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의 복잡성, 시인의 위대성
- 장정애론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예술은 인생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뿐만 아니라 무엇에 대해서 말하는가도 중요시한다. 예술은 작가가 작품을 통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한 화답이며, 인간 본성의 설득 수단이기 때문에 예술가에게는 완전한 창작의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 톨스토이 작품이 도스토예프스키 헤밍웨이 등의 작품과 같이 우리에게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이 위대한 예술가들이 학대받는 사람들과 수백만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안겨주는 정신적인 친근감 때문이다. 사회적 경제적 타자는 부정의한 사회제도의 희생자들이다. 작가가 과연 창작 속에 들어가 어느 정도의 진실한 자세로 사회의 부정의와 대결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은 사회 발전의 가능성을 담보하는 일이다. 창작은 본질적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그 내용에 있어서 깊이가 있고 진보적이어야 한다.
위렌은 모든 제재와 언어가 시의 요소가 될 수 있으며 시의 구조란 추상과 구상, 미와 추, 일반적인 것과 특수한 것 등 대립되는 요소들의 상호작용으로 정의하였으며, 순수시가 진정한 시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경험이 들어있는 시에서는 그 어떤 것도 불법화되지 않는다.”는 위렌에게 시인의 위대성은 시인이 지배할 수 있는 경험영역의 폭에 좌우된다. 인간의 마음이 순수하지 못하고 복잡하고 모순됨은 존재론적 인식에 근거한다. 장정애의 <매미의 시간>에서 ‘짧은 생이 떨어진 오후 두 시/ 여름이 운다’는 대목은 매미에 대한 시인의 사유가 드러난 부분이다. 그러나 이때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 있다. 매미의 삶을 직설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시의 진술은 사실 ‘여름이 운다’라는 매개 문장을 통해 표현된 우회적 진술이다. 시의 복잡성은 마음의 복잡성이 반영된 상관물인 셈이다. 산문이 ‘축적의 원리’에 의한 설명이라면, 시는 ‘압축의 원리’에 의한 암시성을 그 본질로 한다.
Ⅱ.
주변의 나무에서 맹렬하게 울어대는 매미소리는 우리에게 여름이 왔음을 알려주는 표시로 인식되고 있다. 여름철 한 달 남짓 지상에서 살다 가는 매미는 7년이 넘는 기간 동안 땅속에서 애벌레의 상태로 지낸다고 한다. 일단 땅속에 자리를 잡은 애벌레들은 그곳에 자신만의 안식처를 구축하고,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기나긴 삶의 여정을 시작한다. 그렇게 땅속에서 지내다가 대략 7년의 기간을 채운 후, 매미들은 천적으로부터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일제히 부화하여 지상에서의 짧은 삶을 영위하게 된다. 이런 매미의 일생에 숨겨진 비밀을 시인은 ‘여름이 운다/ 칠흑 같은 어둠을 밀고 나와/ 온몸으로 울었던 찰나여’라고 압축적으로 표현하였다. 시인은 매미의 울음에서 노동자의 신음을 듣는다. 디지털 시대 이전으로 인류의 역사를 되돌릴 수 없기에 세상은, 노동자는 불안하다. 울어야 젖을 준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신자유주의 체제가 주도하는 AI가 인간을 대체하고 있기에 노동자는 여름이 오면 울 수밖에 도리가 없다.
짧은 생이 떨어진 오후 두 시
여름이 운다
칠흑 같은 어둠을 밀고 나와
온몸으로 울었던 찰나여
밀봉된 이름
심장 터지게 부르다 부르다가
그대 발자국 따라 무상의 몸짓으로
떨어지리
허공을 맴도는 숨소리
물기 바른 주검 가랑잎 되어
아스팔트 위로
쓰러지네
공허의 시간
소멸의 기억이 곡비되어
날아가면
지상 위의 굼벵이는
죽음 위에 통곡의 생을 얹는다.
