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녀 무덤터에 들어선 학교와 잔디밭 운동장.
잔디밭 운동장~ 학교 야영장 ~ 의상봉 가는 길.
의상봉은 그리 높지 않지만 온통 암릉인 등산로.
의상봉~용출봉~용혈봉~증취봉~나월봉~문수봉.
암릉 능선으로 이어진 주능선 상의 경관이 아름답다.
조선시대의 군기(軍旗) 중 청룡기는 진영의 왼쪽에 세워서
좌군(左軍)·좌영(左營)·좌위(左衛) 등의 표치(標幟)로 하였다.
조선 숙종이 한양 북쪽의 방어를 목적으로 축성했던.,북한산성.
당시 북한산성 축성 책임자는 '화엄사 승려' 성능.
인조 때 남한산성 축성 책임자였던 '각성'의 제자.
성능이 작성한 북한산성 축성 기록.,북한지(北漢誌).
조선시대 북한산성 12성문 중에서 정문.,대서문.
대서문 우측에 위치한 원효봉능선은.,우백호 산세.
대서문 좌측에 위치한 의상봉능선 일대는.,좌청룡 산세.
특히, '용혈봉~ 증취봉 ~나월봉' 암릉 주능선.
클라이머들이 즐겨찾는 호젓한 바위길의 연속.
특히, 용혈봉 암벽연습장은 거의 인적이 없는 곳.
리지등반 수준으로는 접근조차 할 수 없는 탓.
조선시대 용혈봉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던 영역.
'용혈봉'이란 지명이 그 사실을 대변하는 것 같다.
용혈봉 암장.
문수봉~승가봉~비봉~관봉~삼지봉~향로봉(수리봉)
'북한산의 용아장성'이라 불릴만큼 암릉 경관이 환상적.
요즘 '초보자~중급자' 리지등반 코스로서 각광받는 암릉.
'의상봉~ 비봉' 능선 아래
사찰 대부분 비구니사찰이다.
백화사, 삼천사, 진관사, 승가사.
'의상봉 능선' 등산코스 들머리는
'북한산성 입구' 또는 '백화사 입구'.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2번출구로 나와
북한산성 행 버스를 타고 '백화사입구' 하차.
그곳에서 북한산을 향해 걷다보면.,여기소마을.
여기소마을 경로당 벽에는.,'여기소 터' 표지석.
그 표지석에 새겨진 '여기소 전설'이 눈길을 끈다.
이곳 여기소마을 지명은 '여기소'에서 유래.
의상봉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여기소마을.
서울 은평구에서 지정한 친환경마을이기도 하다.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302-3
여기소 경로당 앞.,여기소 터.
너汝, 터基, 늪沼.,여기소(汝基沼)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 축성에 동원된 관리를 만나러
먼 시골에서부터 올라온 기생이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이 못에 몸을 던졌다 하여.,너(汝)의 그 사랑(其)이 잠긴 못(沼).
현재, 그 연못은 없어졌고,
그 자리에 경로당이 있지만
조선 중기 이미 집터로 변하여
그 전설 만 전하는 곳이기도 하다.
.
조선 숙종때 북한산성 축성 담당 종사관을 사랑한.,기생.
왕명으로 축성에 전념하느라 6개월 간 나오지 못한 종사관.
국법이 지엄하여 면회도 할 수 없고, 편지도 전하지 못한.,기생.
(그당시 군관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불과, 6개월 만에 완공된.,북한산성.)
그 종사관의 소식을 몰라
백방으로 수소문을 한 끝에
종사관이 변심한 것으로 오해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한 기생.
여기소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전한다.
(그당시 지방관청에 소속된 관기들은)
(변방 관리 군사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집 떠난 고달픔을 달래주는 것이 임무였다.)
.
(이들은 관리가 부임할 때마다 소집 점고(點考)를 받고 )
(빨래, 바느질, 수청까지 들면서 천민 신분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관리 임기가 끝나면, 이별이 뒤따를 수 밖에 없었다.)
.
(관기는 관물 또는 공물로 취급되어)
(거주 이전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하여, 기생과 관리는 사랑에 한계가 있었다.)
종사관이 산성 축성을 완성하고나서야
산성을 나와 가장 먼저 기생을 찾았을 때는
이미 그 기생이 여기소에서 숨을 거둔 후였다.
'그대 여기서 죽었는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것을,
왜 참지 못하고 여기서 죽었는가?"
너 여(汝), 여기 기(其), 못 소(沼)
그리하여, 이곳에 그 애달픈 뜻을 담아
‘여기소(汝其沼)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여기소에서 좀 더 올라가면.,백화사.
