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타 나카쓰9 - 나카쓰 성의 신사를 둘러보고 절을 거쳐 나카쓰역으로 가다!
11월 6일 오이타현 나카쓰 中津(중진) 에서 일본 개화기 교육계몽가 이자 만엔권 에 나온
인물로 유럽과 미국을 5차례 다녀와 100권의 책 을 저술해 서구문명 을 소개하고 저술
수입으로 게이오대학교 를 설립한 후쿠자와 유키치 주택을 보고는 나카쓰 성 을 구경합니다.
1,588년에 초대 성주로 부임한 NHK 대하 드라마의 주인공인 칸베에!!! 곧
구로다 요시타카 와 그의 아들 임진왜란 3군 대장 구로다 나가마사
그리고 1,600년에 2대 성주 로 부임한 호소카와 타다오키 를 회상해 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동 출신으로 측근이었던지라 임진왜란 이전에
구마모토의 영주 가 되었고 훗날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에도
동군인 도쿠가와 편 에 가담해 큰 공을 세운 2군대장 가토 기요마사 는....
1597년 정유재란시 조명 연합군 5만의 필사적인 공격 을 원군이 오기까지 초인적으로
버텨 격퇴한 울산 도산성 전투 와 서생 왜성을 축조한 경험을 바탕으로 1,607년
에 구마모토성 을 축성하고 도쿠가와의 양녀와 결혼 해 대대손손 번영 을 바랐겠지만....
도쿠가와가에 충성을 바쳐 나고야성 축조 와 에도성 건설 에 큰 역활을 담당했던
가토 기요마사 가 1,611년에 죽은후.... 구마모토번 다이묘 자리 를 이어
받은 아들은 채 20년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 도쿠가와 막부의 신임을 잃게 됩니다?
가토 가문 이 구마모토를 잃게 되자 나카쓰성의 2번째 주인 이었던 호소카와
씨는 그 전에 나카쓰에서 옮겨 쌓은 고쿠라성 을 도쿠가와의 친족인
마쓰다이라 씨 에게 내어주고는... 45만석 구마모토 번주 로 옮겨가게 됩니다!
가토 가요마사 가 조선에서 잡아온 포로들 을 동원 (현재 우루산 마치 동네) 해서
쌓은 구마모토성을 물려받은 호소카와 타다오키 는 교양인 인지라....
"리큐 7철" 로도 불리는데 구마모토성은 아들에게 물려 주고는 은퇴 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호소카와 타다오키 는 번내 남쪽에 자리한 10만석 야츠시로 를 따로 차지하고는
茶道(다도) 의 대가로 산사이류 라고 부르는 유파의 개조 가 되었으니..... 골치아픈
구마모토번 정무는 아들에게 넘기고 노년을 여유작작 풍류 를 즐겼으니 멋진 인생 이라?
호소카와씨가 구마모토로 전봉 되자 1,632년에 여기 나카쓰 성의 3번째 주인 으로
임명된 자는 오가사와라 나가쯔구 로 후손이 오래토록 그 대를 잇다가.....
85년의 세월이 흐른 1,717년 에 네번째로 오쿠다이라 마사시게 가
성주 가 된후 메이지 유신 까지 오쿠다이라씨가 대를 잇게 됩니다.
나카쓰성 을 나와 성내에 있는 신사 를 둘러보는 데... 시내 지도에
보니 신사가 한둘 도 아니고 무려 4개 나 되어 놀랍니다?
그 중에 나카쓰 대신궁 에서 경내에 녹슨 큰 대포 탄알 을 세우고는
日露紀念(일로기념) 이라고 글자를 음각한 것 을 발견합니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에 이겨 조선과 요동반도 를 차지했으나 러시아등 3국간섭 으로 토해 놓은후 절치부심 기회를 노렸으니.... 러일( 日露 일노) 전쟁 은 조선과 만주의 지배
를 둘러싸고 1904년 2월 8일에 일본 함대가 여순 군항을 기습 공격 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영국은 식민지 인도 를 지키기 위해 전 세계에서 러시아 남진을 저지하려 노력중이었으니
일본은 영국과 동맹 을 맺고 미국과는 동맹에 준하는 적극적인 지원하에.....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 만주로 진출 할수 있게 되었지요?
일본 해군 은 1904년 9일 조선의 인천에 있던 두척의 러시아 군함을 격침 시킨후
만주 여순항 봉쇄 에 성공하고는 육군은 5월 5일 요동반도에 상륙합니다.
1904년 4월 말 한국을 거쳐 북진한 부대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입하여
15개 사단에 이른 일본군은 9월에 만주의 중심 랴오양을 점령 하였습니다.
노기 대장 지휘하의 제3군은 러시아군 기관총 십자포화를 뚫고 4개월간 13만 병력중 2만명
전사자 를 포함해 5만 9천명을 희생 시키는 악천고투 끝에.... 드디어 1905년 1월 1일
여순을 함락하고 이어 3월의 봉천전투를 승리 로 이끌어 육전 을 사실상 마무리 지었습니다.
총 120만명의 일본군 은 14만명의 전사자 와 55만명의 중상자 를 내었으며
해군은 전함 7척등 모두 90척의 군함을 전투에 동원했다고 합니다.
만주 여순항 에 있던 러시아 극동 해군 은 전함 7척, 무장 순양함 4척,
어뢰정 37척에 포함 7척등 모두 55척의 군함 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육군은, 러시아 극동군은 정규군 10만에 철도수비대 2만여명 에
불과했으며 시베리아 철도의 수송률은 하루 6량에 불과 하였습니다.
