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러시아 공화국(북 카프카스)소치 – 스타브로풀 - 크라스노다르 – 노보로시스크
소치
소치는 흑해 북동 해안에 위치하며 배후에 카프카즈 산맥이 있기 때문에 겨울에도 따뜻한
아열대성 기후를 갖고 있으며 러시아 연방에서도 가장 유명한 휴양지/피한지이다.
철도와 항공로로 모스크바와 연결되며 선박으로 크림 방면과 이어진다.
소치와 인근한 지역으로는 그루지야 공화국이 있고 배를 타고 건너면 터키가 있다.
시역(市域)은 해안을 따라 140 km나 계속되고 휴양시설이 흩어져 있으며 관광기지/국제
회의장/국제스포츠경기장(레닌스타디움) 등이 있다.
관광 명소로는 마체스타 광천/ 나무 식물원/ 대규모 전망대/ 동쪽 약 100 km에 있는 산간의 리차호(湖) 등이 있다.
소치는 도시 전체가 공원과 같이 조성되어 있다.
여름엔 찬란하게 좋은 날씨이고 청명한 하늘이 매일 계속된다.
해수욕도 5월부터 10월경까지 즐길 수 있다.
따뜻한 기후와 깨끗한 공기/ 신경통과 류마티스 등에 효과가 있는 온천 등으로 얄타와 함께 러시아 최고의 휴양지로 손꼽히고 있다.
소치의 관광은 해안과 평행으로 달리는 크로르트니 대로를 중심으로 하면 좋다.
리비에라 공원과 덴드라리엄을 이으면서 남쪽으로 길게 뻗은 거리로 큰 호텔들도 위치하고 있으므로 길을 잘 모르더라도 쉽게 나올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역시 크로르트니 대로 주변으로 리비에라 공원/ 작은 카페 등의 자유로운 분위기의 작은 볼거리가 있다.
소치에서 북서쪽으로 약 30여km 정도를 가면 해발 300m 지점에 있는 옛 소련의 차 생산지 다고미스가 있다.
소치에서 동쪽으로 120km정도 떨어진 곳에는 리차 호수가 있다.
코카서스 산맥의 해발 950m에 자리잡고 있는 리차 호수는 주변에 아게프스타와 아체투가 등의 산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10월에도 눈을 볼 수 있는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의 소치는 러시아의 대도시와 항공로로 연결되어 있고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매일 항공편이 있다.
아들레르 공항에서 소치 시내로 가는 택시로는 약 25-30분 정도 걸린다.
버스와 봉고차로는 약 40 분 정도 걸린다.
모스크바에서 기차로 갈 수도 있는데 쿠르스키역과 카잔스키역에서 아들레르행 열차를 타면 된다.
여기서 소치까지는 택시도 있고 봉고차도 있고 버스도 많이 있다.
기차시간은 기차 종류마다 다르지만 보통 35시간 정도 달린다.
기차로 모스크바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일찍 예약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양한 종류의 호텔이 있지만 여름엔 방 구하기가 쉽지 않다.
여름엔 시내 곳곳 대학 곳곳에 소치의 휴식의 집(학생들 대상으로 3끼 포함 1인당 약 25불 정도)이 있고 공항 주변에는 숙소를 알선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조그만 호텔이나 자신의 집을 대여한다.
요양원(사나토리)에도 묶을 수 있는데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배를 타고 크림 반도를 통과한다.
슬라브 3국
러시아 연방은 구 소련의 큰 형님으로 14형제를 통제하고 있고 소련의 붕괴와 함께 러시아는 유럽과 아시아를 폭 넓게 비행하던 한 마리의 새가 부러진 날개를 부등켜 안고 방황하는 모습으로 비추어지고 있다.
국제무대에서 지난날 향유했던 가난한 날의 행복을 되찿기 위해 힘겨운 날개 짓는 러시아를 한없이 추락시키고 있다.
심각한 경제난에 봉착한 러시아의 경공업과 식품공업은 국내수요를 충족시키기에도 부족한 상태에 직면하고 있지만 러시아는 자신이 지배하는 CIS 테두리 속에 개별 회원국을 단합시키려는 정책을 지속하고 있다.
슬라브 국가들은 지정학적으로 NATO 국가 및 동유럽 국가와의 완충지역 역할을 수행하고 있고 러시아는 유럽 지역에서의 영향력 증대를 위해서 이들 슬라브계 국가와의 관계에 많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이들은 단일 국가를 거부하며 정치 경제를 중심으로 하는 각종 협력에 동참하고 있을 뿐이며 러시아를 중심으로 이주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개별 슬라브계 국가에는 민족상 러시아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으며 러시아는 이들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며 단일 및 유사한 혈통과 문화 그리고 전통을 지닌 이들 국가들은 러시아 및 CIS 거주를 외국이라는 개념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단순히 타 지역으로 주거 공간을 옮긴다는 생각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동현상은 민족 구성별 경제 활동 및 학업 지속 등과 같은 다양한 원인에 기초하고 있어 경제 활동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2.우크라이나 공화국
우크라이나 연방
우크라이나가 내건 슬로건인 '우크라이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는 여행자들이 선호하는 여행지가 아닌 듯 하지만 여행을 단념 시키진 못한다.
친절한 사람들/ 환상적인 건축물/ 스텝 대평원지대는 여행자들을 매료시킨다.
우크라이나는 주변 국가사이에서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스모그가 많은 공업도시에도 말뚝 울타리/ 오리 연못/ 짐을 가득 싫은 마차가 아직도 존재한다.
우크라이나는 현대적인 수도인 키에브(Kiev)에도 고딕/ 비잔틴/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과 예술을 향기가 남아있어 외국 관광객들을 찾아오게 한다.
거의 대부분의 도시와 마을은 백년 이상 된 성당과 민속 건물 야외 박물관/ 미라로 만든 수도승이 있는 동굴과 절묘한 모자이크를 어디서건 볼 수 있다.
음식 역시 훌륭하고 반두라(bandura) 로지는 편안한 휴식을 준다.
독립일- 1991년 7월 1일
UN가맹일- 1945년 10월 24일 창설가맹국
면적- 60만 3700킬로제곱미터
인구- 5160만명
수도- 키예프 264만 6000명
주요도시- 하리코프/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도네츠크/ 오데사/얄타
주요민족- 우크라이나인 동슬라브계 72.7% 러시아인 22.1% 유태인 0.9% 벨로루시인 0.9% 언어 우크라이나어
종교- 우크라이나 정교 우크라이나 카톨릭
정치 체제- 공화제
헌법- 1996년 6월 28일 제정
국민총생산- 841억달러
1인당 GNP- 1630달러
통화단위- 그리브나
주요교역국- 러시아/ 중국/ 이태리/ 스위스
주요자원- 석탄/ 철광석/ 망간
주요공산품- 철강/ 기계/ 화학/ 금속/ 식품/ 목재제품
주요농산물- 사탕무/ 감자/ 육류
무역- 수출 55억달러 수입 38억달러
기후 및 지리-우크라이나는 프랑스보다 조금 큰 크기로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큰 나라이다.
동쪽과 북쪽은 러시아/ 북쪽에 벨라루스/ 서쪽에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몰도바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흑해와 아조브(Azov)해가 남쪽에 위치한다.
지형학적으로 대부분 스텝 대평원 지대에 속한다.
서북부에서 남동부로 고지대가 이어지지만 높은 산은 서쪽 끝의 카파티안(Carpathians)으로 짧게 뻗어있고 남쪽은 크림 반도(Crimeans)다.
산림과 습지가 북부에 위치하고 남부의 나무가 거의 없는 광활한 스텝지대와 3000개의 강이 우크라이나를 흐른다.
소련의 곡창지대로 알려졌던 우크라이나는 국토의 절반 이상이 보리/ 호밀/ 귀리/ 사탕무 재배지고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 중에 하나인 중부의 부식토 지대는 국토의 2/3를 차지한다.
거대한 지역이 방목지로서 봄에는 흔들거리는 마키(붉은 양귀비 꽃)/ 소냐쉬니키(해바라기) 황금 겨자의 물결을 볼 수 있다.
평지는 거대하게 조성된 목초지로서 오크/ 단풍나무/ 리덴/ 물푸레 나무 등이 드문드문 보이기도 한다.
버드나무와 포플러 나무는 강을 따라 자라며 얇은 산림 벨트는 북부로 가로지르는데 전나무/ 너도밤나무/ 오크가 주종을 이룬다.
쉽게 눈에 띠는 동물은 하얀 거위와 오리로 수많은 연못이 전역에 걸쳐있다.
여우/ 사자/ 담비/ 가젤 영양 등의 동물과 350여종의 새 그리고 200여종의 민물고기가 서식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내륙은 온화한 대륙성 기후로 7월이 가장 덮고 온도는 평균 23도이며 가장 추운 1월에는 영하의 기온을 유지한다.
동부지역은 차가운 시베리아 풍의 영향을 받지만 서부는 따듯한 지중해 풍의 영향을 받아 해안도시인 얄타(Yalta)와 오데사(Odessa)는 내륙도시보다 따듯하다.
내륙은 6-7월이 가장 비가 많이 내리는 시기이고 해안은 12-1월에 거의 비가 오지 않는다.
자연환경- 유럽 남동부에 위치 서부 카르타피아 산맥 주변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흑토지대나 스텝지대 기후가 온난하며 흑해의 영향으로 비가 많아 토질이 무척 기름짐 석탄 철광석등 지하자원도 풍부 남부흑해 연안의 크리미아 반도는 세계적인 휴양지이다.
경제- 지구상에서 손꼽히는 곡창지대로 알려져 있다.
주요 재배작물로는 밀을 비롯한 곡류이외 사탕무/ 옥수수/ 해바라기/ 목화 /담배등이 있고 지하자원이 매우 풍부한 나라로 석탄/ 철광석/ 마그네슘등 총 40여종에 이르는 다양한 광물이 생산된다.
구 소련시절부터 타 지역에 비해 군수산업에 최첨단 과학기술분야의 세계적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연료에너지의 부존량이 없어 에너지 부족현상을 초래해 소비재의 절대부족과 전반적인 생산시설과 산업생산성이 낙후되는 현상을 초래한다.
산업 생산화의 안정화와 적극적인 외자도입의 필요성으로 외국기업의 현지투자를 적극장려 하고 외자활용을 통한 자립적 산업구조로의 조정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독립국가내에서 비옥산 농토와 풍부한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어 경제적 잠재력이 크다.
사회와 문화- 흑해와 지중해의 영향으로 문명이 발달해왔으며 수도 키예프는 1000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다.
우크라이나어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다.
역사-우크라이나는 역사는 기원전 7-4세기 스키티아인(Scythias)에 의해 스텝지대부터 흑해 북부지역을 지배받으며 시작됐다.
스키티아 문화의 흔적은 동물과 인간을 자세히 묘사한 뛰어난 금 세공품이 남아있는 키에브의 동굴 수도원(Cave Monastry)에서 찾을 수 있다.
스키티아인에 이어 오스트로고스/ 훈/ 투르크-이란 카자의 지배를 받는다.
스칸디나비아인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장기간 지배했는데 키에브는 기원전 882년 러시아에게 점령당한 후 10세기까지 다뉴브강 서쪽의 볼가(Volga)에서 발틱해의 남부에 이르는 영토였던 키에브인 러시아(Kievan Rus)의 중심도시 역할을 했다.
키에브인 러시아의 지도자인 볼로드미르는 988년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여 정치와 문화적으로 비잔틴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1520년에는 오스만 제국이 우크라이나의 해안지역을 통제했다.
15세기에 전쟁과 전염병의 많은 인구가 사망했으며 인접 국가의 카작인(코삭 인) 농노와 정교도 피난민들의 우크라이나로 이주해왔다.
우크라이나인 코삭(Ukrainian Cossacks)은 공식적으로 폴란드의 통제를 받고 있었으나 결국 국가를 만들어 자치를 했으나 20년 후 폴란드와 러시아로 분리됐다.
1940년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대두로 러시아는 학교에서 우크라이나 언어 교육/ 언론과 책을 금지시켰다.
1차 대전 후 전제군주제가 붕괴돼 우크라이나는 독립의 기회를 얻었으나 당파로 인해 내전이 발발하고 6개의 군대가 키에브를 일년동안 다섯 번이나 바꿔 통제하는 무정부상태를 야기했다.
러시아와 폴란드가 개입한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인종적 당파간의 연속적인 전쟁의 결과로 폴란드가 우크라이나의 서부를 러시아가 나머지 우크라이나를 차지하게 됐고 1922년에 공식적으로 러시아의 한 부분으로 편입됐다.
스탈린이 권력은 잡은 1927년 우크라이나에 억압을 가했고 1932-33년의 기근으로 7백만명이 사망했다.
지식인에 대한 사형과 강제출국은 인구감소를 심화시켰고 스탈린은 종교정책으로 250개의 교회와 성당이 파괴됐다.
