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회 모임 김인모 회원 ‘Irony가 드러나는 영시 두 편’ 발표주최자: 김학순 장소: 정신영기금회관
행사일: 2022-03-08조회수 :770
3월 8일(화) 정신영기금회관에서 열린 86회 영시공부 모임에서는 김인모 회원이 ‘Irony가 드러나는 영시 두 편’을 발표했다.
서구문학에서 Irony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Irony의 본질적인 특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보통 일상생활에서 아이러니칼하다고 말할 때 사람들은 ‘뜻하고자 하는 것의 반대로 말하는 것’, ‘비난하기 위해서 칭찬하고 칭찬하기 위해서 비난하는 것’, ‘비웃고 조롱하는 것’ 등을 생각한다. 실제로 서구에서도 근대에 이르러 다양한 Irony의 개념이 확립되기 전까지 200여년 이상 Irony는 표현법의 하나로 여겨져 왔으며 이는 염상섭의 단편소설 제목 ‘운수 좋은 날’과 같은 반어법과도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다.<말의 아이러니>
그러나 서구문학에서 Irony의 어원이 되는 희랍어 ‘에이로네이아’(eironeia; 라틴어 ironia)라는 단어를 고려해볼 때 그리스 시대에도 Irony의 관념은 존재했다고 보아야 하며 근대문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s)에 나오는 ‘peripeteia’(상황의 급격한 반전)을 번역하는 말로 Irony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극적 또는 비극적 아이러니>
근대 서구문학이 개화하자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이후 수없이 많은 작품에 다양한 Irony의 양상이 드러나면서 그 본질적 특징에 대한 여러 종류의 정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선 Ivor Armstrong Richards(1893~1979)는 ‘Principles of Literary Criticism’(1926)에서 Irony를 ‘균형 잡힌 태도’를 성취하기 위해 ‘대립적이고 보충적인 충동을 도입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또 Irony 개념의 확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Friedrich Schlegel(1772~1829)은 “현세는 본질적으로 역설적인 것이며 따라서 상반되는 감정을 지닌(ambivalent) 태도만이 그 모순적인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 Irony를 생각했다.
한편 신비평주의자 Cleanth Brooks(1906~1994)는 ‘irony and “Ironic” Poetry’(College English 9권)에서 문학작품의 한 요소가 그 문맥의 압력의 결과로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의미의 변화를 Irony라고 부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전문적인 소매치기가 침착하게 늘상 하던 일을 하는 사이에 자기 자신의 주머니를 털린다.<행위의 아이러니>/ 한 주인공이 달리던 중 간판에 부딪치지만 믿음직스러운 안전벨트 덕분에 무사하다. 헌데 그가 미처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불안하게 요동치던 간판이 떨어져 결국 주인공을 깔아뭉갠다. 그 간판에는 ‘안전벨트가 당신의 생명을 구합니다’라고 써있었다.<사건 또는 상황의 아이러니> 이같은 작은 이야기들은 모두 넓은 의미의 Irony에 속하지만 문학작품에서의 Irony에는 피할 수 없는 본질적인 특징이 있다. Douglas Colin Muecke(1919~2015)는 ‘Irony’(1970)에서 1) 자신감에 찬 不知(사실이건 가장된 것이건), 2) 외양과 현실의 대조, 3) 우스꽝스러운 요소(고통이 포함될 수 있지만), 4) 거리감(detachment), 5) 미적 요소 등을 Irony의 기본적인 특징으로 꼽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희극에는 언뜻 비굴하고 무지하고 약해보이는 Eiron과 그가골려주는 상대인 허영심 많고 오만하고 아둔한 Alazon이 등장한다. Herman Northrop Frye(1912~1991)는 알라존을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으로 정의했다. 에이론은 말로써 알라존을 비웃고 모욕하고 깎아내리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그에게서 중요한 것을 빼앗아가고 관객들도 그걸 알고 있지만 알라존 자신만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Irony는 한명 또는 그 이상의 등장인물은 모르고 있는 것을 관객이 이해하기 때문에 효과를 발휘한다. 이는 ’자신감에 찬 不知‘에 해당하지만 Oscar Wilde(1854~1900)처럼 ’가장된 순진함‘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여기서 에이론은 발화자, 즉 아이러니스트이고 관객은 우월과 자유와 재미를 만끽하는 아이러니의 관찰자이다. 한편 말의 아이러니는 아이러니스트의 관점에서 보지만 상황의 아이러니는 아이러닉한 관찰자의 관점에서 본다. 말의 Irony는 풍자적으로 되기 쉽고 상황의 Irony는 더욱 순수하게 희극적이거나 비극적이거나 또는 철학적으로 되기 쉽다.
