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인들의 시 창작 에세이
티스토리/ 이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② 결코 치환될 수 없는 것 2-1
시는 빛으로 이루어진 층계다.
시는 어둠 속에서 펼쳐 보는 일기장이다.
시는 처음 배운 외국 말이다.
시는 불속에서 녹아내리는 뼈
손끝에서 터지는 한 발의 총성
노래를 듣는 순간 떠오르는 과거의 풍경이다.
시는 모든 것이다. 사물의 희미한 윤곽, 생물의 동력, 우주가 부풀어 오르는 리듬이 바로 시다.
∇ 시의 쓸모
혹자들은 말한다. 시란 쓸모없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시만큼 쓸모 있는 것은 없다. 시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순간에도 나를 구성할 수 있는 세계의 유일한 것이며 과거를 재현할 수 있는 세계의 유일한 것이며 과거를 재현할 수 있는 가장 오롯한 장르이다. 그러한 시를 왜 사람들은 쓸모없다고 말하는 걸까?
그건 바로 시가 자본주의로 곧 치환되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시는 돈이 아니라는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한국인만 ‘물질’을 1위로 꼽았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이토록 가치는 유동적이고 상대적이다. 그렇다면 시인 공화국이라 불리는 한국, 현대시가 발전한 한국에서 오히려 시의 가치를 무시하고 자본주의적 가치를 높게 친다는 것, 그러한 현상이 우연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건 왜일까?
나는 풍선과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쪽을 누르면 다른 한쪽은 튀어나오기 마련이라고. 시는 전혀 무용하지 않다. 시는 사람을 붙드는 가느다란 실이 되어 줄 수 있다고 믿고 싶다. 시를 읽지 않는 사람과 시를 읽는 사람이 보는 세상이 같다고 믿지 않는다. 시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좀 더 어둡고 좀 더 비참하고 부조리하기도 하지만 시의 눈으로 볼 때만 반짝이고 세밀해지는 풍경이 분명 있다. 우리는 끝없이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시가 세상에 없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
시를 읽으면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절망도 더 커질지 모르지만. 모르니까 웃을 수 있는 것보다 알고 슬퍼하는 게 낫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시를 읽자. 시는 언제나 두근대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의 뒤통수에서 쏟아진 빛에서, 밀려오는 파도에서, 무덤에 돋는 풀에서, 우리는 시를 만나고 알 수 있다. 그건 물론 아무 의미 없는 일이다.
방금 전에는 시가 무용하지 않다더니 무슨 소리냐고? 원래 세계는 아무 의미 없다. 시도 마찬가지다. 어디에 가치를 두는가는 우리의 선택일 뿐이다. 당신이 파도를 보며 서있는 동안에 자동차 전시장에 서 있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삶에는 아무런 인과도 운명도 없다. 주어진 시간을 재미있게 사용하는 것이 삶이다. 그러니 이 지긋지긋한 삶을 사는 동안에는 시를 가까이하는 게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 시가 만들어지는 원리
나는 이 글에서 내가 말하는 모든 것을 배반하고 싶다. 이미 살면서 시에 대해 너무 많이 말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시에 대해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 혼자 속으로 생각하는 것만 좋아한다. 시에 대해 말하면 말할수록 자기기만으로 느껴지는 동시에 시에서 멀어진다. 나는 그런 일이 너무 슬프다.
나는 몇 번이나 여러 곳에서 어떻게 시를 쓰는지 이야기했다. 여전히 나는 그렇게 작업한다. 단어를 하나씩 모으고 문장을 모으고 이미지를 모아 커다란 퀼트 이불을 만드는 것처럼. 둥근 돌과 둥근 돌 사이, 둥근 돌을 놓지 않는다. 그 사이 나의 잘린 손, 깨진 거울, 커다란 바퀴를 놓고 싶다. 나무를 오를 때에는 너무 작은 나무에는 오르고 싶지 않다. 나뭇가지가 쉽게 부러질 수도 있고 막상 올랐을 때 마주할 풍경이 땅에서 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면 왜 더 높은 곳에 올라야 하는가? 땅을 파 내려갈 때도 그렇다. 어지간한 깊이로는 만족하고 싶지 않다. 커다란 돗자리 하나쯤 넉넉하게 깔 수 있으며 비바람도 피할 수 있을 만치 깊은 굴을 파고 싶다. 그곳에 누워 겨울을 나고 싶다. 영원히 사라질 마음이라면 그럴 수도 있게. 나는 시를 온전히 장악하고 싶다.