1937-39년의 숙청기간동안 백만명이 사형을 당하거나 소련의 강제 노동수용소로 보내졌으며 2차 대전동안 소련과 독일군의 전쟁으로 6백만명이 추가로 사망하거나 강제출국 당했다. 20세기 초반 50년 동안의 전쟁/ 기근/ 숙청은 우크라이나 남자의 50% 여자의 25%에 해당하는 사람이 죽는 대가를 치뤘다.
1989년 발생한 체르노빌 사고에 대한 소련의 느린 보상으로 인해 광범위한 반소련 감정이 일어났다.
키에브의 지식인과 작가가 중심이 되 일어나 재건설을 위한 우크라니아 민족운동은 1990년 선거에서 다수석을 차지하게 했다.
7월에 국회는 자치권을 선포했지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며 91년 8월에 발생한 소련 쿠테타의 실패로 우크라이나 공산당(Commist Party of Ukraine/ CPU)의 활동이 금지됐고 12월에 국민의 지지를 얻어 독립해 우크라이나 공산당의 의장이었던 레오니드 크라브훅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파주의로 인해 92년 9월 정부는 사임을 하게되고 러시아의 핵무기와 흑해 함대(크림 반도의 항구인 세바스토폴Sevastopol) 문제로 인해 양국간에 긴장이 고조됐고 높은 인플레이션과 기름 부족/ 구매력 감소로 경제 위축과 더불어 지역간/ 인종간 격차가 더욱 심화됐다.
친 러시아 인사인 러오니드 쿠차마(Reonid Kuchma)가 94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됐고 우크라이나 공산당이 다수당이 됐다.
90년대 후반은 우크라이나와 NATO의 외교관계로 인해 러시아와 긴장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
2004년 10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쿠차마는 푸틴을 만나 우크라이나는 NATO가 아닌 러시아와 옛날의 관계로 돌아선다고 다짐했다.
문화-술은 풍부하며 보드카를 즐겨 마신다.
서양 국가들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보쉿(빨간 순무가 든 러시아 스프)/ 그림을 그린 계란/ 유명한 카삭 노래와 춤을 추는 전통은 우크라이나에서 기원한 것이다.
서 우크라이나인은 자신들이 순수한 우크라이나인으로 차처하고 있으며 문화의 선봉으로 우크라이나 언어를 쓰고 민족주의를 퍼뜨린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동부지역은 천만명의 러시아인이 살고 있으며 민족주의도 약하고 대부분 러시아어를 쓰고 있다.
우크라이나어는 러시아어/ 벨라루스어와 같은 동부 슬라빅 언어로 불가리아에서 전래된 정중한 슬라브 교회 이전의 키에브에 있던 9세기 스라브어와 가장 근접한 언어다.
러시아와 폴란드는 1876년 짜르 알레산더(Tsar Alexander) 2세 때 우크라이나어 사용을 금지 시켰으나 현재까지 보존되고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1990년에 우크라이나어가 공식언어로 정해졌으며 러시아어도 통용된다.
우크리이나 문학작품은 12세기의 슬로보 오 폴쿠 이레빔같은 중세 슬라브의 연대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대 문학의 시작은 '우크라이나의 소크라테스'로 칭송 받는 18세기의 흐리홀리 스코보로다가 우크라이나어로 쓴 시와 철학 책으로 지식인보다는 일반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타라스 쉐브첸코(Taras Shevchenko)는 농노 출신의 국민적 영웅으로 최초의 대중적인 작가로 그의 작품은 우크라이나 문학의 황금기를 열었다.
20세기 초반의 가장 능력 있고 다작의 작가인 이반 프랑코(Ivan Franco)는 소설/ 시/ 드라마/ 철학과 동화에 걸쳐 방대한 작품을 썼다.
많은 작가들은 소련의 지배동안 고통받은 내용을 주제로 하고 있고 불일치의 고뇌를 시로 쓴 Winter Trees('68)/ Candle in the Mirror('77)의 작가 바실 스투스(Vasyl Stus)는 소련의 강제 노동수용소에서 사망하기도 했다.
키에브의 우크라이나 작가 연합은 91년 독립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음악은 백년이상 된 서사시와 코삭인의 업적을 찬미하는 발라드 서정시인 두마스(dumas)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민속 음악은 16-17세기 음유시인인 코즈바(kozbar)의 기타와 비슷한 악기인 코즈바로 연주한 코삭 영웅의 노래가 기원이다.
45개의 현으로 된 커다란 악기인 반두라(bandura)는 18세기에 들어 코즈바를 대체했고 반두라 성가대가 대 유행하였으며 악기는 국가의 상징이 됐다.
키에브의 반두라 성가대는 현재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클래식 작고가 중에는 우크라이나 민속 노래 피아노 작품으로 유명한 미콜라 리센코가 있고 현대 음악은 펑크 밴드인 플라치 예렘릴과 싱어 송 라이터인 니나 맛비엔코가 유명하다.
우크라이나에 기독교는 10세기에 전래돼 천주교와 정교도로 1054년 분리된 후 정교도는 러시아 정교와 로마 천주교의 다른 영향을 받아 3개의 큰 종파로 나뉘어졌다.
교회건물은 나무로 만든 독특한 양식으로 박공 구조와 지붕 널로 된 돔과 큐폴라스가 못을 쓰지 않고 만들어져 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막기 위해 소련은 12세기의 성당을 포함해 백 여개의 신성한 건물을 1930년대 파괴시켰다.
그림은 지붕에 종교적인 주제를 그렸고 17세기에는 예수/ 성모 마리아/ 천사/ 성인의 작은 이미지를 라임 나무에 그렸다.
코삭인의 부흥으로 민족주의를 주제로 한 종교 미술 학교가 등장했고 소련의 현실주의 등장으로 실험적 작품과 민족주의 주제가 다시 유행했다.
우크라이나 음식은 곡물과 감자/ 배추/ 콩/ 버섯 같은 채소가 주요산물로 채식이 주를 이루며 고기는 대부분 삶거나 볶아 먹는다.
후식은 체리나 자두가 꿀과 함께 서빙된다.
바레니키는 작은 만두로 인기 있는 스낵이고 돼지 비게인 살로는 신성한 음식이다.
살로의 전통은 1세기가 넘는 것으로 프랑스인이 와인에 매혹된 것처럼 우크라이나인도 살로에 매혹돼있다.
보쉿(borscht)은 우크라이나에서 유래한 스프로 전국적으로 즐기고 있고 소고기와 야채 스프는 전통적으로 크림과 같이 서빙된다.
우크라이나 음식을 제대로 맛볼려면 현지인 가정을 방문해야 먹을 수 있고 맛있는 우크라이나 음식은 우크라이나에서 찾기 어려운데 대부분의 고급 레스토랑은 유럽스타일의 음식을 판매하기 때문이다.
축제 및 행사-우크라이나는 신년에 휴일 축가를 부르며 정교 크리스마스는 1월 7일이다.
파스카(paskha/부활절)는 정교도 교회의 연중 가장 큰 축제로 자정 예배로 시작해 전국적으로 교회 주변에서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르비브(Lviv)에서 열리는 국전기간인 5월은 음악과 극장공연이 한달 내내 이뤄진다.
수도에서는 5월 마지막 주말에 키에브의 날이라는 봄 축제가 있다.
8월에는 크림 반도 축제가 얄타에서 열린다.
8월 28일에는 포차일브(Pochaylv)의 수도원에 성모취임 대축일을 기념하기 위한 순례자들이 모여든다.
8월 24일 독립 기념일은 도시마다 공연과 특별 행사를 실시한다
경비-음식가격이 싼 편이고 숙소도 그런대로 버틸수 있다.
편하게 여행을 하려면 하루에 US$200은 필요하며 수도인 키에브는 가격이 15-30% 높다.
중급 가격대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중급 호텔에서 잔다면 하루 US$150 정도면 충분하다.
직접 요리를 하고 도미토리에서 자고 일반 교통수단을 이용한다면 경비는 더 줄어들 것이다.
환전소의 환율은 호텔보다 높고 어디서나 그리니아로 환전이 가능하지만 여행자 수표와 신용카드는 은행과 대도시의 일부 환전소에서 환전이 가능하다.
현금을 들고 다니는게 여행에 편리하며 미국 달러와 유로화가 일반적으로 유리하다.
경화를 식당과 상점에서 사용하는 건 공식적으로 금지돼있지만 외국인 여행자들이 오는 곳에서는 경화가 통용된다.
여행자들을 위한 고급 식당은 5%의 서비스 요금이 영수증에 포함되지만 10-15%의 팁을 추가로 주는 게 좋다.
기념품/ 수공예품 시장에서는 가격 흥정을 하는 게 바람직하고 가끔 불쾌한 경험을 당할 수도 있다.
(크림반도)케르치 - 심퍼플 - 얄타 - 돈데스크 - 카르키브 - 오데사
얄타
지중해식 기후를 이루는 데다가 배후에 있는 산지가 차가운 북풍을 막아 예로부터 휴양지로 이용되었다.
차르의 여름 궁전이 이곳에 세워졌으나 러시아혁명 후 요양소/휴식의 집 등이 다수 건립되어 결핵의 전지요법 연구소 등 의료기관이 많다.
1945년 2월 루즈벨트/처칠/스탈린 등 3국 수뇌가 모여 한반도의 분단을 결정한 얄타회담이 여기에서 열렸다.
현재 얄타에는 아직 1945년 스탈린/ 루즈벨트/ 처칠이 회담장으로 사용했던 리다비야가 의자까지 보존되어 남아 있다.
7월의 평균 기온은 24℃ 정도이고 10월에도 20℃정도의 온도를 유지하므로 바닷가에서는 9월 정도까지는 수영을 할 수 있다.
크림반도의 남부 해안에 위치한 얄타는 18세기에 러시아의 지배를 받기 시작해 흑해의 전형적인 리조트로 발전해 갔고 짜르 알렉산더 2세의 여름 별장이 인접한 리바디아에 위치했다.
얄타는 혁명 전까지는 귀족들만의 휴양지였지만 혁명 후에는 귀족들의 별장을 휴양소로 바뀌었으며 현재는 관광객들이 휴가를 즐기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흑해와 크림 산맥의 조화로운 모습이 '크림의 진주'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얄타에는 공항이 없기 때문에 심페로폴 공항을 통해 얄타로 들어갈 수 있다.
공항에서 얄타까지는 약 1시간이 소요된다.
심페로폴로 공항으로는 모스크바/ 상트 페테르부르크/ 키예프 등에서 항공편이 있으며 모스크바를 제외한 여타 도시에서는 주 1회 운항 한다.
얄타의 중심가는 얄타만의 동쪽 끝에서부터 이어진다.
모든 이들에게 매력적인 차가 없는 강변 산책로인 나베레즈나 레니아(naberezhan Lenia)는 선착장/ 야자수/ 자갈이 많은 해변/ 상점/ 예술품 시장이 있다.
얄타의 가장 좋은 해변은 비스트라(Bystra) 입구의 서쪽에 있는 얄타만에 있다.
얄타만의 절반에 이르는 길과 나베레즈나의 뒷편은 의자식 리프트가 있고 사원처럼 생긴 전망대가 언덕에 있다.
리프트의 서북부는 알렉산더 네브스키 성당(Alexander Nevsky Cathedral)으로 신 비잔틴 양식의 건물로 백년 전에 지어졌다.
위대한 러시아의 극자가인 안톤 체홉(Anton Chekov)의 팬이라면 그의 생애 마지막 5년을 보낸 체홉 생가 박물관을 방문할 것이다.
바도파드나야 강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나온다.
얄타의 시가지는 흑해를 따라 계속되는 해안과 구릉지대 사이에 펼쳐져 있다.
해안을 따라 뻗어 있는 레닌 해안 거리의 동쪽 끝에는 레닌 광장이 있다.
그리고 얄타 항구가 나온다.
얄타에서 남쪽으로 얼마 가지 않으면 '아이페트리' 라 부르는 산에 아루프카가 있다.
이곳은 제정 시대 대지주 보론초프 백작의 궁전이 있는 데 19세기 러시아의 전형적인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건물 내부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곳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흑해의 모습도 매우 아름답다.
오데사
오데사는 유혹적인 해변 휴양지이며 매연이 심한 공업 항구이기도 하다.
지금은 우크라이나 영토가 된 얄타와 마찬가지로 '흑해의 진주'라 불리는 항구도시이다.
이곳에서 루마니아/ 불가리아/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등과 연결되는 배가 출발한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이미 도시가 창설되었으나 지금의 형태로 정비된 것은 예카테리나 2세 때의 일이다.
여제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했던 표트르 대제의 영향을 받아 '흑해를 향해 열린 러시아의 창'으로 이 도시를 건축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나치에 점령되어 파괴되었지만 지금은 옛날의 모습대로 완전히 복구되었다.
옛날부터 국제 무역도시로서 번영해 왔기 때문에 도시에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온천이 솟아나고 진흙 치료도 행해지고 있어 요양소가 많다.
1792년 건설된 러시아의 요새가 시의 기원이며 1794년에 군항이 되고 1795년에 부근에 있었던 고대 그리스의 식민도시 오데소스(3∼4세기에 멸망)를 기념하여 이름이 지어졌다.
