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주하던 장례식장에는 갑자기 어디선가 팡파르가 울려 펴졌다.
정부의 요인이 연설 대에 오르거나 연예인이 무대에 오를 때 울리는 그 음악이다.
음악에 맞춘 듯이 입구에 나타 난 문상객은 검은 양복에 검은 셔츠와 검은 넥타이 검은 구두를 신은 오칠닥이다. 그는 양쪽에 그 보다는 젊어 보이는 여성 한 사람과 사내 한 사람을 대동 하고는 죽은 오칠닥을 문상 온 것이다.
오칠닥 일행은 죽은 오칠닥의 영정 앞에 나란히 섰다.
칠닥이가 한 발 나서서 향로에 향을 꽂고는 잠시 묵념이 이어지고 음, 하는 신호에 따라 일행은 죽은 오칠닥을 향해 두 번 절을 하였다. 그리고는 상주 일행과 맞절은 한다. 고개를 든 칠닥이가 상주 강하를 넌지시 건너 보면서 입을 뗀다.
“강하가 상주로서 고생 하는구나.”
“아뇨, 당연히 치러야 할 행사이고 묵묵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강하는 의연한 표정과 정감 어린 눈으로 칠닥에게 차분한 어조로 대답을 한다.
“그래, 아빠가 돌아가시니 슬프더냐?”
“슬프다가 보다는 장례식이 진행 되는 내내 돌아가신 아빠를 이해하러 애쓰고 있습니다. 생전에 그분께서 뭔가는 저에게 많은 말씀을 해 주시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만, 별로 들어본 적이 없군요. 방문하시는 문상객 일련을 대하면서 또는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면서 무슨 말씀이신지 해 주실 말씀이 참 많으셨을 거라는 이상한 직감 같은 걸 느끼게 돼지요.”
“그래, 그 말씀들은 네가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듣게 될 것이다. 네가 무엇을 지향하고자 할 때 그 무엇이 아빠의 말씀으로 생각하면 되지 싶구나.”
“네, 아버지. 어디 자리 잡으시고 요기 좀 하시지요.”
“그래, 문상객 대부분이 낮 익은 사람들이구나. 저들과 인사를 나누고 나서 너와는 따로 시간을 가지자꾸나.”
강하는 칠닥이와 동행한 일행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호림이 삼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 이시군요. 전혀 연세가 들어 보이지 않아요. 그리고 이 선생님이시죠? 돌아가신 아빠가 변산에 살 때 선생님 이야기를 해 주신 적이 있지요 반갑습니다!”
“그래요, 강하군을 만나서 반가워요! 장례식장에서 반갑다는 표현이 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해도 어쨌거나 잘 만난 거예요.”
오칠닥의 일행이 조문을 마치고 식당으로 내려서자 장내에는 그렇게 요란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힘차게 결혼 행진곡 음악이 울려 퍼지고 연회석의 사람들이 일제히 그들을 바라보며 역시 요란스럽지 않는 환영의 박수를 한참동안이나 쳐 주었다.
칠닥이는 연회장 상석에 계시는 어머니 봉순이에게 절을 하고는 안부를 묻는다. 그리고는 그의 형 개동이와도 악수를 나누고 그의 형제를 두루 살피고는 이 손님 저손님과 인사를 하며 죽은 자신의 장례에 참석해준 감사를 표한다.
천천히 장내를 도는 동안은 호림이와 이선생이 마치 요인을 경호 하듯이 간발의 간격을 두고 칠닥이와 동행하면서 그들 역시도 문상객들에게 목례를 하고는 하는 것이다.
유세현장을 방문한 정치인처럼 방문객을 한 바퀴 돈 칠닥이는 소복을 입고 계시는 어머니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고 호림이와 이선생도 옆 자리를 잡고는 상을 받는다.
“엄마는 별 일 없니 껴?”
“내야 별일이 있을 게 뭐 있나, 니는 좀 어떤노?”
“내가 그동안 뭘 해도 되는 게 없었잔니껴. 같이 온 저기 호림이나 이선생이나 어울리면서 그저 물 흐르듯이 팔자대로 살라니더. 돈 많이 벌어야 잘 사는 게 아이라 지 좋아하는 짓거리 하면서 사는 게 잘 사는 게 아일리껴?”
“맞다. 니 어릴 때는 하도 알뜰해싸, 니가 돈 젤로 많이 벌고 부자 되면서 산다꼬 했는데 나는 니 생각만 하면 많은 자식들 중에서도 안타깝기만 하다.”