시는 그렇게 시작된다. 질문과 욕망으로부터. 대답할 수 없는 질문, 질문이 질문의 꼬리에 꼬리를 물게 만드는 형식으로, 답할 수 없음에 저항하려는 팽팽한 힘으로 그러나 결국 미끄러짐으로 수없는 미끄러짐의 반복으로 반복과 반복이 기차처럼 지나가고 지나가는 것을 보며 애초에 미끄러짐만이 목적이었다는 듯이 더 바라고 바라며. 시의 열차는 영원히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의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끝없이 불어나는 우물 속 달처럼. 부서질 수 없는 달처럼. 거기 도사린 어둠처럼. 그 어둠을 가르는 밧줄에 매달린 양동이처럼.
시는 도저함을 견디며 조금씩 나아가는 것.
시는 도저히 시가 될 수 없는 상태에서 도약할 때 비로소 시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것 같다. 이 무슨 모순적인 말이냐고 반문하더라도 이보다 더 정확히 시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한 마리 뱀이 풀숲을 기어간다. 풀이 흔들린다. 흔들린다. 흔들린다. 그 뒤를 살금살금 좇는 존재가 있다. 눈을 번뜩이며 뾰족한 발톱을 핥으며. 순간 새들이 날아오른다. 숲은 소란으로 가득 차 누구든 그 장면을 본다면 귀가 터져 버릴 것 같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목격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니 목격한 사람이 있다 한들 그것이 대체 무슨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단 말인가? ‘의미 부여’라는 것은 참 징그러운 것이다.
누군가 그 장면을 보고 ‘강유강식의 자연, 맹수의 습격’ 같은 말을 한다면 나는 그 사람과는 절대로 친해질 수 없을 것이다. 풍경에 의미를 투영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는 뜻이다. 내가 슬퍼서 새도 울고 내가 아파서 눈이 오고 우리가 기뻐서 꽃이 피는 그런 세계는 없다. 제발 시 속에도 없었으면 좋겠다. 나는 시에서 가장 먼 지점에 그런 세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적확하고 구체적인 언어로 장면을 그려 내고 싶다. 그래서 시를 만드는 원리가 뭐냐고?
A와 Z의 사이를 보여 주고 설득하는 과정이 시를 작동시킨다. 그것에 얼마나 필연성이 있는지를 보여 주는 방법은 다양하다. 감정으로 압도할 수도 있고 정교한 형식으로 독자를 끌고 갈 수도 있다. 어쩌면 끌고 가지 않아도 될는지 모른다. 시인과 화자가 진심으로 의심 없이 믿는 순간, 시가 생겨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믿음이 생기려면 분명 필연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 필연은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넘어서는 지점에서 ‘그것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 생겨날 때 발생한다. 나무가 흔들린다고 쓴다면 다들 흔들리는 나무를 떠올렸으면 좋겠다. 왜 흔들리는지는 나중에 생각하거나 생각하지 않는 게 오히려 시를 시로 있게 하니까.
질문에는 영원히 대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젊은 시인들의 시 창작 에세이, 영원과 하루(펴낸이 박은정, 타이피스트, 2023.)’에서 옮겨 적음. (2023.4.27. 화룡이) >
첫댓글 시는 모든 것이다.
사물의 희미한 윤곽,
생물의 동력,
우주가 부풀어 오르는 리듬이 바로 시다.
아주 강력한 애찬론입니다
감사합니다!
꽃은 으아리 입니다
내가 쓴 동시 한 편의 가치를 생각해봅니다.
숨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생명체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