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시심(詩心)이란 어떤 것인가 2 / 구상 (시인) 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할 때 흔히 초심자들로부터 다짜고짜 〈시란 무엇입니까?〉하는 질문을 듣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마 시의 개론이나 작법들이 그 서두에다 〈시의 정의〉니 또는 〈시의 본질〉이니 하고서들 그 해답을 내놓거나 시도하고들 있는 모양이지만, 실상 시가 무엇인가를 뚜렷하게 몇마디로 설명한다는 것은 어렵다기보다 불가능한 일이요, 또한 그것은 마치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격으로 10인 10색이어서 가령 여기에다 동서고금 굴지의 시인 100명의 시에 대한 정의를 나열해놓는다 해도 그것이 시라는 것의 전모를 밝혀낼 수 없을 뿐 아니라 시에 대한 실제적 이해나 창작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이러한 시에 대한 정의의 어려움과 불가능함을 20세기 영국의 대시인 엘리어트 (T.S.Eliot, 18881965)는 〈시에 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다〉라고까지 말한다. 그래서 본 강좌에서는 저러한 성급한 시의 정의나 공소한 본질론을 피하고 먼저 시를 불러일으키는 마음, 즉 〈시심(詩心)이란 어떤 것인가?〉하는 문제부터 밝혀보기로 하겠는데, 여기서 〈시심〉이란 시를 불러일으키는 생각[詩想]·느낌[詩情]·흥취[詩興] 등을 포괄해서 쓴 숙어요, 또한 〈시를 불러일으키는〉도 좀더 적극적으로 〈시를 쓰는〉으로 바꿔 생각해도 무방하다. 그야 어쨌거나 저러한 시심, 즉 시적(詩的) 심리상태가 일상적 생활의 심리상태와 다른 것은 우리 누구나 체험으로 다 아는 바이지만, 그러나 무엇이 어떻게 다르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가 모호하고 막연한 상태인데, 실은 이것이 시를 쓰려는 이들의 가장 기본적인 맹점(盲點)이라 하겠기에 이야기가 좀 잘아지는 느낌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보겠다. 가령 우리가 일상 속에서 〈배가 고파 무엇이 먹고 싶다〉든가, 〈일을 많이 했더니 피곤하다〉든가, 〈친구가 없어 심심하다〉든가, 〈가족과 헤어져 있게 되어 쓸쓸하다〉든가, 또는 〈무엇이 기쁘다〉든가, 〈슬프다〉든가, 〈화가 난다〉든가, 〈좋다〉든가, 〈싫다〉든가 하는 심리상태와 가령 절묘한 자연의 경치를 대했을 때 자기도 모르게 일으키는 흥취나, 또는 연애를 할 때에 자기를 잊는 황홀감이나, 어떤 죽음을 마주했을 때 이는 까닭없는 슬픔 등 소위 시적(詩的)이라고 부르는 심리상태와 구별되는 것은 앞엣것, 즉 일상적인 생각이나 느낌은 어디까지나 자기자신의 이해(利害)에서 출발하고 또 그것의 충족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뒤엣것 즉 시적(詩的)인 생각이나 느낌이나 흥취는 이해를 떠난 맹목적인 것임을 발견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그 감동상태는 대상과 하나가 되어 자기를 잊는 몰아적(沒我的)이고 무아적(無我的)인 가장 순수한 마음의 상태인 것이다. 물론 이렇듯 자신의 이해를 떠나 대상과 하나가 되는 감동상태는 반드시 오묘한 자연의 경관이나, 열애(熱愛)속에서나, 죽음을 접할 때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의 아무리 흔하고 사소하고 허접스러운 일이나 물건이나 사건 속에서도 우연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고, 또 예민한 감성이나 깊은 통찰로 이를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불러일으킬 수가 있다. 즉, 우리가 어떤 자연이나 인간이나 세상살이의 그 생성과 소멸 속에서 신비한 본질이나 진·선·미의 모습을 발견한다는가, 이와는 반대로 아주 고귀하고 아름답다고 여겼던 사물 속에서 무상감(無常感)이나 연민(憐憫ㅡ가엾게 여기는생각이나 느낌)을 느꼈을 때 우리는 저러한 감동상태에 드는 것이다. 그래서 20세기 프랑스의 상징주의의 대표적 시인인 폴 발레리(Paul Valery,1871∼1945)는 저러한 시를 불러일으키는 마음을 우주적 감각이라고 하였는데 나는 거기에다 우주적 연민을 덧붙이고자 한다. 그러면 이제 실제로 저러한 우주적 감각이나 그 연민이 시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살펴보자. 