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TY ME NOT. 24
- Episode 5. The Siren (1) -
“K가 찾아왔었지?”
조금은 화가 난 것도 같은 목소리가 어둠 속의 깊은 침묵을 깨트렸다. 여희는 형광등을 켜는 대신 바닥과 테이블에 즐비하게 놓인 색색의 초에 불을 붙였다.
“그래... K는 널 본 게 분명해. 물론 녀석도 처음엔 절대 내 말을 믿을 수 없었겠지. 그래서 확인하러 왔을 거야.”
노랗고 빨간 초에 불꽃이 아른대며 주위가 밝아졌다. 여희는 이제 여전히 대답 없이 두꺼운 천으로 덮인 커다란 물체에 다가가 귀를 갖다 댔다.
“녀석이 네게 반하는 일이 없도록...나와의 약속을 지켜주었지?”
그러자 안쪽에서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났다. 여희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K는 내가 작곡을 하지 않는 것을 네 탓으로 돌리고 싶어 해. 놈에게 질책받지 않기 위해서 며칠 동안 작업실에 있었어. 네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여희는 두꺼운 천을 벗겨 내었다. 그러자 그녀의 키와 엇비슷한 높이의 통유리 수조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여희는 손에 쥔 검은 색 벨벳 천을 꽉 붙들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그녀를 안절부절못하게 했던 무언가가 있었다. 여희는 홀린 듯 수조로 다가갔다.
“노래를 완성할 때까지 오지 않으려고 했어... 하지만 그 어떤 소리도 무의미해. 이젠 아무런 감동도 느낄 수가 없어. 대체 뭐가 예술이란 말이지? 나는 정말 예술가가 맞을까? 내가 작곡한 수많은 곡을 음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그건 더는 의미가 없어. 온종일 네 목소리만 아른거리고...”
여희는 수조 속에 손을 담갔다. 차가운 물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스치고 지나갔다.
“제발 나에게 노래를 들려줘.”
그러자 아주 천천히... 검은 물속에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여희의 손을 붙잡으며 위로 솟아오른 그것은 금발의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한 여성이었다. 유리 수조의 끝을 양팔로 받치고 기댄 그녀가 촉촉이 젖은 속눈썹을 깜박였다. 속눈썹 끝을 타고 방울진 물이 똑똑 떨어지며 수면 위에 원을 그렸다.
이 젊은 예술가는 세이렌에게 온 관심과 흥미를 붙들린 채 넋이 나간 상태였다. 세이렌은 신성한 존재다. 그들은 애초부터 이승의 존재가 아니므로 누구도 그들보다 노래를 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여희는 이제 그 어떤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닌 가수에게도 자신의 곡을 줄 수 없었다. 때문에 그녀와 계약을 맺은 사장 K만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 사장이 세이렌을 직접 본 뒤로 그가 어떤 수를 썼을지 모르기에 여희는 그녀를 또다시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으로 옮겨야 할 것이다. 세이렌은 빙긋 웃더니 수조 한가운데로 몸을 옮겼다. 여희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너는 나의 뮤즈야.”
그러자 답례라도 하듯, 세이렌이 노래를 시작했다. 천천히 입술이 열리며 벙긋거렸고, 그녀의 입에서 지상의 인간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가장 아름답고도 감동적인 노래가 시작되었다. 달콤한 속삭임과도 같은 감미로운 노랫소리. 서쪽 바다를 넘어 꽃봉오리가 만발한 아름다운 꽃섬에서 항해자를 유혹하는 세이레네스의 노랫소리가 지금, 육지에 올라와 울려 퍼지고 있다. 여희는 작업실에서 몇 번이고 그녀의 노래를 음악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해보았다. 그러나 기억을 더듬을수록, 시끄럽고, 듣기 싫은 불협화음만 만들어 낼 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희는 그녀의 목소리를 뇌리에 각인시키려고 했지만 이미 그는 술을 진탕 들이켠 것처럼 몽롱한 상태이다. 청아한 목소리가 여희의 귀를 휘감았다.
