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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OTER
“스스로 선택한
농구, 신나게 뛰어 다녔다”
천부의 슛감각,
람보 슈터가 되기까지.
문경은은 재능이 많은 선수다. 특히 슛감은 천부적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좋은 선수가 될 수는 없다.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문경은은 스스로 흥이 나야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다. 강압적인 훈련은
맞지 않는다. 농구가 좋아지게 만들기까지 지도자들과 부모님 등 주위의
끊임없는 관심이 있었다. 그의 재능을 살리기 위한 노력이었다. 문경은은
이제 농구가 오래된 친구같다고 말한다. 오래두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
글/최국태 기자 사진/문복주 기자·본인제공
문경은은
농구공을 잡기 이전에 공부를 잘하는 똑똑한 아이였다. 하지만 머리가
좋았을 뿐이지 공부에 흥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늘 공부 외의 것을
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기회가 찾아왔다.
농구가 해 보고 싶지 않니?
“앉아 봐, 일어나 봐”
인상이 험악한 아저씨의 지시대로 앉았다 일어났다. 그 아저씨는
문경은을 한번 훑어 보고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담임 선생님에게 눈
인사를 건네고는 바로 교실을 나가 버렸다. 모르는 아저씨의 묵뚝뚝한
태도에 기분이 좋을리 없었다. ‘도대체 뭐 하는 아저씨야. 수업시간에
불쑥 들어와서는... 선생님은 왜 말리지 못 하는거지?’ 그 아저씨의
행동이 무엇인지 어린 문경은은 알 리가 없었다. 그저 기분만 조금 상했을
뿐이다.
5학년 1학기 끝나가던 어느날의 일이었다.방과 후에 집에 들어온
문경은은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험악한 인상의 아저씨가
부모님과 함께 문경은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리고 교실에서와는
다른 부드러운 어조로 이렇게 말을 건네 왔다. “농구가 해보고 싶지
않니?”
꼭 대표팀 유니폼을 입어라!
문경은은
농구가 뭔지도 몰랐다. 단지 공부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예”라고
대답했을 뿐이다. 어이 없게도 그 대답으로부터 문경은의 농구인생이
시작되었다. 그때 문경은을 찾았던 아저씨는 농구부가 있던 답십리 초등학교의
김춘택 선생님이었다.
5학년 2학기에 답십리 초등학교로 전학을 했고, 본격적으로 농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부를 안해도 된다는 생각에 운동을 계속했지만
그해 겨울은 악몽 자체였다. 태어나서 그렇게 맞아본 적이 없었다. 이건
훈련 전부가 기합과 구타였다. 상황이 이 정도 되니 문경은은 공부가
아무리 싫어도 스스로 이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견디다 못해
하루는 훈련도중 집으로 뛰쳐 나왔다. 당돌하게 훈련복 차림으로 나왔지만
밖은 무섭게 추웠다.
하지만 따뜻한 방과 나를 반겨줄 어머니를 생각하며 무작정 집으로
향했다. 어머니의 반응은 기대와는 달랐다. 문을 열어주지 않았을 뿐더러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까 네가 끝을 봐라’라는 냉정한 말만 건냈다.
다른 갈 곳도 없었고, 밖은 너무 추웠다. 눈물을 머금고 다시 연습장으로
힘 없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때, 아버지가 홀연히 나타났다. 그리고
문경은의 눈물을 닦아주며 조용히 말을 꺼냈다. “이왕 시작한 거 어려워도
견뎌내고 꼭 대표팀 유니폼을 입어라. 신나는 일이 될 거야!”
문경은은 대학 2학년 때 처음 대표팀 유니폼을 입게 된다. 김현준,
허재, 한기범, 김유택, 강정수 같은 쟁쟁한 선배들과 한팀이 된다는
것은 영광이고 정말 기분 좋은 일이었다고 그때를 회상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그 한마디가 떠올라 눈물이 핑돌았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게 3점 라인이야!
문경은은 중학교 2학년때 180cm였다. 그때까지 팀내에서 센터를 봤다.
지금이야 어림없는 얘기지만 당시 180cm면 센터 중에도 큰 키였다. 2학년이
막 시작된 어느날 한 아저씨가 체육관에 들어 오더니 코트에 반원 모양으로
선을 그렸다. 그게 무슨 선이냐고 묻자 ‘이제 여기서 던지면 3점이다’라고
말했다.
그 말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을 깨닫는 순간에 그렇듯 문경은에게
주문처럼 들렸다. 여기서 던지면 3점이야.... 곧바로 그 선 밖에서 슛을
던져 보았다. 잘 들어갔다. 자신도 모르게 재미가 붙기 시작했고, 계속
슛을 쐈다. 한참을 던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코치 선생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다시 한번 던져 봐”. 광신중학교 코치였던 장덕영(현 광신상고
코치)선생님이 멀리서 문경은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장코치는
문경은의 슛을 몇 번 시험해 보고는 바로 포워드로 전향시켰다. 문경은의
남다른 슈팅 능력을 직감한 것이다.
