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3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1코린 2,1-5
복 음 : 루카 4,16-30
그때에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할 것이다.”
24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마지막 유언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많은 이들이 좋아했던 11년 전 출간됐던 제 책명입니다.
당년 ‘둥근 마음, 둥근 삶’에 이어 출간됐고, 이어 7년 전에는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란
3권 째 책이 출간됐고 지금은 품절됐지만 수도원 피정집마다 3권이 비치되어 있습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에 대한 답을 나머지 2책의 제목이 주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윗 세권 책도 좋은 분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출간됐지 제 주변머리론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제 다음 책을 낸다면 제목은 제 좌우명 자작시 이름을 따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로 정하라 조언들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의 물음은 곧장 ‘어떻게 죽어야 합니까?’란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어떻게 죽어야 합니까?’에 대한 물음이 귀가준비의 남은 삶을 깨어 살도록 자극합니다.
죽음 앞에 환상은 사라지고 본질만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하여 제가 피정 중 자주 시도하는 것이 임종어, 유언, 묘비명을 써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좌우명이 되어 각자 삶의 지침이 되기도 하겠기 때문입니다.
제 경우라면 좀 길어도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자작 좌우명 애송시를 묘비명으로 써달라 할 마음입니다.
장례미사 때도 강론 대신 이 좌우명 시를 읽어 달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와 ‘제자들에게 보상을 약속하시다’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섬기는 삶에 최선을 다했을 때 저절로 따라오는 주님의 보상의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루카복음에서 오늘 복음의 배치가 의미심장합니다.
마태오나 마르코와 달리 루카는 요한처럼 최후의 만찬에 이어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처럼 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동상이몽, 오합지졸의 제자공동체에 주신 유언이 바로 오늘 복음에 제시됩니다.
세상에 유토피아 이상적 공동체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공동체 역시 인간적 눈으로 보면 참으로 부족한 이들의 공동체였습니다.
하여 오늘 복음에서 누구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로 말다툼이 벌어진 것 아닙니까?
또 오늘 복음 전에는 제자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신 내용이고
오늘 복음 다음에는 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배신할 것을 예고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처지가 얼마나 곤궁하고 고독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함께했어도 결국은 혼자의 외로운 처지의 예수님이셨음을 봅니다.
이런 와중에서 나온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 같은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 같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드리는’ 거룩한 섬김의 실천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지배하고 군림하고 권세를 부리는 세속 사람들과는 분명히 선을 그으며 마지막 유언 같은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당시 제자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 같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만으로는 부족하셨던지 주님은 다시 재차 섬김의 모범이신 당신을 닮을 것을 강조하십니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언제 어디서나 늘 믿는 이들의 공동체 한 가운데에
섬기는 사람으로 현존하시는 파스카의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진정 섬김의 삶에 항구할 때 섬기는 분으로 공동체 중심 가장 낮은 곳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그러니 분도 성인의 말씀대로 분도수도공동체만 아니라 믿는 이들의 공동체는
모두가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임을 깨닫게 되며
우리 삶의 여정은 주님과 형제들을 섬기는 법을 배워가는 ‘섬김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섬김의 사랑, 섬김의 권위, 섬김의 겸손, 섬김의 순종, 섬김의 기쁨, 섬김의 리더십 등
섬김은 영성생활의 모두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이 있을 뿐입니다.
영어 말마디에서 보다시피 종과 섬김은 같은 어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사랑의 섬김입니다.
사랑의 표현이 겸손한 섬김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가 섬김의 모범입니다.
바로 다음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으로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참으로 서로 섬길 때 예수님을 닮아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얼굴들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뿐 아니라 오늘 기념하는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님 역시 온통 섬김의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그 유명한 ''베네딕도 전기'도 서방 4대 교부들 중 한 분인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님이 쓰신 책입니다.
입당송에 묘사된 성인의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복된 그레고리오는 베드로 좌에 올라, 언제나 주님의 얼굴을 찾고,
주님 사랑의 신비를 그리며 살았네.”
신비가요 관상가로 명성을 떨쳤던 참으로 위대했던 성인 교황님이셨습니다.
성인은 자신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 일컫기를 즐겨했고 지금도 교황님은 이 명칭으로 불립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섬기러 오신 당신을 닮아
섬김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요즘에 읽은 책 중에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이 있습니다.
책에 나오는 요리점은 도쿄에 있는 불과 열두 석에 불과한 작은 레스토랑에서
2017년 6월 단 이틀간만 열린 요리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요리점은 전 세계에서 커다란 반응을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인지 장애를 앓고 있거나 치매 환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가게에는 ‘이 레스토랑에서는 주문한 요리가 정확하게 나올지 어떨지 아무도 모른다.’라는 특별한 규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레스토랑에서 주문을 받는 스태프들은 모두 치매나 인지 장애를 앓고 있는 상태다.’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의 실수를 인정하고 오히려 함께 즐기세요.”라는 콘셉트를 내세웠습니다.
손님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레스토랑에 들어왔기 때문에 어떤 실수에도 웃으면서 받아들였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떠나는 손님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는데, 60%이상의 주문 착오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하지만 화를 내거나 불쾌감을 표시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오히려 90퍼센트 이상이 “꼭 다시 오고 싶어요.”라고 응답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는데 화가 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받아들인다는 것에 대해 묵상을 하게 됩니다.
이는 애초에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상대방의 장점만을 사랑하고 상대방의 단점을 미워하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결국 이 받아들임은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함께 하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것만을 찾다보니 못마땅했고, 또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다른 고장에서 보여주었던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과 사랑을 얻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이 안에서 주님의 구원은 시작됩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이 주님의 사랑과 연결시키고, 우리를 언제 어디에서나 행복을 느끼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은
풍요롭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하느님과의
화해가 필요합니다.
