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길에 오르면서
개업해서 사무실을 운영하는 변호사가 유학을 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 가족의 동의와 협조, 사무실 정리, 비용 마련 및 입학허가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자신의 공부와 자녀의 교육을 위해 유학을 꿈꾸기는 하지만 쉽사리 하던 일을 접어 두고 이국땅을 밟지 못하는 분들이 더 많으리라.
이러한 점에서 나는 복을 많이 받은 놈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가족들이 유학에 전적으로 동의하였을 뿐 아니라 그외의 문제들은 내가 법무법인 구성원으로 있었기 때문에 다른 구성원 변호사님들이 모두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다만 입학허가를 받는 것은 전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숙제였는데, 그 때문에 법정에서 남몰래 이어폰을 끼고 영어테이프를 듣기도 하고 집에서 잠에 들거나 새벽에 눈을 뜰 때 녹음기를 틀어놓고 잘 이해도 안 되는 영어를 듣느라 꽤나 고생하였던 것이 생각난다. 미국에 있는 여러 대학으로부터 입학허가를 받고 고민한 끝에, 안전하며 물가 싸고 비교적 춥거나 덥지도 않고 자녀들 공부하기에 좋다는 인디애나 주립대학 중 블루밍턴(Bloomington)에 있는 캠퍼스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2002년 6월 17일 드디어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외국을 드나들다 보면 뜻하지 않게 황당한 일을 겪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나는 그러한 사건을 유학길에 오르는 첫날부터 경험을 하였다. 부산 김해공항을 통하여 출국할 때 비행기표 예매가 취소되어 원래 계획과 달리 다른 비행기를 타고 가게 된 것도 그렇고, 내가 인디애나 폴리스에 도착할 때 함께 도착되어야 할 짐 중 일부가 도착되지 않은 것이 그것이다. 하여간 그러한 실전적 경험이 있어서 미국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유사한 상황에 처하였을 때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위와 같은 우여곡절 끝에 인디애나 폴리스에 도착하니, 마침 마중 나와 주기로 하였던 M 변호사가 L 변호사와 함께 공항에 나와서 반갑게 맞아 주었다. 우리나라에서 집을 나선 때로부터 23시간이 소요되어 몸과 마음은 지쳤지만, 주위의 외국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동포를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미국, 미국인
미국생활을 4달 정도 해서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음력 한가위가 되었는데, 우리나라에 있었으면 부모님을 찾아뵙기도 하고 성묘도 가겠지만, 여긴 우리나라의 추석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는 등 일상생활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다보니 별로 고국 생각이 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매년 11월 마지막 주 목요일은 미국에서는 우리나라 추석과 비슷한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이라는 큰 명절이다. 그런데 추수감사절 2주 전 쯤에 외국학생들을 관리하는 부서(The Office of International Services)에서 ‘미국 가정에서 추수감사절에 외국학생들을 초청해서 함께 어울리고 식사도 함께 하는 이벤트를 마련했는데 참가하고 싶은 사람들은 신청을 하라’는 메일을 보내왔다. 그래서 나도 신청을 하였고, 며칠 뒤 인디애나 법대를 졸업하였다는 여자 변호사로부터 나를 초청한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초청해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할 겸 전화를 해 보니, 마침 추수감사절 당일에 미시건 주에 거주하는 자신의 아버지와 의붓어머니도 함께 오시는데 내 가족도 와서 식사를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추수감사절 당일 그 집을 방문했었는데, 나를 초대한 그 변호사는 40대 후반이었고 과거에는 변호사를 몇 년 했는데 현재는 사회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왜 변호사를 그만 두었냐고 물으니, 남편의 수입으로 생활하기에 충분하고 자신은 자녀 교육에 신경 쓰느라 직장생활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미국 중류가정의 상당수의 주부들은 남편이 충분한 수입만 가져오면 자신은 직장을 갖지 않고 가사일과 자녀들만 돌보며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생활이 몇 달 정도 되었을 무렵, 경제적 여건이 되는 부모들은 자녀들 교육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주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지극히 열성적으로 과외(물론 단순히 학과에 대한 과외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를 시키는 등 자녀들에 대하여 정성을 쏟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와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는데, 그 뒤에도 여러 사람을 만나고 난 후에 그러한 생각이 맞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여간 그 집 가족들과 어울리며 대화도 나누고 그 전날부터 삶기 시작했다는 칠면조 요리를 먹으면서 4~5시간을 보냈고, 집을 나서면서 ‘나도 기말고사가 끝나고 나면 당신네 가족을 초대하마’ 라고 약속을 하였지만 실제 귀국할 때까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 집을 나오면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초대해서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은 분명히 그네들의 일상은 아니겠지만, 명절을 부모님 등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은 우리나라와 별반 차이가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Are you living here?