비구니 사찰.,백화사.
조선시대 퇴임 궁녀들이
여생을 보낸 곳이 아닐까?
살아서도
죽어서도
오직 왕만
섬겨야하는
궁녀의 일생.
왕의 생전에는 궁궐에서
왕의 사후에는 사찰에서.,
백화사 담장 뒷편은 조선왕실 내시부.,공동묘지.
백화사는 궐에서 나온 궁녀들.,노후 은둔지였을까?.
백화사는 조선시대 '정업원'의 역활을 한듯.,여겨진다.
후손이 없는 궁녀들이 궐을 나온 이후
노후에 몸을 의탁한.,'비구니 사찰' 백화사.
내시부에서 백화사 비구니를 돌본듯 추정된다.
궁녀가 병들면
궁궐을 나와야 하는
조선시대.,왕실의 법도.
사가(私家)에 몸을 의탁할 수 없는 궁녀는
내시부에서 보살피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궁녀는 한번 궁궐에 들어가 입궐하고나면
죽는 순간까지 궁녀 신분으로 평생 살아야 하며
비록, 왕의 성은을 받지 못했어도 정절을 지켜야 했다.
의녀가 앵무새 피를 팔뚝에 떨어트려 흘러내리면
궁녀가 될 수 없었고 살에 묻으면 처녀로 인정 받는
처녀감별법을 통해 입궐하고나면, 평생 외로움의 연속.
궁녀는 신분 상으로는.,'왕의 여자.'이지만.
궁녀가 왕의 성은을 받기란.,하늘의 별 따기.
그 맺힌 한이 하늘에 닿아
가뭄의 원인이 된다고 하여
대기근 때에는 궁녀들을 방출.
사실 상, 궁녀를 감원 차원에서
퇴출할 경우에도 지켜야 할.,정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 궁녀 간
엉덩이에 벗 '朋' 문신도 성행하였고
남근 노리개로 밤의 외로움을 달랬다.
그러나, 궐내 궁녀가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동성애를 하거나 별감 또는 내시와 관계 할 경우
궁형, 곤장100대, 교형, 참수형 극형 등을 받았다.
죽음이 두려우나
사랑에 굶주린 궁녀들은
동성애에 빠지기도 하였다.
문종이 세자였던 시절에, 세자빈을 멀리 하자
세종은 미모의 순빈봉씨를 새 세자빈으로 책봉.
그러나, 순빈봉씨는 궁녀와의 동성애로 쫓겨난다.
현종8년(1667년) 꿏다운 이팔청춘 나이의 궁녀.,귀열.
깊고도 깊은 궁궐의 기나긴 겨울밤이 견디기 힘들었다.
하여, 궁궐 서리인 형부를 유혹하여 통정한 사실이 발각.
극도로 흥분한 현종은
대비전 나인 귀열에게
즉시 참수형을 집행했다.
그리하여, 일단 궁녀가 되면
궁궐에서 퇴출된 궁녀라 해도
혼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
...............................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1번지 국회의사당.
조선시대 궁녀들의 공동묘지 양말산(190m) 터.
조선시대 양, 말 '국유 방목장'이 있었기에.,양말산.
양말산 샛강 영등포 쪽 연못가에
갑오경장으로 내시제도 폐지 전까지
용추(龍湫)라는 내시 시술소가 있었다.
고종 34년(1897)
대한제국 성립 전까지
음경은 남겨놓고 고환만 제거했는데
그 비명소리가 멀리 새어 나가지 않도록
천둥 번개 치는 비오는 날에만 내시 시술.
시술 도중에 죽는 경우도 잦았고
시술 후유증으로 인해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경우도 잦았다 한다.
이곳에서 시술 받은 내시들에게는
용추가 새 생명을 부여받은 곳이기에
"시술한 의녀를 어머니라 불렀다." 한다.
이 일대에는 내시의 한이 서려있어
오늘날 국회가 늘 시끄러운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지관들의 이야기도 있다.
여의도 양말산 궁녀공동묘지는
조선시대 궁녀들의 묘터 중에서도
한맺힌 혼이 많이 묻힌 곳인듯 하다.
18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국사의사당 뒤편에
거대한 남근석을 세워 여인들의 한을 달랬던 곳.
원래, 명당은 기맥이 흐르고 모여서 진혈터를 형성.
그러나, 양말산 터는 기맥이 거의 없어
생기 없는 죽은 땅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
화장터나 공동묘지는 음기 넘치는 곳을 골라
일부러 맥이 꽉 뭉친 곳에 터를 쓰기 때문이다.
