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설법(對機說法)과 차제설법(次第說法)>
부처님께서 대각을 이루신 뒤 설법을 주저하시고 망설인 연유는
부처님이 깨치신바 진리가 너무 어려워 말로써
그 ‘참’을 제대로 전할 수 없음은 물론
당시 중생들이 욕망과 쾌락에 젖어 있어,
이런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가르친다는 것은 피로하고 성가시고,
가르침의 성과도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천왕(梵天王) 사함파티(Sahampati)의 권청(勸請)도 있고,
어차피 제 눈에 안경으로 제 그릇 따라 받아 쓸 일이라 생각하시고,
근기(根機) 따라 설하시기를 결단을 내리셨다.
여기서 근기 따라 설하신다는 말이 곧 대기설법(對機說法)이다.
그리고 차제설법(淡第說法)이란 계단을 오르듯이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점차적으로 수준을 높여
순서에 따라 가르침을 뜻한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자.
1. 대기설법(對機說法)
대기설법(對機說法, skt. pariyaya-desana)은
듣는 이, 혹은 질문하는 이의 이해 수준(근기)에 따라
그에 맞추어 적절한 언어와 방편으로 설법하는 것을 말한다.
병에 따라 약을 주듯[응병여약(應病與藥)],
가르침을 받는 자의 능력이나 소질에 따라
그에 알맞은 가르침을 설함이 대기설법이다.
탐욕이 많은 이에게는 보시를,
성냄이 많은 이에게는 인욕을,
제 잘난 체하는 이에게는 하심을,
악업이 많은 이에게는 선업(善業)을,
이와 같이 상황(근기)에 맞게 설하는 대기설법이다.
이를 근기설법(根機說法), 수기설법(隨機說法),
수의설법(隨宜說法), 방편설법(方便說法)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경전을 보면 당혹스러울 때가 더러 있다.
불경에 상호 모순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영혼과 윤회의 질문에 대해서 침묵할 경우라든지,
혹은 여기에선 이렇게 이야기하고,
저기에선 다르게 이야기 한다든지, 하는 그런 경우가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은, 그 사람에게
그 답이 적합 하냐 적합지 않느냐에 따라서 답하고, 답하지 않고
그러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와서 물었을 때,
그 사람 물음에 대해 답을 주는 것이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일률적인 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의사가 감기환자가 오면 감기약을 처방해주고,
배탈이 난 환자가 오면 위장약을 처방해주는 것과 같다.
말룬카 뿌따(Malunkyaputta) 비구가 와서 14가지를 질문했을 때,
부처님은 거기에 대해 답하지 않고 ‘독화살 이야기’를 한 것은
그 비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당장 생사 해탈이지,
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남방 상좌부불교의 <정정도론(淸淨道論)>에서는
인간의 기질을 여섯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① 탐하는 기질, ② 성내는 기질, ③ 어리석은 기질,
④ 믿는 기질, ⑤ 지적인 기질, ⑥ 사색하는 기질이다.
이와 같이 중생들의 다양한 기질에 따라 근기에 맞게
부처님이 설하셨는데 이를 방편설, 또는 대기설법이라 한다.
이 말에 힘입고 핑계로 삼아 중국에서는 종파마다
교상판석(敎相判釋)을 실시하고 자신들이 서로 최상근기라고 주장했다.
대승은 소승의 아라한과 벽지불은 보살의 아래 단계라고 비하하며,
대승의 보살이야 말로 진정한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밀교는 이에 한술 더 떠서 자신들은 대승 위에 있는
금강승(金剛乘)이라고 주장하며 우월감을 드러냈다.
이런 주장은 부처님의 대기설법을 펴신 근본 뜻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불교는 출세간의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는 종교이다.
출세간의 해탈을 향해가려면 수행을 해야 한다.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사물의 본질을 바르게 관찰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 길을 가는 것이 어려운가? 상근기들만 가는 길인가?