2003년 8월경 승용차를 운전해서 LA에서 San Diego로 가던 중 도로가에 있는 휴게소에 잠시 들렀다가 주차장에서 40대 백인 여자로부터 들은 말이다. 당시 나한테 빈정거리는 투로 말한 그 여자는 아마 내가 차를 타는 것을 보고는 내 차가 곧바로 주차장을 빠져 나갈 것으로 예상하고 기다렸던 모양이다. 그러나 내가 차에 탄 후 지도를 보느라 시간을 지체하자, 기다리다 못해 나한테 와서 그런 말을 한 것 같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기분이 언짢아서 퉁명스럽게 “곧 나간다.”고 답한 후 주차장을 빠져 나오긴 했지만, 영 기분이 좋지 않다. 내가 네 나라 와서 돈 쓰면서 너들 경제에 이바지하고 있는데, 좀더 친절해야 할 것 아니냐? 혹시나 오늘 아침 부부싸움을 한 것은 아닌가?
누가 미국사람들이 친절하다고 했나. 내 경험으로는 결코 미국사람들은 천성이 친절하거나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네들이 남을 배려하는 등 예의바른 행동을 하는 것은 역사적 경험을 통한 반성적 고려에서 나온 산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사람들 역사를 살펴보자.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무지막지하게 무력을 써가면서 인디언들로부터 땅과 생명을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인디언을 멸종의 벼랑으로 몰아세우고 있으니, 이 사람들이 외치는 세계평화의 의미는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평화가 아닌가. 그들이 신봉하는 합리주의는 잘못 해석될 경우 수백 년간 내려온 전통 의식이나 문화를 한순간에 부정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가 될 수도 있지 않는가.
사소한 일 하나 가지고 논리가 비약된 감도 있지만, 그러한 결론을 내린 것이 결코 무리는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내가 본 인디언들은 그저 관광객을 상대로 토산품을 판매하는 시골 촌부나 아낙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정부의 정책상 인디언들은 보호구역을 벗어나서는 살아가기 곤란하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생계를 유지할 수는 있으나 그 이상의 삶의 질을 누릴 수는 없으리라. 이런 생각을 하니 숱한 고난 속에서도 외줄타기를 하듯 생명력을 이어오면서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있는 우리 민족이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2004년 3월 중순, 나야 이미 LL.M. 과정을 마친 상태였고 귀국하면 국내대학에 제출할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중이라 학교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으나, 두 아들 녀석들이 학교에 다니고 있어 가족과 함께 여행을 다니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러던 차에 봄방학이 되어 동부에 있는 워싱턴 D.C., 뉴욕 및 보스턴을 방문하게 되었다.