"망자가 사는 음기 가득한 곳에서는
산 사람이 제대로 살 수 있을 리 만무."
“나쁜 기운이 가득한 곳에 사람이 계속 머물면
몸 안에 균형이 무너져서 분란이 일어나기 마련.”
그래서, 오늘날 국회의사당은 분란이 잦은 것일까?
백화사 인근에 위치한., 북한산 초등학교.
원래, 조선시대 궁녀들의 묘터 였다는 곳이다.
이곳 의상봉 자락 역시 조선왕실 묘역과 관련 깊다.
진관동 백화사계곡 주변에는
조선왕실 종친들의 묘역이 많고,
궁녀들의 묘역, 내시부 묘역이 있다.
원래, 내시는 왕의 침소를 지키는 자.
이들이 고자가 되어 내시부에 들어가면
혹독한 수련과정을 거쳐야만 내시가 된다.
국가에 고변이 발생하였거나
왕을 해치려는 정변이 일어날 경우
왕의 은신처를 함구하는 것은 기본 소양.
입조심을 위해 나무에 꺼꾸로 매달리거나
코에다 모래를 넣는 고문 등 입조심 수련과정.
과거급제자 버금가는 학문을 쌓아야 내시부 입성.
하여, "조선왕실 제2 의 성도(聖都)" 또는
"신들이 사는 곳.(옛주소 신도읍 : 神道邑)"
조선시대 사자(死者)의 마을이었다는.,신도읍.
'귀신 神,
길 道,
고을 邑'
'조선시대 산 사람보다는
죽은 사람이 더 행세했다.'는
의상봉 아래.,'백화사계곡 일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에 속하지만
그 후손들의 발길이 이미 끊긴 묘가 많아
멧돼지 출몰 다발구역일 만큼 인적이 드문 곳.
요즘도 인근 주민들이
새벽 산책을 꺼리는 곳.
한낮에도
이곳을 지나치면
등골이 오싹할 정도.
서울특별시 임에도불구하고
멧돼지 가족이 땅을 판 흔적들이
여기저기 시야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사자의 마을인 이 일대는
간간이 등산로에서 벗어난 등산객들이
길을 찾아 묘지 사이를 방황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도성에서 십리까지는 묘를 쓸 수 없었는데,
이말산 일대는 성저십리 외곽지대라 분묘가 많은 지역.
조선시대에는 내시부에서 이곳 분묘들까지 관리했던걸까?
1960~1970년대까지만해도
내시부 후손들이 많이 살았고
묘지기 주민들이 많이 살던 마을.
조선시대 역대 내시부 상선들의 묘소가
유일하게 보존되어 몰려있는.,내시부 별장.
약 5만평 남짓 규모로 수영장 및 별장도 있다.
내시부 상선은.,조선시대 내시부 최고위직 벼슬.
특히, 명종 재위 때 내시부상선이었던 환관 노윤천.
그의 묘를 비롯하여 그의 후손들이 묻힌.,내시부 묘역.
왕이 내시부 상선에게 하사한 후,
그 수양아들의 후손이 대물림으로
소유하였거나 지켜온 별장인듯 하다.
그러나, 북한산초등학교에서부터
이말산 인근까지 내시부 별장 주변에
산재한 묘역은 아직까지는 방치되어 있다.
'내시부 별장' 철조망이 끝나는 지점부터
백화사계곡으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열린다.
'등산로 따라 올라갈까? 개울따라 올라갈까?'
등산객 대부분 등산로 따라서 오르지만
개울 따라 오르면 더 아름다운 비경지대.
북한산 '의상봉 가는 길' 백화사계곡 입구.,등산로.
'비구니 사찰' 백화사를 지나면 계곡 풍경이 아름답다.
조선 말, 사대부들이 기생과 풍류를 나눴다는.,여름 피서지.
30~40년 전까지만 해도
인근 여기소마을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했다는.,계곡물.
여기서부터는
계곡을 즐기기
딱 좋은.,개울길.
'백화사계곡' 개울길로.,들어서면
규모는 작아도 비경지대의 연속이다.
연인 사이라면 단둘이 찾기에 적당한 곳.
폭포 지대도 있고
개울가 암반지대도 있고
마당바위 쉼터도 간혹 나타난다.
조선시대 무관과 기생 같은 연인이
한밤중에 이곳에서 만나 함께 목욕하며
남몰래 회포를 풀었음직한 개울가 너럭바위.