부처님 말씀에 의하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경전에서 그 증거를 찾아보자.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네 가지에 대한 마음 챙김의
확립[사념처(四念處)]으로 이와 같이 7년을 수행하면,
바로 이번 생에서 최고의 지혜를 얻거나 아직 집착이 남아있다면
아나함의 경지에 이르는 과보를 기대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7년은 그만 두더라도 이 네 가지에 대한 마음 챙김의 확립을
누구든지 이와 같이 6년을 수행하면,
바로 이번 생에서 구경의 지혜를 얻거나 아직 집착이 남아있다면
아나함의 경지에 이르는 과보를 기대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6년은 그만 두더라도…….
5년을, 4년을, 3년을, 2년을, 1년을 수행하면,
바로 이번 생에서 구경의 지혜를 얻거나 아직 집착이 남아있다면
아나함의 경지에 이르는 과보를 기대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1년을 그만 두더라도
누구든지 네 가지에 대한 마음 챙김의 확립을 이와 같이
7개월을 수행하면, 바로 이번 생에서 구경의 지혜를 얻거나
아직 집착이 남아있다면 아나함의 경지에 이르는 과보를 기대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7개월을 그만 두더라도…….
6개월을, 5개월을, 4개월을, 2개월을, 1개월을, 반달을 수행하면,
바로 이번 생에서 구경의 지혜를 얻거나 아직 집착이 남아있다면
아나함의 경지에 이르는 과보를 기대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반달은 그만두더라도 누구든지
네 가지에 대한 마음 챙김의 확립을 이와 같이 7일간 수행하면,
바로 이번 생에서 구경의 지혜를 얻거나 아직 집착이 남아있다면
아나함의 경지에 이르는 과보를 기대할 수 있다.” - <대념처경, D22>
부처님께서는 누구든지 열심히 정진하면 최하근기는 7년,
최상근기는 7일이면 아나함과
또는 아라한과를 성취하리라는 것을 보증하셨다.
‘누구든지’라는 말은 비구들만이 아니고 출세간의 길을 가는
모든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누구나 한 생각 돌리면
거기에 깨달음이 있다는 선사들의 말씀도 깨달음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면 부처님께서 제자들의 근기에 맞추어 설법을 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법구경>에 이것에 대한 예가 되는 이야기가 있다.
사리뿟따 장로는 금세공사의 아들이 출가하자 그에게 부정관을 하도록 했다.
장로는 그가 혈기왕성한 젊은이라서
성욕이 주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개월이 지나도 제자의 수행은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결국 장로는 제자를 데리고 부처님에게 갔다.
부처님께서는 숙명통으로 그의 과거 생을 살펴보셨다.
그는 과거 500생 동안이나 금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나
금으로 연꽃을 만들며 살았다는 것을 아셨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부정관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신통으로 금으로 연꽃을 만들어 주면서
연꽃에 집중하라고 하셨다.
그는 황금연꽃을 보자마자 정신이 집중되면서 선정을 이루었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연꽃을 시들어버리게 하셨다.
그는 그가 가장 좋아하고 소원하는 황금연꽃이 시들어버리자
충격을 받고 무상(無常)을 깨달았다. 이 순간 부처님의 말씀이 들려왔다.
“가을에 핀 연꽃을 손으로 꺾어버리듯이, 그대의 갈애를 꺾어버려라.
붓다께서 가르치신 닙바나(Nibbāna-열반), 그 평화로 가는 길을 닦아라.”
그는 이 말씀을 듣고 번뇌를 뽑아버리고 아라한이 됐다(게송 258번 주석).
이 예를 보면, 근기설법은 제자의 정신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성향의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제자는 더러움에 대해
명상하는 것보다는 정반대로 아름다움에 대해 명상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다. 제자의 과거생을 살펴보시고
그의 잠재성향을 살펴볼 줄 아는 것이 부처님의 능력이다.
‘당신은 수행해도 깨달을 수 없으니 기도나 하라.’라고 말하며
불자들의 의지를 사정없이 꺾어버리는 사람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훼손하는 일이며, 불교를 망치는 일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사람이다.