19세기 후반에는 밀의 대규모 수출항으로서 크게 번영하였으며 남러시아 최대의 항구가 되었다.
이 무렵부터 시내의 도시계획이 진행되었으며 구(舊)시가가 정비되고 프리모르스키 대로(부두와 시가를 잇는 유명한 '포템킨의 계단'도 그 일부)가 건설되었다.
흑해에서 오래된 선박기지이며 우리크라이나 남부의 중심 도시로 1905년의 혁명 당시 반체제 노동자들을 지원한 전쟁선 포템킨 타브리체스키의 반란의 중요한 역할을 한 도시로도 유명하다.
1941년 가을에는 독일군의 포위를 69일간 버팀으로써 '영웅도시'의 칭호를 받았다
현재는 박물관의 훌륭한 소장품으로 인해 도시가 잘 알려져 있다.
도시의 중심부는 해안에서 불과 몇백 미터 거리에 있는데 아름다운 저층 건물/ 가로수가 이어진 길/ 오페라와 발레 극장으로 이루어져있다.
1880년 비엔나 건축 디자인으로 지어진 극장은 바로크와 르네상스의 향기가 혼재해 있다.
인접한 파사즈(Pasazh)는 호화스런 쇼핑 몰이 들어서 있다.
도시 중심부는 오데사의 유명한 박물관들의 현장이기도 한데 고고학 박물관은 1875년에 설립돼 보석과 동전을 포함해 흑해 문명의 창조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길 건너에 있는 해양 역사 박물관은 선박제조/ 항해술 모델/ 해군 장식품이 전시돼 있다.
문학 박물관에는 세브첸코/프란코/체홉/푸쉬킨/톨스토이/고르키의 작품을 맛 볼 수 있다.
오데사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거대한 포템킨 계단으로 1925년 아이센스타인의 영화 전쟁선 포템킨(Battleship Potemkin)의 촬영 장소였다.
카타콤비(katakombi)로 알려진 오데사에 있는 1000km의 터널은 19세기에 건설됐는데 밀수꾼/ 혁명 당원/ 2차 대전 당시의 게릴라들의 피신처로 사용됐었고 게릴라 대원이 만든 터널안의 피난처는 박물관(Museum of Partisan Glory)으로 쓰이고 있고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로 관광객을 위한 가이드 투어를 실시하고 있다.
카타콤비는 버스로 이동이 가능하다.
남쪽 해변은 휴양지로서 사철을 통하여 많은 관광·휴양객이 찾아 든다.
기차로 국경선을 통과한다.
13. 몰도바 공화국
몰도바 공화국
몰도바에선 그 어느것도 소련연방에서 분리한 것 처럼 잘되는 것은 없다.
새롭게 형성된 구 소련 공화국인 이곳은 자기자신의 이익과 합병을 도모하고난 뒤의 지역처럼 남김없이 축내게 되는 부단한 위험에 처해있다.
공화정체 지지자들이 모든 개개인들을 단결시키고 부분적으론 루마니아인과 러시아인이면서 전체적으론 몰도바인인 모순점을 제거하려고 노력하기에 단일체와 평화로운 공존은 항상 내전과는 멀리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이러한 정치적 긴장들에 더해진 것은 러시아 루블화의 운명과 거의 한배를 탄듯한 경제가 가져다 준 몰도바 화폐의 침체이다.
이런 모든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몰도바는 만들어 내기 힘든/ 오래되고 세계적인 매력을 가진 그림과도 같은 곳으로 기복을 이룬 푸른 언덕들/ 회반죽으로 칠해진 마을들/ 잔잔한 호수들/ 해바라기 벌판들이 있다.
또한 유럽 최고의 포도농장이 몇 있다.
6-7달러면 약간의 값싼 포도주를 살수 있는데 이 포도주가 서방 국가들에선 기둥뿌리를 뽑아야 할 가격일수 있다.
몰도바가 완전히 서구화되기 전에 가보도록 하자.
독립일- 1991년 8월 27일
UN가맹일- 1992년 3월 2일
면적- 3만 3700킬로제곱미터
인구- 430만 명
수도- 키시뇨프 66만 7100명
주요도시- 티라스폴리 콤라트
주요민족- 몰도바인 64.5% 우크라이나인 13.8% 러시아인 13% 가가우스인 3.5% 불가리아
인 2%
언어- 몰도바어 공용어
종교- 러시아정교 카톨릭
정치체제- 공화제 대통령 중심제
헌법- 1994년 7월 28일 신헌법 채택 8월 27일 발효
국민총생산- 40억 달러
1인당 GNP- 920달러
통화단위- 레이
주요교역국- EU와 미국
주요자원- 석탄/ 인광석/ 석고
주요공산품- 식료품
주요농산물- 포도/ 밀
무역- 수출 7340만 달러 수입 2억 7050만 달러
지리 및 기후-아르메니아(Armenia)를 제외하곤 몰도바가 예전 소련 공화국들 중 가장 작은 곳이지만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곳 중 하나이다.
하와이의 약 2배쯤 되는 크기로 작은 땅덩어리이며 대충 삼각형의 모양으로 커다란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의 영토에서 잘려있다.
루마니아는 몰도바 서쪽에 있으며 우크라이나는 몰도바의 북부/ 남부/ 동부 국경을 감싸고 있으며 이는 몰도바 남쪽 대부분의 지역이 흑해(Black Sea)에서 불과 100km(62마일)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몰도바를 사실상 육지로만 둘러싸인 공화국으로 만들고 있다.
가장 중요한 지리학적 특징 두 가지는 프루트(Prut)강과 드니에스트르(Dniestr)강으로 단지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각각 자연적인 국경을 형성하는 것 뿐 아니라 몰도바의 가장 귀중한 자원 중 하나인 비옥하고 기름진 토양을 제공해 준다.
이곳 풍경은 주로 평평한 스텝(높낮이가 완만한 광대하고 나무가 없는 초원) 또는 시각적인 안정을 주는 삼림지대가 몇 있는 완만하게 기복을 이룬 언덕들이다.
아직까지 멧돼지/ 오소리/ 여우/ 늑대와 다양한 종류의 사슴들을 스텝지역에서 볼 수 있지만 몰도바는 너무 작고 인구밀도가 너무 높아 야생동물을 위한 공간이 그리 많지 않다.
넓은 황무지대들이 마구 뻗고 있는 포도 농장들과 여름철이면 눈부신 해바라기의 카페트가 되버리는 경작지들에 의해 차지되어 왔다.
특별히 과수원들과 회반죽으로 칠해진 마을들을 만나면 이때가 바로 이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기다려왔던 순간이다.
하지만 이런 엽서의 사진처럼 예쁜 몰도바는 덜 매력적인 실체를 숨기고 있다.
30년동안의 소련 산업팽창으로 환경이 가장 큰 손해를 입었고 몰도바는 지금 뿌린대로 거두고 있다.
화학비료와 살충제의 무차별한 사용은 토양을 위험할 정도로 높은 수준의 독성이 함유되게 하였고 과도한 산림의 벌체와 야생동물보호의 실패는 생물의 다양성을 급격히 감소시켜왔다.
1990년대 초반부터 몰도바는 여러 환경보호선도활동에 참여해 왔고 최악의 무절제했던 것 몇몇을 바로 잡고 있다.
몰도바는 종종 서부유럽과 비슷한 온화한 기후를 가진 곳으로 분류된다.
따뜻한 시기가 일년 중 4분의 3이상 지속되고 평균 이틀에 한번 꼴로 햇빛이 비춘다.
이런 기후조건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전히 바하마군도 같진 않다.
평균기온이 오히려 쌀쌀한 10C(50F)주변을 맴돌고 겨울에는 일반적으로 0C아래 몇눈금 더 떨어진다.
자연환경- 국토의 중앙은 표고 300m 내외의 구릉지이며 흑토가 덮여있어 비옥한 편이다.
과일과 농작물 재배가 잘되며 구 소련연방에서 가장 농업 생산성이 높았던 곳이다.
농업지대에는 저수지와 관개용수로가 잘 발달 기후는 겨울보다 여름이 긴 편이며 건조 덥다.
경제- 몰도바는 젼형적인 농업국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포도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한해수출의 62% 수입의 67%가 독립국가연합국에 의존한다.
사회와 문화- 루마니안과 핏줄을 나눈 라틴계 민족이다.
두 나라간의 동포의식이 무척 강하다.
언어면에서도 몰도바어는 루마니아의 지방 사투리인 셈이다.
역사-원래 몰도바는 더 커다란 몰다비아(Moldavia)의 부분이었지만 큰 놈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힘없는 아이로 역사의 많은 시간을 보냈다.
몰도바는 러시아의 암반지역과 루마니아의 불모 지대사이에 바로 놓여 있고 항상 국경분쟁과 영토 확장정책의 초점이 되어 왔다.
몰도바의 빈약한 통일이전에는 이곳은 황폐되고/ 쪼개지고/ 다시 합쳐지고/ 정복당하고/ 병합되고/ 개명되고/ 그리고 셀 수 없을 만큼 여러 번 이곳을 되찾아 왔다.
몰다비아 공국(公國)에서 몰도바 공화국까지의 시간은 잔인하고 긴 여행이었고 나라를 수호하기위해 흘려진 피를 의미하는 하나의 붉은 줄무늬를 가진 국기가 어울려 보인다.
몰도바인은 AD100년 로마인에게 정복당한 다시아인(Dacian)에서 유래된다.
몰도바는 주변국들에 의해 침략받고 동유럽에 걸쳐 퍼져있는 마자르족/슬라브족과 불가리아인들의 이산에 대한 초점이 되어온 지역이기에 불안정과 변화의 천년이 뒤따른 곳이다.
또한 비잔틴(Byzantine)/ 이탈리아/ 그리스 상인들의 기항항 역활을 했던 곳이다.
중세기 초기까지 인구의 유동이 희미하게 사라져가고 조직된 국가가 출현하기 시작했을 때 몰다비아(루마니아의 한 지역으로서)는 이미 서로 다른 인종과 문화의 혼성곡이 되었다.
14세기 중반 동안 스테판 셀 마레(또는 스테판 대왕)의 통솔아래 있었을땐 몰다비아 공국은 번영했으나 그의 아들이 그 뒤를 이을 때쯤 터키군은 너무 강해졌고 몰다비아는 오토만(Ottoman)제국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후 러시아인들이 처음으로 몰다비아 국경에 나타났던 1711년까지 터키의 종주권아래 있었다.
러시아군대가 처음에는 격퇴당했지만 그 다음 세기에는 러시아와 터키가 맹렬하게 싸웠다. 합병/ 분할/ 소규모전투/ 침략과 전쟁들이 당시 유행처럼 일어났다.
몰다비아는 지배권력을 수 없이 교체했다.
1774년에 오스트리아는 서로 싸우고 있는 러시아와 터키사이에서 평화협정을 중개한 댓가로 북부 몰다비아를 얻었고 부코비나(Bukovina)로 개명했다.
1812년 터키와 러시아의 전쟁상태는 부차레스트협약(루마니아의 수도)에 서명함으로 일시적으로 휴전되었고 이 협약은 러시아에게 몰다비아의 동부 절반(러시아는 이 지역을 베사라비아로 개명했다)을 주었고 몰다비아의 나머지 부분과 왈라치아는 루마니아에게 주어졌다.
러시아는 루마니아의 전략적인 지역들에 대한 통제권을 얻기 위해 갖은 재간과 사소한 것도 시시콜콜하게 따지며 끈덕지게 노력했고 1878년에는 베사라비아의 국경을 루마니아안으로 넓히기 위해 다른 초 강대국들과 두세번에 걸쳐 밀실거래를 했다.
베사라비아는 자유의지의 이데올로기가 기세 좋게 의사 일정으로 되돌려진 1918년 볼셰비크혁명(Bolshevik Revolution)까지 러시아의 통제아래 있었다.
베사라비아는 스스로를 자치공화국이라 선언하며 역사의 현저한 변화에 반응을 보였지만 우크라이나가 베사라비아의 무방비 상태인 측면에 투기적인 시선을 던지기 시작한 후 안전을 위한 조치로서 루마니아와 재통합하기를 결정했다.
레닌에 의해 수여된 자치권은 하나의 사건이었고 오랜 적과의 재통합은 전적으로 다른 사건이었다.
재통합은 소련 연방에 의해 결코 인정되지도 묵과되지도 않았고 1924년 레닌에게 충성스러운 한떼의 소작농들이 분리된 몰다비아 자치 소련사회주의 공화국(Moldavian Autonomous Soviet Socialist Republic; MASSR)을 형성했고 이는 후에 트랜스드니에스트르(Transdniestr)공화국이 되었다.
1939년 동유럽을 나누자는 소련과 독일의 합의인 몰로토프-립벤트로프 조약(Molotov-Ribbentrop Pact)은 더 큰 지역인 베사라비아에서 자라고 있던 ASSR과 결연한 USSR에 베사라비아를 반환했고 USSR은 이 전체지역을 몰다비아 소련 사회주의 공화국(Moldav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MSSR)으로 개명했다.