앞의 장에서 시를 불러일으키는 마음, 즉 시적 감동이나 감흥은 스스로 어떤 모습과 질서를 지어 보존·전달하려는 에너지를 안으로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이 에너지를 능동적으로 발동시켜 그 자연발생적 감동과 감흥을 어떻게 표현하여 정착시키느냐 하는 것이 바로 시의 작업이요, 그 방법과 기술의 문제라고 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능동적 작업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 속에서 가장 먼저 하여야 할것이 자기가 받은 그 감동과 감흥의 대상(물)에 대한 집중적 관찰 ㅡ 이것을 응시(凝視)라고도 한다ㅡ과 상상력의 발동에 의해서 현실적 경험을 시적 경험으로 재구성하는 일이다. 가령 누가 어떤 봄날, 그 화창한 아름다움에 홀려서 시심과 시흥을 일으켰다고 하자. 그래서 그는 그 감동이나 감흥을 표현하고 싶고 남기고 싶어서 펜을 들어 종이에 무엇을 쓰려고 들었다고 하자. 그러나 시적 작업에 훈련이 없는 한 그는 막상 아무것도 쓸 것이 없어지는 경험을 맛볼 것이요, 그가 시의 천재가 아닌 한 무엇을 써놓았다 해도 신통한 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 봄날에서 어떤 느낌을 받고 어떤 생각을 떠올리기는 하였지만 바로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확실하게 또는 구체적으로 아직 포착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를 짓는 첫 단계의 작업으로는 먼저 자기가 어떤 대상(사물)에서 받거나 떠올린 생각이나 느낌, 즉 감동이나 감흥이 무엇인가를 알아내고 이를 글로 써낼이만큼 구체화하는작업으로, 이것을 앞의 문장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현실적 경험을 시적 경험으로 재구성한다고 한다. 즉, 첫째는 그 대상에 대한 집중적 관찰로서, 가령 봄날이라면 그 봄날에서 자기를 가장 매료시키는 사물은 어떤 것인지, 그 까닭은 무엇인지, 자기의 고조(高調)된 심리상태는 어떠한지, 또 그 사물과 관계되고 있는 것들은 어떤 것인지, 그 사물로 말미암아 생각나는 것들은 무엇인지, 그런 심리상태에서 자신이 얻고 잃는 것은 무엇인지 등 이렇듯 여러가지를 하나하나 살피고 따지고 정리(취사선택)해나가야 한다. 그래서 겉으로는아무리 순식간에 수월하게 씌어졌다고 보여지는 시도 이러한 과정을 밟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다. 저 독일의 반(反)나치 혁명시인이요, 전후 문화장관을 지낸 요한네스 베허(Johannes Robert Becher, 1881∼1958)의, 봄 호젓한 나루터에 보트가 한 척 환하게 맑은 호수를 산들바람이 흔들고 선명한 녹색으로 서로 칠한 벤치 여름은 지난해와 다를 바가 없을 테지 그 무렵이나 마찬가지로 언제까지나 마찬가지로 그리고 언제나 새롭게 봄은 쉬고 있다. 모든 나뭇가지 끝 노래 뒤에 이 세상 고요한 깊이에. 라는 작품도 그저 언뜻 아주 수월하게 씌어진 것 같지만 좀더 자세히 한마디, 한 줄을 깊이 음미해보면 아주 예리하고도 세밀한 관찰과 그 취사 선택이 이루어져 있음을 깨달을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적 감동이나 감흥의 대상에 대한 집중과 관찰은 아무나 하려고만 들면 그저 떡 먹듯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우리는하루 24시간 중 깨어 있을 때는 쉴 새 없이 그 어떤 생각 속에 휘말려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어떤 생각을 하나에다가 집중해서 한다는 것은 또하나의 노력과 인내와 훈련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조금씩 이러한 노력과 인내와 훈련을 쌓아나가는 사이에 그 집중시간의 길이도 늘어가고 관찰의 깊이나 넓이도 확대되어가는 것이다. 그 좋은 본보기로 우리는 낚시꾼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낚시꾼들이란 몇시간씩이나 찌만을 바라보고 있는데, 낚시를 안해본 사람에게는 그 짓이 무료하고 졸음이 올 것같이 보이지만 낚시질을 하는 당사자로 말하면 그 시간은 긴장, 즉 정신집중의 연속인 것이다. 