사랑하는 사이라면
함께 목욕하고도 싶고
서로 정분을 나누는 것이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이리라.
고요한 밤의
정막을 깨는
개울가 물소리.
달빛 또한 부끄러워
구름 뒤에 숨었으리라.
혹시, 누가 엿보지 않을까?
조선시대에는
백화사 비구니도
역시 이곳으로 와서
몸과 마음을 씻었으리라.
마음을 씻고 또 씻어도
쉽게 씻어지지 않는.,세속(世俗).
세심대(洗心臺)라 명명되었음직한 곳.
그러나, 이곳에 전하는
지명은 '백화사계곡' 뿐이다.
그외 지명은 맥이 끊긴 것 같다.
백화사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기자기한 비경지대.
선비와 기생들이 풍류를 즐겼음직한 개울가 너럭 바위들.
백화사계곡을 끝까지 거슬러 오르면., 마지막 폭포가 넓은 소.
이곳 위로 올라가 보면
집채보다 큰 바위가 있고
그 큰바위 밑에 동굴이 있다.
무당들의 굿 흔적을
자주 볼 수 있는 동굴.
그 동굴 안에서
은밀하게 솟는 샘물은
마치, '여인의 상징' 인듯.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여근곡에 위치한 동굴은
사자(死者)의 환생을 의미.
.
'용출봉의 정기'를 의미하는 샘물일까?
'아니면, 불교의 윤회설'을 뜻하는 곳일까?
아직도 무속신앙 기도처로서 각광 받는.,동굴.
간혹, 동굴 안에는 촛불이 켜져있고
무당이 굿을 한듯 제수음식이 널려있고
그곳 주위는 경사급한 암반지대가 감쌌다.
그 앞 암반 위에 목욕하기 적당한 소가 있다.
옛부터 이곳을 찾는 무녀들이 목욕재개하던 곳.
그 뒤로 돌아 올라가면, 또 하나의 계곡이 숨겨져 있다.
마치, 처녀의 그곳을
연상하게 하는.,처녀골 산세.
그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큰바위.
마치, 처녀의 자궁을 보호는
처녀막을 상징하는듯한.,풍경.
'큰바위 아래 동굴은
굿판 무녀(巫女)들에게는
사자(死者)의 환생(還生)을
염원(念願)하는 기도처인 곳일까?'
집채보다 더 큰바위가
개울의 입구를 가로막았고
그 뒤에는 개울이 숨겨져 있다.
위치가 비밀스럽고 은밀해
인적이 끊긴 계곡 속.,개울.
계곡이라 부르기에는 작은 규모이고
개울이라 부르기에도 규모가 큰 편이다.
마치, 하늘나라 선녀들의 목욕처 같은 곳.
백화사계곡 속에 숨겨진
또 하나의 비밀스러운 계곡.
마치, 별천지 인양 아름다운 곳.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을 연상케하는 곳.
북한산에서 가장 인적이 드문 곳이기도 하다.
하여, 하산길에 목욕하고픈 女心을 자극하는 곳.
접근조차 허용하지 않을듯
도도한 매력을 발산하면서도
보일 것은 드러내고 싶은.,女心.
북한산12성문 올리지 등반을 하고나면
온몸은 물론 속옷까지 땀에 흠뻑 젖는다.
하산 후,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민망할 만큼.
"선생님!~ 망 좀 봐주세요.
우리 여기서 땀 좀 씻을께요."
'12선녀산악회'에서는 유일한 홍일점.
할아버지 선배님이자 클라이밍 선생님.
그래서, 하산길에 몇번 망을 본적이 있다.
12처녀가 "12선녀탕"이라 부르던 곳.
피부 미용에 효험 있다는.,북천(北川).
북천이 아니더라도 땀을 씻고 싶은 쉼터.
.
등산로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계곡.
그곳을 지나면, '가사당암문'이 나온다.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에 있는.,가사당암문.
조선 숙종때 축성한 북한산성의 일부분이자
북한산성 외곽 12성문 중 하나인.,'가사당암문'.
조선시대 여기소 전설 속 종사관이 축성한 곳일까?
그곳 지나 능선 상에 도달하면
등산로 길가에 있는.,수도승바위.
가사를 입은듯한 수도승을 닮은 바위.
그래서, '가사당암문'이라 부르는걸까?
그 아래 의상봉에 위치한 사찰이.,국녕사.
의상대사 수도처.,궁녕사.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수도에 정진한 기도처.'
훗날, 조선시대 기도처에 세운 사찰이.,국녕사.