“그라이께 생각나네. 우리가 양철지붕 집에 살 때, 좋은 장닭 한 마리 산다꼬 돈 육백원을 꼬깃꼬깃 몇 달째 가지고 댕기께는 형이나 금자누나가 그랬지요. 하이고 내 같으면 벌써 써 버릴건데 자는 참말로 대단테이~ 근데, 돈은 금자누나가 벌었어요. 이~ 그 게 인생이고 팔자 아이껴? 사람이 운명 앞에서 할 수 있는 게 뭐, 별로 없다고 보니더. 그런데도 잘 된 놈들 지가 노력해서 잘 됐다고 하고 못 된 놈은 운명이다 그러는 갑디더. 그러고 보면 잘 못 된 놈이 운명의 입장에서 본다면 더 겸손한 놈이다 할 수 있제요.”
“호림이라는 이는 니가 변산에 갈 때 같이 간 사람이 아이라?”
“변산에 가서 같이 살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농사들 짓는다고들 줄곧 어울리기를 했제요. 나는 변산에, 저 친구는 울진에가서는 농사일을 했었는데, 서로가 끝까지 그 일을 못하고는 떠났지요. 내가 서울서 버스운전 일을 할 때 저 사람은 집 짓는 일을 하고 다녔니더. 그러다가 이선생과 연결이 된 제가 저 친구를 부르게 된 거지요.”
“이선생이라는 저 여자는 뭐 하는 사람이로?”
“음, 혁명가라 할 수 있지요. 하하하 혁명가, 맞네요! 혁명가!”
칠닥이가 죽은 자신의 장례식에 참석하자 내려 앉아 있던 식장의 분위기는 활기에 넘쳤고 죽은 칠닥이와 인연이 있어서 찾아 온 문상객들은 이 사람 저사람 앞을 다투어 칠닥이와 인사를 건네고 안부를 묻고 대화를 나누고자 하여 다소 소란스럽기까지 하였다.
북적거리는 군중들 머리 위로 아련한 영상을 칠닥이가 발견하기로는 소란이 좀 가려 앉은 때이다. 희미하면서 뚜렷하기도 한 안개와 같은 여운에 갇혀 있으면서도 생생한 영상을 발견한 칠닥이 눈동자가 크고 밝게 빛이 났다.
“아, 무현이 형님! 형님이 우에 여기를 다 오셨니껴? 하이고~ 내사 형님을 어예 모셔야 할지 모르겠니더.”
영상은 잔잔하고 흐뭇한 미소가 흐르며 동굴 속에서 울리는 그런 음성이 흘렀다.
“모시기는, 뭘 모실라꼬 합니꺼. 이자 동새이 나를 기억하고자, 하이 나 또한 동새이나 나를 조문해 주신 500만 국민이 그리워 이래 나타나게 되는기 아이겠습니꺼. 나는 내 것이 아이라 그리워지는 모든 분들의 공동소유물 아이겠습니까. 허 허 허 ”
무현이 형님은 칠닥이가 어린 시절에 너무 닮고 싶었던 사람이다. 형님이 칠닥이 보다야 열한 살이나 많은 46년 생 개띠이니, 57년 닭띠인 칠닥이가 오칠닥이면 무현이 형님은 사륙개인가? 하 하 하.
예천상회 오부자는 홍정골 봉순이를 얻어 사 십줄 느즈막에 본 아들이 개동이지만 풍기 장터에 오부자 나이 때의 남정네들은 그 자식들이 이미 장성해 있는 것이다.
예천상회 바로 아랫집인 서울상회만 해도 아들이 장성해서 객지에 나가 공부하고 있고 그 아래 자전포의 우복이네도 큰형인 우철이는 아버지 대신에 자전거를 수리해서 손님을 상대할 정도로 청년이 되어 있으며 풍기극장과 담을 같이 하는 솥전집 큰아들은 칠닥이와 동갑인 그 집 막내 익준이와는 열아홉 살이나 차이가 나 있었다. 중앙시장 시장안 옹기집 인수형님이나 그 밑에 국수공장 조정섭네의 큰 아들은 벌써 머리가 훤히 벗겨지고 있는 상태이다.