처음 들렀던 곳이 워싱턴 D.C.인데, 대통령 관저인 백악관과 국회 및 대법원이 약간은 부담이 되나 모두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모여 있었다. 물론 위와 같은 정부 건물 이외에 규모가 엄청난 스미드소니언 박물관이 있었는데, 이는 영국의 과학자 스미슨의 유언에 따라 1846년 미국에 기증된 50만 불로 설립된 것이라고 한다. 그 박물관은 단순히 하나의 박물관이 아니라 13개의 박물관과 미술관, 동물원을 합한 것으로써, 소장하고 있는 자료만도 모두 8천만 점이 넘는다고 한다. 그런데 한가지 특이한 점은 스미드소니언 박물관처럼 정부가 관리하는 박물관은 관람객들에게 기부금은 받지만 입장료는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긴 세금을 그렇게 많이 받고 입장료까지 별도로 받으면 국민들이 가만있지는 않겠지. 하여간 그렇게 큰 규모와 멋진 건물을 건축하고 전시할 것들을 수집하는데 엄청난 돈이 들어갔을 것이고, 이를 보려고 전세계인들이 몰려들고 있으니, 결국 돈이 돈을 벌어다 줄 뿐 아니라 역사까지도 만들어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뉴욕에 있는 미국 최대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가서도 그 규모와 전시물을 보면서 상기되었다.
그리고 워싱턴 D.C.와 관련해서 생각나는 게 하나 더 있다. 미국의 최초의 수도는 뉴욕이었는데, 우연한 사정 때문에 수도를 옮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이 독립하는 과정에서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엄청난 빚을 부담하게 되었고, 이에 국무장관을 지내던 해밀턴이 각 주의 요청에 따라 주정부의 채무를 연방정부가 떠맡아 대신 갚아주면서 재원 마련을 위해 서부의 넓은 토지를 매각한다는 안을 제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 주에서 이러한 해밀턴의 안을 거부하였고, 특히 빚이 상대적으로 적은 남부주에서 반대를 심하게 하게 되었는데, 해밀턴은 이러한 남부의 주들을 달래기 위해 수도를 남부와 가까운 워싱턴 D.C.로 이전하는 안을 제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남부주들이 동의를 함으로써 수도가 현재와 같이 워싱턴 D.C.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수도를 옮기는 데 있어, 국가재정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발단이 되었고, 수도 이전 자체가 지역경제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어 연방과 주정부 사이 및 남부주와 북부주 사이의 상호 간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을 때, 국민적 합의를 거친 후에 천도를 하게 된 점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문제되고 있는 수도 이전에 있어 하나의 참고자료가 될지도 모르겠다.
워싱턴 D.C.를 거쳐 뉴욕에 들러서는 종종 갱단이 등장하는 미국영화의 배경이 되는 할렘 가를 구경하게 되었다. 원래 할렘 가는 193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부촌이었는데, 건물이 낙후되자 부자들이 떠나고 흑인들이 들어오면서 우범지역으로 변하게 된 곳이다. 멀쩡한 건물의 출입구와 창문이 온통 벽돌로 막혀 있다. 이곳은 대낮에도 살인사건이 일어날 정도로 위험한 지역이고 그래서 건물을 임차할 사람들이 없어 그대로 방치되던 중, 우범자들이 함부로 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렇게 해 둔 것이라고 한다. 이곳을 관할하는 경찰관들이 총격사고 신고를 받아도 사건 현장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될 때까지는 출동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는, 이런 나라에 태어나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작년에는 일본인 관광객이 함부로 돌아다니다가 횡액을 당했다나. 그 할렘 가와 접하여서 유명한 콜롬비아 대학이 있는데, 과거 영국왕실에서 설립한 것이라고 한다.
보스톤으로 가는 길에 코넷티컷 주에 있는 예일 대학을 둘러보았는데, 학교 건물 대부분이 대리석으로 건축되었을 뿐 아니라 각종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어, 명성 만큼이나 학교 건물도 아름다웠다. 그런데 캠퍼스가 위치한 뉴헤이본이라는 도시는 큰 도시는 아니나 그래도 수십 만의 도시다 보니 빈민가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학교 캠퍼스를 벗어나면 우범지대이기 때문에 밤에는 함부로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와 같이 미국은 웬만한 도시는 밤에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되는 빈민가가 있다는 사실을 2002년 겨울에 일리노이 주에 있는 시카고에 갔을 때 이미 피부로 느낀 바 있다.