- <매미의 시간> 전문
<매미의 시간>라는 제목의 이 시는 이러한 매미의 일생을 소재로 하여, 우리 주변에 엄연히 존재하지만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들의 ‘한’을 매미의 울음에 비유하여 형상화한 시라고 볼 수 있다. 그녀의 시 <마지막 지게꾼>도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에서 아웃사이더로 사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약자의 현실을 잘 포착해서 그들의 아픔과 그늘을 껴안으려는 시적 화자의 태도는 시인으로서 더없이 바람직한 시각이다. 그 삶의 비극성이 이 시에서 ‘밀봉된 이름’ ‘떨어지리’ ‘쓰러지네’ ‘소멸의 기억’ ‘통곡의 생’으로 그려지고 있다. 여기에서 ‘칠흑 같은 어둠’은 매미가 땅속에서 애벌레의 상태에서 성체로 부화하기까지의 기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시간에만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된다. 이 시는 권대근의 ‘일몰’ ‘그림자’ ‘상처’ 등 3S에 주목해야 하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매미는 7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엄연히 땅속에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로서, 지금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서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타자’의 비유적인 의미라고 이해된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눈길 한 번 받지 못하는 존재를 비유한 것이라 여겨진다. 7년의 기나긴 시간을 견뎌내고 마침내 껍질을 벗어던지고 매미로서 살아가듯이, 인고의 삶을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는 내용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막히면 옆길로 눈 돌리고 밀치면 휘어지면서도 흘러가는 냇물처럼, 어느 지정된 한 공간에 정착하지 않으려는 구름처럼, 달리고 장애물을 뛰어넘고 깜깜한 구름 속을 헤쳐 나오는 바람처럼 살아가는 것을 찾아내고자 한다. 시인은 홀로 걷는 것이 아니라 그 나무와 물과 구름과 바람과 그리고 타자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인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피어나는 시의 얼굴은 화려하게 핀 꽃보다 눈부시고 아름답다. 기나긴 세월을 땅속에서 견뎌내야만 하는 매미의 일생이 현대 사회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지내야만 하는 아웃사이더들의 처지와 절묘하게 겹쳐지기에 이 시는 강한 힘을 가진다.
Ⅲ.
예술은 지각작용과 선택 및 판단에서 유래하는 것이며, 그 테두리 안에서 그 규범에 따라 비판적인 태도를 수반하는 의식적인 창조행위다. 인류를 위해 상실될 수 없는 그 무엇이 표현될 때 예술의 창조물은 예술작품이라고 불릴 가치가 있으며 이는 작품가치의 척도가 된다. 그러므로 사회적 정신노동의 산물로서 예술은 사회의 발전을 반영한다. 예술작품은 우리에게 관심을 보여주며, 본질적으로 하나의 복합체로서 우리에게 감정과 정신을 향한 외침인 것이다. 시인은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이미 역사에 승선하고 있다. 인간으로서의 전인적인 개성과 창조적 자아에 충실함으로써 작품 속의 자기를 송두리째 투입시키는 성실성이 시인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즉 사실표현에 날카로운 안광을 던질 수 있고 이를 투시해야만 한다.
장정애 시의 출발점은 ‘여름이 운다.’ ‘죽음 위에 통곡의 생을 얹는다.’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오열’ ‘신음’의 발신지를 찾아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당신만 행복하면 그만인가요, 나 같은 건 없는 건가요’를 외치는 수많은 아웃사이더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다. 그녀의 시세계는 ‘공존’과 ‘상생’이라는 생태적 세계관을 축으로 한다. 이는 장 시인의 현실인식과 작가정신의 발로다. 제레미 리프킨이 『노동의 종말』에서 우려했듯이 컴퓨터의 기술이 인간의 정신 자체까지 대체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녀는 언제나 시 작업을 통해 인간의 교사로서 세상 안에 머물고자 몸부림치며 문명 속에서도 변하지 않으려는 선량한 시민으로 남으려 한다. 상실의 아픔으로 절망하는 자를 위로하고, 잃어버린 공존을 위한 순수를 찾아 떠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