Haakon Maurice Chevalier(1901~1985)는 ‘The Ironic Temper’(1934)에서 “모든 아이러니의 기본 특색은 현실과 외관 사이의 대조이다”라고 언급했다. F. 슈레겔의 ‘상반적인 감정을 가진 태도‘(ambivalence)와 비슷한 말이지만 슈발리에의 개념규정에는 사물이나 사건의 겉모습과 내면, 애매모호함과 분명함 등의 대비도 포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연극에서 복수의 등장인물이 태도나 성격에서 대조적인 경우는 많겠지만 내면화가 보다 더 심화된 근대소설 등에서는 단 한명의 주인공이 상반된 감정을 겪을 수 있으며 이는 낭만파의 아이러니에서 보편적인 현상이다.
물론 외양과 현실의 대조는 아이러니에만 존재하는 특징은 아니다. Paradox나 Satire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Irony에는 역설이나 풍자의 경우 희미하게 드러날 뿐인 거리감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Horace Walpole(1717~1797)은 “이 세상은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고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다”고 말했다.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려면 거리감이 필요하고 이는 논리적 모순 속에 진리를 포함하는 Paradox나 제3자를 공격하는 분명한 목표를 갖고 있는 Satire와는 사뭇 다른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Thomas Mann(1875~1955)은 “소설이란 ... 사물과의 거리를 유지하고 그 본질 자체의 성격에 따라 사물과의 거리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 서사시는 미학적 용어로는 ‘아폴로적’ 예술이다. 왜냐하면 아폴로는 원거리의 명사수로서 거리, 객관성의 신이며 아이러니의 신이기 때문이다. 객관성이란 아이러니이며 서사시 문학의 정신은 아이러니의 정신이다.”(‘소설의 예술’)고 규정했다. 한마디로 Heiterkeit(平靜함)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작가는 그 스스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작가는 주관적이면서 객관적이어야 하며, 열광적이면서 현실적이어야 하고, 정서적이면서 이성적이어야 하며, 창조적이면서 비판적이어야 할 뿐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영감을 받으면서 의식적인 예술가여야 한다. 이는 낭만파 시인들이 詩作을 하면서 겪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이었을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Romantic Irony는 한마디로 작가의 아이러니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느끼고 생각한 것을 종이 위에 옮길 때마다 좌절과 체념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것을 버젓이 알고 있지만 내일을 예측할 수 없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인과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은 결국 낭만파의 Irony가 철학적 Irony나 운명적 Irony라는 소위 일반적 아이러니와 불가분의 관계임을 보여준다.
Thomas Mann은 ‘Lotte in Weimar’에서 신과 예술가와 아이러니스트의 상호연관성에 대해 신의 응시는 “절대적인 예술의 응시이며 그것은 동시에 절대적인 사랑이면서 또한 절대적인 허무주의이며 무관심이다”라고 갈파했다. Johann Wolfgang von Goethe(1749~1832)가 Irony에 대해 인간으로 하여금 “행복 또는 불행, 선 또는 악, 죽음 또는 삶을 초월”하게 한다고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詩學‘에서 Irony에 해당하는 미학원리의 한 가지 사례를 들고 있다.
