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
지은 죄가 많아, 흠뻑 비를 맞고 봉은사에 갔더니
내 몸에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손등에는 채송화가
무릎에는 제비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더니
야윈 내 젖가슴에는 장미가 피어나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에 가시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토록 가시 많는 나무에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고 생각하라고
장미는 꽃에서 향기가 나는 게 아니라
가시에서 향기가 나는 것이라고
가장 날카로운 가시에서 가장 멀리 가는 향기가 난다고
장미는 시들지도 않고 자꾸자꾸 피어나
나는 봉은사 대웅전 처마 밑에 앉아
평생토록 내 가슴에 피눈물을 흘리게 한
가시를 힘껏 뽑아내려고 하다가
스며시 그만두었다
선인장은 굵은 가시에 꽃을 피운다
내가 쓴 동화 중에〈선인장 이야기〉가 있다. 이 동화는 아들 선인장이 아버지 선인장의 충고들 듣지 않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이야기다.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이렇다.
아들 선인장은 사막에서 태어난 자신을 미워한다, 아름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가시투성이인 자신이 싫기도 하지만 마냥 내려 쪼이기만한 하는 뜨거운 햇빛이 너무 싫었다. 무엇보다도 목이 말라 견딜 수 없었다. 밤이 되어 햇빛이 사그라들어도 목마름은 여전했다.
"아들아, 네가 사막을 아름답게 할 수 있단다, 좀 참아라, 가시에도 꽃이 핀단다."아버지가 그런 말을 해도 그는 어떻게 하면 태양을 사라지게 하고 시원한 물을 마음껏 먹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갈증을 견디기 힘들면 힘들수록 아버지와 사막을 원망하는 마음만 더 커졌다.
그러던 어느날, 사막에 기다리던 비가 퍼붓기 시작한다. 아들 선인장은 뛸 듯이 기뻐하면서 마음껏 물을 먹는다. 더 이상 목마름의 고통에서 시달리지 않도록 온 몸을 빗물로 가득 채운다. 그때 아버지 선인장이 아들 선인장에게 말한다
"아들아 그렇게 한꺼번에 배불리 먹지 말아라, 아무리 목이 말라도 욕심내지 말고 적당히 알맞게 먹어라, 그렇지 않으면 목숨을 잃게 된다. 아들은 아버지의 진정 어린 충고를 듣지 않았다. 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고 온몸을 빗물로 가득 채운다. 그때 비가 그치고 바람이 분다. 아들 선인장은 제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뿌리째 쓰러져 사막을 나는 배고픈 새들의 먹이가 되고 만다.
언젠가 사막에 관련된 책을 읽다가 선인장들이 비가 오면 빗물을 너무 많이 들이켜 끝내는 제 몸무게을 이기지 못하고 쓸어져 새나 짐승들의 먹이가 된다는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가슴속에 오랫동안 품었다가 이런 동화를 쓰게 되었따. 과욕은 목숨까지도 잃게 한다는 삶의 교훈이 담긴 동화라고 할 수 있다.
선인장을 볼 때마다 놀랍게 생각되는 것은 물도 제대로 주지 않는데 어떻게 가시 끝에 꽃을 피우느냐 하는 것이다 동화에서 아들 선인장이 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 결국 죽게 되듯이 인간이 화분에서 키우는 선인장도 물을 많이 주면 결국 썩어 죽게 된다.
"물을 안 줘도 안 되지만 너무 많이 주면 안 됩니다.그러면 뿌리가 썩어 죽습니다."
내가 선이장을 살 때 꽃집 주인은 그렇게 당부했다. 그 말은 아버지 선인장이 아들 선인장에게 충고한 말과 같다.사막에서 사는 아들 선인장은 스스로 과욕을 부려 죽지만 인간이 재배하는 선인장은 인간의 과욕으로 인해 죽는다. 과정과 원인은 다르지만 결국 선인장은 물을 많이 먹으면 죽는다. 선인장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목이 말라도 물을 많이 먹지 않아다. 그것은 자족을 통해서만 생명을 지킬 수 있고 존재의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는 의마를 던진다.
부 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가장 큰 부자는 자족하는 이라고 말씀하셨다. 자족함으로써 진정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족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겨울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연이 더 높이 날아오기를 원하다가 강한 바람에 연줄이 끊어져버리면 그대로 땅바닥으로 추락하고 만다.
나는 어릴 때 겨울이면 직접 방패연이나 꼬리연을 만들어 연싸움을 자주 했다. 사금파리 가루를 넣어 쑨 풀을 연줄에 발라 상대방 연줄을 끊어버렸다. 연줄이 끊어진 연은 힘없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만다. 기세당당하게 하늘 높이 날아오르던 방패연이 한순간에 곤두박질치는 모습은 참으로 초라하다.
행여 나는 지금 인생이라는 연으로 자족하지 못하고 계속 날아오르기만을 원하다가 연줄이 끊어져 곤두박질 치고 있는지는 않은지 제대로 살펴보아야 한다. 방패연이 아름다울 때는 하늘을 날고 있을 때이지 땅바닥으로 추락할 때가 아니다. 따라서 나라는 방패연 또한 더 높이 나는 것보다 강한 바람을 견딜 수 있는 자족의 깊이가 중요하다. 선인장 또한 타는 목마름을 자족하는 데에 존재의 주요성이 있다.
그리고 선인장이 아름다운 것은 가시 때문이 아니라 가시에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그것도 가장 굵고 긴 가시에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선인장은 잎이 없고 가시가 바로 잎이다,가능한 한 수분의 증발을 막기 위해 잎을 가시로 만들었다. 수분 소모를 줄이고 잎이 가시가 되기까지 선인장은 그 얼마나 힘들었을까, 더구나 어떤 선인장은 10년 만에 꽃을 피우기도 한다니 참을 긴 인고의 세월이 아닐 수 없다.
선인장 꽃은 향기 또한 춘란 못지않다. 화려하지도 요란하지도 않다. 있는 듯 없는 듯 은근하고 그윽하다. 그것은 바로 인고의 가시를 헤치고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만일 가시라는 고통을 통과하지 않았다면 향기 또한 짙고 다채롭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가 선인장을 선인장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꽃이 고통과 절망의 가시를 승화시킨 인고의 꽃이고, 그 향기 또한 인고의 향이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내 삶이 온통 고통의 가시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서, 그 가시가 실패와 절망의 가시로 다시 돋아난다고 해서 크게 원망하지 않는다. 나도 선인장처럼 가시에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인생이 좀 느긋해지고 편안해진다. 가시가 되는 과정이 없다면 선인장이 결코 꽃을 피우지 못하듯이 내 인생이라는 사막에서 자라는 선인장도 반드시 가시가 있어야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
만일 선인장이 늘 비가 알맞게 오는 사막을 원한다면, 늘 맑고 따스한 햇살이 어른거리는 봄과 같은 사막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스스로 존재 가치를 잃게 된다 모든 꽃은 아침에 아름답게 피어나기를 위하여 고통스러운 밤을 참고 견딘다, 신영복[申榮福] 선생께서는 "나무의 나이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겨울에 자란 부분일수록 여름에 자란 부분보다 월씬 단단하다는 사실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인생의 목표의 달성과 완성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준비하며 살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누가 인생을 완성하고 떠났을까.인생을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떠났을 뿐이며, 과정 그 자체가 바로 완성이다.
- 정 호 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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