국녕사를 품고 있는 의상봉을 지나면.,용출봉.
용출봉.
용출봉.
남근처럼 우뚝 솟은 용출봉 산세.
용이 하늘로 솟을듯한.,용출봉(龍出峰)
독립된 암봉이라 낙뢰사고가 잦은.,곳이다.
백화사계곡 여근곡과 어울리는 산세.
백화사계곡에서 흘러내려 고인.,여기소.
여기소마을 입구.
..................찾아가는 길.............
여기소에서 유래된 지명.,여기소마을.
구파발역 1번출구 앞에서 704번 버스 탑승
백화사입구에서 하차하면.,여기소마을 입구.
............................................................
떡시루를 닮은 산세라.,증취봉.
증취봉 아래 부왕동암문 인근.,동굴바위 쉼터.
의상봉능선이 끝나는 지점이자 등산객들의 쉼터.
'의상봉~용출봉~ 용혈봉~ 증취봉'.,'의상봉능선'
의상봉능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경지대., 증취봉.
증취봉 ~부왕동암문~환희대~삼천사계곡~삼천사.
조선시대 연산군 재위때 비구니사찰이었던.,삼천사.
삼천사계곡은 예나 지금이나 풍광 좋은 곳.
조선 중기 선왕의 궁녀들이 몸을 담았던 곳.
삼천사 곁에 능선을 사이에 두고 있는.,진관사.
2015년 3월 진관사 탬플스테이
서울시의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문체위·위원장 이상묵)는
3월 10~11일 1박2일에 걸쳐 진관사에서 템플스테이를 체험.
첫날 일정은 진관사 역사와 템플스테이 소개, 타종, 예불체험.
둘째날 새벽 3시 30분부터 새벽예불과 108배, 참선, 포행, 다도.
2014년 10월 25~26 탬플스테이.
진관사.,16나한도.
'16나한도'는 왕실과 상궁들이 후원하여 조성.
'왕실 발원 불화'로 조선말 시대상을 볼 수 있다.
서울에서 활약하던 진철 비구가 그린 1884년 작품.
이말산.,진관공원.
'진관사~구파발' 사이에 있는.,이말산.
귀모양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이(耳)말산.
이말산에 위치한 진관공원은 은평뉴타운 산책로.
진관공원은 은평뉴타운 및 북한산 경관이
한눈에 들어와 요즈음 찾는 이들이 많은 곳.
.....................진관공원...........................
해발고도 132.7m의 이말산이 곧 진관공원이다.
면적 98만3,791㎡로 북한산국립공원까지 이어진다.,
조선시대 한양 사람들이 성묘를 다녔던 곳이 진관공원길.
지역주민의 일상 산책로로 주로 이용되고 있고
구파발역에 바로 인접하여 숲길로 북한산과 연결.
지하철 3호선과 704번 버스 등 대중교통을 통해서
북한산으로 진입하는 관문의 역할을 하는 시민공원
.....................................................................
은평구 진관동 산74.,이말산.
이말산.,진관공원.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1번 출구 앞.,폭포광장.
그곳 폭포 위로 올라가는 등산로가.,이말산 입구.
이말산에 들어서면 호젓한 숲속 오솔길이 펼쳐진다.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나즈막한 야산.,이말산.
女心을 자극할만한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다.
구파발역 폭포광장 위에 위치한.,연못.
그곳 연못에서 피고지는.,연꽃.
그 연못 인근에 위치한.,갈대밭.
미풍(微風)에도 흔들리는.,갈대 숲.
여심(女心)도 바람에 흔들리는 것일까?
그곳부터는 마냥 걷고만 싶은 숲속 오솔길.
이말산 숲속 오솔길은 진관사로 이어진다.
이말산 진관공원은 조선시대 묘터가 많다.
이곳 묘터은 진관사 수륙제와 관련 깊은듯..
은평구 지도는 물고기 형태이고
진관동은 그 머리에 해당하는 지역.
"물과 물고기는 왕과 신하의 관계."- 정조.
은평구 지도.
연못에 물이 없으면 물고기가 살 수 없고
연못은 조선왕실이고 물은 곧 왕이라는 뜻.
조선시대 은평구는 퇴임 내시와 궁녀들의 삶터.
은평(恩平)이란 왕(王)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모여 살며 그 왕을 추모하면서
여생을 보내는 곳이란 의미를 품고있는.,지명.
조선시대 진관사의 연례행사였던.,수륙제(水陸齊).