이런 낚시질도 처음 하는 초심자들에게는 마음이 자주 흐트러져서 조바심과 안달을 내기가 일쑤이지만, 차차 재미를 붙이면 그런 마음의 산란(散亂)이 가라앉고 스러져서 오직 찌에다 모든 정신을 쏟아서 가령 고기가 낚싯밥에 입질을 하는 움직임이 있으면 마치 감전된 것 같은 상태가 된다. 하지만 그 낚시꾼은 찌만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보이지 않지만 물 속에 있는 고기도 의식하고 있고, 또한 수초(水草)를 헤어나와 낚싯밥에 다가오는 그 고기의 모습이나 동작·성질 등을 떠올리면서 생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낚시꾼이 일심불란 찌에다 온 심신을 쏟듯이 시인도 시를 불러일으킨 그 대상에다 전신전령(全身全靈)을 기울여야 하는데, 흔히들 〈시상(詩想)에 잠긴다〉는 말은 바로 이런 상태를 뜻한다. 여기서 이제 또하나 이러한 집중적 관찰이 돋보이는 시를 음미해보자. 비오는 소리 같았는데, 이윽고 휘어져 들려오니 바람인 줄 알았다. 그 바람은 파도처럼 젖어서 걷다가 모래처럼 말라서 날아간다. 그 바람이 어딘가 아득히 먼 들판으로 밀려간 후 군대들이 쳐들어오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린다 이번에는 참말로 비다. 그 비는 우물을 채우고 연못을 기쁘게 하고 한길을 재잘거리며 간다. 그 비는 산중턱의 마개를 뽑아서 부근 일대에 물사태를 일게 한다. 그 비는 흙땅을 느슨하게 하고 바다를 부풀게 하고 거리의 한복판을 휘저어놓는다 그리고 구름의 수레를 타고 예언자 엘리아처럼 사라졌다. 이 작품은 미국 현대시의 맏누이라고 불리는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1830∼86)의 〈소낙비〉를 그린 시로서, 그녀는 시를 발표할 목적으로 쓰지 않았고 또 생전에 발표한 적도 없기 때문에 다른 시가 그렇듯이 시도 제목이 없다. 그야 어쨌거나 이 시를 읽으면서 우리도 여름이면 때마다 체험하는 소나기 풍경이 집중적 관찰을 통하여 그 얼마나 차근차근하고도 세밀하게 그려져 있는가를 알 것이다. 좀 곱씹는 느낌이지만 〈비오는 소리 같았는데, 이윽고 휘어져 들려오니 바람인 줄 알았다〉든가, 〈이번에는 참말로 비다. 그 비는 우물을 채우고 연못을 기쁘게 하고 한길을 재잘거리며〉 가고 또 〈그 비는 흙땅을 느슨하게 하고 바다를 부풀게 하고 거리의 한복판을 휘저어놓는다〉든가, 마침내 그 소나기는 〈구름의 수레를 타고 예언자(이스라엘)엘리아처럼 사라졌다〉든가 등 아주 극명한 관찰을 통하여 우리 앞에 파노라마처럼 다채롭게 펼쳐 보이고 있다. 이렇듯 우리에게는 우리의 시심이나 시흥을 불러일으킨 그 어떤 모티프(동기나 주제)를 가지고 아주 면밀하고 끈기있는 관찰을 거침으로써 시를 쓸만한 재료, 즉 제재(題材)가 마련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현명한 독자는 스스로 깨달았겠지만 그러한 집중적 관찰에 있어 반드시 그 사람이 현실적으로 체험한 일이나 자신이 감각적으로 접하는 한계 내의 물건만을 살피고 떠올릴 필요는 없다. 이 에밀리 디킨슨의 시에도 알 수 있듯 그녀는 아마 방에 앉아 소리만을 들으면서 밖에서 진행되는 소나기의 과정을 상상으로 그려내고 있을 텐데, 이 상상에는직접경험뿐 아니라 간접경험도 함께 작용하고 있으며 이와는 달리 완전히 감각적 경험의 세계를 떠난 다음에 그리는 세계, 즉 심상(心象)을 발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소나기에 대한 그녀의 관찰을 통하여 일상적 경험의 한계를 벗어난, 즉 〈소나기가 구름의 수레를 타고 예언자 엘리아처럼 사라졌다〉는 새로운 미경험의 세계를 펼쳐놓고 있는것이다. 이러한 면의 적극적인 시의 예로 오스트리아가 낳은 시인 중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Rainer Maria Rilke, 1875∼1926)의 한 편을 보자. 엄숙한 시간 지금 세계의 어느 곳에서 누가 울고 있다 이유도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은 나를 울고 있다. 지금 밤의 어느 곳에서 누가 웃고 있다. 이유도 없이 웃고 있는 사람은 나를 웃고 있다. 지금 세계의 어느 곳에서 누가 걷고 있다. 정처도 없이 걷고 있는 사람은 내게로 오고 있다. 지금 세계의 어느 곳에서 누가 죽어간다. 이유도 없이 죽어가는 사람은 나를 보고 있다. 저렇듯 전혀 현실적으로 체험할 리가 만무한 사실을 시인은 마음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를 짓는 데는 그 주제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더불어 왕성한 상상력의 참가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 상상력은 경험을 확대해가는 또하나의 필연적 에너지라고 말할 수가 있다. 