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에서 건져올린 의대생 한 사람의 변사체를 둘러싸고 그 사인이
국민적 관심 사항이 되었다. 오늘 다시 민간 잠수사 한 사람에 의해 누구 것인지 알 수 없는
휴대폰 하나를 시체 발견 그 인근의 한강 바닥에서 건졌다고 나온다.
외아들.
그 외아들의 부모의 마음이 오죽할까. 우리가 여기저기 책들을 보면 부모가 죽은 데 대해서는
효자들의 처절한 비통함이 있지만 그건 극히 드문 경우이고, 아들, 그 중에서도 외아들을 잃은
부모의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뼈아픈데가 있다.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있나, 라고 하지만
그건 속담일 뿐이고, 더 아픈 손가락이 있고 덜 아픈 손가락이 있다. 아들이 다섯인가 여섯인가
되는 집에서 막내가 스무남 먹어서 어디 나갔다가 실종된 부모를 보니, 여기저기 알아보는 듯 했으나
그렇게 비통해 하지 않았다.
"경찰에 신고 했어요?"
"큰 애가 가서 했단다."
"무슨 연락은 없고요?"
"찾으면 연락 준단다."
다 키운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이 어찌 아프지 않으랴만 그러나 확실히 외아들을 키우다가 잘못된 경우와는
다른 것 같았다. 그 아이가 없어지고도 그 집의 일상생활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외아들인 경우, 부모의 모든 것이 무너진 것이 아니겠는가. 그 죽은 의대생의 아버지는 '더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라 하였다.
아버지를 잃은 아픔을 천붕지통, 형제를 잃은 아픔을 할반지통, 남편을 잃은 슬픔을 붕성지통..............
예전에는 다 같은 가족이라도 누구냐에 따라 표현하는 단어가 달랐다. 그런데 아들을 잃은 아픔을
표현하는 말은 상명지통이라 하였다. 공자 제자 자하가 장래를 기대하던 외아들이 죽자 얼마나 절망했던지
그만 시력을 잃고 말았다. 그 이후 자식을 잃은 사람에 대해 상명지통이란 말을 쓰기 시작하였다고.
상명이란 시력을 잃음. 밝음을 잃음이란 뜻.
참으로 부모에게 있어 자식은, 특히나 외아들은 눈동자와 같은 존재이리라.
인간에게 있어 심장도 중요하고 폐도 중요하고 귀도 코도 중요하지만 눈동자 만큼 중요한 경우가 있을까.
도대체 눈동자로 무엇을 봐야 사람이 움직일 수 있고, 날씨가 비가 올지 맑을 지도 가늠할 수 있는 법.
예전에 윤상군 사건이라는 유괴사건이 있었다. 그 또한 외아들이었다. 그 얼마뒤 아이의 어머니의 모습이
티부이에 비치는 데 보니 손에 염주를 헤아리고 있고 이미 온당한 정신의 소유자가 아닌 듯 했다. 그로부터 몇 년
안가 아이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이 있었다.
이번에 죽은 의대생의 부모 역시 이미 제정신이 아니리라. 어떻게 죽은 것인가. 누군가 그 의대생을 타살하였다면
그는 그 의대생만이 아니라 그의 가족 전체를 절망으로 몰아 넣었음이다. 무엇으로 그 죄를 갚을 수 있으랴.
슬픈 일이다. 죽음의 원인이 밝혀진단들, 혹은 타살이 맞고, 그 타살한 범인을 잡아서 법에서 그 비행에 상응하는
벌을 안겼다한들 그 부모들에게 도대체 위안이 되겠나. 누군지 모르지만 참으로 바닷물로도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