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畢齋先生 門人錄
발췌: 장달수
김종직(金宗直) 1431(세종 13)∼1492(성종 23).
본관은 선산. 자는 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 밀양 출신.
아버지는 사예 강호(江湖) 숙자(叔滋)이고,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사재감정(司宰監正) 홍신(弘信)의 딸이다.
1453년(단종 1)에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1462년 승문원박사로 예문관봉교를 겸하였다.
이듬해 감찰이 된 뒤 경상도 병마평사·이조좌랑·수찬·함양군수 등을 거쳐 1476년 선산부사가 되었다.
1483년 우부승지에 올랐으며, 이어서 좌부승지·이조참판·예문관제학·병조참판·홍문관제학·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고려말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로부터 수학, 후일 사림의 조종이 된 그는 문장·사학(史學)에도 두루 능하였으며, 절의를 중요시하여 조선시대 도학(道學)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나 많은 시문과 일기를 남겼으며, 특히 1486년에는 신종호(申從濩) 등과 함께 《동국여지승람》을 편차(編次)한 사실만 보더라도 문장가로서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무오사화 때 많은 저술들이 소실되었으므로 그의 진정한 학문적 모습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후일 제자 탁영 김일손(金馹孫)이 사관으로서 사초에 수록, 무오사화의 단서가 된 그의 〈조의제문 弔義帝文〉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 의제와 단종을 비유하면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것으로, 깊은 역사적 식견과 절의를 중요시하는 도학자로서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정몽주·길재 및 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도학사상은 그의 제자인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유호인(兪好仁)·남효온(南孝溫)·조위(曺偉)·이맹전(李孟專)·이종준(李宗準) 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도학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김굉필이 조광조(趙光祖)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시켜 그 학통을 그대로 계승시켰다.
이처럼 그의 도학이 조선조 도통(道統)의 정맥으로 이어진 것은 〈조의제문〉에서도 나타나듯이 그가 추구하는 바가 화려한 시문이나 부·송 등의 문장보다는 궁극적으로 정의를 숭상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는 의리적 성격을 지닌 것이기 때문에 이를 높이 평가하였던 때문이다.
세조·성종대에 걸쳐 벼슬을 하면서 항상 정의와 의리를 숭상, 실천하였는데, 이와같은 정신이 제자들에게 전해졌고, 실제로 이들은 절의를 높이며 의리를 중히 여기는 데 힘썼다. 이러한 연유로 자연히 사림학자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고, 당시 학자들의 정신적인 영수가 되었다.
이들 사림들이 당시 훈척계열(勳戚系列)에 의하여 빚어지는 비리와 비도를 비판하고 나서자, 이에 당황한 훈척계열인 유자광(柳子光)·정문형(鄭文炯)·한치례(韓致禮)·이극돈(李克墩) 등이 자신들의 방호를 위해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그 결과 많은 사림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고, 생전에 써둔 〈조의제문〉으로 빚어진 일이라 그도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으며, 밀양의 예림서원(藝林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김천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의 덕림서원(德林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점필재집》·《유두류록 遊頭流錄》·《청구풍아 靑丘風雅》·《당후일기 堂後日記》 등이 있으며, 편저로 《일선지 一善誌》·《이존록 彝尊錄》·《동국여지승람》 등이 전해지고 있으나, 많은 저술들이 무오사화 때 소실된 관계로 지금 전하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한때 문간(文簡)으로 바뀌었다가 숙종 때에 다시 환원되었다.
佔畢齋先生 門人錄
*김맹성(金孟性)의 자는 선원(善源)이고 호는 지지당(止止堂)이며, 정통(正統) 정사년에 출생하였고, 해평인(海平人)이다. 조 매계(曺梅溪)가 선생의 시집(詩集)에 쓴 서문에 이르기를,
“성산(星山)의 가천(伽川)에 살면서 독서(讀書)와 저술(著述)하기를 좋아하였고, 시 짓기를 더욱 좋아하여 날마다 음풍(吟諷)을 일삼았으며, 가인(家人)에 대한 생활 영위의 일은 일삼지 않았다. 그리고 천성이 술을 마시지는 못하나 손이 오면 술 대접하기를 좋아했고, 문득 거나하게 취하여, 있고 없는 것을 묻지 않았으며, 부귀(富貴)와 영리(榮利)에 담박하였다. 선원(善源)은 문벌 좋은 집에서 태어났으니, 고 재상인 정숙공(靖肅公) 안순(安純)의 외손이요 문숙공(文肅公) 안숭선(安崇善)의 생질이었다. 그래서 내외손(內外孫)의 친당(親黨)들이 조정에 가득하여 간혹 벼슬하기를 권하기도 하였으나 이를 탐탁찮게 여기었다. 일찍부터 중한 명성이 있었고 개연히 세상에 나가볼 뜻도 있었으나, 누차 과제(科第)에 실패하고 나서는 가천 가에 집을 지어 지지당(止止堂)이라 편액을 걸고 시주(詩酒)를 스스로 즐기면서 장차 그대로 생애를 마치려는 뜻이 있었다.”