―
“여태껏 맡은 의뢰 중에 이번 의뢰가 가장 당기는데?”
정작 본인은 집에서 한 발짝도 꼼짝하지 않으면서 파일을 뒤적이던 다희가 눈을 반짝였다. 카르트가 파일이 덮이지 않도록 앞발로 누르고 내려다보았다.
‘세이렌이로군.’
“세이렌? 설마 인어 말하는 거예요?”
옆에서 듣고 있던 한아가 무심결에 되물었다. 카르트가 늘어지라 하품하고 대꾸했다.
‘그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럼 신화 속의 생물이 진짜 있단 말이에요?”
답답해진 다희가 어디서 났는지 책 한 권을 한아에게 주었다. 안데르센의 동화책이었다.
“어! 인어공주다.”
“읽어는 봤어?”
“당연하죠! 제일 좋아하는 동화인데.”
“취향이 딱 초등학생이네.”
이제 그런 놀림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가볍게 무시한 한아가 책장을 넘겼다. 인어공주 그림이 나왔다. 파도가 철썩이는 바다 한가운데 가파르게 솟은 바위 위에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 있다. 물론 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엔 녹색으로 빛나는 꼬리가 달려 있다.
“근데 인어를 왜 잡아요?! 불쌍하지도 않아요? 사랑을 전하지도 못하고 사라지는데.”
‘이제 눈치가 좀 돌아가는 줄 알았더니.’
“멍청아, 그건 낭만주의 시대에 쓰인 동화니까 그렇지.“
‘큰 회사에서 만든 만화영화의 결말은 더 우습고.’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가보면 알겠지. 약 올리듯 말한 다희가 테이블 위의 동화책 표지를 힐긋 보고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세이렌이 가진 아름다움은 죽음과도 같은 거야.”
“괜찮아요. 세이렌이 강다희보다 예쁘니까.”
다희는 한아에게 책을 집어 던졌다.
맞아서 아직도 얼얼한 뒤통수를 어루만지던 한아가 또 저만치 멀어져가는 블레인의 뒤를 부랴부랴 쫓으며 투덜거렸다.
“블레인, 다리 긴 건 알겠는데 보폭 좀 맞춰주죠?”
“아...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그냥 이제 계속 같이 다닐 건데 서로 배려하자는 말이에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인 듯 블레인은 뚜벅뚜벅 걷던 속도를 조금 늦춰주었다.
“진작 이렇게 가면 좋잖아요.”
“한아님이 느린 겁니다.”
“블레인이 빠른 거예요.”
“..........”
“할 말 없죠? 거봐요. 아직 해가 지려면 한참이나 남았고 의뢰 장소까지 거리가 먼 것도 아니면서 서두를 이유가 뭐가 있어요?”
“정말 말이 많으시군요.”
“블레인이 말이 없는 거라고요.”
한아는 블레인이 이제는 수다를 조금 들어준다는 생각에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들은 나무 사이로 넓게 펼쳐진 하늘에 노을이 천천히 물드는 공원을 지나가고 있었다. 곧 어둑어둑해지면 더위가 한풀 꺾이고 사람들은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운동하러 나올 것이다. 한아는 블레인을 조금만 이 자리에 붙잡아 두고 싶었다.
“어쩐지 좀 덥지 않아요? 우리 조금만 쉬었다 가요.”
“그러기엔 갈 길이 아직 멉니다.”
“땀 좀 식히고 가자구요. 여기 앉았다 가요. 네?”
다짜고짜 블레인을 벤치에 앉혀 놓더니 한아가 가판 매점으로 달려가 하드 아이스크림을 두 개 사 왔다. 정신없이 뛰어오느라 한아의 머리가 온통 흐트러졌다. 블레인의 시선 끝에 그녀의 단발머리가 까치집이 된 것이 보였다. 그것이,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찮고도 귀여운 느낌에 블레인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어...”