당시 중학생 중에 3점슛을 자유자재로 던지는 선수는 문경은 뿐이었다.
중학교 3학년부터 주니어 대표로 뽑혔고, 고등학교 시절부터 청소년
대표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신문에서는 ‘최장신 포워드가 등장했다’라고
떠들썩했다. 이충희, 김현준 등 당시에 이름난 슈터들의 신장은 180cm대
초반이었다.
잘 키워 보라고. 이 녀석은 농구가 좋아서
하는 놈이야
문경은은
스타일이 그렇다. 시키면 안하고 그냥 내버려 두면 혼자 잘 해낸다.
장덕영 선생님과의 만남을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런 부분 때문이다.
“선생님은 연습을 지겹게 시키지 않아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훈련이
이루어지죠. 그것이 내 스타일하고 잘 맞았어요. 안 시켜도 연습을 더
하게 되고, 실력이 부쩍부쩍 늘었지요.”
장덕영 코치는 선수들의 심리를 잘 아는 지도자다. 스파르타식의
한계를 알고 선수의 개성을 존중해 줬다. 문경은이 지금도 장덕영 코치를
고맙게 생각하는 것도 자신의 개성에 맞춰 지도해준 점 때문이다. 그리고
연세대로 진로를 결정했다.
장덕영 선생님은 최희암 감독에게 “저 녀석은 농구가 신나서 하는
놈이기 때문에 가능성이 무한해!”라고 문경은을 소개했다. 그 말이
그토록 고맙게 들릴수가 없었다고 한다. “나는 농구를 좋아하고 있었다...”큰
꿈을 안고 대학에 갔지만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훈련이 고등학교 때와는
전혀 달랐다. 대학 농구는 성인 농구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정말
편하게 운동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강도가 쌨다.
문경은에게는 생전 처음으로 겪는 고된 훈련이었다. 최희암 선생님을
찾아가 운동을 그만 두겠다고 말 한 적도 여러 번이다. 그러나 다시
코트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어려울 때마다 장덕영 코치가 최희암 감독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농구를 좋아하고 있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적도 많았고,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견뎌냈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농구만큼 나를 위로해
준 것도 없었던 것 같아요. 마치 오랜 친구처럼요...”
앗! 이런일이?
연세대
농구부 삭발사건
문경은이 대학 4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 평일날 낮 경기에
학생체육관이 만원 사례를 이룰 정도로 대학 농구 인기는
최고였다. 그리고 그 중심은 단연 연세대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연세대는 1학년 서장훈, 김택훈, 2학년 우지원,
김훈, 3학년 이상민, 4학년 문경은 등 초호화 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들이 많은 팬을 몰고 다닌 것에 깔끔한 외모도 한몫했지만,
그 보다는 성인 농구를 앞도하는 실력이 더 큰 매력이었다.
위의 멤버는 역대 대학농구 최강이라고 자타가 공인하고
있었고, 그래서 이충희, 임정명 시절의 고려대가 세운 49연승을
경신할 것이라는 말들이 많았다. 실제로 그해에 MBC배와
춘계대회를 전승으로 석권하고 있었다.
그러나
49연승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종별선수권대회에서 연세대를
벼르고 나온 중앙대와 고려대에 연속으로 발목을 잡혀 3위에
그친 것이다. 예상치 못한 결과로 연세대는 큰 충격을 받았고,
비난도 빗발쳤다. 당시 겨울 스포츠의 최대 축제인 농구대잔치를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큰 대회를 앞두고 연세대 체육관에서
농구부 미팅이 있었다. ‘이제 죽었구나’ 선수들은 최희암
감독의 불호령을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라는 감독님 말에 어렵게 고개를
든 선수들은 모두 자지러지게 놀라고 말았다. 최희암 감독이
삭발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조용히 주장이었던
문경은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도 머리를 자르라는 소리는
아니다. 모두 뭉쳐서 이번 대회 열심히 치르자!”
이게 무슨 소린가? “너희들 모두 삭발하고, 죽어라고
달려!”라는 것보다 더 무서운 소리였다. 다음날 연세대
체육관은 마치 해병대 신병 훈련소를 옮겨 놓은 듯 삭발
머리의 선수들이 코트에서 땀을 흘라는 광경이 연출됐고,
그 삭발의 위력 때문인지 그해 농구대잔치는 사상 처음으로
대학팀이 우승하는 이변을 낳았다. 그 대학팀은 물론 연세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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