육지의 땅위나 땅 밑 그리고 바다 혹은 강에 살고 있는
미물중생이나 축생들을 위해 지은 죄업을 씻는 불교의식.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세종과 세조 재위 때에는
유교를 숭상하는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실에서는 전통적인 중요한 행사로 강행한.,수륙제.
진관사 수륙제
진관사 수륙제(津寬寺 水陸齋)는 조선초기부터
온 수륙(水陸)의 고혼 천도를 위하여 행해졌던 불교의례.
2013년 12월 31일 대한민국 중요민속문화재 제126호로 지정.
조선초기부터 불교의례로 조선왕조실록에
설행기록이 나타나는 역사성과 예술성이 높다.
개인 천도의 성격을 띤 영산재에 비해
대중적인 성격이 두드러지고 낮재․밤재
합설이라는 의례 상 특수성을 지니므로
중요무형문화재 신규종목으로 지정하였다.
오늘날, 은평구 지도를 살펴보면
수륙제의 흔적 또는 영향인듯 하다.
진관사 & 진관사계곡.
진관동은 서울특별시 은평구에 속한 동이다.
북쪽에 북한산 응봉이 있고, 동쪽에 경기도 고양시,
동의 많은 면적이 북한산국립공원 내에 포함되어 있다.
진관동 서쪽에 구파발동, 남쪽에는 불광동.
진관동 지명은., 응봉 기슭 진관사에서 유래.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고양군 신혈면에 속했다.
1914년 고양군 신도면 진관외리(津寬外里).
1973년 진관외리는 서대문구에 편입되었고
1979년 은평구 관할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이 동은 법정동명과 행정동명이 같다.
197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진관동.
인구증가로 1975년 진관내동과 외동으로 분리.
진관내동에서는 구파발동 행정도 담당한다.
옛 지명은 탑골, 삼천리골, 못자리골(못절터),
여기소, 마고정, 재각말, 잿말, 폭포동 등이 있다.
동의 많은 지역이 개발제한구역 및 군사보호구역.
북한산국립공원 행락객 등 유동인구 및 교통량 증가.
통일로, 진관사길 주변에 개발집중, 기자촌, 은평경찰서.
진관사 경내
진관사는 고려 8대 현종(顯宗)이 왕위에 오르기 전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 있을 때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진관조사 은혜에 보답하고자 절을 짓고 진관사라고 하였다.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
진관동 문화재로는.,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보물 657)
삼천사지 담벽에.,고려 초 마애여래입상(불상 높이 2.6m)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127·1., 삼천사(三川寺) .
신라 원효(元曉)가 흥국사(興國寺) 등과 함께 창건.
그 뒤 중창 및 중수에 관한 역사는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고려 현종 때 이 절 등의 승려들이 쌀로써
술을 빚어 처벌을 받았다는.,고려사 기록이 전하며,
6·25 때 불탄 뒤 1960년 중건한 대웅전과 선실(禪室) 등.
대웅전 위쪽 30m에 보물 제657호 석가여래입상.
자연바위에 새긴 마애불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인듯.
양각과 음각을 함께 섞어 조각하여 선을 잘 살린 작품.
삼천사(三川寺) 경내에는 오래된 큰 석조(石槽)와
고려시대 이영간(李靈幹)이 쓴 비명(碑銘)이 있다.
조선중기 연산군이 사냥 나왔다가
이곳 선왕의 후궁과 궁녀들이었던
비구니들을 희롱한 야사가 전한다.
삼천사계곡은 '시크릿 가든' 비경지
삼천사~환희대~부왕동암문~증취봉.
연산군이 흥청들과 환락을 즐겼다는 곳.
이말산
조선왕실을 대대로 섬긴.,내시부 상선 및
역대 왕의 유모였던 상궁들의 묘터.,이말산.
얼마나 많은 잊혀진 사연들과
묻혀진 전설을 품고있던 곳일까?
이말산.,옥궁임씨 묘소.
......이말산.,상궁 옥궁임씨 묘소.....
2004년 은평 뉴타운 지표조사 당시 발견.
상궁 임씨(1635~1709)는 본관)이 옥구(玉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낸.,임효원.
할아버지는 통정대부를 역임했던.,임회.
어머니는 '해주오씨'인 오금금의 딸이다.
상궁 임씨는 13살때인 1648년(인조26년)
액정서에 배속되어 궁궐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현종'이 된 원손의 동궁에.,30년간 소속.
액정서는.,왕이 쓰는 벼루 및 궁궐의 열쇠를 보관,
궁궐 정원의 설비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관청이다.
상궁 임씨는숙종과 각별한 사이.