하였다. 그리고 점필 선생(佔畢先生)이 지지당 선생과 정분이 가장 두터웠으니, 서로 왕래하면서 경학(經學)을 강론했고, 서로 수창(酬唱)한 시첩(詩帖)은 이루 다 기억할 수도 없다. 그리고 점필 선생의 아들 곤(緄)이 단정하고 신중하며 학문에 뜻을 두었으므로, 지지당 선생이 그를 사랑하여 마침내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성종(成宗)이 즉위한 처음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유일(遺逸)을 천거하게 하자 지지당을 불러 중부 참봉(中部參奉)으로 삼았다. 뒤에 병신년 과거(科擧)에 급제하고 나서는 간성(諫省)을 거쳐 금종(禁從)의 직에 올라 화려한 명성이 더욱 널리 퍼졌는데, 이윽고 어떤 일에 연좌되어 고령(高靈)에 유배되었다. 고령은 가천(伽川)과의 거리가 10여 리밖에 안 되었으나 한 번도 자기 집을 가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어려운 일로 여겼다. 오랜 뒤에 환조(還朝)하여 이조 정랑(吏曹正郞)과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고, 정미년 봄에 서울에서 작고하니, 향년이 51세였다. 집이 매우 가난하였으므로, 요우(僚友)인 정자건(鄭子健)이 극력 주선해줌을 힘입어 무난히 고향으로 반장(返葬)하였다. 한훤 선생(寒暄先生)이 지지당 선생을 사사(師事)하였으니, 지지당 선생의 간직한 바를 또한 상상할 만하다. 감히 공경하여 앙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점필 선생의 문집 가운데 지지당 선생과 서로 수창한 시만도 거의 30여 수(首)가 되니, 점필유고(佔畢遺稿)의 보존된 것을 이미 10의 2, 3이라 하였고 보면, 30여 수 이외에 그 망실(亡失)된 것이 아마 더욱 많을 듯하다. 그러나 선생의 문집 속에는 점필 선생과 왕복한 시는 하나도 없다. 지지당 선생의 문집을 신유년에 찬집하였는데, 이 때가 무오년의 천양지화(泉壤之禍)를 당한 지 4년 뒤이고, 또 신유년으로부터 4년째 되던 해에는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있었으므로, 점필 선생의 명호(名號)는 의당 세상에서 크게 꺼리는 바가 되었기에, 그 화답하여 부친 시까지도 감히 편입(編入)하지 못했던 것이니, 그때의 풍색(風色)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지지당(止止堂)이 거처하는 정사(精舍)에는 한때의 명현(名賢)들이 와 놀면서 제영(題詠)을 남겼는데, 점필 선생의 시문(詩文)도 그 가운데 많이 있었다. 그런데 지지당 선생이 작고한 뒤에 한번은 별실(別室)의 꿈에 누가 와서 말해주기를, “빨리 당상(堂上)의 현판(懸板)들을 걷어 치우라.” 하므로, 별실이 놀라 깨어 그 꿈을 이상하게 여겨 즉시 제현(諸賢)의 제영들을 걷어서 숨겨버렸는데, 이윽고 중사(中使)가 서울에서 내려와 점필재 선생의 제영을 찾다가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는 대체로 유자광(柳子光)이 자기가 함양군(咸陽郡)에 제영해 놓은 현판(懸板)을 점필재가 일찍이 발거(拔去)시킨 데에 원한을 품고 모든 점필재의 시편(詩篇)이 있는 곳은 끝까지 수색하여 극력 발거시킴으로써, 점필재의 현판이 있는 집도 또한 모두 화를 입었는데, 지지당 선생만이 유독 신후(身後)의 화를 면하였으니, 이 또한 이상한 일이다.《지지당집(止止堂集)》에서 나온 말이다.
○金孟性字善源。號止止堂。正統丁巳生。海平人也。曺梅溪序先生詩集曰。家于星山之伽川。好讀書。喜著述。尤嗜於詩。日以吟諷爲事。不事家人生產作業。性不能飮。而客至。喜置酒。輒醉醺然。不問有無。富貴榮利。泊如也。善源生於閥閱。故宰相靖肅公安純之外孫。文肅公崇善之甥。內外孫親黨滿朝。或勸而仕。不屑也。早有重名。慨然有志於世。旣屢科第。則築室伽川上。扁以止止。詩酒自娛。將有終焉之志。與先生。契誼最厚。互相往來。講論經學。相酬唱詩帖。不可勝記。佔畢先生子緄。端飭志學。先生愛之。遂以女歸之。成廟踐祚之初。命有司擧遺逸。召爲中部參奉。後擢丙申科。歷諫省。躋禁從。華問益達。俄坐事。貶高靈。高靈距伽川十餘里。一不往其廬。人皆以爲難。久之。還朝。入爲吏曹正郞,弘文館修撰。丁未春。卒于京師。年五十一。家甚貧。賴僚友鄭子健極力經紀。乃克以喪還鄕。寒暄先生師事之。先生之所存。亦可想已。敢不敬而仰歟。佔畢齋文集中。其與先生相酬唱者。殆三十有餘首。佔畢遺稿之存。旣曰十之一二。則三十餘首之外。其所亡失者。想尤多矣。然而先生集中。無一與佔畢往復者。玆集之撰在辛酉。去戊午泉壤之慘四歲矣。又四歲。而有甲子之禍。佔畢名號。宜其爲世大忌。而至於和寄之詩。亦不敢編入矣。其時風色。尙忍言哉。
世傳。止止堂所居精舍。一時名賢。來遊題詠。佔畢齋先生詩文。多在其中。止止堂先生歿後。嘗於別室夢中。語之曰。急掇堂上懸板。別室驚覺。異之。卽拔諸賢題詠而藏之。俄而中使自京下來。索佔畢齋先生題詠。不得而歸。蓋柳子光。怨佔畢齋嘗拔去其題詠於咸陽郡。凡佔畢詩篇所在者。窮搜而力去之。懸板所有家。亦皆被禍。而止止堂先生。獨免身後之禍。亦異事也。 出止止堂集
*정여창(鄭汝昌)의 자는 백욱(伯勖)이고 하동인(河東人)이며 호는 일두(一蠹)이다. 효행(孝行)으로 천거를 받아 참봉(參奉)이 되었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이 되고 벼슬이 안음 현감(安陰縣監)에 이르렀다.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선생에게서 수업(受業)하여 성리학(性理學)을 일삼았다. 무오년에 종성(鍾城)에 유배되어 작고했는데, 이윽고 부관(剖棺)되었다. 중종(中宗) 초에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고, 그 후에 우의정(右議政)이 가증(加贈)되었으며, 선조(宣祖) 때에 문헌(文獻)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鄭汝昌字伯勖。河東人。號一蠧。以孝行薦爲參奉。辭不就。登第。爲翰林。官至安陰縣監。與金宏弼受業於先生。事性理學。戊午。謫鍾城以卒。旣而。又剖棺。中廟初。贈都承旨。後加贈右議政。宣廟朝。賜謚文獻。
*김굉필(金宏弼)의 자는 대유(大猷)이고, 호는 한훤당(寒暄堂)이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다가 천거를 받아 형조 좌랑(刑曹佐郞)이 되었다. 무오년에 희천(熙川)에 유배되었다가 순천(順天)으로 옮겨졌는데, 갑자년에 극형(極刑)을 당하였다. 중종 초기에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뒤에 우의정이 가증되었으며, 선조 때에 문경(文敬)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金宏弼字大猷。號寒暄堂。潛心於性理之學。以薦起。爲刑曹佐郞。戊午。謫煕川。移順天。甲子。被極刑。中廟初。贈都承旨。後加贈右議政。宣廟朝。賜謚文敬。
*조위(曺偉)의 자는 태허(太虛)이고 창산인(昌山人)인데, 선생의 처남(妻男)으로서 선생을 사사하였다. 한훤당과는 동년생(同年生)으로서 정분이 가장 서로 친밀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들이 모두 원대(遠大)한 데에 이를 것으로 기대했었다. 이미 벼슬을 하기 시작하여서는 성종(成宗)의 알아줌을 크게 입어 칭찬과 총애가 특히 대단하였다. 그가 어버이를 위해 군수(郡守)가 되기를 요청했을 적에는 특별히 일급(一級)을 하사하여 사품(四品)으로 올려주었다. 그가 함양 군수(咸陽郡守)로 있을 때에 상(上)이 하서(下書)하여 포유(褒諭)하기를,
“네가 문장(文章)으로 몸을 진취시켜 유악(帷幄)에 배시(陪侍)함으로 인하여 내가 너를 인재로 여겨온 지 오래였다. 그런데 어버이가 늙은 때문에 사직하고 시양(侍養)하기를 요구하여 가까운 군(郡)의 수령(守令)을 제수받아 어버이 봉양에 자뢰하게 되었으니, 이는 대체로 부득이한 형편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네가 시종(侍從)이었던 관계로 감사(監司)에게 하유(下諭)하여 지금 네 어버이에게 희름(餼廩)을 약간 보내게 해서 향리(鄕里) 사람들로 하여금 너의 학문에 관한 힘으로 네 어버이에게까지 영화가 미치게 된 것을 알게 하도록 하는 바이니, 너는 그 뜻을 알라.”