“단순히 우연히 일어난 일들 가운데서도 의도를 나타낸 것처럼 보이는 경우 가장 경이롭고 현저한 것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아르고스에 있는 미티스상이 미티스를 죽인 바로 그 살해자가 그 像을 둘러보고 있을 때 그 위에 쓰러짐으로써 그를 죽인 것과 같은 사건을 놓고 결코 우발적인 사고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한번 포괄적으로 Irony를 정의하자면 말과 그 의미, 행위와 그 결과, 외양과 실제 사이의 불일치나 부조화를 내포하고 있으며 따라서 부조리와 역설의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는 총 208행이나 되는 William Wordsworth(1770~1850)의 ‘어린 시절의 회상을 통한 영원불멸의 노래’(Ode: Intimations of Immortality from Recollections of Early Childhood) 첫 줄 즉 Epigraph(題詞)를 기억할 것이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노니 내 생애의 하루하루가
자연에의 경건한 마음으로 이어지기를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우선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첫줄은 어린이는 어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뿐더러 자신이 깨달은 것을 어른에게 충분히 알려줄 수 없다는 점에서 대단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I. A. Richards는 ‘Coleridge on Imagination’에서 Samuel Colerige(1772~1834)나 W. Wordsworth가 자연으로부터 때때로 끌어내는 두 가지 상상력의 원리가 있는데 인간은 자연을 통해 자기 이외의 다른 어떤 것에 연결되며<현실원리>, 또한 인간은 자연을 거울 삼아 욕망과 근심이 투사된 자신의 변형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투사원리> 아무튼 이 송가에서 ‘진부함과 이기적인 걱정거리의 껍질’에 때묻지 않은 어린이는 자연을 천상의 빛으로 옷 입는다. 다시 말해 어린이는 하느님으로부터 떠나온 지 얼마 안 되었으므로 하늘의 빛의 원천과 가까이 있고 아직도 양이나 벌처럼 자연과 조화로운 국면에 있다고 보고 있으며 이는 어린이가 신성에 가깝기 때문에 자연스럽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어린이가 어른의 아버지가 되는 Irony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Thomas Stearns Eliot(1888~1965)의 ‘The Waste Land’(1922) 앞부분도 우리를 자못 충격에 빠지게 한다. “정말 쿠마에서 나는 한 무녀가 항아리 속에 달려있는 것을 똑똑히 내 눈으로 보았다. 애들이: ’무녀야 넌 무얼 원하니?‘ 물었을 때; 무녀는 대답했다: ’난 죽고 싶어‘”라는 Epigraph(題詞)와 Ezra Pound(1885~1972)에 대한 헌사에 이어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Irony가 바로 등장한다.
1. 死者의 埋葬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라일락꽃을
죽은 땅에서 피우며,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활기 없는 뿌리를 일깨운다.
겨울이 오히려 우리를 따뜻이 해주었었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고, 마른 球根으로
작은 생명을 길러주며,
1. The Burial of the Dead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brea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Winter kept us warm, covering
Earth in forgetful snow, feeding
A little life with dried tubers,
엘리엇 자신이 주석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시의 토대는 Jessie Laidlay Weston(1850~1928)의 ‘From Ritual to Romance’(1920)이다. 어부왕 신화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은 버려진 황무지와 잃어버린 풍요를 복구하는 내용과 관련이 있다. 성배전설의 기원과 변천을 다루면서 옛날의 풍요의식이 기독교화하여 기사들의 성배탐색 이야기로 발전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어부왕의 성적 불능으로 국토는 불모의 저주가 내려, 비가 오지 않자 강은 마르고 식물은 시들며 생물은 생식을 그친다. 왕과 나라를 구하려면 마음이 순결한 기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성배를 찾아내야 한다. 그 기사는 황무지 한복판에 있는 위험성당 혹은 聖杯城에서 용기와 순결에 대한 가혹한 테스트를 받은 뒤 되찾은 성배의 힘으로 어부왕을 낫게 하고 국토에 풍요를 가져올 수 있다. 그 함의는 새로운 생명은 죽음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엘리엇은 현대가 정신적으로 메마르고 불모일뿐더러 선악의 지식조차 잃고 삶이 일종의 죽음인 사람들이 사는 荒蕪地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다른 작품을 차용할 때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효과중 하나가 Irony라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다. 계절을 굳이 구분하면 봄은 Comedy, 여름은 Romance, 가을은 Tragedy, 겨울은 Irony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봄이 시작될 무렵이면 거의 비극들로 이루어진 축제를 벌였다. 겨울 동안 쌓인 나쁜 감정을 씻어내고 가을의 수확에 대한 위험도 제거하려는 것이다. 엘리엇은 겨울이 도리어 봄보다 따듯했다며 죽은 자를 묻어야하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리스 시대의 전통을 충실하게 따른 발상이라 볼 수 있다. 엘리엇은 지성과 감성을 종합하는 분열되지 않은 ’통합된 감수성‘을 지닌 총체적 인간을 이상형으로 보았다. 산업화와 세속화로 황폐한 시대를 야기한 인류야말로 스스로 순결한 기사가 되어 황무지를 풍요의 땅으로 바꿔나가야 한다는 메시지인 만큼 명백한 Irony라고 아니할 수 없다.