수천명의 베사라비아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Auschwits)로 이송되었던 기간인 1,941년과 1944년 사이에 루마니아군은 이 지역을 재 점유했다.
1944년 루마니아는 이 점유에 대한 단념을 강요받았고 소련당국은 다시 한번 이곳의 통제권을 취했다.
그 결과 몰다비아는 소련화가 되었고 이는 25,000명 이상의 몰다비아 민족을 시베리아와 카자흐스탄으로 퇴거시켰고 유대교 교회당을 폐쇄했으며 종교행사를 금지하고 라틴어 근본의 루마니아 알파벳에 키릴(Cyrillic)철자를 쓰도록 강요했다.
또한 모든 늘상의 기념비 건축/ 조상 제작/ 거리이름의 작명과 정복당한 민족에게 억지주문을 강요하는 시립광장 봉헌잔치가 있었다.
1980년대 중반의 공산주의의 붕괴와 고르바초프의 공식적 개방정책인 글라스노스트(glasnost)정책과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정책으로 민족주의자인 몰도바 인민전선(Moldovan Popular Front)은 마침내 그들의 입장을 알리기 위한 포럼을 가졌다.
수년간의 개혁과 협의가 뒤따랐다.
1989년에 라틴알파벳이 공식 문어(文語)로서 재도입 되었다.
1990년에 몰도바 국기가 임명되었고 몰도바 주권선언이 통과되었다.
1991년에 몰도바는 마침내 완전한 독립을 선언했고 공산주의자인 미르체아 스네구르(Mircea Snegur)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독립이 몰도바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진 못했고 사실 몇몇 새로운 문제들을 만들었다.
트랜스드니에스트르의 슬라브 소수민족들은 러시아와의 문화적 사회적 유대관계의 유지를 열망하며 반면 남부의 터키어를 쓰는 가가우즈(Gagauz) 소수민족은 루마니아와의 재통합 가능성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몰도바가 소련과의 탯줄을 끊고 공화국으로 선언하자마자 트랜스드니에스트르 당국은 이 공화국에서 탈퇴했고 모국 러시아에 대한 충절을 몇번이고 외쳤다.
가가우즈 민족이 남동쪽에서 그들 자신의 분리된 공화국에 대해 중얼거리기 시작하자 사태는 더욱 복잡해졌다.
새로 출범한 몰도바 공화국은 순간적으로 수축했다.
마침내 가가우즈는 더 커다란 지역의 자치권과 정부내의 대표자에 대한 약속을 받은 후 누그러졌지만 트랜스드니에스트르 공화국은 몰도바와의 합병을 완고히 거절해 오고 있다.
어색한 타협이 이 지역에 러시아-드네스트르-몰도바 3국 평화유지군의 주둔을 이끌었지만 분리주의자 반란군과 몰도바 정규군간의 산발적인 전투가 아직도 발생하며 강경노선을 추구하는 탈퇴론자들이 독립의 공식적인 인정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
파이프라인에 엄격한 비용 절감조치와 함께 찾아온 경제적 재앙들과 더 강하고 더 빠른 개혁을 주창하는 이들과 공산주의 통치스타일로 돌아가자고 요구하는 이들 사이에서의 정치적 분투가 이러한 내부 긴장상태에 더해졌다.
문화-몰도반레우(Moldovan leu)는 나무랄데 없는 방식으로 시작했지만 레우의 경제적인 운명은 러시아루블에서 빠져 나올 수 없게끔 연계되어 있었다.
루블화가 통제불능의 공전 안으로 빠져 들었을 때 레우화도 그에 따랐고 1998년 말에 통화가치가 폭락했다.
통화가치 폭락은 이 지역을 경화(硬貨)가 없는 곳으로 만들었다.
축제 및 행사-몰도바에선 종교의식행사가 극히 드물게 열리는데 이는 주로 공화국이 아직 초기단계이며 고통스러운 초기 문제점들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축제나 행사를 개최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모든 옛 레닌 동상들의 잔해를 말끔히 치울 시간도 거의 없다.
사실 몰도바의 행사 하나로 독립기념일이 8월 27일에 열린다.
트랜스드니에스트르의 거주민들에게는 이것은 마치 황소 앞에서 붉은 천을 흔드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 행사는 주로 드니에스트르강 동쪽에 사는 이들에 의해 보이콧 된다.
경비-몰도바는 소련의 3단 가격시스템(능력에 따라)이 아직까지 효력을 발휘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구 소련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여행객들에겐 만만치 않은 장소이다.
가장 큰 지출은 숙박비이지만 만약 더운물이 잘 안 나와도 너무 흥분하지 않고/ 약간 무뚝뚝한 호텔직원의 태도를 참을 수 있으며/ 옥수수 죽과 케밥으로만 끊임없이 나오는 식사를 게의치 않는다면 하루에 $70로 그럭저럭 살 수 있다.
음식에 양념좀 더치고/ 샤워도 확실하며/ 미소를 받으며 호텔방을 얻으려면 하루에 $90정도 든다.
만약 비단소파에/ 은쟁반에 음식이 나오는 곳을 찾는다면 하루 $200이상 써야 할 것이다.
몰도바에선 아직도 오래되고 훌륭한 배달없는 현금 판매제도가 운영되므로 미국 달러를 많이 가져가고 잔돈도 얼마 챙기자.
준비된 잔돈의 부족이 종종 있어서 레우화 잔돈 대신에 성냥 한갑이나 빵 반덩어리를 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몰도바에선 몇몇 은행들이 환전을 해줄 것이며 한군데는 비자나 마스터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을 때 4%의 수수료를 받지만 여행자 수표는 거의 환전하는게 불가능하다.
이는 단지 몰도바 어디에서도 여행자수표가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신용카드를 점검 받을때의 얘기이다.
트랜스드니에스트르(국제사회의 인정을 제외하곤 모든 것에서 분리된 공화국이다)는 그들 자신의 통화인 트랜스드니에스트르 루블을 소개해 왔다.
이것은 대략 독점화폐로서 가치가 있지만 안정적이거나 똑바로 정진하진 않는다.
인플레이션이 위기적인 용융상태에 다다르면 아무 근심도 없이 계산서에 동그라미들이 붙으며 이는 경제학자의 눈에 눈물을 보이게 할지도 모른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푸른색 50,000짜리 지폐가 50,000루블의 가치가 있고 반면 갈색의 50,000짜리 지폐는 실제 500,000루블의 가치가 있으며 5루블짜리 지폐에 만약 은빛 홀로그램이 붙어있다면 실제로는 50,000루블의 가치가 있다. 그
리고 트랜스드니에스트르 밖에서는 그 어느것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레스토랑과 택시 이용시 10%-15%의 팁이 필요하다.
치시나우 – 가가우지아 – 티라스풀 – 트란스드내스트르
치시나우
치시나우는 공원들과 호수들이 옆에 놓여있는 비크강(Byk River) 기슭에 위치한 놀라울정도로 푸른 도시이다.
이 도시는 교통의 중심지임에도 불구하고 예쁘게 나무가 줄지어선 거리들은 수도라기 보다는 오히려 루마니아의 한 시골마을을 닮았다.
세계 2차대전때 폭격으로 치시나우 옛건물들의 거의 3분의 2가량이 파괴되었고 이곳은 명백히 재건된 도시이다.
아직도 위엄있는 옛 건물들과 러시아식 둥근 지붕의 대성당들이 많이 있지만 스탈린 주의자 시대 때의 우뚝선 굴라그-잿빛(Gulag-grey)의 상자같은 건물들/ 도시 주변에 생겨나고 있는 수 많은 펑키 스타일의 바와 카페들의 분점과 만연해있는 경제의 현실에 역행해 가려는 힘겨운 노력들이 이런 옛 건물들과 섞여있다.
그러나 일단 주변 시골지역에 가보면 빈곤의 범위가 명확해진다.
유명작가 알렉산더 푸쉬킨치시나우에서 수년간의 유배생활을 보냈다)과 미하이 에미네스쿠의 동상을 제외하곤 이 도시에 직립해 있는 거의 모든 석공품은 일종의 전쟁 기념비이다.
스테판 셀 마레 대로의 서쪽 측면에 솟아 있는 스테판 셀 마레 공원안에는 스테판 셀 마레의 동상이 있다.
말할것도 없이 중세 때 전사였던 왕자는 아직도 몰도바에서 영웅같은 존재이다.
몰도바 주변에는 많은 수의 미술/ 역사 박물관들이 널려있지만 국립 역사박물관(National History Museum)에는 정말로 정신이 들만한 전시물이 있다.
그것은 1945년 소련의 치시나우 침공을 실물크기로 묘사한 것이다.
마치 실제가 전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슬레이트 잿빛의 말에 올라탄 슬레이트 잿빛의 이 모든 장정들에 대한 대책은 동시대의 미술이 전시중인 전시홀(Exhibition Hall)로 피해 가는 듯 하다.
전시홀안 갈레리아 브란쿠시(Galeria Brancusi)에는 국제적으로 예술적 가치가 있는 작은 소품들을 수집하는데 관심이 있는 이들을 위해 판매용인 것들이 있다.
치시나우는 방향적으로 도전된 엄격한 바둑판무늬체계의 곧은 길들을 만든 재봉사이다.
치시나우의 주요거리는 스테판 셀 마레 대로로 남동쪽에서 북서쪽으로 도시를 가로지르고 있다.
북쪽 끝에는 주요 대성당들과 몰도바 아크 드 트라이옴피(Moldova's Arc de Triomphe)같은 엄청난 건물들이 우뚝 솟아있는 중앙 광장이 있다.
레스토랑과 호텔들이 시 중심지 전역에 퍼져 있다.
비록 거리들이 곧게 뻗는 방식으로 놓여있지만 거리 이름들은 그렇지 않다.
어떤 거리는 몰도바 이름을 가지고 있고 어떤 거리는 아직도 러시아 이름을 쓰며 어떤 곳은 옛 것과 새것 둘 다 가지고 있다.
포도주 양주장
불행히도 몰도바의 포도주 양조장 대부분은 오직 공식적으로 인가된 투어로만 방문할 수 있고 가이드들이 그 자리에서 직접 포도주를 시음할 수 있는 특전에 대해 상처입은 황소들처럼 요금을 부과할 수 있다.
그러나 양조장에는 그에 따른 보상과 기쁨이 있다.
크리코바(Cricova)는 치시나우 북쪽으로 약 15km(9마일)지점에 있고 몰도바에서 술집을 순례하며 차이점을 즐기는 출발점이다.
크리코바는 완전하게 지하에 위치한 곳으로 60km(19마일)가 넘는 미로식으로 뻗은 지하 거리들이 있다.
모든 거리는 포도주 타입을 딴 이름이 지어져 있어서 피노트거리(Pinot Street)안 동쪽으로 기어가기전에 카베르네트거리(Cabernet Street)를 비틀거리며 걸어볼 수 있다.
크리코바 동쪽 15km(9마일)지점은 코쥬스나(Cojusna)로 이곳에선 보통 적포도주와 백포도주뿐만 아니라 보드카와 술고래들을 위한 독한 포트와인도 생산한다.
코쥬스나는 엄밀히 이곳에 묵으며 홀짝홀짝 자주 술을 마시는 관광객을 위한 곳이지만 이는 프랑스 스타일의 샤토와인(chateaux)같은 오래된 포도주를 홀짝거리는 것은 아니다.
지하 저장소인 코쥬스나에는 실제로 포도농장은 없고 이 지역 조그만 포도 농장들로부터 수확물을 받아 저장한다.
치시나우 북동쪽 12km(4마일)인 스트라세니 포도농장은 거품이 이는 백포도주로 유명하다.
이곳이 바로 코쥬스나에서 기대했을지도 모를 그런 나가떨어지게 할만한 포도농장을 찾을 곳이다.
조금 더 떨어진 곳에는 가장 큰 양조장중 하나이며 예전에 USSR 포도주생산의 선두주자였던 로만네스티(Romanesti)포도주 양조장이 있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제품 중 하나는 보르도(Bordeaux)타입의 적포도주로 수많은 러시아의 유명한 황제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크리코바의 포도주 양조장을 방문하는 것은 오직 투어상품의 일부로서만 가능하고 이 투어상품은 치시나우의 포도주양조장 유람 사무소를 통해서 참여할 수 있다.
이 관광의 엄청나게 비싼 가격은 최소한 왕복 교통편은 포함하고 있다.
코쥬스나 양조장에서 한잔 마셔 볼라면 그 공장으로 전화해서 사전에 예약하고 치시나우에서 버스를 타고 그 마을로 가자.
스트라세니도 같은 방법으로 가보자.
다른 버스를 타야한다.
카프리아나
포도농장을 방문하고 나면 약간 피곤하고 감정적일 수 있고 편안하고 영적인 뭔가를 위해 준비될 수 있다.
