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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장왕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의 제23대 군주. 춘추오패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성군으로 평가된다
재위 초기
출생연도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기원전 614년 부친인 초 목왕이 급사하여
아주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왕 때부터
불안정한 왕권과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 어린 나이 때문에
그의 재위는 매우 불안정하였다.
거기에 재위 초반에
일어난 홍수, 냉해로 인한 기근까지 발생하여
민심이 흉흉해졌으며,
이를 진정시키려
측근 반숭과 영윤(재상) 자공이 동정을 나간 사이 약오 씨족(대대로
재상을 배출해온 유력 귀족 가문이었다) 투극이 반란을 일으켜
수도를 함락시키고
공자 섭을 내세워 수도를 장악한 다음, 장왕을
납치하여 자신의 근거지인 상밀로 향했다.
그러나
여 땅에서 즙리와 습윤 등의 유인에 빠져
사망하고 장왕은 간신히 풀려난다.
이러한 불안정한
정국이 조금 진정되자 장왕은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조회를 폐지한 채로 매일 사냥과 주연을 벌인다.
몇몇 대신들이
간언을 했지만, 오히려 장왕은 "간언을 하는 자는 대부(大夫)와
상오(常晤)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생활이 3년이나
지속되면서 국정은 간신들이 들끓게 되며, 국력은
나날이 쇠락해지게 된다.
불비불명
초장왕 3년(기원전 611년),
이렇게 매일 같은 방탕의 끝에, 참다못한 오거[1][2]라는
신하가 목숨을 걸고 간언을 올린다.
오거: "언덕의 새 한 마리가 3년 동안 날지도 울지도 않습니다.(삼년불비불명三年不蜚不鳴[3]) 이 새는 어떤 새입니까?
(有鳥在於阜,三年不蜚不鳴,是何鳥也?)"
장왕: "3년 동안 날지 않았다니 날았다 하면 하늘을 찌를 것이고(三年不蜚,蜚將沖天), 3년 동안 울지 않았다니 울었다 하면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오
(三年不鳴,鳴將驚人)." 경의 뜻은 알았으니 이만 물러가시오.
(三年不蜚,蜚將沖天;三年不鳴,鳴將驚人。舉退矣,吾知之矣。)
그 뒤로 몇 달이 지나도록
장왕은 여전히 향락을 그치지 않았는데, 오거의 친구이자 또 다른 충신인
대부 소종(蘇從)이 찾아와서 목숨을 걸고 간언을 올리자,
장왕은 비로소
잔치상을 치우고 소종과 마주 앉아 국정을 논하고는, 다음 날 그동안
아부하던 간신들을 숙청하여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다.
3년에 걸친 사치와 향락은,
나라가 너무나도 혼탁해 충신과 간신을 구분할 수 없자, 일부러 사치와
향락을 즐겨 옥석을 가리고자 했던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간신을 처단한
장왕은 오거와 소종에게 국정을 맡겨 패업을
시작하기에 이른다.[4]
이것이
유명한 불비불명(不飛不鳴)이라는
고사이다.
그야말로 간지 폭풍의 일화.
조상들도 저 일화에서 간지 폭풍을 느꼈는지, 이 일화에서
비롯된 고사성어가 상당히 많다.
•불비불명
◦삼년불비
◦삼년불비우불명
三年不飛又不鳴
◦삼년부동불비불명
三年不動不飛不鳴
•일비충천
•일명경인
패권국을 자처하다
초장왕 3년
(기원전 611년), 용(庸) 나라를
정벌하였다.
초장왕 6년
(기원전 608년), 송나라를 공격하여,
전차 200승(대)를 얻었다.
초장왕 8년
(기원전 606년), 초장왕은 육혼(陸渾)의 융(戎)을
정벌하였고, 낙하(洛河)에 이르자,
주나라의
국경 부근에서 군대를 사열하였다.
한편 위기를 느낀
주나라는 권력은 없었지만, 종주국이라는
명목은 있는 나라였는데[5],
주정왕
(周定王)은 왕손 만(王孫 滿)을 초나라에
사신으로 보낸다.
주나라의 사신인
왕손 만이 오자, 초 장왕은 구정의 무게가
얼마나 나가냐고 물었는데,
왕손 만은
"덕이 중요하지 솥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초장왕은
"초나라는 창끝만 부러뜨려도 충분히 구정을 만들 수 있다."