미국 대학생활
미국 내 법과대학은 기본적으로 J.D. 과정을 두고 있으나, 그외 특별과정인 LL.M.이나 S.J.D. 과정을 두고 있는 학교도 있고, 그러한 과정을 두고 있지 않는 학교도 있다. 그리고 LL.M. 과정을 두고 있기는 하나 내국인의 입학을 허용하는 데도 있고, 내국인의 입학을 허용하지 아니하는 곳도 있는 등 그 과정이 다양하게 운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내가 다녔던 인디애나 법과대학의 LL.M. 과정은 오로지 외국인만 입학을 허가하고 있으며, 매년 10개 내지 15여 개 국가에서 다양한 경력을 가진 학생들이 입학을 하고 있었다. LL.M. 과정의 학생들은 J.D. 과정의 학생들과 동일하게 수강신청을 해서 그들의 특유한 수업방식인 소크라테스식 수업을 함께 들어야 하기 때문에, 학기 초에 나누어 주는 강의계획서에 따라 1시간의 수업을 위해 최소한 30페이지 정도 되는 Case Book을 읽고 들어가야 된다.
내 개인적으로는 수업준비를 완벽하게 하고 수업을 들어간 경우보다 제대로 수업준비를 못하고 들어간 때가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수업시간 중 혹시나 나에게 질문이 올까봐 가끔 긴장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교수들은 LL.M. 과정의 학생들에게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아마 질문을 하더라도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화를 통하여 교수가 의도하는 결론을 이끌어 내기 곤란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또한 LL.M. 과정에 있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여러 가지 배려를 해주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J.D. 학생들에 비하여 시험시간을 연장해 주고 시험성적 평가에 있어서도 LL.M. 학생들끼리만 상대평가를 하는 것이다. 아마 상당수의 다른 대학도 이와 비슷한 실정인 것 같은데, 이와 같은 사정뿐 아니라 LL.M. 입학허가의 요건이 J.D.의 입학허가 요건과 차이가 나기 때문에, 미국 대학의 순위를 판단함에 있어 LL.M. 과정에 입학하는 학생들의 수준은 고려요소가 아니라고 한다.
하여간 학교 측의 배려로 학교시험 답안작성에 있어 시험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정작 내국인과 동등한 입장에서 시험을 쳐야 하는 New Bar 시험에 있어서는, 시간이 부족하여 객관식 문제를 풀 때는 문제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고 푸는 문제가 있었을 뿐 아니라 결국에 가서는 몇 문제 정도는 읽지도 못하고 답을 찍을 수밖에 없었고, 주관식 시험에서는 아는 것도 시간이 부족해서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답안을 제출하면서 영어실력을 원망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학교의 LL.M. 학생들에 대한 배려 덕분에, 나는 미국법 체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최소한의 기초법을 수강하는 것 이외에는 학점에 부담을 갖지 않고 지적재산권 및 인터넷법제와 관련된 과목들을 수강할 수 있었다. 아마 학점에 부담이 많았다면 괜히 비싼 등록금 내고 큰 도움도 되지 않는 학점을 수강하느라 시간만 낭비할 뻔 했다.
LL.M. 과정에는 한국학생들과 태국학생들이 많았다. 한국학생들 대부분은 국가공무원이거나 기업체에 근무하는 사람들로서 나이가 30대 중반임에 반하여, 태국학생들은 대부분 자비로 유학을 오다 보니 평균연령이 우리나라 학생들에 비하여 10년 정도는 더 어리다.