웃음이라곤 한 번도 지어본 적 없는 가면 같은 얼굴 때문일까, 한아는 환상에서 꼼짝할 수 없는 사람처럼 잠깐 멈칫했다. 이제야 두 번째 보는 그의 미소. 한아의 반응에 블레인은 금방 미소를 거두었다. 방금 그 표정을 미소라고 부를 수 있을지 기억도 안 날 만큼 순식간에. 어색한 침묵이 덮칠까 한아가 얼른 아이스크림의 포장을 뜯었다.
“저는 이런 것을 먹지 않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먹으면 되겠네요.”
그리고 한아는 블레인이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얼른 블레인의 입에 아이스크림을 물려주었다. 한아의 당돌한 행동에 순간 말문이 막힌 블레인은 한아를 빤히 쳐다보다가, 기가 막혀서 또 피식 웃고 말았다. 한아로서는 그게 또 신기해서 계속 블레인을 힐끔거렸다.
블레인은 아주 오랜만에 사람 구경을 했다. 그의 기민한 눈동자는 적을 색출해내기 위해 번득이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행동을 캐치하며 이리저리 움직였다. 아주 작은 아기를 태운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엄마, 조깅하는 남자, 줄넘기하는 꼬맹이들, 다정한 노부부...마치 목가적인 배경의 그림을 한 장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언제나 날카로우면서 지쳐 보였던 그의 눈동자에 깃든 평온을 본 한아는 가슴 속에서 치고 올라오는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 이 순간 블레인은 그가 가지고 있는 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저 평범한 인간처럼 보였다.
그가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인지도 모르지. 그러자 한아는 자신이 온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에 큰 위안을 느꼈다. 유한한 삶을 사는 대신 매 순간을 아깝지 않게 사는 것. 그것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임을 깨달은 것 같았다.
“이제 그만 출발합시다.”
“네에, 네에.”
다시 블레인이 일어섰다. 이 순간을 조금 더 즐기고 싶었던 한아는 잔뜩 밍기적 거리며 일어났다. 이제 대낮의 시끌벅적한 소음과 함께 노을은 물러갔고 팽팽한 긴장으로 가득 채워진 기나긴 침묵의 밤이 찾아왔다.
서울 외곽에 있는 여희의 자택은 주변에 이웃 하나 없이 온종일 죽은 듯이 처박혀서 예술에 몰두하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하지만 한아는 만약 사교성 있는 사람이 이런 장소에 혼자 산다면 제 아무리 호화롭다고 한들 외로워서 미치기 일보 직전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도 없나 본데요?”
한참 초인종을 울려보아도 대꾸 한마디 없자 뻔히 안에 있는 걸 알면서도 한아가 대문 너머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블레인은 집주인의 동의 없이 훌쩍 담을 뛰어넘을 수 있었으나, 일단 예의를 차리기로 했다. 그들은 끈기 있게 음악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한참 후에 인터폰을 통해 집주인의 부루퉁한 대꾸가 흘러나왔다.
“누구시죠.”
“여희 씨 댁 맞나요? 저희는 청음 기획 직원입니다.”
“사장과는 오전에 통화했습니다. 지금은 별로 방해받고 싶지 않습니다.”
“아... 저희도 방해하고 싶진 않지만 일을 해야 해서요. 문 좀 열어주세요.”
어수룩한 신입 사원처럼 한아가 난처해하자 잠깐 망설이던 그녀는 한참 후에 문을 열어주었다. 한아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창작의 고뇌에 시달린다는 광적인 예술가들은 언제나 이런 몰골을 하고 있었다. 지저분한 머리에 눈은 움푹 튀어나오고 볼은 핼쑥하게 들어가서, 죽지 못해 사는 것 같은 절망에 빠진 얼굴. 창작의 고통 대신 차라리 마녀에게 시달린 결과라고 하면 믿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제 그녀는 살이 너무 빠져서 앙상하게 뼈만 남았는데, 한때는 그녀도 대외적으로 실력을 인정받아 사교 모임에도 제법 나갔을 타입의 미녀였을 것이다. 그녀는 블레인과 한아를 번갈아 보며 구부정한 허리를 바로 폈다. 말하지 않아도 그들이 무엇 때문에 왔는지 알고 있었고, 그 역시 말하지 않고 그것을 숨길 것이다.