라고 하면서
허울뿐인
권위 따위는 초나라의 무력 앞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간접적으로 말하는데,
이에 주나라
사신 왕손 만은 "먼 옛날 순우 임금의
치세가 성하자 정을 만들어
백성으로 하여금
'신령스러운 것과 간악한 것(神奸)'을 구분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나라의 걸이
덕을 어지럽히자 정은 은나라로 옮겨갔고, 은나라의
주가 포악하게 굴자 정은 주나라로 옮겨갔습니다.
덕이 있다면
구정은 작아도 무거운 법이고, 간사하고 사악하면
아무리 커도 가벼운 법입니다.
주나라의 덕이
쇠하긴 하였지만 천명은 아직 바뀌지
않았습니다.
정의 경중을
물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고 답했고, 초 장왕은
이를 듣고 천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버리게 된다.
고우영의
십팔사략에서는 분위기가 정 반대로 나오는데,
위의 창날 얘기를 하면서
초나라의 무력 앞에
허울뿐인 권위 따윈 아무 쓸모도 없다는 선포를 듣고
주나라 사신이 달아나는 것으로 끝난다.
참고로
구정은 하나라 때 만들어진 솥으로서 왕권의
신성함을 상징[6]하는 물건인데,
그것의 무게를
물어봤다는 것은 자기가 그 솥의 주인이 되어 초나라를
패권국으로 만들겠다는 속마음의 선포나 마찬가지다.
정확히는
초 장왕은 초나라가 패권국을 넘어서서,
주나라를 멸망시키고,
초나라가
새로운 종주국이 되려고 했던 야망을
표출했던 것이다.
이러한 발언은
초나라가 한족이 아닌 묘족의 나라였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초나라와
오나라는 주나라에게서 정식으로 책봉받은
제후가 아니라
지역의 토착민들이
후대에 스스로 나라를 세운 것이기 때문에 주나라에
충성할 이유가 적었다.
다른 제후국들이
현실적인 힘이야 어찌 됐든 명목상으로나마
주천자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오나라 역시
시조가 주나라 왕실의 혈통이라 봤기 때문에 일정 부분
주나라의 체면을 지켜준 반면
초나라는 전혀
연관 관계도 없고, 신세진 것도 없었기에
주나라를 경시했다.
초나라가 주나라의
책봉을 받아들였지만, 이는 초나라가 중원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지 복속했다고 보기 어려운데,
이는 군주의
명칭을 주나라와 같은 왕을 썼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황제란 단어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천자의 공식 작위는 왕이었고,
제후국들은 오등작 명칭을 사용했다.
초장왕의 발언은
단순히 초장왕의 야망이라기보다는 초나라의
야망이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투월초의 난
초장왕 9년
(기원전 605년), 투월초(鬬越椒)를
재상으로 임명했다.
어떤 이가
투월초를 왕에게 헐뜯었는데, 초 장왕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두려웠던 투월초는 반란을 일으켰다.
투월초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투월초의 활 솜씨는 신궁에 가까워서 전쟁 중에 장왕을
두 번이나 활로 위태롭게 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병사들 사이에선
초 장왕이 투월초의 화살에 맞아 곧 죽게 된다는
소문이 나돌게 되었다.
이 말을 들은
초 장왕이 초나라에 보물로 내려오는 화살이 3발이 있는데[7],
그걸 투월초가 두 발을 훔쳐 가서 이제 두 발을 다 썼으니
다시는
초장왕의 목숨을 노릴 일이 없다며
병사들을 안심시켰다.
이런 소문을
퍼트린 한편으로 초장왕은 계략을 써서 투월초가
활을 쏘는 것을 못하게 막아내고,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일이 없게 하여 투월초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백발백중(百發百中)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하기도 했다.
이때 투월초와
대결한 사람은 양유기(養由基)였는데, 양유기는 버들잎을
백 보 앞에서도 맞힐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장수였다.
이들은
활쏘기 시합을 제안했으며, 먼저 투월초가
세 발을 쏘자 그는 활로 막고,
몸을 옆으로
기울이고, 화살을 이로 물어서 투월초의
공격을 막아냈고,
양유기는
그다음에 한 발로 투월초의 반란을
제압했다.
그 뒤에 초나라 왕인
공왕은 양유기가 재주만 믿고 함부로 날뛰니,
활을 쏘지 말라고 경고를 했고,
그 뒤에
양유기는 전쟁터에서 적의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초장왕 13년
(기원전 601년), 서(舒)나라를
멸망시켰다.