* 참고도서
D. C. Muecke: Irony 1986, 문상득 역, 서울대 출판부
Cleanth Brooks: The Well Wrought Urn 1997, 이경수 역, 문예출판사
Thomas C. Foster: 교수처럼 문학읽기 2018, 박영원 손영미 역, 이루
장미와 나이팅게일 1967, 이재호 역편 범한서적
* * * * * * * *
* John Donne(1572~1631); 17세기와 20세기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영국의 대표적인 형이상학파 시인이요 산문작가. 그는 날카로운 위트, 놀라운 奇想(Conceit)과 관능적이며 강열한 풍자시 등으로 유명했다. 형이상학파 문학은 기지가 풍부한 기상(witty conceits)을 정교한 비유로 표현했고 대부분 대화체(구어체)와 역설을 활용, 논리적 분석적이면서도 압축 집약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한때 국새상서인 토마스 에저튼경의 비서였지만 그의 조카 앤 모어와 비밀결혼을 했기 때문에 실직하고 1602년까지 감옥에 갇혀있었다. 후에 제임스 1세는 그를 성 바오로 대성당의 수석사제로 임명했다.
The Canonization BY JOHN DONNE
For God‘s sake hold your tongue, and let me love,
Or chide my palsy, or my gout,
My five gray hairs, or ruined fortune flout,
With wealth your state, your mind with arts improve,
Take you a course, get you a place,
Observe his honor, or his grace,
Or the king’s real, or his stamped face
Contemplate; what you will, approve,
So you will let me love.
Alas, alas, who‘s injured by my love?
What merchant’s ships have my sighs drowned?
Who says my tears have overflowed his ground?
When did my colds a forward spring remove?
When did the heats which my veins fill
Add one more to the plaguy bill?
Soldiers find wars, and lawyers find out still
Litigious men, which quarrels move,
Though she and I do love.
Call us what you will, we are made such by love;
Call her one, me another fly,
We‘re tapers too, and at our own cost die,
And we in us find the eagle and the dove.
The phœnix riddle hath more wit
By us; we two being one, are it.
So, to one neutral thing both sexes fit.
We die and rise the same, and prove
Mysterious by this love.
We can die by it, if not live by love,
And if unfit for tombs and hearse
Our legend be, it will be fit for verse;
And if no piece of chronicle we prove,
We’ll build in sonnets pretty rooms;
As well a well-wrought urn becomes
The greatest ashes, as half-acre tombs,
And by these hymns, all shall approve
Us canonized for Love.
And thus invoke us: "You, whom reverend love
Made one another‘s hermitage;
You, to whom love was peace, that now is rage;
Who did the whole world’s soul contract, and drove
Into the glasses of your eyes
(So made such mirrors, and such spies,
That they did all to you epitomize)
Countries, towns, courts: beg from above
A pattern of your love!"
시성(諡聖)
제발 입 좀 닥치게, 내가 사랑 좀 할 수 있게.
내 중풍이나 통풍을 걱정해도 좋고,
몇 올 안 남은 내 흰머리나 탕진한 가산을 비웃어도 좋지만,
자네나 돈 모아 지위 높이고 학문으로 고상해지며,
출세해서 궁정의 한 자리나 차지하고,
고관대작이나 주교의 은혜나 구하시게.
아니면 왕을 배알하든가 동전에 찍힌 용안이나 쳐다보시오.
자네 멋대로 하게나.
그리고 내 사랑은 상관 말게.
아, 내 사랑에 누가 피해 입었나?
내 한숨에 뉘집 상선이 침몰했나?
내 눈물에 뉘집 전답이 잠겼다고 누가 말합디까?
내 감기에 오던 봄이 멈춘 적이 있던가?
내 혈관에 가득 찬 열기로
역병자 명단에 한 사람이라도 더 늘었나?
군인들에겐 전쟁들이 있고, 변호사들에겐
싸움 좋아하는 소송군들이 여전히 있지 않소.
비록 그녀와 내가 사랑을 해도.
우리를 무어라고든 부르게, 사랑 때문에 이렇게 되었으니;
그녀를 한 마리 나방, 나도 다른 한 마리 나방으로 불러주시오.
우리는 또한 촛불이어서 제 몸을 태워 죽는다네.
또 우리 속에는 독수리와 비둘기가 들어있고
불사조의 수수께끼는 우리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지;
둘이면서 하나인 우리가 바로 그것이니까.
그러니 우리의 양성은 중성이 되고,
죽어서 같은 몸으로 승천하니,
이 사랑으로 신비한 것이 된다네.
우리는 사랑으로 살 수는 없어도, 죽을 수는 있다네.
우리 전설이 碑銘이나 銘旌거리는 못되어도,
詩 쓰기에는 안성맞춤 일걸세;
우리가 한편의 연대기는 못 되어도,
소네트 속에 보금자리는 꾸밀 수 있을 것이네;
잘 빚어진 항아리가 반 에이커의 陵 못지않게,
위대한 死灰를 담을 수는 있다네.
