
해서 키위 를 하나 따니 이번에는 옆에 있는 감나무 를 손으로 가리키기에...
아 “카기데스까? 감입니까?” 라고 물으니 손짓으로 감을 따랍니다!
우히..... 이게 왠 횡재냐 싶어 감을 서너개 를 더 더 따서 돌아서며
인사 를 하니.... 할아버지가 잘가라며 손을 흔들어 주네요?
일본은 "메이와쿠 めいわく迷惑" 라고 해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니 자식은
20세에 성인식 만 하면 경제적으로 독립 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자식은 도회지로 떠나고 농촌에 홀로 남은 저 할아버지 는
외로운지라... 그동안 내내 적적하니 사람이 그리웠던 것일러나?
여자들은 아이를 친정에 맡길수도 없으니 전업주부 가 되고 늙은 부모를 모시지 않는
관계로 원거리 에 사는 "자식 대신에 부모집을 방문" 해주는 회사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일본과 달리 자식의 대학등록금 은 물론이고 졸업 후에도 취업을
못하고 있으면 그 경제적 뒷바라지 에..... 결혼 비용과 전세금 까지 보태 줍니다.
손주를 낳으면 애를 맡아 대신 키워 주니 딸이나 며느리가 직장생활이 가능 한데
정작 부모가 늙어 병들면 모시는걸 꺼리니..... 그럼 단물만 빼먹는 것일러나?
“조선의 일상 법정에 서다” 라는 책에 보면, “사위 장응필은 내 딸이 죽을
병을 얻어 고생할 때는 거들떠 보지도 않더니 처가 죽을 날이
임박해 오자 예천 집에 있던 딸의 재물 을 자기 노비의 집 으로 옮겼고......
또 장모인 내가 몸져 누워 신음할 때는 한번 와보지도 않았다.“ “이에 이미 준
노비를 되뺏아야 하겠지만 딸의 봉사조 ( 제사 지내기 위해 떼어논 재산 )
로 딸의 신노비 ( 시집갈 때 부목 준 노비 ) 만은 허락하지만 나머지는.......”
1,535년 안게종의 부인 의성김씨 가 남긴 재산 상속 문서 로 조선은 유교로 인해 송사가
없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1,414년 한해에만도 송사가 무려
1만 2천 800 건 이니... 당시 인구 600만에 비한다면 조선은 가히 “동방소송지국” 이라?
조선시대 여러 분재기 를 보면 상속 재산은 논밭 보다도 노비가 주종 을 이루는데
신사임당은 친정에 노비 162명이 있었으며 퇴계 이황은 367명 그리고 유설룡은 임진왜란을
당해 기근과 질병으로 흩어지고도 남은 노비가 146명 이라는데 주로 "외거노비" 지요?
주인의 집에 함께 사는 솔거노비 외에 따로 사는 외거노비 는 스스로 남의 논밭을 갈거나
장사를 해서 주인에게 1년에 연공으로 많은 돈 을 내야하니, 주인은 가만히 앉아
떼돈을 버는데... 로마와 달리 조선은 노비가 양인이 되는 제도가 없었으니 죽자고
일했는데, 노비는 사람에게 부치는 名 이나 人 이 아니라 입구 자를 붙이니 노비 3口라?
에 보면 계집종이 천리를 걸어서 한산도 통영에 의복을 갖고와 하룻밤을 자고 갔다는
기사가 자주 보이는데... 조선의 사대부 양반에게 노비는 인간이 아니라 옷이나 신발과
같은 도구 였으니 노비를 해방하고 천민제도를 철폐하는 일은 스스로 하지는 못했습니다!
거느리고 제물포에 상륙해 서울에 무혈 입성 후, 경복궁을 공격해 고종을 포로 로 잡아
김홍집 친일정권 을 세운후 청군을 치기 위해 아산에 내려가자 이노우에 공사의 훈수 로
친일내각은 노비해방, 천민폐지, 신분철폐, 5백년 이어온 과부재혼금지 제도를 폐지 합니다.
그럼 이제 늙고 병든 부모들 은 조선시대의 엄청난 송사 를 보아도 그렇고 또
기왕지사 인구 천명당 소송율이 일본의 10배를 넘는다 고 하니....
자식을 향해 그간 양육비를 계산 해서는 부모 봉양 비용 재판 을 청구해야 할러나?
羅漢寺(나한사) 절로 올라가는 산길 입구 강둑에 퍼질러 앉아 할아버지가 주신
감 을 먹는데... 단감 으로 어찌나 단지 점심을 굶은 허기가 다 채워 집니다!
그러고는 절이 너무 멀기로 포기하고는 돌아서서 내려오는데 마을 한복판을 흐르는
개울옆 도로 에서 호호백발 할아버지가 쩔쩔메고 있으니... 플라스틱
통에서 참게 가 기어나와 이리저리 도망치니 할아버지가 연신 주워 담는 중 입니다.
바로 여기 개울에서 잡았느냐고 물으니.... 여긴 아니고 100여미터 떨어진 개울 에
통발 을 설치해 잡아서 들고 오다가 떨어뜨려서 그만 게들이 기어나온 거라네요?
그러고는 골목길을 다 내려와서 큰 도로를 만나 버스 정류소 로 가니... 이름이
아오이 (靑 청) 라는 한 글자인데, 옆 공터에서 옛 우물 을 구경하고는
조금후 마지막 버스 를 타고는 20여분이 걸려서 나카쓰 中津(중진) 로 돌아옵니다.
나카쓰 中津(중진)역 에 내리니 밤이라 어두운데 배가 고프니 기차역 남구 광장에 있는
이자카야 居酒屋(거주옥) 체인점 인 시로키야 白木屋(백목옥) 에 들어가는데
처음에는 저 글자 白木屋(백목옥) 을 일본옥 으로 잘못 읽었으니... 쓴웃음을 짓습니다?
일본 군국주의는 민족주의로 일본에서 백제와 신라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하는데
신라(新羅) 는 일본에서는 시라기(しらぎ) 라고 읽으니 음이 서로 유사한 지라!
“新羅(신라)”를 "白木(백목)" 으로 글자를 바꾸고“시라키”라고 발음했던 것이지요?
또 규슈 서북쪽인 사가현(佐賀県) 에 옛날에 한국(가야) 과 중국으로 가는 배가 출항
하던 옛 무역항을 현재는 唐津(당진) 이라 쓰고“가라쓰” 라고 발음하는데...
옛날에는 唐津(당진)이 아니라 아마“韓津(한진)”이라고 썼을 것이라 짐작해
보는데 4대 문명 등 6천년 인류역사 는 고유 문자 를 만들면서 민족문명 이 발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