하였다. 그러자 공(公)이 전(箋)을 올려 진사(陳謝)하였다.
이에 앞서 상이 세초(歲抄)에 관하여 응제(應製)하게 한 시(詩)가 상의 뜻에 맞아, 공의 부모에게 미두(米豆)를 하사하도록 명하였고, 함양 군수의 임기가 다 차서는 상(喪)을 당하자, 또 부제(賻祭)의 미두를 하사하였으니, 외관(外官)에 대한 부전(賻典)은 전에 없었던 것이다.
벼슬이 참판(參判)에 이르러 연산조(燕山朝) 때에 수찬 선생(修撰先生)의 시문(詩文) 때문에 죄를 얻어 의주(義州)에 유배되었고, 이어 순천(順天)에 이배(移配)되었다가, 홍치(弘治) 계해년에 질병으로 작고하니, 향년이 50세였다.
공이 사귀었던 사람들은 모두 한때의 명류 거공(名流鉅公)들이었는데, 서로 조전(朝典)을 강론하고 문사(文史)를 절차탁마하면서 힘써 부지런히 공부하였다. 뒤에 비록 문사(文事)로 폐적(廢謫)되었으나, 그래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저술(著述)한 것이 자못 많다. 일찍이 매계총화(梅溪叢話) 10여 가지 일을 초(草)하다가 초고(草稿)를 완성하지 못하고 작고하였다. 한훤당과 함께 순천에 유배되었는데, 한훤당이 공의 병을 다스려주고 공의 상(喪)까지 주선해 주었으며, 반장(返葬)하기에 미쳐서는 제문(祭文)을 지어 조문하였다.
○曺偉字太虛。昌山人。先生婦弟。師事先生。與寒暄同年生。契最欵密。自童稚時。人皆期以遠到。旣筮仕。大被成廟之知。奬愛特甚。爲親乞郡。特賜一級。陞四品。守咸陽時。下書褒諭曰。爾以文章致身。陪侍帷幄。爲予所器者。久矣。以親老。辭職求侍。得除近郡守令。以資奉養。蓋出於不得已也。予以侍從之故。下諭監司。今略致餼于爾親。使鄕里知爾以稽古之力。榮及其親。爾其知悉。公上箋陳謝。前此。上令歲抄所製詩稱旨。命賜父母米豆。在郡秩滿。而丁憂。又賜賻祭米豆。外官賻典。前所無也。官至參判。燕山朝。以修撰先生詩文定罪。謫義州。移配順天。弘治癸亥。感疾而卒。享年五十。所結交皆一時名流鉅公。相與講論朝典。切磨文史。亹亹不倦。雖以文事廢謫。猶不釋卷。著述頗多。嘗草梅溪叢話十餘事。未成稿而卒。寒暄並謫順天。救其病。治其喪。及其返櫬。作祭文以吊之。
*남효온(南孝溫)의 자는 백공(伯恭)이고 의령인(宜寧人)인데 추강거사(秋江居士)라 자호하였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섬기면서 효성으로 이름이 높았다. 사람됨이 맑고 깨끗하고 도량이 넓고 의지가 견고하며, 소탈하고 고상하며, 가슴 속이 쇄락(灑落)하여 한 점의 진기(塵氣)도 없었다. 일찍이 선생에게서 수업했는데, 선생은 감히 공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우리 추강’이라고 하였으니, 그가 경례(敬禮)를 받음이 이러하였다.
김굉필, 정여창, 김시습(金時習) 등 제현(諸賢)과 함께 서로 추중(推重)하며 형제간처럼 지냈었다. 그러나 성종 때에 상소(上疏)하여 소릉(昭陵)을 복구시키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마침내 이 세상에 뜻을 단절하고 구속없이 지내는 삶을 일삼아, 무릇 명승지로 일컬어지는 곳은 그의 발자취가 거의 다 미쳤다. 정통(正統) 갑술년에 태어나서 성화(成化) 임자년에 졸하니, 향년이 39세였다. 연산(燕山) 갑자년에 소릉에 관한 상소 때문에 추죄(追罪)되어 천양(泉壤)의 화를 입었다. 유홍(兪弘)이 《추강집(秋江集)》 의 발문(跋文)을 썼다.
○南孝溫字伯恭。宜寧人。自號秋江居士。早喪父。事母以孝聞。爲人冲澹而弘毅。踈曠而典雅。胸次灑落。無一點塵氣。嘗受業於先生。先生不敢名。必曰吾秋江。其見敬禮如此。與金宏弼,鄭汝昌,金時習諸賢。相推重若弟兄。然。在成廟朝。上䟽。請復昭陵。不聽。遂絶意於斯世。以散漫爲事。凡稱名勝之地。足跡殆將遍焉。正統甲戌生。歿於成化壬子。年三十九。燕山甲子。追罪昭陵之䟽。禍及泉壤。兪弘跋秋江集。
*김일손(金馹孫)의 자는 계운(季雲)이고 호는 탁영(濯纓)인데, 집의(執義) 맹(孟)의 아들이요, 절효 선생(節孝先生) 극일(克一)의 손자이며, 김해인(金海人)으로 대대로 청도(淸道)에서 살았다. 일찍이 선생에게서 수업하여 문장(文章)을 잘하였고, 성품이 대범하고 고상하여 남을 잘 인정하지 않았다. 벼슬은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이르렀고, 무오년에 사화(史禍)를 당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극돈(李克墩)이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있을 때에 성종(成宗)의 초상이 났는데도 서울에 진향(進香)은 하지 않고 기녀(妓女)를 수레에 싣고 다녔으므로, 탁영이 그 사실을 사초(史草)에 기재하였더니, 극돈이 실록청 당상(實錄廳堂上)이 되어 실로 이 화를 일으킨 것이다.”