스트라세니 남서쪽 7km(2마일)에 편리하게 위치한 오래된 수도원이 고립된 마을 카프리아나에 있으며 이곳에서 술마시며 돌아다닌 것을 후회하며 간장에 휴식을 불어 넣어줄 수 있다.
이곳은 14세기 수도원으로 소련 시대때의 호전적인 무신론과 그의 필수로 따라온 약탈과 강탈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곳이다.
호수 끝 자락에 편안히 앉아보자.
이곳은 각기 다른 시대 때 지어진 3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은 14세기 고전 바로크양식으로 지어진 성모몽소승천 교회이다.
성니콜라스교회는 1800년대에 지어졌고 성죠지 교회(Saint George's Church; 대수도원장의 저택과 식당/ 수도자 독방들하고 인접해있다)는 20세기 전환기에 지어졌다.
42명의 그리스정교회 수도사들이 오늘날까지 이 수도원을 사용하고 있다.
치시나우에서 카프리아나까지 매일 세대의 버스가 운행하지만 버스들이 치시나우로 거의 바로 돌아오며 거리는 30km(10마일)이다.
이점이 당일 여행을 어렵게 한다.
오휴일베치
고대도시인 오휴일 베치 또는 옛 오헤이가끔 트레뷰제니로 불리며 몰도바 삼림 지대밖에 있다.
이곳은 약간 고고학적으로 경이로운 곳으로 중세마을의 폐허들 뿐만 아니라 석기도구의 사용이 그 절정에 다 달았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히 고대인 문명의 유물들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회교사원/ 두 개의 능(陵)/ 대상(隊商)들의 여성숙소/ 목욕탕 3개와 전형적인 몰도바 가옥 한채의 흔적들을 포함한/ 이 마을의 유물들은 일반에게 공개되어 있다.
이 단지 외에 불굴의 스테판 셀 마레에 의해 14세기에 지어졌다가 마찬가지로 불굴인 타타르인에 의해 1499년에 파괴된 고대 요새와 석회절벽 정면에 만들어진 고대 수도원이 있다.
부투체니 암자(hermitage of Butuceni)는 13세기동안 수도사들에 의해 지어졌고 중세 시대때 행해진 건축술의 역할에 대한 고전적인 본보기가 된다.
이곳은 단지 예배장소로만 지어진게 아니라 역경의 시간동안 피난처로서도 사용되었다.
이곳의 내부는 거의 이음매가 없는 복도들의 망으로 기하학적인 선이나 급격한 방향전환이 결여되어 있고 돌을 잘라 만든 직사각형의 문들을 통해 어둠을 꿰뚫는 빛이 들어온다.
18세기동안 어떤 시기에 부투체니를 이웃하고 있는 충실한 신도들이 작은 예배당으로 통하는 터널을 팠고 그로 그들은 상대적으로 은밀히 그들의 종교를 실천할 수 있었다.
대중교통으로 오휴일 베치에 가는 것은 힘들다.
맨 처음 치시나우에서 오헤이 마을까지 약 50km(16마일)를 버스로 가고 거기에서 다른 버스로 오휴일 베치나 트레뷰제니로 간다.
가는 도중에 버스기사에게 수도원단지(Monastery Complex)에 내려줄 것을 부탁하자.
또한 택시로 오헤이와 오휴일 베치사이를 왕복할 수 있다.
가가우지아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지아 자치공화국은 터키어를 쓰는 그리스도교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 민족의 이슬람교 자손들은 18세기 러시아와 터키간의 전쟁에서 도망쳐 나왔다.
이 지역으로 들어오기 위한 댓가는 그리스도교로의 개종과 터키 사투리인 그들의 언어였었다.
현재 이 언어는 다른 터키사투리의 이슬람교 영향보다 오히려 러시아어화 쪽으로 변하고 있다.
가가우즈(Gagauz)는 몰도바 국가주의 표면에 나타난 불독같은 완고함을 설명하는 방향으로 긴 여정을 가고 있는 일반적인 전범위의 유화정책을 저항하는 기교를 만들어 왔다.
공화국에서 탈퇴하겠다는 가가우즈의 부단한 협박은 마침내 몰도바 정부를 포기하게 했고 작지만 의미있는 이 구조의 변화들이 가가우지아가 지역 일에서 자치적이고 정부수준에서 더 낫게 대표되게 하는 길을 닦았다.
가가우지아의 수도인 콤라트(Comrat)는 빈약한 마을로 치시나우 남서쪽 약 75km(24마일) 떨어져 있다.
대학에서의 수많은 연구를 제외하면 콤라트에서는 별 특별한 일이 없지만 이곳은 가가우즈 독립에 대한 이슈로 1990년에 몰도바 군대와 가가우즈 국가주의자들간에 폭력적인 충돌이 있었던 곳이다.
치시나우에서 일일 왕복버스가 아주 조금 있고 당일 여행하는 것이 가능하며 아마도 'Good Idea'일 것이다.
이곳에서 머문다면 숙소 선택이 제한적이다.
트랜스드니에스트르
트랜스드니에스트르는 1991년 공화국이 처음 형성된 이후로 몰도바 정부측에서 보면 눈에 가시같은 존재여 왔다.
분리주의자 저항군은 러시아 군대의 지지와 지원을 받으며 줄곧 말썽을 피워왔다.
트랜스드니에스트르는 티라스폴(Tiraspol)을 수도로/ 그들 자신의 통화와 군대/ 미디아/ 경찰력등 스스로 선언된 공화국이지만/ 가상의 국경을 그리고 (실제) 총을 가진 (비공식적인) 국경수비대로 국경을 지키기 시작했을 때/ 트랜스드니에스트르는 정말로 토끼굴에 미끄러져 빠진 것 같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 자신의 대통령으로 이고르 스머노프(Igor Smirnov)를 뽑았다.
여기보다 더 이상의 러시아것은 없다.
트랜스드니에스트르 시민중 거의 3분의 2는 나이가 지긋하고 가난하며/ 삶의 질이 훨씬 나았던 소련통치의 좋았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요즈음 그들은 삶이 어떤 형태의 정부 아래서도 힘들다는 것을 발견할지 모른다,
그러나 독립공화국을 세우겠다는 노력은 그 원천에 추가적 압박을 가해왔다.
만연한 인플레이션/ 거의 가치가 없는 통화/ 낮은 임금/ 러시아 경제의 붕괴와 치솟는 부채는 트랜스드니에스트르를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입장에 처하게 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가볼 가치가 있다.
이곳은 걷고/ 말하고/ 숨쉬는 스탈린주의자식 정부의 무덤이다.
트랜스드니에스트르의 철의 장막은/ 밖에서 조심스레 살짝 엿볼 수 있을 만큼/ 조금도 젖혀 있지 않을 정도로 파괴되지 않았다.
이곳엔 황금 아치들도/ 코카콜라 광고판도 더블 디카프-카프스를 파는 펑키 스타일의 카페도 없다.
소작농의 실용주의와 스탈린주의자의 공리주의가 전부이다.
그리고 그들은 미국 여행자들 또한 많이 환영하지 않는다.
트랜스드니에스트르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실제로 3단 가격시스템 때문에 외국인에겐 꽤 비싸다.
평균이하의 숙소가 하룻밤에 약 $100하며 이는 트랜스드니에스트르에서 한달 월급에 달하는 액수이다.
트랜스드니에스트르인의 이런 뒤죽박죽인 논리세계에서는 심지어 여행안내소에 질문하는 것도 돈을 내게 할 것이다.
치시나우와 티라스폴사이의 50km(16마일)를 운행하는 수많은 버스가 매일 있고 콤라트와 티라스폴사이에는 하루 한 대가 운행한다.
트랜스드니에스트르는 모든 외국인 방문객은 도착 3시간 안에 경찰에 등록하고 US$40 수수료를 내야 한다고 최근 발표했다.
다소강력한 위기정책으로 이는 몰도바 국민도 그들이 정의한 외국인에 포함된다.
교통편
몰도바로 가는 모든 국제선은 치시나우(키쉬네프)공항을 이용한다.
몰도바로 오는 유일한 직항선은 베를린과 파리에서 있다.
더 나은 선택은 부차레스트로 날아가서 거기서 버스나 열차로 치시나우로 가는 것이다.
버스는 또한 몰다비아의 수체아바-체르노티에서 치시나우까지 운행될 수 있다.
부차레스트에서의 열차는 가장 경제적이므로 아마도 최상의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할인요금이나 이용 가능한 열차패스는 없다.
몰도바의 시내교통은 버스/ 트램과 무궤도전차 정도 되며 보통 이 셋다 만원일 것이다.
떠밀고/ 밀치고/ 팔꿈치로 밀치는 것은 단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즐거움의 일부이며 어디엔가 가길 원한다면 그냥 재미로 즐기는게 낫다.
그리고 그런 일이 생기면 가만있지 말고 같이 즐기자.
정부 택시와 개인 택시 모두 이용 가능하다.
정부택시는 미터제이므로 출발 전에 다른 종류의 흥정으로 요금을 정할 수도 있다.
버스 또한 대부분의 큰 마을과 도시들 사이를 운행한다.
기차로 국경선을 통과한다.
14. 우크라이나 공화국
리비브 – 키예프
키예프
5세기에 형성된 도시로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의 기원이 되는 도시다.
3개의 국가는 9-11세기 슬라브의 강대한 국가인 키에프인 러시아에서 유래됐다.
그 후 키에프는 몽고의 침략/ 사회주의자의 도시화 정책/ 세계 2차 대전간의 대규모 파괴로부터 살아 남았다.
구시가는 부리차야 볼로디미르스카의 동북부 주변으로 키에프의 역사적인 장소가 모여있다.
11세기에 지어진 키에프에서 가장 오래된 성 소피아 성당이 가장 큰 볼거리로 모자이크와 프레스코가 잘 보전돼 있다.
성당 남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상점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부리차야 크레쉬차틱이다.
크레쉬차틱의 남쪽 끝은 베사랍스키 시장으로 과일과 야채 노점상이 가득하다.
구시가는 키에프 도심에서 걸어서 다녀 올만한 거리에 있다.
키에프에서 가장 매력적인 거리인 안드리이브스키 브즈비즈(Andriyivsky vzviz)는 구시가에서 역사적인 상업지구이며 항구인 포딜(Podil) 구역으로 이어진다.
안드리이브스키는 미술관/ 상점/ 식당과 카페가 즐비하고 포딜의 중앙은 콘트락토바 프로쉬차로 크고 하얀 콘트락토바 딤이 중앙에 위치하는 공원같이 생긴 광장이다.
1871년부터 건물 안에는 식당/ 미술관/ 사무실이 가득히 들어서 있다.
북서쪽으로 조금 가면 역사상 최악의 핵 참사였던 체르노빌 사고에 대한 문서를 전시한 체르노빌 박물관이 있다.
체르노빌은 박물관으로부터 북으로 불과 100km 떨어져있다.
남쪽은 포딜에서 가장 오래된 1631년의 미콜라 프리티스코 교회가 있는데 우크라이나 바로크 건축양식의 표본이 되는 건물이다.
구시가의 남부는 강을 따라 있는 페처스크(Pechersk) 구역은 역사적으로 성직자들의 중심역할을 한 곳이며 1051년에 건설된 동굴 수도원(Caves Monastery)이 위치한다.
중심으로 몇 킬로 벗어난 남쪽은 나무가 심어진 경사지로 황금 돔으로 된 교회/ 미라가 된 수도승들이 있는 지하 미로/ 한 때 스키티아인의 금을 저장했던 박물관으로 쓰이는 우아한 모자이크 건물이 있다.
11세기에 건설된 수도원의 일부로 사용되던 도미션 성당은 2차 대전 당시 러시아 붉은 군대에 의해 일부 파괴되긴 했지만 우크라이나 바로크 양식 건물 중 가장 훌륭한 건물이다.
성당의 북쪽은 역사 보물 박물관으로 가공물과 보석/ 귀금속을 전시하고 있고 기원전 4세기부터 만들어진 스키이타인의 금 세공품이 박물관의 하이라이트다.
또한 키에프의 12세기 모델과 우크라이나/ 러시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장인들이 만든 고블렛(손잡이 없는 술잔)/ 십자가/ 술잔이 장식되어 있다.
도시 버스들 이용해 키에브 도심에서 페처스크 구역으로 이동이 가능하다.
민속 건축 박물관은 키에부에서 남쪽으로 12km 떨어져 있는데 방문할 만한 가치가 있다.
경치가 좋은 언덕에 17-20세기의 목조 가옥/ 교회/ 농장/ 풍차가 많이 보이며 아름다운 정원과 실내 가구가 잘 보존되어 있다.
박물관은 지역적 특색에 따라 7개의 작은 마을로 구분돼있으며 레스토랑/ 기념품 가게가 있고 특별 이벤트가 열린다.
르비브
서 우크라이나(Western Ukraine)의 수도인 르비브는 1939년까지 한번도 러시아의 지배를 받지 않았고 1980년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다시 발생한 도시다.
2차 대전의 피해를 입지도 않아 르비브는 고딕양식부터 현대의 건축까지 볼 수 있는 살아있는 서부 건축 박물관이다.