2003년 가을에 한국학생들과 태국학생들 간에 축구시합을 가진 적이 있는데, 당시 나는 법대 한인학생회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시합에 참가하여 몇 분간 뛰기도 하였지만 괜히 정강이를 채여서 피멍이 드는 사고를 당하고야 말았다.
영어와 조기유학
귀국 준비를 슬슬 하고 있던 차에, 함께 공부하다가 나보다 먼저 귀국한 사람과 전화통화를 하다가 “아들 녀석이 한국에서는 공부 못하겠다면서 다시 외국으로 보내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하소연을 듣게 되었다. 이런 일이 비단 그분만의 고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두 아들 녀석을 불러 놓고 한글공부 열심히 하라고 일장 훈시를 해 본다.
유학하던 중에 여러 사람들로부터 귀국하게 되면 자녀를 미국에 남겨 두고 갈 것인지 여부에 대하여 질문을 많이 받은 바 있는데, 당시 그러한 질문을 받을 때에는 별 생각 없이 당연히 함께 귀국할 거라고 대답을 한 바 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자녀들이 그동안 미국 학교생활에 적응하느라 고생했는데 귀국하면 또다시 우리나라 학교생활에 적응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므로, 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유학생으로서는 동반한 자녀들에 대하여 걱정을 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어린 애들이 우리나라 언어도 자유자재로 사용할 줄 모를 뿐 아니라 조국의 역사나 문화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유학을 갈 경우, 장차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사회생활을 하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을 받고 소수민족으로서 넘지 못하는 벽에 부딪혀 좌절을 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래서 결코 두 아들놈을 미국에 떼어놓고 오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실제 내가 만난 사람들 중 미국에서 유학하고 취직까지 해서 번듯한 직장을 가진 분들 대부분이 기회만 있으면 한국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말을 하였다. 이것은 바로 미국사회가 소수인종이 정착해서 살기에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이리라. 물론 ‘조기유학을 해서 미국에 있는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국내에 와서 취업을 하면 될 거 아니냐’ 라고 반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껍질만 한국인인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살면서 고향과 같은 편안함을, 표현을 바꾸어 요즘 많이 사용하고 있는 좀더 유식한 말로 하면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물론 교육 전문가인 대학 교수들조차 형편만 되면 자신들의 자녀들은 외국에서 공부하게 하고 있는 실정일 정도로 우리나라 교육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어린 자식을 품에서 떠나보내는 아픔을 참아가면서 자식 잘되라고 조기유학을 보내는 부모가 많다. 그러나 미국으로 유학해서 제대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가지는 유학생들은 우리나라에서도 좋은 대학에 들어갈 정도로 영리할 뿐 아니라 성실한 자들이고, 상당수 유학생들이 대학을 제대로 졸업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므로, 막연히 자식들만이라도 입시지옥에서 살지 말라는 생각에 조기유학을 보내려는 부모들이 있으면 심사숙고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미국에 와서 느낀 것인데,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상식과 반대인 것이 하나 있었다. 외국어 습득을 하려면 어릴 때 외국으로 나가야 된다는 것이 내 경험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이 그것이다. 나이가 어린 아이들은 그동안 사회경험이 부족하여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다 보니 영어를 듣기는 들어도 의미도 이해하지 못하니 지식뿐 아니라 언어를 습득하는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다. 실제 내가 다닌 대학에서 외국어를 언제 습득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인지 여부와 외국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주위에 많이 있는 것이 득이 되는지 실이 되는지 여부에 대한 상관관계 등을 밝혀 보려고 연구하는 한국학생이 있었다. 자신의 경험과 연구결과에 비추어, 초등학교 저학년 때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것이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서 유학하는 것에 비하여 외국어 습득속도가 늦다는 중간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니 영어습득을 위해 어린 자녀들을 몇 년간 유학보내는 경우 그 시기를 잘 선택하여야 할 것이다.