덕기네 아버지 전장장로의 큰 딸은 양과점을 내고 있었는데 덕기의 손에 이끌려 서양식 탁자가 줄비한 양과점으로 들어서면 어린 칠닥이가 입안이 시어지고 얼굴 달아오르는 것은 그 누나가 무릎 위로 깡총한 짧은 치마에 뽀얀 다리를 훤히 드러내고는 맞이해 주고 하였기 때문이다. 누나가 허리를 굽혀서는 탁자라도 닦을라치면 그 치마속이로 얼핏 보이는 색깔 연한 팬티가 살짝 보여 잠시 넋을 잃었던 것이 어린 칠닥이의 추억이다. 그 누나 또래가 오부자의 본처 김씨의 둘째 딸이고 칠닥이의 배 다른 누나인 미자이다.
이렇게 칠닥이의 형인 개동이 또래의 또 몇 살 상위에 그런 형들이 있었고 그런 또래 중에는 무현이형님이 인상 강하게 아직도 칠닥이의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이다.
과보호 속에만 커갔던 개동이가 학교에 입학하고부터는 적응을 못했다. 학교에 보내 놓으면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소외 되어 급기야는 공부시간에도 성내교회 계단에 앉아 있다가는 돌아오고는 하였다. 그러는 개동이에게 오부자는 집에다 개인교사를 붙였다.
개동이의 개인교사가 무현이 형이었다.
무현이형은 상업고등학교에 다니는 고등학생이었다. 오부자 생각으로는 무현이 같으면 훌륭한 선생이 될 거라는 것이다. 개동이가 공부뿐 아니라 행실도 무현이를 닮아 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무현이는 이제 갓 고등학생일 뿐이지만 그 기품이 나이든 자신이 보기에도 부러울 정도이다. 말하는 품세도 조용하고 빠르지 않지만 어른스럽기가 여간하지 않다. 개동이가 공부 않겠다고 도망가면 무현이는 성큼 다가가서는 개동이를 보따리 안듯이 말아 안고는 마주하는 큰 밥상 앞에 턱하니 앉히고는 하였다. 그러는 믿음직한 모습을 지긋히 바라다보는 오부자는 흐뭇한 미소를 흘리고 있는 것이다.
어린 칠닥이도 무현이형이 제 형을 가르치자고 집에 오면 왠지 좋기만 했다. 그 형은 그 또래 형들 중에서도 대장처럼 우아함이 서려 있다는 것이 뭔지 잘 모르는 어린 것의 정서이었다.
무현이는 어릴 때 별명이 작고 단단하다는 뜻의 돌콩이나 노천재로 불리었다.
머리도 좋았지만 웅변력이 뛰어나서 그를 아끼던 선생님의 권유로 중학교 때는 당당히 학생회장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는 부정한 방법으로 붓글씨대회에서 1등을 한 교사 자제의 행위를 용서 못하고 자신의 2등상을 반납하기도 하였다. 무현이가 중학교 1학년일 때 학교에서는 독재자 이승만을 대상으로 하는 “우리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글제를 주어 작문을 하게 하였는데 무현은 학우들을 선동하여 백지동맹사건을 일으키기도 한다.
한 번은 극장 앞에 형들이 몰려 있었다.
무현이 또래의 청년들이 모여서 짐바리자전거 들어 올리는 시합을 하고 있다. 또래 중에는 술도가에서 배달하는 이도 있었는데 그이가 그 짐바리자전거를 중앙에 떡하니 세워두고는 청년들이 하나씩 나와서는 한 손으로 들어 올려서 어깨 위로 뻗는 시합이다. 술도가의 짐자전거는 일반 짐바리 자전거보다도 더 크고 무거운 것이다. 짐칸의 사귀에 쇠고리를 달아 술통을 걸게 되어 있으며 짐칸에도 테두리를 만들어 술통을 얹도록 만들어서 무게가 만만치 않다. 한 번 넘어지면 자전거를 세우는 것조차 어른이라 하더라도 힘겨울 일이고 배달꾼들도 일단 술을 실으면 곧바로 자전거에 올라 비빌 수가 있는 게 아니라 받침대에서 자전거를 밀어 내면 왼손으로는 자전거 핸들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중심을 잡기 위하여 짐칸의 술통을 부여잡고는 한 발 두발 앞으로 민다. 그러면 자전거에 탄력이 생기게 되고 그 탄력에 휙 하니 안장에 올라 페달을 첨에는 반 바퀴씩 까닥까닥 밟아서 탄력을 더 주어 일단 안정을 취한다. 자전거가 그제야 가겠다는 느낌을 받으면 반바지 힘살 솟은 종아리에 푸르름한 동맥이 불끈 불거지도록 페달을 밟아 술 배달에 나서는 것이다.