“사장이 왜 당신들을 보낸 건가요.”
“연락이 너무 안 된다고, 살펴보고 오라고 하던데요?”
대수롭잖은 척 묻는 한아의 말에는 여희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블레인이 최대한 그녀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한도 내에서 집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위층엔 뭐가 있죠?”
블레인은 느낄 수 있었다. 주인이 숨겨 둔 것은 위층에 있다는 것을. 여희는 그들이 집에 들어온 후부터 꼼짝도 안 하고 계단을 향하는 입구를 지키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대번에 눈빛이 달라지는 것이 보였다. 역시 저쪽이군. 블레인은 이제 볼일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한아에게 손짓했다. 한아는 그가 부르는 것도 모르고 열심히 무언가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여희가 한아에게로 달려오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한아는 피아노 위에 올려진 악보를 읽고 있었다. 「The Enchanted Shore」. 바다의 유혹이라는 제목의 곡이었다. 일찍이 피아노를 배운 적이 있으나 악보에 그려진 음계의 음이 좀처럼 쉽게 상상이 안 되어 고개를 기우뚱하고 있던 참이었다. 여희는 악보를 뒤집고는 피아노 뚜껑을 닫아버렸다. 쾅 하는 무거운 소음이 집안에 울려 퍼졌다.
“죄송해요. 전 그냥... 악보를 읽고 있었는데.”
“세상에 어떤 음악가가 완성도 못 한 악보를 남에게 보여줍니까? 정말이지 예의가 없군요.”
그러잖아도 예민하고 고집스럽던 여희는 이때다 싶었는지 한아와 블레인을 바로 쫓아 내버렸다. 여희는 사과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너무나 미안해진 한아가 블레인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고개를 돌리자,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엉? 또 어딜 간 거야?”
무심코 위를 쳐다본 한아가 깜짝 놀랐다. 블레인이 담 위로 뛰어올라 집을 쳐다보고 있었다.
“야 이...! 블레인! 들키겠어요!”
그러나 블레인은 어느새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 가지를 붙잡고 순식간에 테라스로 뛰어내렸다. 착지 소리가 너무 가벼웠기에 흡사 집 안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고 하더라도 아마 고양이가 지나가는 소리쯤으로 들었을 것이다. 블레인은 커튼이 드리워진 테라스 창가 쪽에 몸을 숨긴 채 귀를 바싹 기울였다. 과연 그 안에서 물이 찰박이는 소리가 났다.
“이쪽... 여기입니다.”
“... 헉...!”
블레인이 말하는 쪽으로 귀를 기울이자, 주문처럼 묘한 음성이 공기를 타고 한아의 귀에도 들리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목소리였지만 머리가 지끈거렸다. 세이렌은 인간을 저승으로 이끄는 노래를 부른다. 여희는 결국 죽음을 대가로 저승의 선율을 듣고 있는 것이다.
“한아님. 그거, 가지고 계십니까?”
“뭘요?”
블레인은 굳게 결심한 얼굴로 2층에서 뛰어내렸다. 필요한 물건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
근처 공터에서 쌀쌀한 밤공기에 추워서 제자리 뛰기를 하며 열을 내던 한아가 불쑥 물었다.
“찾는 게 뭔진 몰라도... 없는 거 아니에요?”
벌써 새벽이 되어 가는데 코빼기도 안 비치는 놈 때문에 답답해 죽겠다. 블레인은 벤치에 앉아서 녹슨 농구 골대 너머를 보고 있었다. 골대 뒤로 펼쳐진 하늘에 별과 구름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여희라는 작곡가가 아침까지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한아는 여희의 어깨가 금단현상에 시달리는 중독자처럼 덜덜 떨리던 것을 떠올렸다.
“어? 왔다! 진짜 왔네?! 이한결!”