고 한다. 현종(顯宗) 때에 도승지에 추증되고 자운서원(紫雲書院)의 편액(扁額)을 내렸다.
○金馹孫字季雲。號濯纓。執義孟之子。節孝先生克一之孫。金海人。世居淸道。受業於先生。能文章。性簡亢。少許可。仕至吏曹正郞。戊午。遭史禍。或云。李克墩爲全羅監司。成廟之喪。不進香京師。而載妓而行。濯纓書其事於史草。克墩爲堂上。實起此禍云。顯廟朝。贈都承旨。宣以院額。
*권오복(權五福)의 자는 향지(嚮之)이고 호는 수헌(睡軒)인데, 예천인(醴泉人)이다. 성종(成宗) 병오년에 과거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에 선보(選補)되었다가 옥당(玉堂)에 전임되어 김탁영 등 제공(諸公)과 막역(莫逆)의 친교를 맺었다. 그러다 무오년의 사화가 일어남에 미쳐 선생의 문도(門徒)라는 이유로 탁영과 함께 극화(極禍)를 당하였다.
○權五福字嚮之。號睡軒。醴泉人。成廟朝丙午。登第。選補翰苑。轉入玉堂。與金濯纓諸公。爲莫逆交。及戊午禍起。以先生門徒。與濯纓同罹極禍。
*유호인(兪好仁)의 자는 극기(克己)이고 고령인(高靈人)인데, 정통(正統) 을축년에 태어났다. 임오년에 생원(生員), 진사(進士)가 되고, 갑오년에 과거 급제하여 벼슬이 합천 군수(陜川郡守)에 이르러, 나이 50세로 작고하였다. 어득강(魚得江)이 그의 묘갈문(墓碣文)을 지었는데, 그 서문의 대략에,
“충효(忠孝)하고 청검(淸儉)하며, 침중(沈重)하고 간엄(簡嚴)하였으며, 시문(詩文)은 고고(高古)하고 필력(筆力)은 주경(遒勁)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삼절(三絶)이라 일컬었다. 가세(家世)가 청빈(淸貧)하였으나, 또 산업(産業)을 경영하지 않았다.”
하였다. 선생의 문학(文學)은 한 시대에 으뜸이었는데, 공(公)의 문학이 여기에 손색이 없었다. 아, 그런 덕망(德望)으로 성명(聖明)한 임금을 만났으니 평소에 온축해 놓은 것을 써볼 만했는데도, 누차 부격(府檄)에 굴해 있다가 섭양(攝養) 또한 이루지 못하여 50세에 그쳤으니, 슬프다. 공은 임종(臨終) 때에 아들 환(瑍)에게 이르기를,
“군자(君子)는 모름지기 임금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 너는 만일 조그만 벼슬이라도 얻으면 의당 내 말을 생각해야 한다.”
하였다. 뇌계(㵢溪)에 살면서 인하여 뇌계를 호로 삼았고, 유고(遺稿) 수권(數卷)이 있다.
○兪好仁字克己。高靈人。正統乙丑生。壬午。生員,進士。甲午。登第。官至陜川郡守。年五十卒。魚得江銘墓碣。序略曰。忠孝淸儉。沉重簡嚴。詩名高古。筆力遒勁。人稱三絶。家世淸貧。又不營業。先生文學冠一世。公不讓焉。嗚呼。以德望。遇知聖明。可試素蘊。而屢屈府檄。養又不終。止於知命。痛哉。臨終。語子瑍曰。君子。要須不欺君。汝若得一官。當思我言。家于雷溪。因以爲號。有稿數卷。
*박한주(朴漢柱)의 자는 천지(天支)이고 밀양인(密陽人)이며, 자호는 우졸자(迂拙子)인데, 선생의 문하에 유학하였다. 성종 을사년에 과거 급제하여 정언(正言), 헌납(獻納)을 역임하면서 국사를 말하는 것이 직절(直截)하였고, 나가서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되었다. 무오년 사화 때 벽동(碧潼)으로 장류(杖流)되었다가 갑자년 사화 때 피살되었다. 중종 초기에 명하여 도승지를 추증하였다.
○朴漢柱字天支。密陽人。自號迂拙子。遊先生門下。成廟乙巳。登第。歷正言,獻納。言事直截。出爲醴泉郡守。戊午。杖流碧潼。甲子。被殺。中廟初。命贈都承旨。
*이원(李黿)의 자는 낭옹(浪翁)이고 경주인(慶州人)으로,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호임)의 후손이다. 성종 기유년에 과거 급제하여 벼슬이 호조 좌랑(戶曹佐郞)에 이르렀다. 무오년 사화 때 원지(遠地)에 장류(杖流)되었다가 갑자년 사화에 죽었다. 그는 사람됨이 당당하여 사절(死節)이 있었으므로, 어린 임금을 맡길 만하였는데, 연산군(燕山君)이 점필재에게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리자고 청했다는 이유로 그를 능지처참하였다. 중종 초기에 명하여 도승지를 추증하였다. 남추강(南秋江)의 《사우록(師友錄)》에 이르기를,
“익재의 후손이요 박팽년(朴彭年)의 외손(外孫)으로서, 두 집안의 현량(賢良)함이 이 한 사람에 모아졌다.”하였다. 호는 재사당(再思堂)이다.
○李黿字浪翁。慶州人。益齋之後。成廟己酉。登第。官至戶曹佐郞。戊午。杖流遠地。死于甲子之禍。爲人堂堂有死節。可以托六尺之孤。燕山以文忠謚佔畢齋處斬。中廟初。命贈都承旨。南秋江師友錄曰。益齋之後。朴彭年之外孫。二家之賢。萃于一人。號再思堂。
*이주(李胄)의 자는 주지(胄之)이고 고성인(固城人)이다. 행촌(杏村 이암(李嵒)의 호임)의 후손으로 문장에 능하고 기절(氣節)이 있었으며, 망헌(忘軒)이라 자호하였다. 성종 무신년에 과거 급제하여 정언(正言)에 제배되었다. 무오년 사화 때 진도(珍島)에 유배되어 피살되었다.
○李胄字胄之。固城人。杏村之後。能文章。有氣節。自號忘軒。成廟戊申。登第。拜正言。戊午。流珍島被殺。
*이승언(李承彦)의 자는 사아(士雅)이고 성주인(星州人)이다.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하였다. 김굉필과 함께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는데, 도량이 넓고 용맹이 뛰어났다.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고 호산(湖山)에 마음껏 배회하다가, 유일(遺逸)로 천거를 받아 벼슬이 한성 참군(漢城參軍)에 이르렀다. 아들 장길(長吉), 장곤(長坤)은 김한훤당에게서 배웠다.