춘추 시대 최대 스캔들
초 장왕 16년(
기원전 598년), 진(陳)나라에 하어숙(夏御叔)
이라는 대신이 있었다.
하어숙의 부인인
정나라 출신 하희(夏姬)는 미인으로 유명했는데
하어숙이 죽고 난 이후
하희가 정나라의
다른 사람들과 바람을 피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게다가 진(陳)나라의
군주였던 영공(靈公)까지 하희와 스캔들이 나서 하희의 아들이었던
하징서(夏征舒)가 영공을 살해해버린다.[8]
당시 맹주였던
초 장왕은 신하가 왕을 죽였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진(陳)나라를
정벌하기 위해서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신하들은
진나라는 성벽이 높고 양식이 많으며 무기가 많아 작은
나라일지라도 쉽게 정벌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장왕은
그 말을 듣고서 진(陳)나라가 그 정도로 성벽이 높으며
양식이 많고 무기가 많다는 것은
백성들을
고달프게 해서 성벽을 높게 하고 양식을 빼앗고 무기를
만들게 해 그 원망이 얼마나 클 것이냐라고 하며
진(陳)나라를
쉽게 정벌할 수 있다고 설득하여 진(陳)
나라를 공격했다.
진(陳)나라를
공격하여 하징서를 죽여버리고[9] 하희를
초나라로 데려왔다.
하지만 하희가
워낙 미인이라 초 장왕이 탐을 내 첩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신하인 신공 무신
(申公 巫臣)[10]이 하희는 남자를 망치는 여자라 하면서
초 장왕이 첩으로 삼는 것을 극구 반대하였다.
그러자 초 장왕은
그 말을 들어 얼마 전에 아내를 잃은 신하에게
하희를 시집보낸다.
하지만
그도 전쟁에서 죽게 되자 하희를 고향인
정나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15년 후,
제나라의 사신으로 무신이 자청해서
가게 되었다.
무신이 제나라로 가던
도중 정나라에 있던 하희를 데리고 진(晉)나라로
도망가 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다[11].
이 사실을
알게 된 초장왕은 무신의 가족을
몰살시켜버렸다.
(좀 과하단
생각도 들긴 하지만 초장왕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지는 일..) [12]
잘한 것 하나 없는
무신은 이에 극도로 분노해 진나라 군주에게
본인을 오나라로 보내주면,
오나라를 크게 일으켜
두고두고 초나라의 근심거리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오나라는
무신에 의해 중원 문물을 받아들이고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합려 시대에
이르러서는 오자서와 손무를 장군으로 삼아
대규모 원정군을 조직.
초나라의
수도를 점령하고 종묘를 불태우기까지
이른다.
고작 몇 사람의
성욕 때문에(...) 여러 가문과 여러 나라가
쑥대밭이 된 나비 효과인 셈.
이후
초 장왕 17년
(기원전 597년) 봄, 초 장왕은 정나라를 공격하여
포위를 하고, 3달 만에 함락시켰다.
그해 여름에는
필(邲) 땅의 싸움에서 진나라(晉)를 물리치고,
중원의 패권을 장악했다.
초 장왕 23년
(기원전 591년), 초 장왕이 죽으니, 그의 아들
초 공왕 웅심이 왕이 되었다.
초 장왕 관련 일화
어전 회의에서
자신의 주장에 신하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자 기뻐하기는
커녕 자신보다 더 나은 신하가 없으니
어찌 나라를
제대로 이끌어가겠냐며 안타까워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리고 신하를 아껴
대인배로 불리는 한 사람으로서 절영지연이라는
고사를 만들어냈다.
초장왕의 절영회 이야기
<절영회(絶纓會)는
‘갓끈(모자의 끈)을 끊고 즐기는 연회'
라는 뜻으로,
남의 잘못을
관대하게 용서해주거나 어려운 일에서 구해주면,
반드시 보답이 따름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중국 춘추시대,
기원전 590년경, 초장왕 시절
초장왕은
즉위 한지 3년이 지났으나 주색만 밝힐 뿐 한 번도
명령을 내린 일이 없었으며,
다음과 같은
글을 크게 써서 궁성을 들어오는
문 밖에 걸어 놓았다.
‘누구든지
짐을 간하는 자가 있으면 사형에
처하리라’
신하들이 감히
간언을 못하고 있는 데, 신무외라는 대부가
간언을 하기 위하여 궁에 들어갔다.
초장왕은
여자들을 안고, 악공이 음악을 연주하도록
하여 놀고 있었다.