숙종이 어린 시절에 "이모"라고 불렀다.
인조 계비와 숙종의 생모를 모신 때문이다.
1709년(숙종35년) 임 상궁이 75세 병사하자
관재와 포복을 하사하여 장사 지내게 하였다.
부모와 조부의 선영에 묻힌지 4년 후의 일이다.
...............................................................
아말산 일대에는
그 후손들이 끊겨
제멋대로 나뒹구는
묘비가 많았던 곳이다.
2015년 5월 서울시 지원으로
은평구 문화관광과에서 정비
서울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이말산(132.7m)은 은평구민 휴식처이자
은평뉴타운을 애워싸고 품고있는 산책로.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2번 출구에서 올라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 가도.,이말산 등산로.
조선시대 성저십리에 해당하는 이곳 지명은 '신혈'
'신혈' 지명은 신혈사(神穴寺)에서 유래되었다.
북한산 서쪽 기슭에 있는 진관사의 옛 이름으로,
고려 8대 현종이 왕에 오르기 전에 숨어 지내던 곳.
당시 주지였던 진관조사의 도움으로 목숨을 유지.
대량원군(大良院君)이 즉위 한후,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혈사를 '진관사'라 한것이 오늘날 진관동 지명의 유래.
이말산(李末山)
이말산(莉茉山)이
곧, 현재 진관공원.
약 30만평 규모.,아말산.
이말산은 매장문화재 보고이며.
말리(茉莉 : 자스민)의 자생지였단다.
즉, 이말산은 말리(茉莉)에서 유래된 지명.
한양 도성 및 한성부로부터 경계 지점의 시작이었다.
이곳은 내관, 궁녀, 중인, 사대부 묘역이 혼재되어 형성.
그중에서도 내관 및 궁녀 묘역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묘비 주인공들의 신분은
비문 글귀와 석물들로 보아
대부분 예사롭지 않은 인물들.
이말산 묘역은
상궁 임씨 처럼
조선왕실과 밀접한
가문들 또는 인물들이
묻힌 묘역으로 추정된다.
은평구 진관동 이말산 98만3천㎡ 일대
조선시대 내시와 궁녀들의 다양한 분묘.
1746기 분묘와 1488기 석물이 널려있던 곳.
............이말산 묘역.........
이말산 북사면 서에서 동으로
해주오씨, 밀양천씨, 우봉김씨.
영천이씨, 한산이씨, 완산이씨,
칠원윤씨, 묘역이 분포하고 있다.
이말산 남사면 사에서 동으로
청주한씨, 임천백씨, 임실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 환관 노윤천 친가,
선산백씨, 옥구임씨, 전주이씨 은언군파,
안산이씨, 김해김씨, 청주방씨, 청주한씨.
통진최씨, 김포김씨, 온양정씨, 수원최씨,
백천조씨, 진주강씨, 광주이씨, 제주고씨 묘역.
이외에도 내시 궁녀 모역, 중인계급인 역관 묘역,
평민시인 '위항시인' 묘, 집단 아기 묘, 등이 산재.
그중 은평뉴타운 지역 전주이씨 효령군파 묘역은 이장.
2010년 이말산에는 무연고 묘지313기,
유연고 묘지1433기 등 총 1746기 분묘.
또한 비석277기, 비신69기,문인석42기,
망주석64기, 동자석66기, 향로석238기,
상석435기,산신단8기,기단 254기, 제단2기,
장명등3기, 표지석4기, 혼유석26기 등이 조사.
............................................................
덧말.
'도봉구 창동~ 노원구 월계동' 나지막한 야산.,초안산.
319,503㎡ 면적에 조선 시대 환관 묘역을 비롯하여 양반,
중인(中人), 궁녀(宮女), 서민 등 다양한 계층 묘 1,000여 기.
무덤을 지키는 여러 석물이 흩어져있는.,초안산.
이곳에 조선시대 묘역이 밀집해 있는 이유가 뭘까?
도봉산 자락 도봉구는 하늘의 중심이자 옥황상제 거처.
자미원(紫薇垣)의 기를 집중적으로 받는 명당이라고 한다.
초안산은 배수가 잘되는 마사토 지질 야트막한 야산이며
산 왼쪽에 중랑천이, 오른쪽에 우이천이 흘러 풍수상 명당.
조선시대 한성 사자(死者)의 문은.,광희문, 수구문, 시구문 뿐.
광희문 밖 성저십리(약 3.93㎞)에 있는 도봉산 & 북한산.