범부라는 무리 중에서도 불교의 불법은 몰라도 자연에서
그 천진성을 체달(體達)해 성품을 깨달아 진리에 계합한 사람들이 있으니
그런 사람에게는 어려운 법문을 닦으라는 식은 통하지 않으니
서로간의 견처(見處)로써 그 심처를 단박 알아봐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부처님이 가르침을 펴신 법문을 통틀어 팔만사천법문이라 한다.
그 팔만사천법문이란 한량없이 많다는 말이다.
부처님이 중생을 가르칠 때에는 듣는 사람 근기나 가르치는 시기,
생활환경 등에 따라 온갖 방편을 다하셨기 때문에 그 가르침은 한량이 없다.
그래서 ‘무량의(無量義)’라고 한다.
‘무량의’라는 뜻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많은 가르침을 말한다.
부처님의 방편설법은 한량이 없다는 말이다.
그 많은 것 중에 잘 골라 써야 한다.
2. 차제설법(次第說法)
차제설법이란 상대가 이해하기 쉽고, 받아들이기 쉬운 순서에 따라
차례대로 성숙시켜가면서 행하는 설법을 말한다.
부처님은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수준을 높여가며
가르침을 펴신다고 했다.
예를 들면, 부처님께서는 재가불자에 대해 설하신 가르침의 시작은,
「시론(施論) - 계론(戒論) - 생천론(生天論) - 제욕(諸欲)의 과환(過患) -
출리(出離)의 공덕 - 사제(四諦)」의 순서에 따라 설법하셨다.
초기경전(아함경)에 흔히 볼 수 있는 시론, 계론, 생천론의
단계적 설법은 재가신도의 수행법 중의 하나로
부처님께서 상식적인 업보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인과의 도리를 설명한 것으로 사성제를 설하기 위한 기초를 마련키 위해
이를 설하셨다.
• 시론(施論)이란 보시론(布施論)의 준말로서, 보시에 대한 가르침이다.
즉, 곤궁한 자에게 먼저 옷과 음식을 베풀라는 것이다.
• 계론(戒論)은 계율에 대한 가르침이다. 생물을 죽이지 않고,
사악한 간음을 범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도둑질을 하지 않고,
제멋대로의 행위에 빠지기 쉬운 음주 등을 삼가는 오계를 지키라는 것이다.
• 생천론(生天論)은 복을 지으면 하늘에 난다는 가르침이다.
즉, 보시와 지계로써 선업을 쌓은 결과 사후에는 천계에 태어나서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곧,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 줄 알고 개인적으로는
윤리 규범을 준수해야 되는데, 그렇게 해야만
그 보답으로 좋은 세상에 태어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그러한 선업의 결과로 천계에 태어나 행복한 삶을
영위 할 수 있다는 것이 생천론이다.
사후에 천계에 태어날 수 있다는 생천론은
당시 인도의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널리 신봉되고 있었던 사상이므로,
부처님은 이처럼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난해한 교리를 설한 것이 아니라,
길잡이로서 우선 일반적인 도덕론을 설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바탕이요
궁극적으로는 깨달음까지 이르는 근본바탕이 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3론은 올바른 업보설(業報說)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것으로서
그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생활을 개선해 나가면,
내세를 기다리지 않고도 우선 현세의 생활이 평안하고
즐겁게 됨을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에 ‘제욕(諸欲)의 과환(過患)’과 ‘출리(出離)의 공덕’에
대해 가르쳤다.
• ‘제욕의 과환’이란 여러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지나쳐
그에 따른 위험과 타락과 오염이라는 허물에 대해 설하셨다.
• ‘출리의 공덕’이란 세간의 욕구를 여의는 것에 대한 공덕을 가르친 것이다.
불교는 상식과 일반윤리를 기초로 삼고 있다.