인간이 일반동물과 다른 것은 짐승은 직접적 경험밖에 지각하지 못하는 데 비해서 인간은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마저도 상상력을 통하여 지각할 수가 있다는 점이다. 가령 〈죽음〉이란 것도 짐승은 죽기에 앞서 그 죽음을 생각하지 못하지만(본능으로 그것을 예감하는 경우는 있으나), 인간은 죽기 전에그것을 자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식물 같은 것도 같은 생물이지만 내일 잘리어 불 속에 던져질 운명에 놓여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모른 채 그때까지 살고, 한편 먹이에 있어서도 짐승은 먹을 때 내일의 굶주림에 아랑곳없이 먹으며 식물은 그것이 천혜(天惠)이거나 인력이거나주는 대로 흡수하며 인간처럼 미래를 걱정하거나 준비할 줄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산다는 자체가 이미 현재적이면서 미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 속성 때문에 어떤 현실적 체험을 그대로 그려낸 것보다 상상력을 발동하여 그것을 재구성해놓은 것이 오히려 진실을 더욱 잘 나타낼 수가 있다. 앞의 릴케의 시도 일반적 사실의 세계에서는 가공(架空)의 이야기, 즉 허구다. 그러나 그 작자의 정신적인 내적 경험으로서는 더할 수 없는 진실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시가 이렇듯 전면적 허구만으로 씌어지는 것이 아니요, 이 시에서도 보다시피 그 제재 자체가 허구일 뿐 그 묘사 자체는 사실적으로서 현실적 경험을 토대로 하여 시적 경험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또한 그 시적 경험은 그것으로서의 리얼리티를 지니고 있다. 이렇듯 그 시적 경험 자체에 실재(진실이라고 해도좋다)가 없이는 그 표상(表象)은 공허한 것이 되고 만다. 이것 역시 좀더 설명을 가하면, 앞의 릴케의 시 「엄숙한 시간」에서 작자의 상상으로 그려진 〈지금 세계 어느 곳에서 이유도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은 나를 울고 있다〉는 그 느낌이나 생각이 작자 자신의 마음에서 절실하게 우러나오지 않는다면 그 말은 빈말이 된다는 이야기다. 이 문제는 앞으로 시와 언어의 문제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어지겠기에 더 이상 언급을 피하거니와,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처럼 어떤 시적 감동이나 감흥의 대상이 된 사물에 대해서 어느 만큼 그것을 집중적으로 관찰하여 깊이 인식할 수 있었고 또 그것에 상상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느냐에 시의 성패와 우열이 달려있는 것이다. 실은 아무리 사소한 사물이나 사물의 현상이라도 생각을 모아 응시하노라면 그 둘레에 무수한 경험이 집합해서 새롭고 커다란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주게 마련이다. 그래서 시란 그저 우연히 떠오른 마음의 흥취를 써놓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제재로 하여 새로운 감동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시작의 과정을 일본의 원로 시인의 한 사람인 오노 도사부로[小野十三廊]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하나의 사실이나 사건을 보고 경험함으로써 얻어진 감동을 일단은 잊어버리려고 한다. 아무리 강하게 마음에 와 닿았어도 그것을 그 당장 시로 만들려고 들지는 않는다. 감동이란 것은 생짜일 적에는 쓸모가 없는 것이라 우선 그것을 마음속에 넣어둔다. 어떤 이들은 무쇠는 달아 있을 때 두드려야 한다고들 하지만 나는 도리어 감동을 식혀버린다. 나는 감동은 일단 잊어버릴수록 또 그것을 내칠수록 오히려 그것을 보다 소중히 하고 보다 확실한 것으로 만든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 술회에서 우리는 많은 시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