사회주의 기간의 기괴함과 좁고 오래된 골목길과 색채감 넘치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인해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가볼 만한 곳이다.
신시가의 중심가 바로 동쪽이 구시가로 프로쉬차 리녹(Rynok)이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가장 잘 보존된 도시 광장을 위치한다.
19세기의 시청과 그 주변은 아름다운 지나치게 정교한 석조 조각이 있는 16-18세기 건물들이 있다.
남서 코너의 반대편에 있는 로만 카톨릭 성당은 르비브에서 가장 훌륭한 고딕양식 건물로 14세기에 지어졌다.
성당 안에 있는 보임 예배당(Boyim Chapel)의 석조 조각은 환상적이다.
남동부 코너의 반대편에는 르비브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이 있는데 1735년에 생긴 곳으로 16세기 거물인 압테카 박물관과 같이 사용되고 있고 약제기구가 전시돼 있다.
르비브의 대중 건축과 생활 야외 박물관은 구시가에서 2km 떨어져 있으며 100여개의 목조 농장/ 대장간/ 풍차/ 교회/ 학교가 60헥타에 걸쳐있다.
전국의 민속 전통에 따라 건물들은 매일 쓰는 물건들로 치장돼 있고 버스와 트램이 박물관으로 운행된다
카미아넷 포딜스키
카미아넷-포딜스키는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루마니아 만나는 국경에 접하는 도시로 11세기부터 깍아 지른 듯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바위섬으로 스모트리치 강(Smotrich River)에서 밖으로 빠져나가는 가파른 길이 있다.
남서쪽에 있는 다리는 100년간 육지를 연결하는 유일한 교량으로 16세기의 9개의 탑이 있는 성에 의해 보호되고 있다.
대부분의 탑은 공개되어 도시의 경관 뿐 아니라 주변의 지형을 조망할 수 있다.
민족학 박물관은 민속 공예품과 성에서 발견된 것들이 전시되고 있다.
자갈로 된 길을 따라 성에서 내려가면 아르메니아 지구가 나오는데 14세기에 만들어진 시장광장과 15세기의 교회가 남아있다.
광장의 북서쪽에 있는 1580년에 건설된 피터와 폴의 성당은 승리의 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투루크의 지배 당시 성당은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됐고 첨탑이 세워졌으나 성당을 다시 회복한 후 기둥의 끝 부분에 금으로 된 성모마리아 상을 추가했다.
광장 북쪽은 도미니칸 수도원과 교회로 높게 주조된 종탑이 있다.
수도원의 북쪽은 14세기 시청 건물로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오래된 시청 건물로 2차 대전을 기념하기 위한 작은 박물관으로 현재 사용되고 있다.
포차이브
키에프에서 동굴 수도원을 방문했다면 우크라이나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포차이브의 수도원을 방문해 보라.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우크라이나인에게 신성한 곳으로 종교적 축제기간에는 순례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우스펜스키 성당은 바로크 양식의 성당으로 실내는 6,00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압도적인 표현의 정교 도해서는 화려하고 뛰어난 성인과 총주교의 그림이 벽면에 빛나고 있다.
100년 전에 지어진 황금 돔의 트리니티 성당(Holy Trinity Cathedral)은 우스펜스키 성당보다 작고 어둡지만 거대한 기둥과 얇은 아치형 천장은 유심론의 깊이를 느끼게 해 준다.
트리니티 성당의 서쪽에는 19세기 중반의 종탑이 있는데 높이 65m/ 무게 11,180kg의 바로크 양식 탑으로 내려다보는 전망이 나쁘지 않다.
포차이브는 서 우크라이나 중부에 있는 도시로 키에프에서 300km 서쪽에 있다.
크레메넷(40분) 테르노필(2시간) 르비브(6시간)에서 오는 버스는 수도원 서쪽에 있는 버스터미널에 정차한다.
체르닙시
150년간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 난 체르닙시는 우아하고 국제적인 중앙 유럽 분위기의 도시다.
혼합된 역사로 인해 비잔틴에서 바로크까지 다양한 형태의 건축 양식과 고상한 거리의 구시가 지구가 있다.
3차선의 부리차야 오 코비리안스카의 보행자 거리는 카페/ 레스토랑/ 상점들이 들어서 있다.
매우 다른 매우 오스만적인 체르닙시의 정원들은 목조 발코니와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 코비리안스키의 동쪽에 있는 아르메니안 성당은 19세기의 건물로 고대 아르메니아 디자인 양식으로 건설됐다.
실내는 지나치게 정교한 그림과 아름다운 오르간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구시가의 광장은 쩬트랄나 프로쉬차는 19세기 건물들에 둘러싸여 있는데 그 중 지역 박물관이 가장 흥미 있는 곳으로 중앙에 계단이 있는 아트 노보 건물이다.
20세기 그림과 윤색된 민족학적 전시품이 실내에 있다.
키에브에서 400km 서남쪽에 위치하며 기차로 11-13시간 소요되고 버스는 기차보다 오래 걸리며 작은 공항이 있다.
체르니히브
8세기에 형성된 체르니히브는 우크라이나의 11-12세기 종교적인 건물이 있는 도시로 키에프 러시아 제국의 공국 중에 하나였다.
프로쉬차 체르노바(ploshcha Chernova)를 조금만 벗어나면 사랑스런 피앗닛스카(Pyatnytska) 교회가 나오는데 12세기에 만들어진 교회로 1960년대에 재 건설돼 키에프 러시아제국의 양식이 남아있고 외부의 벽돌공사는 석공기술의 진수를 볼 수 있다.
남동쪽에 있는 디티넷(Dytynets)은 낙엽이 가득한 공원주변으로 종교적인 건물이 있는데 이 중 2개의 미사일처럼 생긴 종탑이 있는 스파소-프레오브라젠스키(Spaso-Preobrazhensky) 성당은 어둠고 신비스런 실내에 키에프 러시아 왕실의 무덤이 있다.
12세기에 건설된 보시소-흐립스키성당은 성당의 역사와 디티넷 지역의 박물관 역할을 한다.
체르니히브 역사 박물관은 19세기의 신고전주의 건물로 키에브 러시아제국/ 코삭 전쟁용품/ 유명한 1851년에 슬로빅어로 처음 쓰여진 오스트로 성경을 전시하고 있다.
키에프에서 100km 동북부에 있으며 버스와 기차가 두 도시를 정기적으로 운행한다.
교통편
키에프는 유럽의 주요도시와 북미 도시로부터 연결이 된다.
대부분의 국제 노선은 보잘것 없는 키에프의 보리스필 국제공항으로 운행되는데 도심에서 40km 외각에 공항이 위치한다.
르비브 공항은 도심에서 8km 떨어져 있으며 바르샤바/ 프라그/ 암스테르담/ 프랑크푸르트/ 런던과 시카고로 국제선이 취항한다.
오데사 공항은 베니스와 모스크바로 가는 국제선이 있다.
국제 기차는 7개의 국가로부터 10개의 도시로 운행되는데 비자를 입국 전에 획득했다면 육로 입국에 지장이 없다.
우크라이나의 중요도시는 모스크바 행 국제 기차가 매일 운행되는데 키에프에 15시간/ 르비브에서 28시간이 소요되며 키에프에서 브레스트(10시간)와 바르샤바를 경유해 베를린(26시간)까지 이동이 가능하다.
기차역은 키에프의 서쪽 가장자리에 있다.
르비브에서 출발하는 국제 기차는 중요 동유럽의 도시와 러시아의 도시를 연결하며 기차역은 서쪽으로 3km 떨어져 있다.
카키브(Kharkiv)에서는 러시아 행 버스가 하루에 두 세 차례 운행되는데 모스크바까지는 20시간이 걸린다.
오데사와 얄타에서는 선박으로 이용해 흑해 연안 도시나 지중해지역의 도시로 여행이 가능한데 하이파(이스라엘)/ 리마쏠(싸이프러스)/ 피리우스(그리스)/ 포트 사이드(이집트) 항로가 있는데 이스탄불 항로가 가장 빈번하고 믿을 만 하다.
또한 오데사에서 다뉴브 강을 따라 동유럽의 강변 항구도시로 이동할 수도 있다.
크림반도의 케르치(Kerch)에서 러시아의 템리육(Temryuk) 아나파(Anapa) 노보로스리스크(Novorosslysk)까지는 차량을 실을 수 있는 선박이 운항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육로 국경 통과는 비자를 입국 전에 취득했으면 입국에 불편은 없으나 국경에서 긴급 비자를 받을 경우 입국이 거부될 경우도 있는데 특히 러시아에서 입국 시는 비자를 미리 취득 하는게 현명하다.
우크라이나의 주요 도시간을 이동 하는데는 버스보다 기차가 유용하다.
자주 운행되고 싸며 밤 여행에 편리하다.
그리니아를 절약하고 지체되는 시간을 상관치 않는다면 버스도 유용한데 특히 기차가 다니지 않는 소도시를 이동하는데 편리하다.
버스는 항상 지저분하고 복잡하고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는 힘든 여행은 현지인을 만나는 것 이외에는 장점이 없다.
기름의 공급이 원할치 않고 부품 구하기가 어렵고 도로사정이 나빠 우크라이나에서 운전하는 건 권할만한 일이 아니다.
기차로 국경선을 통과한다.
15. 벨라루시 공화국
벨라루시 공화국
벨라루시는 평탄하고 단조로운 하나의 땅덩어리로 모스크바와 폴란드 국경사이 가장 짧은 루트로 양쪽에 걸쳐있다.
지형이 평탄한 것은 괜찮지만 단조로움이 조금 심한 편이다.
넓게 펼쳐진 개간되지 않은 자작 나무숲들/ 삼림이 우거진 광대한 저습지들/ 넘실거리는 녹지 한가운데에 목조가구로 이루어진 마을들과 새까만 벌판들이 벨라루시의 잊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심어주고 있다.
벨라루시에는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다.
민스크는 국제적인 중심지로 옛 소련 도시계획의 훌륭한 증거물이다.
브레스트는 활기있고 열광적이며 흐로드나는 역사적인 유산들이 섞여있고 폴라트스크는 예전 부귀영화의 편안하고 긴의자 속에서 졸리운 듯 누워있는 귀족 미망인과 같은 곳이다.
이 모든 것이 벨라루시이지만 관광객의 발걸음은 쉽사리 이르지 못하고 있다.
독립일- 1991년 8월 25일
UN가맹일- 1945년 10월 24일 창설가맹국
면적- 20만 7595킬로제곱미터
인구- 1030만 명
수도- 민스크 167만 2600명
주요도시- 고멜 비텝스크 브레스트
주요민족- 벨로루시인 슬라브계 78% 러시아인 13% 폴라드인 4%
언어- 벨로루시어가 공용어 그밖의 러시아어
종교- 러시아정교 카톨릭
정치 체제- 공화제
헌법- 1996년 11월 28일 신헌법 발효
국민총생산- 218억 달러
1인당 GNP- 2110달러
통화단위- 벨로루시 루블
주요교역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독일/ 영국
주요자원- 석탄
주요공산품- 자동차/ 농업기계/ 금속공작기계/ 컴퓨터
주요농산물- 호밀/ 감자
지리 및 기후-벨라루시는 영국보다 약간 작으며 북쪽과 동쪽으로 러시아가 북서쪽으로는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가 접해있고 폴란드는 서쪽에 우크라이나는 남쪽으로 접하고 있다.
벨라루시는 저지대 국가로 가장 높은 언덕인 드자르진스카야의 높이가 겨우 345m이다.
지형은 작은 호수들이 산재되어 있고 폭넓은 저습지를 가르는 낮은 등성이들로 이루어져 있다.
드냐프로(Dnjapro)강이 이곳 주요강으로 러시아의 스몰렌스크에서 벨라루스 동부로 흐른다.
벨라루시는 예전에 한번 숲으로 완전히 뒤덮혀 있었다.
16세기까지 대부분 지역이 농사를 위해 개간되었지만 큰 숲은 특히 남쪽에서 다시 성장해왔다.
가장 일반적인 나무로는침엽수/ 참나무/ 너도밤나무와 은빛자작나무가 있다.
벨라베즈스카야푸쉬챠 자연보호지는 폴란드국경에 있으며 유럽에서 가장 큰 혼합원시림의 일부로 유럽들소의 왕성한 무리가 서식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벨라루시의 다른 자연보호지들에는 엘크사슴( 유럽산 큰사슴)/ 사슴/ 멧돼지/ 늑대/ 여우/ 다람쥐/ 담비/ 산토끼/ 비버/ 수달/ 밍크와 오소리가 서식하고 있다.
농경지는 곡식과 아마(린네르(linen)의 원료)를 생산하는데 쓰여지고 있다.
우아한 푸른 아마꽃이 피어있는 광활한 들판은 시선을 고정시킬 정도의 광경을 이룬다.
벨라루스는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더욱 극단적으로 혹독해지는 대륙성기후를 가지고 있다.
1월 평균기온은 -4°C에서 -8°C 사이이며 1년 중 7- 8개월은 땅에 서리가 내린다.