○李承彥字士雅。星州人。▣▣魁生員。與金宏弼。同遊學先生之門。沉洪有量。雄勇絶倫。淹貫經史。放意湖山。以遺逸薦。官至漢城參軍。子長吉,長坤。學於金寒暄堂。
*원개(元槩)의 자는 원오(元五)이고 원주인(原州人)인데, 고상한 행실로 천거를 받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김굉필과 함께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다.
○元槩字元五。原州人。以高行薦授參奉。不赴。與金宏弼。同遊學先生之門
*이철균(李鐵均)의 자는 □□이고 성주인(星州人)이다. 경태(景泰) 경오년에 태어나서 을유년에 진사(進士)가 되고, 병진년에 과거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김굉필과 함께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다.
○李鐵均字▣▣。星州人。景泰庚午生。乙酉。進士。丙辰。登第。官至大司成。與金宏弼。同遊學於先生之門。
*곽승화(郭承華)의 자는 □□이고 현풍인(玄風人)이다. 정유년에 진사가 되었다. 김굉필과 함께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는데, 청개(淸介)한 인품으로 사우(士友)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는 사림(士林)의 화(禍)가 있을 줄을 알고 시골 구석에 묻혀 살면서 스스로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보이지 않도록 하였으므로, 한훤당이 간혹 그에게 장난말로 이르기를, “이렇게 하여 화를 피하는 것이 어찌 도리에 합당하겠는가.” 하였다.
○郭承華字▣▣。玄風人。丁酉。進士。與金宏弼。同遊先生之門。以淸介爲士友所推。知有士林之禍。沉冥鄕曲。不自表異於凡人。寒暄或相調戱。以爲如此避禍。豈合道理。
*강흔(姜訢)의 자는 시가(時可)이고 진주인(晉州人)으로, 관찰사(觀察使) 자평(子平)의 막내아들이다. 맨 처음 여경(餘慶)을 따라 밀양(密陽)에 가서 선생에게서 두시(杜詩)를 배우고, 다음에는 덕우(德優)에게 종유하여 《시경(詩經)》을 배웠으며, 다음으로는 대유(大猷)에게 종유하여 《소학(小學)》을 전공하고, 다음으로는 시숙(時叔), 공서(公緖)와 종유하면서 유극기(兪克己)에게서 시(詩)를 읽었다. 여묘(廬墓)살이를 하였고, 뒤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사우록(師友錄)》에 나타나 있다.
○姜訢字時可。晉州人。觀察使子平之末子。始從餘慶于密陽。受杜詩於先生。次從德優。學詩。次從大猷。攻小學。次從時叔,公緖。讀詩於兪克己。廬墓。後中進士。 師友錄
*권경유(權景裕)의 자는 군요(君饒)이고 또 다른 자는 자범(子汎)인데, 안동인(安東人)이다. 성종 때에 과거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옥당(玉堂)에 들어가 정자(正字)가 되었고, 누차 전임되어 교리(校理)에 이르렀다. 연산조(燕山朝) 때에 시사(時事)가 점차 변해가는 것을 알고 외직을 요청하여 제천 현감(堤川縣監)이 되었는데, 무오년의 사화가 일어나서 김일손(金馹孫)과 같은 날에 죽었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말하기를,
“군요는 성품이 강직하여 작위(作爲)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였다.
○權景裕字君饒。又字子汎。安東人。成廟朝。登第。由藝文館撿閱。入玉堂爲正字。屢遷至校理。燕山朝。知時事漸變。乞外爲堤川縣監。戊午禍起。與金馹孫同日死。南秋江孝溫云。君饒性剛毅。不喜作爲云。
*이목(李穆)의 자는 중옹(仲雍)이고 전주인(全州人)인데, 성품이 강직하여 말을 기탄없이 하였다. 일찍이 태학(太學)에 있을 당시, 윤필상(尹弼商)이 대신(大臣)으로서 국정을 담당했었는데, 이목이 가뭄을 인하여 소(疏)를 올려 말하기를,
“필상을 삶아 죽이면 하늘이 비를 내릴 것입니다.”
하였다. 그 뒤 윤필상이 이목을 길에서 만나자 그를 불러서 말하기를,
“군(君)이 꼭 이 늙은이의 고기를 먹고 싶은가?”
하였는데, 이목은 도도한 표정으로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연산군 초기에 문과에 장원하였다. 그 후 사화(史禍)가 일어났을 때, 윤필상이 당상(堂上)으로서 전일의 유감을 품고 이목이 일찍이 점필재에게서 수업(受業)했다는 이유로 죄를 얽어 죽였다.
○李穆字仲雍。全州人。剛直敢言。嘗在太學時。尹弼商。以大臣當國。穆因天旱。上䟽曰。烹弼商。天乃雨。弼商遇諸途。呼之曰。君必欲食老夫肉耶。穆昂然不顧而去。燕山初。擢壯元科。及史禍起。弼商爲堂上。挾前憾。以穆嘗受業於佔畢齋。搆殺之。
*강경서(姜景敍)의 자는 자문(子文)이고 진주인(晉州人)이며, 호는 초당(草堂)이다. 성종 정유년에 과거 급제하였고, 무오년에 선생의 문도(門徒)라는 이유로 회령(會寧)에 장류(杖流)되었다가 뒤에 방환되었다. 중종 때에 벼슬이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이르렀다. 《초당집(草堂集)》 1건(件)이 있다. 뒤에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추증되었다.
○姜景叙字子文。晉州人。號草堂。成廟丁酉。登第。戊午。以先生門徒。杖流會寧。後放還。中廟朝。官至左副承旨。有草堂集一件。後追贈禮曹判書。
*이수공(李守恭)의 자는 중평(仲平)이고, 광주인(廣州人)으로 둔촌(遁村)의 후손이며 영의정(領議政) 극배(克培)의 손자이다. 성종 무신년에 과거 급제하여 정언(正言), 장령(掌令)을 역임하면서 쟁신(諍臣)의 풍도가 있었다.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서는 교리(校理), 수찬(修撰), 응교(應敎)를 거쳐 전한(典翰)에 승진되었다. 무오년에 창성(昌城)에 유배되었고 그 후 광양(光陽)으로 이배(移配)되었으며, 갑자년에 사사(賜死)되었는데 그때 나이 41세였다. 중종 초기에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李守恭字仲平。廣州人。遁村之後。領議政克培之孫。成廟戊申。擢第。歷正言,掌令。有諍臣風。入弘文館。拜校理,修撰,應敎。陞典翰。戊午。謫昌城。移光陽。甲子。賜死。年四十一。中廟初。贈都承旨。
*정희량(鄭希良)의 자는 순부(淳夫)이고 호는 허암(虛菴)이다. 연산군 초기에 과거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이윽고 무오년의 옥사(獄事)에 연좌되어 의주(義州)에 유배되었다. 그는 점[卜]을 잘 쳐서 길흉(吉凶)을 알았으므로, 일찍이 말하기를,
“갑자년의 화는 무오년보다 심할 것이다.”