서기2009년 5월 23일 경남 김해의 봉하마을에 부엉이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졌다.
대한민국 제 16대 대통령 노무현이었다.
2007년 12월 19일은 제17대 대통령 선거일이다.
여권에서는 방송국앵커출신 정동영이 후보로 나서고 야권의 한나라당에서는 강력한 당선 후보인 이명박, 민주노동당에서는 역시 권영길이 나섰고 이인제도 출마를 했다. 이회창은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를 감행한다. 17대 대선에서 특이한 인물은 문국현이다.
문국현은 유한커벌리회사의 사장을 지냈으며 시민운동에도 투신한 바로 타 후보에 비해 상대적으로 참신함으로 부각되었다. 정동영측에서는 자신과의 단일화를 구원했지만 문국현은 이미 정동영의 당선 불가를 계산하고 대선에서 완주를 하지만 득표율은 5.8%에 불과하다. 이명박은 48.1%로 당선되므로 국민들은 보수 세력을 선택을 한 것이다.
17대 대통령은 재벌기업가 출신 이명박이 되었다.
이명박이 집권하자마자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협상에 반대하는 학생과 시민들의 촛불시위가 거세어 가는 시간에 경남의 봉하마을에는 하루에도 수만의 군중들이 노무현을 찾았다.
국민들은 진한 인간미가 넘치는,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 노무현에 환호를 보냈고 대통령도 행복해 했다.
그러나 오래 가지는 않았다.
1575년생 조선의 15대 임금, 광해군.
중국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명나라에 전쟁이 일자 조정대신은 군사를 파견하여 명을 도와서 금을 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전하! 기마 오백 두에 궁수 삼천에 기병 일천을 포함한 군사 이만을 파병함이 옳은 줄 아뢰오!”
“아니, 그만한 병사를 작출 하자면 우리의 국방이 염려되지 않겠소?”
반대파에서 한 마디 건네자 발끈하여 큰소리로 훈시하듯이 일갈을 한다.
“이 나라가 누구 덕에 종묘사직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명이 있어야 조선이 있는 것! 오랑캐에 짓밟히는 한이 있어도 사대의 예를 다하는 것이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이라 사료됩니다. 윤허하여 주소서~”
“경의 뜻대로 하시오.”
“다음은 태황태후께 받칠 품목이옵니다. 궁녀 사십, 채단..”
“적당히 하시오! 적당히들. 대체,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요. 뭐라? 이 땅이 오랑캐에 짓밟혀도 상관 없다고? 그렇게 명 황제가 좋으면 이 나라를 통째로 갖다 바치시오! 그깟 사대의 명분이 뭐 길래, 이만의 병사를 사지로 내몰란 말이요. 임금이라면, 백성이 지아비라 부르는 왕이라면 빼앗고 훔치고 빌어먹을지언정 내 그들을 살려야겠소! 그대들이 죽고 못 사는 사대의 예보다 내 나라 내백성이 열 갑절 백 갑절은 더 소중하오. 부끄러운 줄 아시오!”
1923년, 서인 김류, 김자겸, 이귀, 이괄, 심기원등은 명나라와 후금사이에 실리외교를 펼치는 광해군에 반대하여 반정을 일으킨다. 이른바 인조반정이다.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되고 광해군정권의 인물들은 철저하게 압살 당한다.
1946년생, 16대 대통령 노무현.
2006년 평화통일 자문회의에서 노무현은 미국으로부터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에 관한 연설을 하게 된다.
“작통권 회수하면 안 된다고 줄줄이 몰려가서 성명을 내고 그럽니다. 작통권 돌려받으면 한국 사람들 잘해요. 경제도 잘하고 문화도 잘 하고 영화도 만들고 배도 잘 만들고 차도 만들고 전화기도 잘 들고요. 외국에 나가 보니까 못 하는 게 없는데, 왜 작전통제권만 못한다 말입니까. 미국하고 외교가 있으면 중국하고도 북한하고도 외교가 있는 겁니다.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는 자주국가의 안보의식이 있어야 미국과 대등한 외교를 할 수 있는 것이지 언제까지 미국의 바짓가랑이 잡고 엉덩이 뒤에 숨어서 형님, 형님하면서 매달려서야 독립국가로서 최소한 체면유지하고 심리적 의존관계를 해소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외교상 실리에 매우 중요한 문제이지요. 대한민국 군대들 지금까지 뭐 했나 말이요. 북한보다도 국방비를 열 배나 넘게 근 이십 년 썼는데, 그 많은 돈을 쓰고도 아직도 북한보다 약하다면 옛날에 국방장관들 직무유기한 거 아닙니까?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이명박의 청와대에서는 시비를 걸어 왔고 얼마 후 검찰이 나서기 시작하였다.