만주에 도착한 120만 러시아군 병력은 대부분 1905년에 이동한 것으로 도착하자
마자 전투에 돌입해 이 중에서 총 40여만명의 사상자 를 내게 됩니다.
서로가 지친 중에 유럽 발틱해 에 있던 러시아 함대 가 영국의 방해 로 수에즈 운하 통과
가 저지 되자 멀리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싱가폴을 거쳐 대마도 에 이르렀습니다.
도중에 일본의 동맹국인 영국해군 이 육지에 상륙과 석탄 및 물과 식료품 선적 및 선박
수리를 방해 함으로써... 천신만고 끝에 대마도 해협 에 간신히 도착한 러시아 함대는
지구를 반바퀴나 돌아 항행한 것이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기진맥진한 상태 였습니다.
영국 해군으로 부터 러시아함대의 동정을 전해듣는 외에 일본 해군은 군함 2척을 싱가폴에
보내 척후활동 을 했고 1905년 5월 27일 조선의 진해만 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본 연합
함대의 도고 헤이하찌로 사령관은 24시간 계속된 해전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파 합니다.
그러나 러시아 육군은 건재 하였기에 포츠머스 강화회의 에서 러시아 대표 위테는 패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은 교묘한 일본 지원과 더불어
러시아 대표를 어르고 달래서 결국 조약이 체결되고 노벨 평화상 까지 타는데....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을 친일파 로 만든게 니토베 이나조 의 책 "무사도" 였다던가요?
이토 히로부미 는 혜안이 있었으니 전쟁이 길어지면 일본에서 만주까지는 보급로 가 엄청
긴지라 군수품 부족으로 고전 하게 될 것을 예상하고 전쟁전 가네코 겐타로 를 보내
하버드대학교 동문인 루즈벨트 대통령 에게 저 "무사도" 책을 선물하니, 책을 읽고
감동을 먹은 루즈벨트는 친일파 가 되어 책을 구입해 지인에게 주었고 회담을 도왔지요?
포츠머스 조약은 한국을 차지 하며 중국 요동반도를 조차 하고 만주 철도부설권 을 얻으며
사할린 남부를 러시아에서 양도 받고 베링해에서 일본의 조업권 을 보장한다는 내용인데
신문을 통해 알려지자, 일본 우익들은 그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다며 도쿄 히비야공원
에서 폭동을 일으켜 정부 청사와 경찰서를 습격하니 11명이 사망하고 수천명이 부상 합니다!
일본은 조선을 확실하게 얻기 위해 회담중 조선은 일본 이, 필리핀은 미국 이 차기하기로
"태프트-가쓰라 협약" 을 맺으니 포츠머스 조약과 밀약을 등에 업고, 이토 히로부미 는
방한해 을사늑약을 맺고 통감부 를 설치했으며, 태프트가 대통령 이 되자 일본은 벚꽃
3천그루를 워싱턴 포토맥 강변에 심으니 오늘날 워싱턴 시민들의 최대 축제 가 되었습니다!
신사 를 뒤로 하고 나카쓰성 을 나와 길을 걷는데 아이가 태어나면 신사 를 찾아 복을
빌고 죽으면 절에서 장레식 을 지내는 일본인지라 기독교도가 1% 에 불과하니 보기
드문 교회 가 보이고 그 다음 블록에서“南(남)”이라고 교명이 적힌 소학교 를 지납니다.
일본은 군국주의 하에서 1941년에 어려서 부터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교육 을 위해서
소학교 를 "황국신민의 학교" 로 변경히면서 그 준말로 "국민학교" 라고 했는데...
일본은 전후 다시 소학교 로 바꾸었지만, 한국에서는 일제잔재인 저 이름을 무심하게
계속 쓰다 1996년에야 초등학교 로 바꾸는데 하기사 "일본해 명칭도 50년간 무심" 했으니?
1948년 이승만 정부 가 수립된후 한국 정부는 일본해 명칭에 50년간 아무 항의도 없다가
1999년 반크가 결성될 무렵에야 뒤늦게 동해라며 이의를 제기 하고 나섰던 것이지요?
하기사 고종의 조선정부는 동해가 아닌 조선해 라 했다가 후일 대한해 라고 불렀습니다만?
그러고는 골목길을 빠져 나오니 저멀리 건너편에 절 이 보이는데 시내 지도를 보니
이 부근 주택가에만 절이 14사 나 있으니 일본은 불교 천국 이라!!! 일본 사람
들은 신도와 불교 를 함께 믿는데, 70%의 국민이 특정 절에 소속 되어 있다고 합니다.
절 안으로 들어가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시간이 부족 한지라
그만 발길을 돌려 상가를 지나 나카쓰역 으로 돌아옵니다.
호텔로 가서는 배낭을 찾아 역 구내로 들어가 식당에서 우동을 한그릇을 시켜 먹는데
가장 싼 것이 320엔 하는“가케 우동” 이라!!! 옛날 서울에서 부산
가는 밤열차가 8시간 걸릴때 대전역 플랫폼 에서 서서 먹던 바로 그 가케우동 입니다!
그러고는 기차를 타는데 오이타현 남쪽에 오래된 고성 과 고풍스러운 무사의 저택
거리 가 매우 잘 보존되어 있다는 항구 도시 기쓰키 杵築 로 가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