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
꽃 중에서도 죄 없는 꽃이수선화로 피어난다 꽃 중에서도 용서하는 꽃이수선화로 피어난다
꽃 중에서도 가장 사랑하는 꽃이서귀포 검은 돌담 밑에 피어난다 이른 봄에 수선화를 만나러 가면 추사 선생을 꼭 만난다 이듬해 이른 봄에도 추사 선생을 만나러 가면 수선화를 꼭 만난다
사람중에서도 가장 죄 없는 사람이 수선화로 피어나 온 나라를 수선화 향기로 가득 채운다
겨우내 세한의 소나무에 앉아 있던 작을 새 한 마리 나뭇가지 사이로 푸드덕 흰 눈을 털며 우리는 오래도록 잊지 말자고 봄이 오지 않아도 수선화는 피어난다고 수선화가 피어나기 때문에 봄이 온다고 추사 선생처럼 수선화를 바라보며바다로 가는 봄길을 걷는다
울지 말고 꽃을 보라
서울 영등포 거리에서 꽃을 파는 아주머니한테 꽃대가 막 올라온 작은 수선화 화분 한 개 샀다. 비닐봉지에 넣어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는 동안 올 봄에는 내 손으로 수선화를 피워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그동안 사는 데 바빠 내 손으로 꽃 한 송이 키워본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수선화는 며칠 안 가 여린 꽃대를 쭉 밀어 올리며 활짝 꽃을 피웠다. 연노란 꽃빛이 어둡고 좁은 방 안을 한순간에 환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 어떤 사람이 주변을 이토록 아름답게 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이 이토록 꽃처럼 아름다울 수 있을까, 나는 수선화가 핀 것을 보고 나에게도 이제 봄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그런 생각을 지워버렸다. 꽃이 피기 때문에 봄이 온 것이 아니라, 봄이 왔기 때문에 꽃이 핀 것이다. 내 손으로 꽃을 피운게 아니라, 봄이 왔기 때문에 꽃이 핀 것이다. 내 손으로 꽃을 피운게 아니라 꽃 스스로 피어난 것이다. 꽃이니까 아름다운 것이지 아름다우니까 꽃이 아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지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나는 왜 한순간이나마 본질과 현상이 전도된 그런 생각을 했느니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인생의 혁명과도 같은 결혼도 마찬가지다.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 것이지, 결혼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청혼할 때는 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는 본질적 문제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즉 내가 결혼할 만큼 사랑하는가 하는 것이 가장 우선적 가치로 설정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 경우,결혼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혼이라기보다 결합에 가깝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결혼하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본질과 현상이 뒤바뀐 가치전도 현상이다
문제는 본질에 있다. 본질이 존재해야 현상이 존재한다. 그런데도 나는 지금껏 본질의 존재에는 무관심한 채 외양의 존재와 변화에만 관심을 지닌 채 살아왔다. 이는 자신은 변하지 않고 남이 변하기만을 바라는, 자신은 탓하지 않고 남만 탓하기를 즐기는 삶의 태도다. 문제는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변해야 남이 변하고,속이변해야 겉이 변한다.
올봄에 나는 본질과 현상이 전도되고 원인과 결과가 뒤바뀌는 삶의 태도를 버리는 데서 봄의 의미를 찾는다. 봄이 왔기 때문에 꽃이 피는 것이지, 꽃이 피기 때문에 봄이 온 것은 아니다, 봄비가 오기 때문에 강물이 흐르는 것이지 강물이 흐르기 때문에 봄비가 내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내가 있기 때문에 세상이 있는 것이 아니고,세상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것이다.
다시 수선화를 바라본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조금도 방황하지 않는 모습이다. 꽃은 꽃을 피우려고 애쓰지 않으면서도 꽃을 피우고, 꽃은 피어난 그대로 방황하지 않고 열심히 산다. 누가 보든 말든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하늘을 향해 피어 있다.그리고 때가 되면 시들어 열매를 맺는다.
달라이 라마와 함께 세계 불교계의 큰스님으로 존경받으시다가 2022년 조국 베트남에서 입적하신 틱닛한 스님은 "한 송이 꽃은 남에게 봉사하기 위해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다, 오직 꽃이기만 하면 된다.그것으로 충분하다,한 사람의 존재 또한 그가 만일 진정한 인간이라면 온 세상을 기쁘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말씀하셨다.
꽃은 존재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이미 아름다운 것이다. 무엇을 이루려 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피어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꽃은 또한 지기 때문에 아름답다. 꽃이 지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모든 열매는 지는 꽃에서 비롯된다. 내가 사는 아파트엔 봄날에 가장 먼저 산수유 꽃이 피는데, 그 연노란 산수유도 꽃이 져야 붉은 열매가 익어 겨울엔 배고픈 새들의 먹이가 될 수 있다.
내게 수선화를 팔던 아주머니는 말했다. 꽃이 지고 꽃대마저 시들면 화분에 흙을 수북이 덮어 놓으라고 그러면 내년에 다시 구근에서 수선화 꽃대가 올라온다고,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 그동안 내 가슴속엔 내 인생의 꽃을 피울 수 있는 구근 하나 제대로 심어둔 게 없었다. 지금이라도 사랑이라는 구근을 심어야 한다,구근이라는 사랑의 본질이 있어야마 내 인생의 꽃도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다.
그 꽃은 굳이 만개하지 않아도 좋다. 꽃은 만개하기 직전이 더 아름답다. 인간의 만개는 오히려 오만을 부를 수 있다. 꽃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자신이 작고 볼품없는 씨앗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올봄에 우리 인생에도 또 슬픔이 많을 것이다, 그래도 꽃은 보도블록 사이에, 지하철 계단 이음매에 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울 것이다. 그러니 울지 말고 꽃을 보라 꽃은 시들지언정 스스로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 자기의 향기조차 의식하지 않고 겸손히 살아간다.
- 정 호 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
첫댓글 꽃은 시들지언정 스스로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
꽃을 보면서 자신을 버리지 않고 살아야겠습니다
정호승 님의 글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