2009년 4월 30일 검찰은 노무현을 뇌물수수혐의로 소환했고 언론은 그 모습을 대대적으로 중계하였다.
노무현을 조사하는 담당검사는 중앙수사장 이인규와 1과장 우병우가 맡았다.
이인규는 당시 대통령 이명박과는 이미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인물이었다. 검찰총장인 임채진을 배제하고 청와대와 직접 의견을 조율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우병우는 경북봉화 출생으로 영주고등학교를 거쳐 서울 법대를 졸업했으며 박근혜 정권 때는 청와대 민정비서관에 임명 된다. 동료검찰 조차도 그들에게 힘없는 노무현만 족치는 망나니라 불렀다. 검찰은 지속적으로 노무현의 측근을 압박해 오고 있었다. 국세청도 노무현 후원자인 박연차회장의 태광실업을 비롯하여 제주도에서 골프장을 경영하는 지인을, 심지어는 노무현의 허리 수술을 해 준 병원과 그가 즐겨하던 삼계탕을 파는 식당에까지 세무의 칼날을 들이댔다. 최측근 안희정, 이광재, 정상문의 조사는 물론이고 영부인 권양숙여사에게도 검찰 출두를 예고하고 있었다.
증거를 제시하라고 외치는 노무현에게 검찰은 포괄적 뇌물죄라는 희한한 논리로 불충분한 증거로 언론 플레이를 즐기고 있었다.
노무현을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 봉하마을 홈페이지 사람사는세상에 자신을 버리라고 호소하였다.
망나니들은 서울 대검찰청에 봉하의 노무현을 불러 톡톡히 망신을 주고도 그의 구속여부를 결정치 않고 시간 끌기를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님의 심정을 이해 한다는 뜻에서
제 이야기를 잠시 하겠습니다.
99년도 당시에도 무일푼인 제가 귀농을 결행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곳의 영농조합에 농산물 차량을 운전 하면서 실무를 맡기로 해 얼마의 소득이 보장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귀농 채 한 달 만에 음주운전으로 적발되어 면허가 취소되고 소득의 보장은 사라졌습니다.
분명한 저의 잘못 입니다만, 형사적인 처벌보다도 더 큰 현실적인 죄 값은 참으로 가혹 했습니다. 그 길로 대책 없는 낭떠러지로 몰려서 결국은 오 년을 더 버티지 못하고 빛을 진 채로 귀농을 접어야 했습니다. 농사를 정리 하는 과정에서도 돈이 들었습니다.
도시로 회귀 하였습니다.
과거의 경력을 삼아서 시내버스회사에 취업의 문을 두드렸지만, 음주운전 경력에다 이혼남이라는 이유로 아무 곳도 저를 써 주는 곳이 없었습니다.
딱, “이혼 하고는 매일 술이나 쳐 먹다 신용까지...” 이런 인상에서 변명할 여지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나는 쟝발잔이었습니다.
도시에서 여러 일, 바닥을 기면서도 상대적으로 취업이 쉬운 마을버스를 거쳐서 시내버스회사 문을 다시 두드리기를 수 년 만에 한 회사에 취업이 결정 되었습니다.
저는 너무 좋아 했습니다. 여기 봉하마을 홈페이지에도 정규직 진입이라 했던 것이 그 말이었고, 제 주위 사람도 부러워하면서 축하해 주었습니다.
소득의 상승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방치해야할 두 아이의 학비가 보장 된 것이 무엇보다도 다행한 일이 된 것입니다.
버스회사에서 2주간의 견습을 하고 운전 실습 3일 째, 저는 사고를 내고 말았습니다.
차고지에서 주차를 하면서 뒤 주차차량을 접촉한 크지도 작지도 않는 사고입니다.
의외로 매우 격노한 회장님의 질책에 아무도 손을 쓸 엄두도 못 내고 그대로 잘렸습니다.
99년도 음주사건 이후 꼭 10년 만에 터진 불행입니다.
분명하고도 틀림없는 제 잘못입니다.
10년 전과 같이 앞으로 얼마나 제 인생이 험난해야 할 지, 그에 따르는 두 아이의 장래에 몸서리치는 두려움이 사무칩니다.