귀국해서 느낀 것 한 가지. 신문이나 방송 및 그에 등장하는 정치인들이 영어를 너무 많이 사용하는 것 같다. ‘솔루션(해법, 해결책)’, ‘포털 사이트(종합정보사이트)’, ‘엔지오(NGO : 비정부기구)’, ‘시이오(CEO : 최고경영자)’, ‘시너지(상승) 효과’, ‘하이브리드(복합, 잡종)’, ‘바캉슈랑스(은행의 보험상품판매)’ 등이 그 예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영어 중에는 위와 같이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우리나라 말이 있거나 조금만 노력을 하면 듣기 좋은 우리나라 말을 만들 수 있을 터인데, 유식해 보이려고 일부러 그러는지 아니면 적절한 우리말을 사용할 능력이 부족해서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한때 일본의 잔재를 청산한다고 정부차원에서 건설공사장에서 사용되는 일본한자용어는 모두 우리말이나 우리의 한자용어로 바꾸어 사용하도록 하더니만, 유독 영어에 대하여는 왜 그리 관대한지 모르겠다. 그리고 길거리에 널브러져 있는 간판의 반 이상이 정체불명의 외국어로 되어있는 것 역시 눈꼴사납다.
최근에 ‘모레아’ 라는 장례식장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원래 그 단어가 갖는 의미야 좋겠지만 ‘무릉도원’이나 ‘천국’이라는 상호를 썼으면 그 훌륭한 시설에 걸맞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래서인지 고속도로 ‘인터체인지’나 ‘톨게이트’ 라는 용어보다 ‘나들목’, ‘요금정산소’ 라는 용어가 듣기가 좋다. 국어의 발전은 국어학자의 몫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의무라는 생각이 든다.
미국의 변호사 등록
귀국하기 한 달 전쯤에 변호사 등록을 위해 뉴욕 주 주도인 알바니에 간 적이 있다. 내가 사는 데로부터 1,300여 Km 정도 떨어져 있어 자동차를 타고 13시간 정도 가면 되는데, 하루에 가기에는 약간 먼 거리라서 고민이 되었다. 비행기를 타고 가자니 비용이 많이 들고, 자동차를 운전해서 가자니 몸이 피곤할 뿐 아니라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고민하는 것을 옆에서 보고있던 집사람이 “귀국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안전하게 비행기 타고 가자”면서 한마디 거든다. 하긴 중국속담에 행백리자반구십(行百里者半九十)라는 속담이 있지 않는가. 백 리를 가는 사람이 90리를 걸어야 비로소 절반을 지난 것이니 끝날 때까지 긴장의 고비를 늦추어서는 안될 것이라는 생각에, 비행기를 타고 가서 렌트카를 빌려 가까이 있는 나이아가라 폭포도 구경하고 오기로 계획을 짜게 되었다.
사실 나이아가라 폭포는 알바니로부터 4시간 이상 차를 타고 가야 되는 곳으로써 서울과 부산 정도로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 미국에 살다보니 몇 시간 정도 차를 타면 갈 수 있는 거리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내가 미국생활에 적응이 되긴 되었는가 보다.
그런데 알바니 공항에 내리자 양복을 넣어 둔 가방이 도착이 되지 않았고, 이에 미국에 처음 올 때 가방을 분실했다가 찾은 경험이 있는지라, 항공사 직원에게 혹시나 가방이 도착되면 내가 묵고 있는 호텔로 배달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면서 그래도 믿기지가 않아 전화번호를 달라고 한 후 공항을 떠났다. 수차 전화를 해도 가방의 행방을 모른다는 답변만 듣다가 그 다음날 외출하였다 돌아오니 호텔로 가방이 도착되어 있었다. 다행히 가방에 주소와 인적사항을 꼼꼼히 적어 둔 덕을 본 것이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변호사 등록절차를 모두 마치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의 변호사 등록절차와 달리, 미국 뉴욕 주는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자에게 귀찮을 정도로 많은 서류를 제출하도록 요구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개별적으로 인터뷰까지 하고 있다. 그 이유는 등록신청자의 도덕성에 대한 심사를 위한 것이다. 아마 그 서류만 준비하는데 열흘 정도가 걸린 것 같다.
