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산 기슭에서
설을 쇤 지 일 주가 지난 이월 중순이다. 새벽에 일어나 서연호가 쓴 ‘한국 축제를 읽다’를 펼쳐 넘겼다. 우리 민속에 관심이 많은 저자가 전국 곳곳으로 발품 팔아 남긴 자료였다. 다른 서책에서도 같은 내용을 접한 바 있어 신선감이 다소 떨어졌다. 내가 보낸 유년기 정초에서 정월대보름까지 민속 행사들이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다. 동신제나 지신 밟는 장면을 직접 보며 자랐다.
아침 식전 찬거리로 삼을 무청 시래기 껍질을 벗겨 놓았다. 작년 김장철에 귀촌해 농사를 짓는 친구가 보내온 무청이다. 베란다에서 말려 삶아 데쳐 냉동실에 두었다가 녹였는데 줄기의 껍질을 벗기면 삭감이 부드러워졌다. 세탁소에 잠바를 맡겨야 해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현관을 나섰다. 어제처럼 꽃대감이 가꾸는 꽃밭으로 가 수선화 싹과 복수초가 밀어 올리는 꽃대를 살펴봤다.
문안 인사하듯 꽃밭을 둘러보고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세탁소를 거쳐 교외로 떠나는 마을버스를 탔다. 올겨울은 예년보다 비가 잦고 날씨도 따뜻해 꽃소식이 일찍 전해왔다. 이미 설 전부터 영춘화와 매화를 완상했다. 산수유도 꽃망울이 부풀고 목련 꽃송이도 솜털이 보송보송해졌다. 수액이 오른 수양버들은 가지가 휘어지고 갯버들의 버들개지도 솜털이 부풀어 봄기운이 번져갔다.
근교로 나가려는 곳은 용강고개를 넘어간 구룡산 기슭 용전마을 근처다. 북면 감계와 무동 신도시 아파트 입주민을 위한 터널이 뚫린 산자락을 찾아갈 요량이다. 구룡산 자락 들어선 민자터널 요금소 부근은 볕이 발라 다른 곳보다 쑥이 일찍 돋아났다. 작년에도 단감 과수원과 인접한 절개지 비탈에서 남들보다 먼저 쑥을 캐 왔더랬다. 올해는 겨울비가 잦아 생육 환경이 더 좋았다.
지난겨울 들머리 땅이 얼어붙기 전 강가로 나가 냉이를 제법 캐 집에서도 먹고 지기와 나누었다. 생활권에서 상당히 떨어진 의령 지정면 성당리로, 남강이 흘러와 낙동강으로 합류하려는 지점이다. 봄 감자를 심으려는 휴경지에 자란 냉이였다. 소한 이후 추위가 덜할 때 창원 대산 강가와 진영 화포천 습지 근처로도 나가 냉이를 캐 와 식탁에 올리고 이웃과 봄내음을 나눈 바가 있다.
민자터널이 뚫린 구룡산 기슭으로는 쑥을 캐기 위해 나선 걸음이다. 남해고속도로가 국도에 걸쳐진 굴다리를 지나는 마을버스에서 용전마을 앞으로 갔다. 산기슭으로 가는 농로 곁 텃밭에는 겨울을 넘긴 시금치와 마늘이 파릇했다. 근래 세워진 비닐하우스 다육이 농장을 지나니 양봉업자의 벌통 수백 개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길섶에 핀 봄까치꽃에는 벌들이 날아와 꼼지락거렸다.
민자터널 요금소가 생기면서 단감 과수원은 뭉개지고 산자락이 잘려 생태계가 예전과 달라졌다. 거기는 남향으로 볕이 바른 곳이라 다른 데보다 쑥이 먼저 돋아남은 내가 익히 아는 바다. 작년에도 다녀간 시든 검불을 뒤지니 움이 돋아 보드랍게 자라는 쑥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쑥은 오염이 되지 않은 곳에 자랐느냐가 중요하다. 짧은 시간에 많이 캘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날이 따뜻해 겉옷 잠바를 벗어두고 쪼그려 앉아 쑥을 캐 모았다. 시간 많이 걸리지 않고도 캔 쑥은 봉지가 금세 채워졌다. 두해살이로 지난가을 싹이 튼 방가지똥 순도 다수 보여 뿌리 부분 바싹 잘라 캐 모았다. 약간 쓴맛이 돌기는 해도 이른 봄 여린 새순은 나물로 먹을 수 있다. 쑥과 방가지똥 순을 캐 장소를 한 군데 더 옮겨 쑥을 캐 보태서 남산리 앞 지인 농장을 찾아갔다.
나보다 먼저 퇴직해 고향 마을 단감 과수원을 블루베리 농장으로 바꾸어 노후를 보내는 수학과 선배를 뵈었다. 칠순 중반임에도 아주 정정했는데 전에 없던 진돗개가 보였다. 지기가 타준 커피를 들며 안부를 나눈 뒤 국도변으로 나가 시내로 가는 마을버스를 탔다. 집 근처 카페에서 꽃대감 친구를 만나 커피를 한 잔 더 마시고 배낭의 방가지똥 순을 넘겼더니 등짐이 가벼워졌다. 24.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