가장 따뜻한 달은 7월로 기온이 보통 19°C(66°F)에 이른다.
6월과 8월이 가장 비가 많고 12월에서 4월까진 눈으로 뒤덮힌다.
자연환경- 폴란드를 비롯 주변 5개국에 싸여있는 내륙국가로 중앙에는 얕은 구릉지가 동서
로 길게 뻗어 있고 그 사이사이로 강과 운하가 종횡으로 흐르며 숲과 호수의 나라인 만큼 비옥한 토지와 목초지가 넓게 펼쳐진 천혜의 자연을 지녔다.
기후는 대륙성이지만 대서양의 영향으로 겨울나기가 어렵지 않다.
경제- 국토의 3분의 1이 농경지로 전통적인 농업국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기계공업과 소비재 생산업을 중심으로 공업화를 추진 최근 컴퓨터등 첨단 전자산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공업분야에서의 기계제작 산업은 벨라루시아 경제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이들 산업 중에서 트랙터와 농업관련의 기계제작/ 자동차/ 공작기계/ 제작 /전기공학 산업이 대표적이며 산림관련 분야는 두꺼운 마분지를 포함하는 종이/ 합판/ 성냥 그리고 가구등 생산관련 제품의 50%이상을 외국으로 수출하며 경공업 분야는 면/ 견직물을 비롯하여 메리야스 및 피혁(가죽) 제품/ 재봉 산업이 주종을 이룬다.
감자 수확은 압도적이며 이러한 감자를 상품화하는 작업이 왕성하게 진행 중이다.
사회와 문화- 성격이 무척 온건하고 이성적인 품성을 지녔다.
폴란드의 지배를 받아 폴란드 문화의 잔재가 짙다.
역사-벨라루시에 인간이 출몰한 증거는 초기 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동부 슬라브민족이 슬라브민족 팽창기 동안인 AD 6세기에서 8세기까지 이곳에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1240년 키에프(Kiev)에서 몽고족이 이 지역 슬라브 군주들을 굴복시킨 후 많은 벨라루시 마을이 타타르인 지배하에 있게 되었다.
14세기동안 이 지역은 리투아니아가 차지했고 그 후 400여년을 거치며 벨라루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와는 다른 문화적인 개체가 되었다.
1569년 폴란드가 리투아니아와 합쳐졌을 때 폴란드 문화는 벨라루시에서 더욱 더 출중해졌고 벨라루시 교회는 로마교황청의 권위아래 놓이게 되었다.
폴란드가 휘청거리기 시작한 18세기 말 러시아가 벨라루시를 차지해 버렸다.
러시아는 벨라루시를 러시아의 일부로 만들려고 결심했으며 따라서 벨라루시어로 출판되는 것을 금했고 러시아 정교회가 세워졌다.
19세기동안 벨라루시는 농업경제에서 산업화된 경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1860년대 농노들이 해방되었지만 교외지역의 빈곤상태가 심했기에 세기의 전환기무렵 백오십만명의 사람들이 이주해 버렸다.
러시아가 유대인들에게 지정구역에서 - 그중 한곳이 벨라루시이다 - 살도록 요구한 이래로 19세기동안 도시유대인 인구수는 급속도로 증가했고 몇몇 마을은 반 이상이 유대인으로 구성됐다.
대부분 도시 지역들은 주로 유대인과 러시아인들로 채워진 반면 벨라루시인은 정치적 영향이 적게 미치거나 수도/ 전기 등의 자원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 머물게 되었다.
세계 1차 대전 중 러시아 독일간의 많은 전투가 벨라루시에서 치뤄져 수많은 지역이 파괴되었다.
독일이 벨라루시를 차지했지만 1921년 벨라루시는 폴란드와 볼셰비크러시아(Bolshevik Russia; 러시아 사회민주당내의 과격파로 그 다음해에 USSR(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소련 사회주의공화국 연방) 사이에서 나뉘게 된다.
벨라루시의 소련측 구역은 1930년대 동안 숙청과 농업집산주의 아래 있었고 벨라루시의 문화와 독립성은 억압을 받았다.
수 천명의 벨라루시인들이 처형당했는데 이는 주로 민스크 외곽 숲 속에서 일어났다.
1939년 폴란드가 독일과 USSR에게 침공을 당했을 때 USSR은 벨라루스의 폴란드측 구역을 되차지 했다.
불행히도 벨라루시인들은 1941년 독일이 USSR을 침략했을 때 다시 전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독일의 점령은 잔혹했으며 유격대의 저항운동이 넓게 퍼졌다.
1944년 독일군은 붉은 군대(the Red Army; 소련 정규군)에 의해 축출되었으나 벨라루시는 시간이 흐를수록 파괴되었고 민스크에선 간신히 돌맹이하나 남겨질 정도였으며 벨라루시 전체인구의 4분의 1이 죽었다.
많은 사상자들이 나치(Nazi)수용소에서 그들의 최후를 맞이하거나 USSR에 의해 추방되거나 처형되었다.
첫 번째 전후 5개년 계획으로 많은 전쟁의 흉터가 아물었고 민스크는 USSR의 산업중심지로 발전해 나가면서 사람들이 도시로 모여들었고 많은 러시아인들이 산업노동력을 지원하기위해 이주해 왔다.
1980년까지 벨라루시 정치인들은 독립국가로서의 벨라루시와 소련 품 안에서 안전하고 편안히 지내는 벨라루시 사이에서 훌륭한 노선을 걸어왔다.
그렇지만 벨라루시는 소련 공화국들에서 가장 엄격한 공산주의 중 하나라는 평판을 갖고 있었다.
1986년 우크라이나의 체르노(Chornobyl) 원자력발전소가 녹아내렸을 때 벨라루시가 우크라이나보다 더 심하게 타격을 받았다.
국토의 약 5분의 1이 심각하게 방사능에 오염되었고 정치적 의견의 조류는 소비에트 연방의 회원국으로 유지하는 것에 반하게 되었다.
1988년 벨라루시 인민전선(Belarusian Popular Front)이 형성되었고 체르노빌사건으로 떠오른 이슈들과 벨라루시어의 사용감소에 대해 발언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부터 국수주의적 정서가 자라났으며 1990년 7월 27일 벨라루시 공화국은 USSR안에서 주권선언을 공표했으며 1991년 8월 25일 공산당에서의 완전한 국가적 독립 선언을 공표한다.
물리학자로서 체르노빌 직무과실에 대한 캠페인활동을 벌였던 스텐니슬라우 슈시케비츠는 구 공산주의 옹호자와 혁신주의 인민전선사이에서 중도주의 노선을 추구한 첫 번째 국가 원수였다.
1990년대 초반 경제개혁이 느리게 진행되었고 공산주의자들은 슈시케비츠의 의지에 반하는 러시아와의 많은 유대관계를 다시 설립했다.
슈시케비츠는 1,994년 물러나게 되었으며 벨라루시 최초의 대통령 직선제를 통해 알렉산더 루카쉔카(AlexandLukashenka)가 뒤를 이었다.
루카쉔카는 물가상승 억제/ 민영화 금지/ 부패 근절/ 조직범죄 타도를 강조하며 러시아와 더욱 가까운 유대관계를 발전시킬 것을 공약했다
문화-벨라루시의 출판사업은 주목할 만한 영향을 끼쳐왔다.
벨라루시어 성서는 동유럽에서 인쇄된 최초의 서적 중 하나이며 17세기 벨라루시 시인인 폴라트스크의 시메온(Symeon)은 러시아에 바로크양식 문학을 소개했다.
벨라루시의 현대문학은 19세기에 창시되었다.
야쿠브콜라스(Jakub Kolas)는 고전문학의 개척자로 푸른 하늘아래(Beneath the Blue Sky)의 저자 나탈라 아르센네바(Natalla Arseneva)는 20세기 문학의 모범으로 알려져 있다.
소련의 점령은 지방 작가들의 숨통을 조였었지만 문학의 장은 지금 부흥기를 겪고 있다.
벨라루시는 강력한 음악적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많은 12세기 정교회 찬송가와 설교는 벨라루시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벨라루시 민속음악은 아주 유명한데 만약 공연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절대 놓치지 말자.
현대식 민속음악은 의식을 위한 예식이나 교회음악에서 비롯되었고 16세기 이후에 대단히 발전하게 되었다.
20세기에 이르러 벨라루스의 클래식음악은 두각을 나타나게 되었으나 국제적인 평판을 얻고있는 민스크의 오페라와 발레 극단들을 앞지를 정도는 아니다.
벨라루시는 우크라이나처럼 항상 로마카톨릭과 동방정교회 기독교사이에서 교차로역할을 해왔다.
약 70%의 벨라루시아인들이 동방정교회지만 상당한 수의 로마 카톨릭 인구도 폴란드 통치기 때부터 유래해왔다.
또한 신교도/ 이슬람교도(타타르인)와 유대교도들도 있는데 이들 중 다수는 이민을 가고 있다.
벨라루시어는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의 동족인 동부 슬라브어이다.
벨라루시어는 주로 키릴문자로 쓰여지며 드물게 로마 벨라루시 알파벳도 쓰여진다.
소련의 지배하에 있을 때는 80%의 벨라루시 어린이들이 오직 러시아어로만 교육되어 왔고 러시아어가 모든 비즈니스와 정부업무의 공식어로 사용되었었다.
1990년에 벨라루시어가 국가 공식언어로 채택되어 현재 거리의 이름들이 개명되고 있으며 교육은 벨라루시 역사와 문학을 역점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어가 아직도 가장 많이 퍼져있는 언어이다.
벨라루시인들은 버섯요리를 좋아하는데 버섯을 채취하는 것은 일종의 지역의식과도 같다.
많은 요리들이 어떻게든 버섯을 주재료로 사용하며 풍부하게 소스를 곁들이거나 크림을 채워 넣어서 혹은 버섯 그 자체만으로 요리한다.
유명한 음식으로는 흐리비브슴타네(시큼한 소스를 곁들인 버섯요리)/ 흐리브노이수프(버섯과 보리수프)와 코틀레타 포크레스탼스키(버섯소스를 곁들인 얇게저민 돼지고기)가 있다.
그밖의 중요한 음식재료로는 마늘/ 생선/ 캐러웨이미나리과의 식물)가 있고 인기있는 음료로는 크바스(Kvas)가 있는데 맥아가루/ 설탕/ 박하와 과일로 만든다.
축제 및 행사-작곡가들은 국립 벨라루시 작곡대회기간이 열리는 1월 동안 민스크로 몰려든다.
4월에는 민스크에서 국제언어 페스티발인 엑스포링궈가 열리며 6월에는 스비탸즈호수에서 시페스티발이 열리는데 벨라루스와 러시아의 기라성같은 시인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벨라루시 음악의 가을축제(Belarusian Musical Autumn)는 민스크에서 11월 하순 열흘동안 열리며 민속/ 클래식 음악과 춤의 향연이 펼쳐진다.
경비-벨라루시에서 여행하는데 주로 드는 비용은 숙박비고 나머지들고 만만치 않다.
정식은 US$30 정도 하고 한밤에 오페라를 구경하는 것은 US$20 정도 한다.
국내열차요금은 싸다.
예산은 저렴하게 여행한다면 하루 약 US$60 정도이고 수준 높은 편안함을 원한다면 하루 US$150 정도이다.
신용카드와 여행자수표가 휴대하기에 가장 편리하고 안전한 방법이지만 사용할 수 있는 장소가 광범위하지 않다는 것이 단점이다.
이러한 단점 때문에 부피는 많지만 현금으로 가지고 가는 것이 낫다.
미국달러와 독일마르크가 가장 널리 사용되는 통화이다.
은행뿐아니라 간이환전소에서도 환전이 가능하다.
몇몇 최고급 호텔들은 호텔 계산서에 5-15%의 팁이 추가된다.
포터에게는 US$1-2의 팁을 주는 것이 일반적이며 웨이터들은 식사요금의 5-10%의 팁을 기대한다.
호멜 – 브레스트 – 민스크 – 오르사 – 폴라트스크
민스크
민스크의 거의 모든 빌딩들은 1944년 소련군이 탈환한 후 돌맹이 조각만 간신히 남겨놓았던 때 이 후 세워진 것들로 이 도시는 아마도 소련의 대규모 계획 중 가장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민스크는 노동자 유토피아건설을 시도했으며 일률적으로 기념비적인 외관은 넓은 거리와 상쾌한 공원들로 부드러운 분위기를 갖는다.
국제적이고 떠들석한 분위기의 이 도시는 이전의 여느 다른 소련도시들보다 깨끗하고 밝은 느낌을 준다.
민스크의 주요거리인 프라스페크트 스카이니는 크고 북적대는 산책길이다.
이 거리의 남서쪽 끝에는 500m(1640ft) 길이의 독립광장/ 플로쉬챠 네짤레즈나스트시가 있는데 정부 빌딩들과 매력적인 성 시몬 폴란드 카톨릭교회로 둘러 싸여있다.