한아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끝에 헐레벌떡 뛰어오는 낯익은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한결이 보자기에 싸인 물체를 품에 끌어안고 뒤뚱이며 달려오고 있었다. 한아는 웬일로 블레인이 한결과 전화를 연결해달라고 했는지 궁금해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이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너무 늦었죠? 일찍 온다고는 했는데 워낙 멀어서요.”
“감사합니다. 물건은 확실합니까?”
무려 블레인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들어서인지 한껏 어깨가 올라간 한결이 잔뜩 생색을 내며 보자기에 싸인 물건을 주었다.
“그럼요. 할아버지 다락방에서 몰래 빼 오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제가 또 악기를 좋아해서 종류도 헷갈리지 않아요.”
블레인이 보자기를 들춰내자, 한아가 처음 보는 물건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분명 악기인 것 같은데, 처음 보는 악기다. U자 모양의 나무에 세로로 줄이 엮여 있었다.
“하프인가?”
그러기엔 크기가 작았다. 겨우 품 안에 들어올 정도로. 한결이 어깨를 쭉 편 자세로 당당하게 말해주었다.
“한아 선배님, 이건 리라라고 하는 겁니다.”
“리라?”
“고대 그리스의 악기예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귀한 녀석이죠.”
“엥? 어째서 이런 걸 네가 갖고 있는 거야?”
“내가 아니라, 우리 할아버지가요.”
그러자 블레인과 한아가 눈빛을 한 번 교환했다. 그리고 한아가 실눈을 뜨고 물었다.
“혹시 너희 할아버지 성이 허 씨는 아니겠지?”
“그럴 리가! 제가 이한결인데 당연히 이 씨죠! 그건 왜요?”
“아니야. 우리가 좀 쌓인 게 많은 고물상 이름이 허영감이거든.”
“서둘러야겠군요.”
말을 마치기 무섭게 블레인이 돌아서 버렸다.
“어? 같이 가요!”
“나도 데려가요! 기껏 짊어지고 왔더니만 구경도 안 시켜주려고?”
한아와 한결은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블레인의 뒤를 쫓았다.
다시 집 앞에 돌아왔을 무렵은 벌써 새벽 세 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이번에도 블레인은 담을 넘었고, 점프해서 1층과 2층 사이에 튀어나온 벽을 한 손으로 잡았다. 그의 점프가 너무나 날렵했기 때문에 매우 순식간에 일어난 일처럼 보였다. 난간을 잡은 블레인은 매달린 상태로 몸을 왔다 갔다 하더니 그 반동으로 뛰어올라 몸을 한 바퀴 돌리며 2층에 있는 테라스 위로 착지했다. 먼젓번보다 두 번째가 더 좋았다.
“우와! 체조 선수인 줄!”
의류 수거함 통을 밟고 올라서서 구경하던 한결이 휘파람을 불었다.
“쉿, 조용!”
옆에서 깡충깡충 뛰던 한아가 화들짝 놀라 손뼉 치는 한결을 끌어내고 대신 수거함 위로 올라갔다. 나동그라진 한결은 아파서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끄응 거렸다. 한아는 담벼락에 팔을 걸치고 블레인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테라스에 오른 블레인은 커튼이 쳐진 창 뒤에 몸을 숨긴 후 테라스 난간 쪽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커튼에 가려진 방안을 투시라도 하듯 빤히 쳐다보았다. 여전히 세이렌이 노래를 하고 있었다. 견딜 수 없이 매력적인 음성,
블레인은 늘 지니던 검을 옆에 놓더니 주머니에 접어 넣었던 종이를 꺼냈다. 그것은 한아가 엿보았던 여희의 미완성 악보였다. 바다의 유혹. 여희가 한아에게 화내느라 한눈을 팔던 순간에 감쪽같이 슬쩍해 온 것이었다. 이제 블레인은 악보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리라를 왼팔로 끌어안았다.
“블레인,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나도 도울...”