후대에 발전된 불교(부파불교, 대승불교 등)가
아무리 고차원적인 사상이나 경지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상식과 일반윤리에 어긋나거나 별개일 수가 없다.
이론적으로 보면 업보설(業報說)은
불교의 근본교의인 무아설(無我說)과 상충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은 이 업보설을 불교에 입문하는 필요조건으로 삼을 정도로 중시하셨다.
부처님이 채택한 업보설이란 남에게 베풀 것을 앞세우고 있음에서
알 수 있듯이, 오로지 자신만의 행복이나 해탈을 추구하는 방편이 아니라
인륜과 도덕을 확립하기 위한 방편이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자신의 정신적 발전을 추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부처님의 입장이었다.
불교 신자는 이를 기반으로 해서 자신의 심경을 고양하고
신앙을 정화할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사람들이 인과 업보의 도리조차 믿지 않는
사견(邪見)을 품고 있는 동안은, 아무리 법을 설하더라도
결코 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해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은 처음부터 사성제(四聖諦)의 도리를 말하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이 인과(因果)의 도리를 진실 되게 알아
그 마음의 준비가 된 후, 비로소 그것을 설명하셨다.
그것은 흡사 염색하는 사람이 염색을 할 때,
먼저 염색할 천에 묻은 때나 이전에 염색된 색을 세탁하거나
표백해 순백으로 만든 후,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색으로
물들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신자의 마음이 더러워져 있거나 그릇된 선입견에 물들어 있으면
먼저 그 그릇된 사고를 인과 업보의 도리로 세탁해 깨끗이 하고,
그의 마음이 순백으로 된 때에 비로소 불교적인
사제(四諦)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에 의해 신자들은 사제의 도리를 바르게 받아들일 수 있고,
이 올바른 이해에 따라 그것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
부처님은 일반인으로서 최초로 귀의를 받은 야사(Yasa)에게 차제설법(次第說法)을 행하셨다.
그리하여 야사가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려는 마음상태가 돼 있고,
잘 받아들이려는 마음상태가 돼 있고, 장애 없는 마음상태가 돼 있고,
신명난 마음상태가 돼 있고, 밝고 청정한 마음상태가
돼 있음을 알았으므로 부처님은 최상설법(最上說法)인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담마(dhamma)를 설하셨다.
그리하여 야사는 마치 때 없는 하얀 천이 물들 듯이,
먼지가 없고, 때가 없는 법안(法眼)을 얻었다.
이와 같이 알기 쉬운 순서로,
그리고 성숙시켜가면서 차례대로 법을 설하는 것을 차제설법이라 하며,
이러한 방식의 설법을 통해 야사의 부모와 친구들도 교화했다.
그래서 야사의 아버지는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길 잃은 자에게 길을 가르쳐 주듯이, 어둠 속에서 길을 밝히고
'눈 있는 자는 와서 보라'고 하듯이,
부처님께서는 갖가지 방편으로 법을 밝혀 보이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차제설법은 맨 처음 정립된 설법의 방식으로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다. 부처님은 처음부터 사성제를 설하지 않았다.
입문자에게는 보시하고 지계하면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가르침부터 설했다.
이를 부처님의 ‘차제설법’이라 한다.
이는 부처님이 “아난다여, 나는 순서에 맞는 설법을 하겠다.”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순서에 맞게’ 설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
맛지마니까야(M56)와 디가니까야(D3)에 따르면,
보시를 설한 다음에 계행을 설하고, 계행을 설한 다음에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설하며, 다음에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재난과
욕망의 여읨의 공덕을 설하고,
그 다음에 부처님의 본질적인 가르침인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와 여덟 가지 고귀한 길[八正道]을 설한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윤리적인 것보다
수승한 수행적 관점을 설하는 것으로 돼 있다.
부처님은 처음부터 사성제를 설하지 않았다.
아직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도덕적이고 윤리적 가르침부터 설한 것이다.
그것이 보시와 지계이다.
시⋅계⋅생천(施戒生天)의 가르침을 말한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