그리고 이런 사랑의 성가로
모두들 우리가 성인이 되었음을 알게 되겠지.
그러니 우리에게 간청하시오:
신성한 사랑으로 서로에게 안식처를 마련하신 그대들이여;
지금 우리에겐 광란에 불과하지만 그대들에겐 사랑이 평화였던 분들이여!
온 세상의 영혼을 짜내서
그대들의 눈의 거울 속에
(그렇게 거울이 되고 안경이 되어,
그것이 온 세상을 그대들에게 축소해주어)
시골과 도시와 궁정을 몰아넣습니다.
바라옵나니 천상에서 그대들의 사랑의 본을 보여주소서!
cf. Monologue/Contrast/Hyperbolical metaphors of the Petrarchists/
Invocation/Erich Fromm(1900~1980)/Genesis
* John Keats(1795~1821): Percy Bysshe Shelley(1792~1822), George Gorden Lord Byron(1788~1824)과 함께 18세기 영국 낭만주의 전성기의 3대 시인. 1815년 유명한 소네트 ‘On First Looking into Chapman’s Hormer’를 썼고 Edmund Spenser(1552~1599)의 ‘Faerie Queene’(선녀여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동생 톰을 간호하다가 폐결핵으로 25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의 시는 당시 비평가들에게 높게 평가받지 못했지만 사후 Alfred Lord Tennyson (1809~1892), Wilfred Edward Salter Owen(1893~1918) 등 많은 시인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묘비에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작가 Francis Baumont (1584~1616)의 ‘Philaster‘에서 따온 문구인 “여기 물 위에 이름을 쓴 자가 누워 있노라(Here lies one whose name was writ in water)”가 쓰여 있다.
Ode on a Grecian Urn BY JOHN KEATS
Thou still unravish‘d bride of quietness,
Thou foster-child of silence and slow time,
Sylvan historian, who canst thus express
A flowery tale more sweetly than our rhyme:
What leaf-fring’d legend haunts about thy shape
Of deities or mortals, or of both,
In Tempe or the dales of Arcady?
What men or gods are these? What maidens loth?
What mad pursuit? What struggle to escape?
What pipes and timbrels? What wild ecstasy?
Heard melodies are sweet, but those unheard
Are sweeter; therefore, ye soft pipes, play on;
Not to the sensual ear, but, more endear‘d,
Pipe to the spirit ditties of no tone:
Fair youth, beneath the trees, thou canst not leave
Thy song, nor ever can those trees be bare;
Bold Lover, never, never canst thou kiss,
Though winning near the goal yet, do not grieve;
She cannot fade, though thou hast not thy bliss,
For ever wilt thou love, and she be fair!
Ah, happy, happy boughs! that cannot shed
Your leaves, nor ever bid the Spring adieu;
And, happy melodist, unwearied,
For ever piping songs for ever new;
More happy love! more happy, happy love!
For ever warm and still to be enjoy’d,
For ever panting, and for ever young;
All breathing human passion far above,
That leaves a heart high-sorrowful and cloy‘d,
A burning forehead, and a parching tongue.
Who are these coming to the sacrifice?
To what green altar, O mysterious priest,
Lead’st thou that heifer lowing at the skies,
And all her silken flanks with garlands drest?
What little town by river or sea shore,
Or mountain-built with peaceful citadel,
Is emptied of this folk, this pious morn?
And, little town, thy streets for evermore
Will silent be; and not a soul to tell
Why thou art desolate, can e‘er return.
O Attic shape! Fair attitude! with brede
Of marble men and maidens overwrought,
With forest branches and the trodden weed;
Thou, silent form, dost tease us out of thought
As doth eternity: Cold Pastoral!
When old age shall this generation waste,
Thou shalt remain, in midst of other woe
Than ours, a friend to man, to whom thou say’st,
"Beauty is truth, truth beauty,?that is all
Ye know on earth, and all ye need to know."
그리스 항아리의 노래
1
그대 아직 더럽혀지지 않은 정적의 신부여,
그대 침묵과 느린 시간의 양자여,
우리의 시보다 더 감미로운 꽃다운 이야기를
이처럼 표현할 수 있는 숲의 역사가여,
템페 혹은 아르카디아 골짜기에 있는
신들 혹은 인간들, 아니면 둘 다의,
잎사귀로 가장자리가 꾸며진, 어떤 전설이 그대 주변에 감도는가?