담장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채 블레인이 하는 행동을 엿보며 툴툴대던 한아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왼 품에 리라를 안은 블레인이 오른손으로 현을 건드리자,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는 신비로운 소리가 튕겨 나왔다. 한아에게 자리를 빼앗겨 얼굴을 구긴 한결도 멈칫할 정도였다.
칼을 버리고 리라를 든 뱀파이어.
오늘 밤은 낭자한 피 대신 음악을 택한 뱀파이어.
언제나 고집스러운 뒷모습만 보여주었을 뿐, 부리부리하게 뜬 눈으로 사방을 살피던 그가 악기를 다룬다는 것은 상상해 본 적도 없을뿐더러 믿기지 않는 상황이었다.
“... 블레인...”
그의 손가락이 줄을 스치며 내는 잔잔한 선율에 취해서일까, 한아는 맥박이 점점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테라스에 앉아 눈을 지그시 내리깔고 악보를 기억해가며 물 흐르듯 유연하게 손을 놀리는 모습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달빛이 블레인의 넓은 어깨와 숱 많은 속눈썹과 코끝을 비추었다. 가늘게 뜬 눈 끝에 걸린 눈동자는 옛날 사람의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한아는 갑자기 울컥하여, 격정적인 두근거림을 느꼈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뱀파이어란 저렇게 아름다운 존재였구나. 자신이 힘겹게 담에 매달려 있는 것도 모르고, 한아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그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리라(Lyra)
고대 그리스 헤르메스 신이 거북의 등딱지, 산양의 뿔, 소의 힘줄 등을 엮어 만든 악기.
피와 전쟁이 난무하던 때에 음유시인으로 활약한 오르페우스의 악기다.
그는 리라 연주로 세이렌들의 노래를 물리쳤고, 자신의 음악으로 폭풍을 잠재우기도 했다.
첫댓글 유리 수조의 끝을 양팔로 받치고 기댄 그녀가 촉촉이 젖은 속눈썹을 깜박였다. 속눈썹 끝을 타고 방울진 물이 똑똑 떨어지며 수면 위에 원을 그렸다.
표현력 보소.... 그리고 여희 뭔가 이름부터 졸라 고상하고 예쁠 것 같아
감사합니다... 칭찬해주시니 표현력에 더욱 공을 들이게 됩니다...♡
“세이렌이 가진 아름다움은 죽음과도 같은 거야.”
“괜찮아요. 세이렌이 강다희보다 예쁘니까.”
다희는 한아에게 책을 집어 던졌다.
다희 대사 존나 감탄하고 있었는데 개웃곀ㅋㅋㅋㅋㅋㅋㅋ 책 집어 던진 것돜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둘이 티격태격하는거 넘넘넘 좋앜ㅋㅋㅋㅋㄱ 강다히 책 던지는거 왤케좋닠ㅋㅋㅋㅋㅋ
한아 블레인 부부싸움 금지. 애정 싸움 금지.
둘이 싸울 일이... 생길 것 같기도하고... (갸우~뚱)
블레인 뭐냐 왜 웃냐
왜 피식거리냐
블레인이 귀엽다는 단어도 알고 많이 발전했네
그치
쨔식..... 많이 컸어
ㅋㅋㅋ아 한아 순간적으로 블레인한테 야 라고 한건가?? ㅋㅋㅋㅋ
엌ㅋㅋㅋㅋㅋㅋ 미친놈아 라고 안 한 게 다행ㅋㅋㅋㅋ
아니 근데 블레인 약간 노동착취 당하는 것 같아... 맨날 이렇게 자기 혼자 다 처리해...
아 그건 아님ㅋㅋ 퇴치 의뢰가 다희를 위한 돈 뿐만 아니라 자기가 인간이 되기 위한 연구를 하는 라비한테 연구비도 주는 겸이니 ㅋㅋ 다음화에 살짝 풀어집니다요
블레인 진짜 악기까지 다룰 줄 아는 건 너무 반칙 아닌가요??
얼굴도 잘 생겼어 몸도 섹시해 싸움도 잘해 악기도 다뤄~
그리고 키스도 잘해 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