두 산의 경우 풍수지리상으로 서울을 지키는 진산이므로,
일반인 묏자리로 적합하지 않았으므로 이 두 산을 제외하면
초안산 만이 일반인 묘를 쓸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장소가 된다.
이런 기준에 의해 초안산은 한양 동북쪽에 가장 적합한 묘지.
그 결과 사대부, 내시, 궁인들이 초안산을 묘지로 사용함으로써
현재, 1,000여 기 묘가 산재해 2002년 3월 9일 사적 제440호로 지정.
초안산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는 무려 40여 개.
대부분의 진입로가 자연적으로 만들어졌으나,
2000년대 이후 공원과 산책로가 많이 정비된 것.
노원구 월계동에 2008년 만들어진 ‘비석골 근린공원’
그 안에는 초안산 주변에 흩어진 비석 30기를 모아 전시.
노원구 월계동 쪽에서 초안산을 만날 수 있지만,
도봉구 창 2동 주택가 골목을 지나면.,초안산 자락.
초안산에 수많은 묘가 모두 내시와 궁녀 무덤은 아니다.
현재 어느 정도 분묘가 남아 있는 묘를 중심으로 조사한 결과
조선시대 사대부의 이름 모를 묘도 초안산에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
현재, 그 존재가 확인된 내시 묘소는 ‘승극철 부부 묘’가 유일.
이것이 현재 초안산에서 유일하게 묘비를 갖춘 내시 묘인 때문.
또한 초안산에서는 상궁 개성 박씨(開城朴氏)의 묘도 발견되었다.
이들을 통해서 조선시대 내시와 궁녀의 삶을 일부나마 엿볼 수 있다.
...........
............
승극철 부부 묘는 초안산 동남쪽 정상 녹천정(鹿川亭) 아래.
묘비의 전면에 ‘통훈대부 행내시부 상세 승공 극철 양위 지묘'.
'通訓大夫行內侍府 尙洗承公克哲 兩位之墓’ 라고 표기되어 있다.
뒷면에 ‘숭정 기원 후 갑술 삼월 일 립(崇禎紀元後 甲戌三月日立)’
승극철이 내시부 정6품 상세직(尙洗職)에 있었으며 통훈대부라는
정3품 품계를 받았던 인물로, 부인과 함께 쌍분으로 합장한 양위 지묘.
승극철 집안의 족보.,『연양군파 가승록(延陽君波家乘錄)』
승극철은 선조 대 상선(尙膳)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한
공이 있는 연양군(延陽君) 김계한(金繼韓)의 맏손자이며, 아들은
박중창(朴重昌)이고, 손자는 오윤환(吳允桓)으로 표기되어 있다.
1990년 대 초반 승극철 부부 묘 일대가 개발되기 전까지
50기 내시 묘가 있었으나, 현재 화장되거나 어디론가 이장.
조선 시대에 이장한 대표적인 무덤으로는 양주 사내리(沙乃里)
현재,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로 이장한 연양군 파조(波祖)인
숭록대부 김계한의 묘와 그 아들인 상선 김광택(金光澤)의 묘가 있다.
김광택의 묘비 명문에 따르면, 김계한→김광택→김선필→
정중명→서경달→최봉좌→백희장→홍명부 등으로 이어지는
내시 가계가 선산인 초안산을 묘역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내관들은 양자(養子)로 대를 잇기 때문에
김계한의 족보에서 볼 수 있듯이 부자간에도
성이 다른 경우가 많았으며 김계한의 부인은
복천 오씨로 그 5대 족산이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그 후손들이 효촌리 뒷산과 초안산에 묘소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김계한 이후, 즉 17세기 중엽 이후부터
초안산이 내시 가계 선산으로 묘가 계속 만들어진듯.
이장 전 김계한 묘 위치는 승극철 묘 위쪽인
현재 녹천정 자리에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승극철 가계는 선조 대 김계한을 시조로 하며,
역대를 거쳐 가장 번성하였던 내시 가계이다.
이들은 각심사(角心寺)가 있던 선산에 모셔졌고,
대를 이어 이곳 선산인 초안산에 묻혔던 것 같다.
이들 내시족의 한 계파가 수백 명에 달하는 것을 보면
조선 시대 가장 번창하였던 내시들은 이곳이 공동 묘역.
현재 확인되는 비문의 주인 외에도 마모되어 지워졌거나
흩어져 분식되었을 묘비, 묘만으로도 그 흔적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수색산 ~봉산 ~ 이말산' 일대는
내시 및 궁녀들의 공동묘지 묘터가 많은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