파크 잔키쿠팔리는 푸른 나무들이 상쾌하게 뻗어있는 곳으로 구불구불한 스비슬라치강과 일부 접해있다.
이곳에서 노 젓는 배를 빌리거나 러시아공산당이 1898년 불법적으로 설립의회를 열었던 저택을 구경할 수 있다.
벨라루시 국립역사문화박물관에서는 벨라루시의 험난했던 역사가 전시되 있으며 벨라루시 국립미술박물관에는 17세기에서 20세기까지 회화들이 소장되어 있다.
위대한 애국전쟁박물관(Museum of the Great Patriotic War)은 세계 2차대전의 공포를 생생하게 전달하며 벨라루시가 과거 전쟁에 사로잡혀왔음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가장 오싹한 것은 전쟁포로에 대한 전시물과 처형되고 있는 유격대원 사진들이다.
프라스페크트 스카이니의 서쪽은 구시가로 성 듀크호스키 바로크대성당이 있는 곳이다.
이 대성당은 예전에 폴란드 베르나르딘수도원(Polish Bernardine convent)에 속했는데 이전 수도원 건물은 복원되었고 현재는 음악학교가 들어서 있다.
민스크가 과거에 어떠했는지를 보려면 17세기와 18세기풍으로 재건축된 스비슬라치강의 동쪽지구를 돌아보자.
이곳은 독특하고 작은 규모로 카페/ 바/ 레스토랑과 기념품점들이 산재해 있다.
1847년에 지어진 성 메리 메그델라인교회에는 뾰족한 8각형의 종탑과 웅장한 돔이 있다.
카틴
1943년 나치는 카틴촌락을 완전히 태워 버렸다.
이 곳은 현재 유일한 생존자인 유지프카민스키(Yuzif Kaminsky)를 모델로 한 조각물을 중심으로 기념된 장소이다.
또한 이곳에는 독일군에 의해 전몰된 185개의 다른 벨라루시 마을을 기리는 마을묘지(Graveyard of Villages)가 있으며 추가로 파괴되었지만 복구된 433개 마을을 기념하는 생명의 나무들(실제로는 콘크리트 기둥들)과 벨라루시 내의 나치수용소와 몇몇 수용소 희생자들을 기록해 놓은 기억의 벽(Memory Wall)이 있다.
민스크에서 북쪽 60km(37마일) 거리의 카틴까지는 대중교통수단이 없고 별도 투어에 참가하는 것과 수도에서부터 택시를 타는 것인데 왕복요금이 걱정된다
브레스트
동유럽에서 가장 바쁜 도로와 철도 국경지점 중 하나인 브레스트는 바르샤바에서 200km(120마일) 민스크에선 350km(215마일)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폴란드 국경하고 바로 접해 있다.
모든 국경 지대마을이 그렇듯이 이곳도 힘차고 분주한 분위기로 국경을 넘어 잽싸게 물건을 사오는 벨라루시인들로 우글거린다.
브레스트 도심은 기차역에서 무카벳츠강까지 남에서 동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져 있다.
뷸릿트사 사벳트스카야(Vulitsa Savetskaja)가 이곳의 중심가이다.
브레스트는 2차대전 시 소비에트연방의 11개 '영웅도시들'('Hero Cities')중 한 곳으로 1941년 6월 독일군이 침략했을 때 브레스트 요새(Brest Fortress)는 한 달 동안 버텼던 곳이다.
부강(Buh River)과 무카벳츠강 합류지점에 있는 브레스트요새는 브레스트에서 가 봐야할 곳이다.
1838년과 1842년 사이에 마을전체는 이 육중한 요새에 길을 내주기 위해 동쪽으로 이동되었다.
1941년 이곳은 폐허가 되었는데 요새 바로 서쪽에 부분적으로 파괴된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니콜라이브스키교회(Nikolaivsky Church)가 있다.
한때는 큰 수도원의 일부이기도 했던 이 교회는 1941년 포위되어 공격 당할 때 내부가 파괴되었다.
다른 교회로는 매력적으로 세밀하게 건축된 200년이 지난 성 니콜라이브교회로 전통적인 정교회의 미학을 가지고 있으며 강렬한 금빛을 발하는 17세기의 성 시몬정교회 대성당도 있다.
베레스테 고고학박물관은 13세기 브레스트 장인지구의 유적지 위에 세워졌다.
벨라베즈스카야 푸쉬챠 자연보호지역
캄야뉴키(Kamjanjuky)시에서 북쪽으로 펼쳐져 있고 브레스트 북쪽 약 40km(25마일)에 떨어져있는 이 보호지역은 유럽 원시림의 약 1300평방 킬로미터(507평방마일)를 포함하고 있다.
폴란드에도 이 보호지가 조금 미치며 벨라루스와 함께 공동으로 관리한다.
큰사슴/ 사슴/ 스라소니(살쾡이의 큰종류)/ 멧돼지/ 야생말/ 늑대/ 오소리/ 흰담비/ 담비/ 수달/ 밍크와 비버 등 약 55종의 포유류가 이곳에 살고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20년대 거의 멸종위기를 당했던 유럽 산 들소로 약 1,000여 마리가 있다.
이 보호지에는 자연박물관과 들소/ 사슴/ 멧돼지 등의 동물들을 볼 수 있는 안전지대가 있다.
브레스트에서 이곳까지 매일 버스가 운행되며 허가를 받으면 자동차로 올 수도 있다.
흐로드나
흐로드나는 민스크에서 서쪽으로 280km(175마일) 떨어져 있으며 아마도 벨라루시에서 가장 그림같이 아름다운 도시일 것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게 이 도시가 다른 어느 곳보다 전쟁에서 살아 남았으며 역사적 건물들도 더 많이 온전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정착되어온 흐로드나는 14세기 주요방어요새가 되었을 때 리투아니아에 흡수되었고 그 후로는 폴란드에게 흡수되었는데 폴란드는 이곳에 궁전과 여러 교회들을 세웠다.
흐로드나는 2차 대전에서 쉽게 함락되었으며 건물의 손상은 미미했지만 이곳 인구의 대부분을 잃었다.
오늘날 이곳은 국제적 도시의 분위기로 산업과 문화의 중심지이다.
뷸릿트사 사벳트스카야(Vulitsa Savetskaja)는 걸어 다니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진기한 상점들과 카페가 줄지어선 기분 좋은 자갈길과 서쪽 끝으로 나무들이 빽빽한 공원이 있다.
흐로드나에 있는 교회로는 화려한 제단과 성자들이 있는 인상적인 바로크 파니 대성당과 르네상스 베르나딘교회와 수도원 그리고 12세기 목조건물인 성 보리스와 성 흘립교회 등이다.
최근 새롭게 수리된 18세기 궁전 안에 있는 종교역사박물관에는 폴란드 카톨릭과 러시아 정교회의 영향을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부식판화와 공예품들 그리고 유대인 전시물들이 있다.
14세기에 지어진 흐로드나의 오래된 성/ 스타리자막크에는 현재 몇 구역의 성벽만이 남아있고 성부지에 있는 박물관에는 시간을 9세기로 되돌린 듯한 흥미로운 전시물들이 있다.
바로 가까이에 있는 새로운 성/ 노비자막크는 1737년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는 다채로운 로코코양식으로 지어졌지만 후에 새롭게 개조되었다.
현재는 문화부의 본부이자 박물관이며 도서관으로 이용된다.
나스비찌
냐스비찌는 민스크에서 남서쪽으로 120km(75마일) 떨어진 벨라루시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중 하나이다.
이곳의 역사는 13세기부터 시작되지만 16세기중반 이곳을 지배하던 상인들이 냐스비찌를 진보된 요새방어시스템 도시로 재건했을 때 절정에 달했었다.
수세기에 걸친 전쟁/ 화재/ 소홀로 이 도시의 지위는 축소되었고 오늘날 이곳은 채색된 목조오두막과 아름다운 16세기 건축물이 산재된 작은 마을이다.
16세기에 지어진 시청은 벨라루시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로 낡고 퇴색되었지만 흥미로운 디자인을 갖고 있다.
슬럿트스크 게이트도 16세기에 지어졌는데 2세기가 지난 후 바로크양식으로 새로 개조됐다.
크고 거무스름한 파니폴리쉬 로마카톨릭교회(Farny Polish Roman Catholic Church)는 초기 바로크양식으로 훌륭하게 균형잡힌 외관이 특징이다.
이 교회 너머로 래드찌윌 궁전요새가 있는데 이탈리아 건축가 베르나르도니에 의해 16세기 설계된 이 곳은 오늘날 심장병환자와 신경질환 환자들을 위한 요양소가 위치하고 있다.
폴라트스크
민스크 북쪽 260km(160마일)에 위치한 폴라트스크는 풍부한 역사를 지닌 조용한 강변 도시이다.
이 도시의 역사는 6세기 바랑인(Varangian)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3세기 몽골 유목민들에게 약탈당하는 것은 면했지만 후에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에 흡수당했고 폴라트스크 시민들은 농노가 되었다.
폴라트스크는 강 항구도시로서 번영했지만 옛 러시아의 황제들과 폴란드 국왕사이의 다툼 속에서 끊임없이 이리저리로 내던져졌고 여러 번 폐허로 몰락했었다.
이곳에는 특별하게 볼만한 것은 없으며 여러 전쟁과 영웅의 기념비들이 산재한 전형적인 소련의 혁명적 계획 도시이다.
11세기에 지어진 성 소피아대성당(St Sophia Cathedral)은 이곳의 하이라이트로 원래 키에프(Kiev)의 성 소피아 대성당을 모델로 해서 지어진 것이다.
그러나 11세기의 특징은 남아있지 않고 15세기 때 화재로 손상되어 군 본부로 변형되었으며 18세기에는 바로크 카톨릭 대성당(Baroque Catholic cathedral)으로서 재건축되었다.
내부의 박물관에는 건축당시 대성당의 모델이 있으며 지하실에서 11세기 건축의 토대를 볼수 있다.
그 외 볼만한 것들로는 역사적인 서적과 출판물 박물관인 뮤제이 벨라루쉬카 크니하드루카반니와 매력적인 옛 목조 오두막들이 늘어선 지역역사박물관이다.
비트셉스크
민스크 북쪽 277km(172마일)에 위치한 비트셉스크는 과거 30개가 넘는 교회들과 번영하는 문화의 광경을 자랑하던 곳이었다.
칸딘스키/ 말레비치와 샤갈이 종종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세계2차대전과 소비에트연방시절 그들은 이 곳에 올 수 없었으나 구시가지 곳곳에는 아직도 엘레강스한 분위기가 남아있다.
시티미술박물관에는 18세기에서 20세기까지 유럽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옛시청이 근처에 있으며 그 건너편에는 역사적인 비트셉스크 벽화가 있다.
뷸릿트사 수바로바(Vulitsa Suvarova)가 구시가의 주요 거리이다.
이 길을 따라 중간쯤 가면 1812년 프랑스-러시아전쟁 기념비가 있는 조그만 공원에 닿게되며 기념묘지를 건너면 계곡너머로 전망이 펼쳐진다.
근처에 있는 우아한 옛 궁전은 현재 KGB의 본부이다.
비트셉스크에서 태어난 샤갈을 기념해 샤갈 박물관 건립 계획이 추진 중이다.
교통편
대부분의 국제선은 민스크 동쪽 40km(25마일)에 있는 민스크-2 국제공항에 도착한다.
여기에서 베를린/ 베이루트/ 프랑크푸르트/ 라나카/ 모스크바/ 뮌헨/ 세인트페테르츠부르그/ 탈린/ 텔아비브/ 비엔나/ 바르샤바/ 취리히 등으로 연결된다.
이보다 작은 민스크-1 공항은 도시 남쪽 3km(2마일)에 있으며 키에프/ 모스크바와 세인트페테르츠부르그로 연결된다.
이 외 벨라루스의 다른 국제공항은 브레스트에 있으며 여기서는 모스크바/ 세인트페테르츠부르그/ 키에프/ 바르샤바와 오데사로 가는 비행기들이 연결된다.
가장 유명한 국제버스노선으로는 민스크와 빌니우스/ 민스크와 비알리스토크(폴란드)사이를 잇는 노선들이다.
기차는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러시아/ 우크라이나에서 10개의 국경교차점을 경유하여 벨라루시로 들어오며 또한 개인차량으로 통행할 수 있는 10여개의 국경 교차점들이 있다
원칙적으로는 민스크/ 브레스트/ 호멜/ 흐로드나/ 마힐레우/ 마찌르와 비트셉스크사이에 국내선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연료제한 때문에 아주 적은 수의 국내선만 실제로 운항된다.
주요 도시들 사이에는 기차가 자주 있고 상대적으로 싸다.
버스 또한 풍부하게 있지만 지저분하고 초만원이 될 수 있으며 차표를 구하는 것이 호된 시련일 수도 있다.
자동차를 렌트하는게 택시를 대절하는 것보다 더 저렴할 수 있지만 벨라루시에서 운전하는 것은 불안하다.
연료와 예비부품을 구하는 것이 어렵고 도로상태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기차로 국경선을 통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