알바니뿐 아니라 미국의 다른 지방을 여행하면서 느낀 것인데, 북미에 있는 미국 대부분의 주에서의 주도(州都)는 그 주에서 가장 큰 도시가 아니라 지리적으로 가장 한가운데 위치한 도시라는 것이다. 그 이유야 말할 것도 없이 주 거주자들의 접근편의성을 위한 것이리라. 그러니 국내로 눈을 돌려 몇 년째 논의만 거듭하고 있는 경상북도 도청 이전문제에 대하여 한가지 의견을 내어 본다면, 사통팔달로 뚫린 도로망을 고려하여 도청을 구미나 포항으로 옮길 것이 아니라 경상북도의 한가운데에 신도시를 건설하여 도청을 옮기는 게 어떨런지.
귀국길에 가졌던 한 가지 회상
귀국할 날짜가 잡히자 그동안 쓰던 물건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거나 팔게 되었다. 재산목록 중에 그래도 제법 돈이 되는 자동차 2대는 흥정 끝에 모두 중국인에게 팔고 나니 약간은 경제적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귀국하면서 하와이 주에 들러 쉬다가 왔는데, 여긴 미국땅이 아니라 아시아 국가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백인들을 보기가 힘들다. 호주에서 모래를 사다가 해변에 뿌린다는 그 유명한 와이키키 해변에 가보니, 오염이 거의 되지 않았다는 것 외에는 우리나라 해수욕장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하와이 시에서 비행기로 30분 정도 타고 가야 되는 마우이 섬 역시 소문과 달리 우리나라 설악산이나 한라산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자연을 최대한 보존하기 위하여 무척 노력하고 있는 게 우리나라와 다르다면 다른 것으로 보였다.
현재의 자연은 우리와 우리 후손이 공유하는 재산이므로 자연을 보존하는 것은 공유자로서 당연한 의무인데, 이 사람들은 그러한 의무를 잘 실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하우 섬(주도인 호놀룰루 시가 있는 섬임)에 있는 사탕수수밭을 돌아보게 되었는데, 100여 년 전에 이곳에 이민을 와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 번 돈을 모국의 독립자금에 쓰라고 송금한 하와이 이민 1세들에 대한 생각으로 가슴이 저려온다. 돌아갈 나라가 없었던 당시 이민 1세들은 조국이 독립할 수만 있다면 내 몸 하나 부서진들 어떠하겠냐는 생각을 하였으리라.
글을 마치며
일상에 젖어 지내다가 2년 정도 외유를 하고 오니 새로운 힘이 넘쳐 의욕이 앞서지만 아무래도 그동안의 공백을 메우려면 한 몇 달간은 고생 꽤나 할 것 같다. 당장 눈에 띄는 것은 한글 타이프 치는 속도가 느려졌다는 것과 때때로 미국법과 한국법에 대한 개념이 머릿속에 뒤죽박죽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이런 지경이니, 우리나라에서 유치원 다니다 미국에 가서 유치원과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온 내 둘째 아들 녀석의 머릿속은 지금 엄청나게 혼란스러울 것 같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중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는 큰 아들 녀석이다. 귀국하기 3달 전부터 한글공부를 하긴 했지만 그동안 잊어버린 한글과 2년 동안 하지 못한 국내 교과과정을 따라가려면 꽤나 고생을 할 것 같다.
결국 나와 가족들에게 있어 미국유학 준비기간과 귀국 후 적응기간을 합하여 유학은 5~6년이나 걸리는 사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쪼록 두 아들 녀석이 국내생활에 잘 적응하길 빌며, 먼 장래에는 지난 2년간의 경험들이 그놈들의 인생살이에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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