이들은 어떤 인간들이고 어떤 신들인가? 어떤 처녀들이 수줍어하는가?
얼마나 미친 듯한 추적인가? 얼마나 도망치려는 몸부림인가?
무슨 피리들이며 작은 북들인가? 얼마나 미칠 듯한 황홀인가?
2
들리는 멜로디는 감미롭지만, 들리지 않는 멜로디는
더 감미롭다. 그러니 부드러운 피리들아, 계속 불어라;
감각의 귀에다 불지 말고, 더욱 정답게,
영혼의 귀에다 불어다오 곡조 없는 노래를;
나무 밑에 있는 아름다운 젊은이여, 그대는 그대의 노래를
그칠 수 없고, 저 나무들도 헐벗을 수 없으리라;
대담한 연인이여, 결코, 결단코, 그대는 키스하지 못하리라.
아무리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도 그러나 슬퍼하지 말라;
그대 비록 행복을 누릴 수 없어도, 그녀는 시들지 않으리니
영원히 그대는 사랑하고 그녀는 아름다울 것이기에!
3
아, 복되고 복된 가지들이여! 그 잎들을
지게 할 수도, 봄에게 작별을 고할 수도 없으리라;
그리고 싫증 낼 줄 모르는 복된 연주가여,
영원히 새로운 노래를 연주하고 있으니;
더욱 복된 사랑! 더욱 복되고 복된 사랑이여!
영원히 따듯하고 언제나 누릴 수 있고,
영원히 헐떡이고, 영원히 젊어 있으니;
크나큰 슬픔으로 가득 차서 넌더리 쳐지는 가슴,
뜨거운 이마와 타는 듯한 혀를 남기는
모든 숨쉬는 인간의 정열을 초월하도다.
4
제사지낼 곳으로 오고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
오, 신비로운 사제여, 어느 녹색 제단으로
그대는 하늘을 보고 우는 송아지,
꽃다발로 꾸민 비단 같은 허리를 가진 저 송아지를 어디로 끌고 가는가?
강가 혹은 바닷가, 아니면 평화로운 성채로
산 위에 지어진 어떤 작은 마을이기에
이 경건한 아침,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는가?
그리하여 조그만 마을이여, 너의 길거리들은 영원히
침묵하리라; 그리고 단 한 사람도
왜 네가 황폐해졌는지 말하러 돌아올 수 없으리라.
5
오 아티카의 형체여! 아름다운 자태여!
대리석 총각들과 처녀들,
숲의 가지들과 짓밟힌 잡초로 온통 뒤섞여 새겨진;
그대 말없는 형상이여, 그대 영원이 그러하듯
우리들 생각이 미칠 수 없도록 괴롭히고 있구나: 차디 찬 목가여!
늙음이 이 세대를 황폐케 할 때,
그대는 우리의 비애와는 다른 비애의 한복판에서
인간에게 친구로 남아서 그에게 말하리라.
“아름다움은 진리이고 진리는 아름다움이라”고 이것이
지상에서 그대들이 아는 전부이고, 알아야 할 전부다.
cf. Tempe = valley in Thessaly; It was here that Apollo purified himself after slaying the Python, and where he cased Daphne whose metamorphosis gave him the laurel crown./ Arete, Kalokagathia, Sophrosyne/ Benjamin Bailey
* 참고할 한국시
도다리를 먹으며 김 광 규
일찍부터 우리는 믿어 왔다.
우리가 하느님과 비슷하거나
하느님이 우리를 닮았으리라고
말하고 싶은 입과 가리고 싶은 성기의
왼쪽과 오른쪽 또는 오른쪽과 왼쪽에
눈과 귀와 팔과 다리를 하나씩 나누어 가진
우리는 언제나 왼쪽과 오른쪽을 견주어
저울과 바퀴를 만들고 벽을 쌓았다.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자유롭게 널려진 산과 들과 바다를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누고
우리의 몸과 똑같은 모양으로
인형과 훈장과 무기를 만들고
우리의 머리를 흉내 내어
교회와 관청과 학교를 세웠다.
마침내는 소리와 빛과 별까지도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고
이제는 우리의 머리와 몸을 나누는 수밖에 없어
생선회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신다.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
온몸을 푸들푸들 떨고 있는
도다리의 몸뚱이를 산 채로 뜯어먹으며
묘하게도 두 눈이 오른쪽에 몰려 붙었다고 웃지만
아직도 우리는 모르고 있다.
오른쪽과 왼쪽 또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결코 나눌 수 없는
도다리가 도대체 무엇을 닮았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