하고, 어느날 갑자기 종적(蹤跡)을 끊고 도망가 버려서 그가 죽은 곳도 알 수 없다. 문집(文集)이 세상에 행해지고 있다.
○鄭希良字淳夫。號虛菴。燕山初。登第。爲藝文館撿閱。旣而。坐戊午獄。謫義州。善推卜。知吉凶。嘗曰。甲子之禍。甚於戊午。一日。絶迹逃去。不知所終。有集行於世。
*노조동(盧祖同)의 자는 공서(公緖)인데, 《소학(小學)》을 읽기 좋아하였고, 엽등(躐等)의 학문, 풍월(風月)의 글귀, 과거(科擧)의 재주 등을 좋아하지 않아서, 몸가짐을 신중히 하여 법도를 지키는 것이 대략 대유(大猷)와 같았다. 부친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면서 일체 《가례(家禮)》에 따랐다. 시숙(時叔)과 함께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할 적에 한훤당(寒暄堂)이 그를 공경하였다. 김모재(金慕齋)가 노 처사(盧處士)를 방문하여 지은 시의 서문에 이르기를,
“노공(盧公)은 고상한 행실이 있으며 현달하기를 구하지 않고, 젊어서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유학하였다.”
하였고, 그 시에는
인간의 고관 대작은 절로 길이 다른 법이라 / 人間軒冕自殊途
안자처럼 곤궁히 살며 도의 진미 맛보누나 / 顔巷窮居味道腴
눈 밑에는 크나큰 우주를 한데 넣었고 / 眼底牢籠閑宇宙
가슴 속엔 하나의 요순을 온축하였네 / 胸中蘊蓄一唐虞
학문은 염락관민의 바른 연원을 따랐고 / 學追濂洛淵源正
행실은 안자 증자의 실천과 같이 독실하도다 / 行篤顔曾踐履俱
산림 속에 찾아온 건 응당 뜻이 있노니 / 爲訪林丘應有意
높은 의범으로 남쪽 구석 표창하려 함이라오 / 欲將高範表南隅
하였다. 《척언(摭言)》에는 이르기를,
“노 일사 필(盧逸士㻶)은 고성인(固城人)이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공(公)이 필(㻶)로 개명(改名)을 하였는데, 어느 때 무슨 연유로 개명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기묘보록(己卯補錄)》에는 이르기를,
“유일(遺逸) 노모(盧某)의 별과 천목(別科薦目)에 의하면, 우애(友愛)가 향당(鄕黨)에 드러났고, 학식(學識)이 순정(醇正)하며 또 재행(才行)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낙제(落第)하고, 천거로 누차 전임하여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가 되었다가 정랑(正郞)에 체배(遞拜)되었는데, 뒤에 강자(降資)되었다는 이유로 향리에 돌아갔다. 호는 묵재(墨齋)이다.”
하였다.
○盧祖同字公緖。好讀小學。不喜躐等之學。嘲弄之文。科擧之才。持身守法。略與大猷同。居父喪。廬墓三年。一依家禮。與時叔。同學於先生之門。寒暄敬之。金慕齋訪盧處士詩序曰。盧公有高行。不求聞達。少與金宏弼同遊學。其詩曰。人間軒冕自殊途。顏巷窮居味道腴。眼底牢籠閑宇宙。胷中蘊蓄一唐虞。學追濂洛淵源正。行篤顏曾踐履俱。爲訪林丘應有意。欲將高範表南隅。摭言云。盧逸士㻶。固城人。 按公改名㻶。不知何時緣何而改。己卯補錄。遺逸盧某。別科薦目。友愛著於鄕黨。學識醇正。且有才行。落第。累轉爲慶尙都事。遆拜正郞。後以降資還鄕里。號墨齋。
*강희맹(姜希孟)은 진주인(晉州人)으로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姜希孟。晉州人。封晉山君。謚文良。
*임희재(任熙載)의 자는 경여(敬輿)인데 풍천인(豐川人)이다. 무오년의 문과에 급제했는데, 이윽고 선생의 문도(門徒)라는 이유로 장류(杖流)되었다. 희재는 사홍(士弘)의 아들인데, 세설(世說)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희재는 글씨를 잘 썼는데, 일찍이
요순을 조종으로 삼으면 절로 태평할 것인데 / 祖舜宗堯自太平
진 시황은 무슨 일로 창생을 괴롭히는고 / 秦皇何事苦蒼生
재앙이 소장 안에서 일어날 줄을 알지 못하고 / 不知禍起蕭墻內
오랑캐를 막고자 헛되이 만리장성만 쌓았네 / 虛築防胡萬里城
라는 시(詩) 한 절구(絶句)를 병풍에 써 놓았다. 그런데 연산군(燕山君)이 하루는 갑자기 사홍의 집에 행행하여 그 병풍을 보고 묻기를,
“누가 쓴 것인가?”
하자, 사홍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연산군이 노여운 기색으로 말하기를,
“경(卿)의 아들은 불초한 사람이니, 내가 그를 죽이고 싶은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자, 사홍이 즉시 무릎을 꿇고 대답하기를,
“이 자식은 성행(性行)의 불순함이 과연 상교(上敎)와 같습니다. 신(臣)이 진작 이 사실을 아뢰려고 하였으나 그리 못하였습니다.”
고 하여, 마침내 화를 입었다. 혹자는 말하기를,
“희재가 항상 자기 아버지를 간(諫)하였기 때문에 그 아비가 이를 싫어하여 그를 참소했다.” 고도 한다.
○任煕載字敬輿。豊川人。登戊午科。俄以先生門徒杖流。煕載。士弘之子。世說。煕載善書。嘗書祖舜宗堯自太平。秦皇何事苦蒼生。不知禍起蕭墻內。虗築防胡萬里城一絶于屛上。燕山。一日。猝幸士弘家。見屛問之曰。誰所書耶。士弘對以實。燕山有怒色曰。卿子。不肖人也。我欲殺之。卿意何如。士弘卽跪對曰。此子。性行不順。果如上敎。臣曾欲啓之而未果。遂被禍。或云。煕載常諫其父。故士弘不悅而譖之云。
*이계맹(李繼孟)의 자는 희순(希醇)인데 전의인(全義人)이다. 성종 기유년에 과거 급제하였고, 그의 시문(詩文)은 선생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무오년에 선생의 문도라는 이유로 장류(杖流)되었다. 중종 때에 다시 기용되어 벼슬이 찬성(贊成)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그는 성품이 방달(放達)하여 몸을 검속하지 않았으므로, 처음에는 기묘 사류(己卯士類)들에게 흠을 잡혔으나, 사류들이 화를 당함에 미쳐서는 유독 그만이 사류들을 신구(申救)하여 마지않다가, 권간(權奸)의 뜻에 거슬리어 근심과 번민 끝에 죽었다.