대부
신무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누가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는데, 그 뜻을 알 수 없어 대왕께 들려 드리려고
왔습니다”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몸에 오색찬란한
큰 새가 있었는데 그 새가 초나라 높은 곳에
앉은 지 3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그 새가
나는 걸 본적이 없고 우는 소리를 들은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 새가
무슨 새냐고 묻는데 신은 그 수수께끼를
알 수 없습니다.
<3년불비(3年不飛)>’
초장왕이
신무외가 풍자하는 뜻을 알고 대답하였다.
‘그것은 비범한 새다.
3년을 날지 않았다 하니 한번 날기만 하면
하늘을 찌를 것이며,
3년을 울지 않았다 하니
한 번 울기만 하면 반드시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다.
그대는 그 때를 기다려라’
이후
초장왕이 정사를 보기 시작하고, 눈부신
업적을 만들어 갔다.
당시 큰 나라였던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송나라 우사 화원을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다음에는
춘추시대의 2번째 패권국이면서 강대국으로 행세하고 있던
진(晉)나라와 싸워 진나라 장수 해양을 사로잡았다.
이때부터 초나라 세력을
날로 강성해 졌으며, 초장왕은 천하패권을 잡기로 결심했다
(나중에 패권을 잡아 춘추시대 5패의 한 사람이 되었다)
초장왕이
오랑캐 육혼 땅을 치기 위하여
원정을 갔는데,
초나라 2인자인
영윤(초나라에서는 다른 나라의 2인자인 재상을 영윤이라
불렀음) 투월초가 불만이 있어 반역을 일으켰다.
그러나
초장왕이 투월초를 죽이고 반역을
진압하였다.
초장왕이 반역한
난을 평정하고 돌아와서, 반역을 진압한 신하들의
공로를 위로하기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궁중에서
성대하게 잔치를 차리고 모든
신하를 초대했다.
잔치는
해가 진후에도 계속되었으며, 촛불을
밝히고 잔치를 계속하였다.
초장왕이
잔치의 흥을 돋우기 위하여 사랑하는 허희(許姬)로
하여금 모든 대부에게 술을 따르게 하였다.
허희가
대부들에게 술을 따르고 있는 데, 갑자기 괴상한
바람이 불어 모든 촛불이 일시에 꺼지자,
누군가가
허희의 허리를 슬며시
끌어안았다.
허희가
재빨리 그 사람의 관끈을
잡아끊었다.
그리고는
관끈을 초장왕에게 가지고 가서 ‘속히 불을 밝혀
관끈을 끊은 자를 잡으십시오’ 라고 아뢰었다.
초장왕이 황급히 분부한다.
‘아직 불을 밝히지 마라.
과인이 오늘 이렇듯 잔치를 베푼 뜻은, 모든 경들과
함께 서로 기뻐하기 위해서이다.
경들은 우선
그 거추장스러운 관끈부터 일제히 끊어
버리고 진탕 마시라.
만일 관끈을 끊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과인과 함께 즐기기를 거절하는 것으로 알겠다’고 하면서,
모든 대부들이 관끈을 끊도록 하였다.
잔치가 끝나고,
허희가 초장왕이 일부러 범인을 잡지 않은 것을 불평하자,
초장왕이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자고로
임금과 신하가 한자리에서 술을 마실 때에는
서로 석 잔 이상을 못 마시며,
낮에만
마시고 밤에는 못 마시는 법이다.
그런데 과인은
오늘 모든 신하와 함께 취하도록 마시고,
또 촛불을 밝히면서까지 마셨다.
누구나
취하면 탈선하는 것이 인정이다.
만일 그 대부를
찾아내어 처벌하고 그대의 절개를 표창하고, 그 대부의
마음을 괴롭힌다면 모든 신하의 흥취가 어찌 되겠는가?
그렇게 되면
오늘 잔치를 차린 의의가 없지 않나뇨?
허희는
이 말을 듣고 초장왕의 큰 도량에
감복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 잔치를 절영회(絶纓會)라고 하였다.
후에 초장왕이
정나라를 치러 갔다. 이때 당교라는 장수가 선봉이
되겠다고 자원하여 선봉을 시켰더니,
정나라
교외에 갈 때까지의 적을 모조리
무찔러 버렸다.
초장왕이
그 용기와 능력을 높이 사서 큰 상을 내리려고 하자,
당교는 상을 받지 않겠다고 하였다.