화해는
새로운 관계로
나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관계는
판단을 멈추는 것입니다.
판단을 멈출 때
모든 것은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자신에게
베푸신 하느님 사랑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사랑은
나눌수록 풍요롭습니다.
오늘 이 시간이
서로에게 감사하는
은총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은총의 시간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시간입니다.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
맡겨드리는 은총이 됩니다.
은총의
가장 확실한 시작은
판단을 가로질러
자기 자신을 먼저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과 마음이
예수님을 통해
더 건강하여지고
더 풍요로워지길 기도드립니다.
받아들임과 맡겨드림의 신앙이
오늘도 우리를 치유하고 있습니다.
안다고 말하면 모르는 것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알고 이해해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물론 가족일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가족이 나를 가장 이해하지 못 할 때도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자녀는 부모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만큼 함께 오랜 시간을 지내도 서로를 다 알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무엇이 그 사람을 더 이상 알지 못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미 ‘그 사람은 잘 알고 있다’는 교만한 생각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심리가 무엇인지 검사를 받기도 합니다.
또 그 검사 한 번으로 나 자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도 알고 남도 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안다고 믿는 교만한 이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그 사람이 행동할 때 자신들이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냅니다.
상대는 내가 아는 틀 안에서만 행동해야 하고 그것을 벗어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합니다.
저를 애기 취급하던 분이 어떤 뚜껑을 못 열고 있기에 제가 도와준다고 했더니
저는 못하니 다른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을 빼앗듯이 하여 쉽게 열어버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잘 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누구였을까요? 바로 나자렛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 태어나면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다 보아왔고 그 가족도 잘 아는 사람들은 나자렛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독이 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안다고 믿었기에 더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 틀에 들어가 있지 않으신 분입니다.
행자가 상좌에게 공손히 다가가 물었습니다.
“아름다운 삶이란 무엇입니까?”
상좌는 스승이신 큰스님의 책을 뒤적여 큰스님 말씀으로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아름다운 삶이란 모름지기 부처님의 넘치는 공덕을 드러내는 삶일 따름이다.”
행자가 큰스님을 만나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모른다.”
조금 아는 사람은 이 무지의 경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계속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며 평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아는 자는 말이 없습니다. 안다고 말하면 모르는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은 상대가 어떤 변화를 겪던 이상해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알 수 없는 바다보다 깊고 우주보다 넓은 존재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하느님도 그런 겸손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 18-19)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이 오늘 우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고 하십니다.
이 희년선포는 ‘에덴’의 회복, 곧 하느님께서 주신 본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본래의 신원인 하느님의 자녀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곧 해방을 실현하십니다.
그것은 단지 빚진 이가 탕감 받거나 눈먼 이가 보게 되거나, 혹은 억압과 묶인 것으로부터 벗어나거나,
가난한 이가 기쁜 소식을 듣거나 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나 어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해방인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아갈 때라야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곧 진리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갈 때라야 진정 자유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인가보다, 무엇에로의 해방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해방이 선포되고 빛이 왔건만,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던 것만이 아니라, 배척하고 죽이려고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 4,30)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언덕 위 벼랑에까지 그분을 떨어뜨리려 내몰아갔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유유히 가로질러 가시는 그분을 그 누구도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수난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신이 수난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가 아직 오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때가 되면, 당신께서는 수난을 스스로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강제로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몸소 당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원하시면 붙잡히시고, 또한 원하시면 빠져나가십니다(요한 18, 7-8).
원하지 않으실 때는 잡혀가지 않으시고, 당신이 원하실 때에는 나무에 달리실 것입니다.
한편, 그들은 완고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거역하였습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은 완고함과 고집으로 형제를 불신하고,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를 믿음에로의 초대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결코 당신을 배척하지 않게 하소서!
제 형제를 배척하는 바람에 당신을 배척해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눈을 떠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혼을 내줄까? 고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리 소문 없이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렸으면 좋으련만 그게 여의치 않자
결국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아닌 척 하면서 자기 뜻을 관철합니다.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고, 쓴 소리를 들을 수도 있으며
그것을 통해 오히려 자기발전의 기회를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 눌러버리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남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결정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게 우리를 지배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예수님을 좋게 생각했습니다(사도10,38).
그가 하는 말씀이 진리요, 은총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목수 요셉의 아들로 알려지면서 그 권위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은총의 보유자이시고 권위를 지니셨지만
사람들의 편견과 선입견은 주어진 은총을 놓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는 게 병’입니다.
사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고 얻게 됩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약속된 구세주시라는 표징과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길 원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미에 맞는 표징을 제시하기 보다는 오히려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불경한 자로 단죄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교육받은 편견대로 판단하며 자기들 식으로 구원을 상상하였습니다.
고은 시인이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라고 통찰한 것처럼
힘이 빠지고 내 것을 내려놓아야 '새로운' 눈을 뜨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고 그러다가 의심하며 심지어 예수가 밥 먹여 주냐? 고 외면하기도 합니다.
자기의 기대가 자기방식으로 채워지지 않을 때 혼란을 겪으며‘다 필요 없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십니다(루카 4,30).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결국 주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같지 않고 주님의 길과 우리의 길이 같지 않습니다.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고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삶을 우리가 살아야지
그분이 내가 원하는 대로 맞춰주기를 바래서는 안 되겠습니다.
내 생각과 욕구에 맞지 않으면 내 것을 바꾸어야지 주님께 바꾸라고 떼를 쓰고 배척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너 죽을래!’ '살려면 내 입맛에 맞춰!' 하고 구박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