○李繼孟字希醇。全義人。成廟己酉。登第。詩文爲先生所取。戊午。坐先生門徒。杖流。中廟朝。起廢復用。官至贊成。謚文平。性放達不撿。初。爲己卯士類所短。及士類敗。獨申救不已。與權奸忤。憂懣而卒。
*강겸(姜謙)은 진주인(晉州人)이다. 경자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에 뽑혀 들어갔다. 그 후 누차 승천되어 정랑(正郞)에 이르렀다. 무오년의 옥사(獄事)에 연좌되어 장류되었다. 그의 아우 형(詗)은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갑자년의 사화에 죽었다.
○姜謙。晉州人。登庚子科。選入弘文館。屢遷至正郞。坐戊午獄。杖流。弟詗。爲大司諫。死於甲子之禍。
*홍한(洪翰)은 남양인(南陽人)인데, 을사년의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의(參議)에 이르렀다. 그는 성품이 곧고 남을 잘 인정하지 않아서 권귀(權貴)의 뜻에 거슬렸는데, 무오년의 화에 걸려 장류되던 도중에 죽었다. 중종 때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洪翰。南陽人。登乙巳科。官至參議。性直。少許可。忤權貴。罹戊午禍。杖流。道卒。中廟朝。贈吏曹參判。
*무풍부정 총(武豐副正摠)의 자는 백원(百源)인데, 태종(太宗)의 증손이다. 시(詩)에 능하였고 거문고를 잘 탔다. 그는 양화도(楊花渡)에 별장을 짓고 살면서 조그마한 배에다 고기잡는 그물을 갖추어 항상 어선(漁船)을 띄우고 노닐었는데, 시인 소객(詩人騷客)들을 맞이하여 날마다 좋은 시를 이루어 시가 무려 천백편(千百篇)에 달하였다. 서호주인(西湖主人)이라 자호하였다. 무오년에 먼 곳으로 장류(杖流)되었다.
○茂豊副正揔字百源。太宗之曾孫。能詩。善彈琴。搆別墅于楊花渡。具小艇漁網。常剌漁船。邀詩人騷客。日致好詩。無慮千百篇。自號西湖主人。戊午。杖流遠地。
*정승조(鄭承祖)는 연산군 갑인년의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선보(選補)되었다가, 무오년에 먼 곳으로 장류되었다.
○鄭承祖。登燕山甲寅科。選補翰林。戊午。杖流遠地。
*강백진(康伯珍)의 자는 자온(子韞)이고 신천인(信川人)인데, 선생의 생질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선생에게서 수업하였다. 성종(成宗) 임진년 중춘(仲春)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정유년 봄에는 갑과(甲科) 제삼인(第三人)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사인(舍人),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흥해(興海)의 수령으로 나가 있을 적에 《이준록(彝尊錄)》을 간행하였다. 무오년에 장류되었다.
○康伯珍字子鞰。信川人。先生外甥也。自少。受業於先生。成廟朝壬辰仲春。中生員。丁酉春。登甲科第三人。官至舍人,司諫。出宰興海時。刻行彝尊錄。戊午。杖流。
*강중진(康仲珍)의 자는 자도(子韜)이다. 경자년 봄에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이르렀는데, 바로 백진(伯珍)의 아우이다. 선생에게서 수업하였다. 무오년으로부터 22년 뒤에 중진이 선생의 문집(文集) 7권을 간행하였다.
○康仲珍字子韜。庚子春。中生員,進士。登第。官至弘文館修撰。伯珍之弟也。受業於先生。戊午後二十二年。仲珍刻行先生文集七卷。
*김흔(金訢)의 자는 군절(君節)이고, 호는 안락(顔樂)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그는 사문(斯文)을 부식(扶植)한 일이 많았다.
○金訢字君節。號顏樂。登第。官至大提學。謚文匡。多有扶植斯文之事。
*김용석(金用石)의 자는 연숙(鍊叔)이다. 그는 태학(太學)에 유학하면서 한 때의 명사(名士)들과 함께 주 문공(朱文公)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향약(鄕約)을 만들고, 《소학(小學)》을 강론하였다. 무오년에 사화가 일어나자 망명(亡命)하여 태백산(太白山)으로 들어갔다.
○金用石字鍊叔。遊太學。與一時名士。依朱文公故事。作鄕約。講論小學。戊午禍作。亡命入太白山下。
*홍유손(洪裕孫)의 자는 여경(餘慶)이고, 호는 소총(篠叢)이며 또 하나의 호는 광진자(狂眞子)인데, 남양인(南陽人)이다. 그는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였으나 성품이 방달(放達)하여 몸을 검속(檢束)하지 않았고 또한 과거(科擧)를 좋아하지 않았다. 도보로 영남(嶺南)까지 가서 선생을 배알하고 두시(杜詩)를 배웠는데, 선생이 이르기를,
“이 사람에게는 벌써 안자(顔子)가 도(道)를 즐기던 곳이 보인다.”
고 하였으므로, 학자들이 모두 그를 높이었다. 그는 사람됨이 문(文)은 칠원(漆園 장주(莊周)를 가리킴)과 같고, 시(詩)는 산곡(山谷 황정견(黃庭堅)의 호임)과 비슷하며, 재(才)는 공명(孔明 제갈량(諸葛亮)의 자임)과 같고, 행(行)은 만천(曼倩 동방삭(東方朔)의 자임)과 같았다.
○洪裕孫字餘慶。號篠叢。又號狂眞子。南陽人。涉獵經史。放達不撿。不喜科擧。步歸嶺南。謁先生。受杜詩。先生曰。此子已見顏子樂處。學者皆宗之。爲人文如㓒園。詩涉山谷。才挾孔明。行如曼倩。
*이종준(李宗準)의 자는 중균(仲鈞)이고 호는 용헌(慵軒)인데, 문장(文章)에 능하고 서화(書畫)를 잘하였다. 성종 을사년에 과거에 급제했는데, 무오년의 옥사(獄事)에 연좌되어 피살되었다.