‘나는 이미
왕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이번에 그 은혜를 갚기
위하여 힘써 싸운 것이므로 상을 받을 수 없다'고 하면서,
‘자신이
잔치 자리에서 허희의 허리를 안은
장본인’이라고 하였다.
※ 염옹이 시로서 이 일을 읊은 것이 있다.
어둠 속에서
여인에게 손을 대는 것은 취한
사람의 상정이라
그런데,
아름다운 손이 바람처럼 관끈을
끊었도다
초장왕의
그 바다 같은 도량을 알 수 있으니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느니라
또 한 가지
일화가 전해지는데, 그가 아끼는
말이 있었다.
그 말을
너무나 아끼는 나머지 말에게 풀이 아닌 사람이 먹는 야채를
먹이고 비단 옷을 입히며 침대에서 잠을 자게 했다.
그 뒤 말이
죽게 되자 슬퍼하면서 말에게 관을
만들어 주려고 하였다.
신하들은
말에게 관을 만들어 준다는 사실에 대거 반대했지만
이말을 듣지 않고 말의 관을 준비했는데,
이때 우맹이라는
악공이 나타나서 이왕 하는 거 최고로
비싼 관에 넣어주고
무덤엔 비단으로
치장하며 국외의 국빈들까지 말의 장례식에
초청하자고 건의했다. 반어법[13]
그러자 장왕은
우맹의 말에 뉘우치고 말의 관을 만드는
걸 취소했다고 한다.
그리고 말은
고깃국이 되어 신하들과 맛나게
나눠먹었다고 한다.[14]
[1] 단, 이 인물에 대해선 기록이 저마다 다르다. 사기 초세가에는 오거, 한비자에는 그냥 벼슬인 우사마라고 나오며, 여씨춘추에는 '성공 가'라고 기록되어 있다. 덤으로 소설인 열국지에서는 신무외(申無畏)라고 쓰고 있다. 다른 기록에는 오거의 아버지인 오삼이라는 기록도 있다. 또 사기 골계열전에는 이 일화가 제위왕의 일로, 간언을 올린 신하는 순우곤으로 되어있다.
[2] 이 사람의 손자가 오자서다.
[3] 삼년불비우불명三年不蜚又不鳴(사기 골계열전), 삼년불시불비불명三年不翅不飛不鳴(한비자 유노), 혹은 삼년부동불비불명三年不動不飛不鳴(여씨춘추 중언편)이라고 쓰기도 한다.
[4] 사기 골계열전에도 이 일화가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제위왕과 순우곤의 일화로 나온다.
[5] 초나라가 이 명목상의 군주에게 충성을 안 한다는 이유로 다른 제후국들의 어그로를 끌었다.
[6] 천자가 신(왕의 조상)과 접할 때 쓰는 제사용 기구이기도 하고, 이것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청동 주조술이 하나라 또는 상나라의 왕실에 의해 철통 보안을 받아온, 당시 개념으로서는 최첨단 기술이었다. 물론 초 장왕의 시대에 와서는 그저 권위의 상징물이라는 가치만 남았을 뿐이지만.
[7] 물론 군심 동요를 막기 위한 거짓말. 참고로 이 3발의 화살은 천자의 질서에서 꽤 의미있는 아이템인데, 주나라 문왕이 은(상)나라 주왕을 패퇴시키고 달기를 처단한 후 그 시신에 벌할 목적으로 3발의 화살을 쏘았다.
[8] 구멍 동서(...)들끼리 모여 시시덕거리며 하징서의 어디가 널 닮았네 어디는 너를 안 닮았네 하며 놀고 있던 걸 듣게 된 하징서가 듣다듣다 못해 군주를 죽여버리고 만다.
[9] 그것도 오체분시형으로!
[10] 성은 미(羋), 씨는 굴(屈). 자는 자령(子靈). 굴무(屈巫)라고 부르기도 한다.
[11] 이때쯤 하희의 나이가 40대 중반 이상으로 추정된다.
[12] 현대인의 시점에서 봤을 때의 이야기. 고대 시대 때 왕을 능멸한 사람과 그 가족, 가문에 대한 형벌이 어땠는지는 말할 것도 없다.
[13] 반어법 맞는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그러면 왕께선 인간을 짐승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게 들통날 거라고 했다.
[14] 왜냐면 장왕이 그럼 어찌해야겠냐고 묻자 우맹은 은유적으로(불꽃 옷을 입히고 가마솥 관에 넣어 창자 속에 장사지내자고 했다.) 먹을 것을 권했다.
[출처] 초 장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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