○李宗準字仲鈞。號慵軒。能文章。善書畫。成廟乙巳。登第。坐戊午獄。被殺。
*최부(崔溥)의 자는 연연(淵淵)이고 호는 금남(錦南)인데, 나주인(羅州人)이다.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좋았으며, 영걸(英傑)하여 세사에 속박을 받지 않았다. 성묘조(成廟朝)에 재차 등제(登第)하여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가 되었는데, 무오년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끝내 피살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崔溥字淵淵。號錦南。羅州人。博聞強記。英傑不羈。成廟朝。再登第。爲弘文館校理。戊午。被謫。後竟逮被殺。
*표연말(表沿末)의 자는 소유(少游)이고 호는 남계(藍溪)인데, 신창인(新昌人)이다. 성종 임진년에 등제하여 문명(文名)이 있었다. 선생에게서 수업(受業)할 적에 서로 교유(交遊)하던 사람은 모두 한때의 명사(名士)들이었다. 일찍이 한림(翰林)이 되었을 때, 동료들과 연음(宴飮)하면서 우육(牛肉)을 베푼 것이 상(上)에게 알려져서 관례에 따라 파면되었다. 그 후로는 금육(禁肉)을 볼 때마다 그것을 물리치며 말하기를,
“차마 다시 법을 범할 수 없다.”
고 하였다. 복상(服喪)하면서 예(禮)를 극진히 한 사실이 알려져 상(上)의 명으로 한 자급(資級)이 더해졌고, 뒤에 벼슬이 중추부사에 이르렀다.
○表沿沫字少游。號藍溪。新昌人。成廟壬辰。登第。有文名。受業先生。所與交遊。皆一時名士。嘗爲翰林。同僚宴飮。設牛肉。爲上所知。例罷。自後見禁肉。輒去之曰。不忍更犯法也。服喪盡禮。事聞。命加一資。後官至中樞府事。
*안우(安遇)의 자는 시숙(時叔)인데, 효행(孝行)이 있어 거상(居喪)할 적에 일체 《가례(家禮)》를 준행하였다. 노공서(盧公緖)와 함께 선생의 문하에 유학하였는데, 사환(仕宦)에 뜻이 없었고 절조(節操)는 동한(東漢) 시대 고사(高士)들에 견줄 만하였다. 호는 노계(蘆溪)이다. 뒤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안음 현감(安陰縣監)에 임명되었다가, 기묘년에 운봉(雲峯)에 유배되었다.
○安遇字時叔。有孝行。居喪一遵家禮。與盧公緖。同遊學先生之門。無意仕宦。節操可方東漢。號蘆溪。後以遺逸。拜安陰縣監。己卯。謫雲峯。
*허반(許磐)의 자는 문병(文炳)인데 양천인(陽川人)이다. 계묘년에 진사가 되었고, 음보(蔭補)로 사직 참봉이 되었다. 《추강집》에 이르기를,
“허반은 성리학(性理學)에 뜻을 두어 벼슬하는 데에 생각이 없었고 일마다 옛사람의 인품을 흠모하고자 하였으므로, 대유(大猷)가 그의 단아(端雅)함에 감복했다.”
고 하였다. 일찍이 좌상(左相) 홍응(洪應)에게 말하기를,
“세자(世子)는 나라의 저군(儲君)으로서 만성(萬姓)이 우러러 의뢰하는 바인데, 지금 환시(宦寺)들과 함께 거처하니 옳지 않다. ……”
고 하였다. 무오년에 등제하여 권지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는데, 마침내 사화(史禍)에 연좌되어 죽었다.
○許磐字文炳。陽川人。癸卯。進士。蔭補調社稷參奉。秋江集。磐。志於性理之學。恬於進取。欲事事慕古。大猷服其端雅。嘗語左相洪應曰。世子。國之儲君。萬姓所仰賴。今與䆠寺居處。不可云云。戊午。登第。權知承文院副正字。遂坐史禍死。
*유순정(柳順汀)의 자는 지옹(智翁)인데 진양인(晉陽人)이다. 청천군(菁川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柳順汀字智翁。晉陽人。菁川君。謚文貞公。
*정세린(鄭世麟)의 자는 창부(昌符)이다. 그는 학문이 공서(公緖)와 같았고 시재(詩才)가 매우 높았으므로, 선생이 그를 공경히 대하였다. 병오년에 죽었는데 나이 22세였다.
○鄭世麟字昌符。其學同於公緖。而詩才甚高。先生敬之。丙午歿。年二十二。
*우선언(禹善言)의 자는 덕부(德夫)이고 호는 풍애(楓崖)인데, 단성군(丹城君) 공(貢)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뜻이 크고 기개가 있었으므로, 선생이 그의 자를 자용(子容)이라고 지어주었다.
○禹善言字德夫。號楓崖。丹城君貢之子。爲人倜儻。先生字之曰子容。
*신영희(辛永禧)의 자는 덕우(德優)이고, 영산인(靈山人)으로 재상 석조(碩祖)의 손자이다. 그는 기개가 있어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았고, 뜻이 크고 대절(大節)이 많았으며, 과명(科名)을 좋아하지 않았다. 계묘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 후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성 참의(成參議)는 그의 시를 가리켜 소동파(蘇東坡), 황산곡(黃山谷)의 경지에 드나든다고 여기었다.
○辛永禧字德優。靈山人。宰相碩祖之孫。倜儻不覊。磊磊多大節。不喜科名。癸卯。中進士。自後不應擧。成參議以其詩爲出入蘇,黃。
*손효조(孫孝祖)의 자는 무첨(無忝)인데, 생원시에 합격하고 태학(太學)에 유학하면서, 김연숙(金鍊叔) 등 제인(諸人)과 함께 주 문공(朱文公)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향약(鄕約)을 만들고 《소학(小學)》을 강론하였다.
○孫孝祖字無忝。中生員。遊太學。與金鍊叔諸人。依朱文公故事。作鄕約。講論小學。
*김기손(金驥孫)의 자는 백운(伯雲)이다.
○金驥孫字伯雲
*강혼(姜渾)의 자는 사호(士浩)이고 호는 목계자(木溪子)인데, 문명(文名)이 탁영(濯纓)에 버금갔다. 중종 때에 벼슬이 판중추(判中樞)에 이르렀다.
○姜渾字士浩。號木溪子。文名亞於濯纓。中廟朝。官至判中樞。
*주윤창(周允昌)의 자는 □□이고, 상주인(尙州人)인데,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유학하였다.
○周允昌字▣▣。尙州人。與金宏弼同遊學。
*방유녕(方有寧)의 자는 태화(太和)인데, 벼슬이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다.
○方有寧字太和。官至兵判。
*양준(楊浚)의 자는 징원(澄源)인데, 마음이 침착하고 큰 도량이 있었으며, 곤궁함을 잘 견디고 도(道)를 즐기면서 담박하게 지냈다. 아우인 침(沈)과 함께 유학하였다.
○楊浚字澄源。深沉有大度。安貧樂道。淡如也。與弟沈同遊學。
[출처] 佔畢齋先生 門人錄 발췌: 장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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