도시 주택가의 옥탑 방에 대책 없이 갇힌 지 사나흘 되었습니다.
이대로 딱 죽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분명하고 틀림없는 잘못이긴 하여도 어째, 그 죄 값이 이토록 즉각적이고 매정하고 냉정한 처벌이 내려져야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햇볕이 쨍한 옥상을 어슬렁거리며 대통령님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대통령님!
저는 어쨌거나 살아 보렵니다.
실제의 심정으로는 그냥 죽는 게 더 편하겠습니다.
10년의 죄 값에, 수년의 염원이 한순간에 물거품 되고 말았지만 아이들이 공부를 하고 있으니 여러 방도로 또 문을 두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은 대통령님의 일신을 해명하거나 변명하는 곳이 아니라고 봅니다.
못다 이룬 민주주의를 완성하고 특히나 친환경 동호회는 우리 농업 발전에 일조를 해야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이 차곡차곡 쌓여 가자면 최근의 일련의 사태는 점으로 남거나 과정 중에 하나로 기록될 뿐일 것입니다.
저는 십년 전에도 그랬듯이
요 번의 황당하고도 당혹스러운 제 잘못을 의연하게 감수 하겠습니다.
대통령님도 그렇게 하실 거지요?
칠닥은 사람사는세상 홈페이지에 장문의 글을 올린다. 대통령께서 읽어 주셨으면 하였다.
노무현은 서거 나흘 전에 이렇게 마지막 육성을 남겼다.
“내가 알고 모르고 이런 수준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어. 나는 봉화산 같은 존재야 산맥이 없어. 딱 홀로 서 있는 돌출돼 있는 산이야. 여기서 새로운 삶의 목표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내가 돌아온 곳은 이곳을 떠나기 전의 삶보다 더 고달픈 삶으로 돌아와 버렸어. ‘이제 해방 되는구나’ 하고 돌아왔는데, 새로운 일을 좀 해 본다는 것이었는데... 내가 옛날 여기 살 때 최대 관심사가 먹고 사는 것이었어. 마지막에 돌아 와서도 지금 딱 부닥쳐 보니까 먹고 사는데 급급했던 한 사람, 그 수준으로 돌아와 버린 것 같아. 어릴 땐 끊임없이 희망이 있었지만 지금은 희망이 없어져 버렸어. 이미 전세가 기울어버린 전장에서 마지막 옥쇄하겠다는... 싸움터에서 빨리 빠져 나가야돼 도망가야 돼. 사람들은 여길 떠나서 다른 성채를 구축해야 돼... 정치라는 것이 싸움일 수밖에 없지만 시민이 싸움에 휘말리면 정치의 하위세력이 될 수밖에 없어. 시민은 중심추거든. 시민이할 수 있는 것은 더 좋은 놈 선택하는 것이고 덜 나쁜 놈 선택하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쟤가 어떤 정책을 할 것이냐’가 제일 중요해. 그렇게 보고 고심을 해야 되는데... 제일 절박한 것이 밥그릇이 없어지는 것이거든. 그럴 절박한 상황이 아니면 이것저것 해 볼 수... 혼자 버틸 수 있으면 버티고... 조직의 전망이 없으면 개인의 전망도 없는 것이거든. 일의 전망 이것을 놓고... 담배 하나 주게. 담배 한 개 주게. 이정도 합시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류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다.”
# 대통령님의 명복을 빕니다.
대통령님,
왜 그러셨습니까.
전과 수범인 자가 대통령직에 있고, 쿠데타 수괴도 살아 있다고 하잖습니까?
정권의 개에게 물린 상처가 그토록 깊었을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머잖아,
대통령님께서 기운을 차리시어 봉하마을에 농사를 지휘할 거라는 생각만 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에서 농업, 농촌을 살릴 가장 영향력 있으신 분으로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작년 이맘때 귀향하신 대통령께서의 환경농업 계획이 알려질 때 함께하고 싶어서 대통령님께 이력서를 보내기도 했었습니다.
그렇게 돼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멀리서 봉하마을이 발전하는 농업농촌의 모델로 변해가는 모습에 그윽이 행복하였고 기대감에 마음이 설렜습니다.
며칠 전에는 그런 심정으로 대통령님을 존경하고 찬양하는 글을 올렸다가는 진부한 것 같아서 지워 버렸는데 그냥 둘 걸 그랬습니다.
이제, 그런 행복감과 기대치를 접어야 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당신께서 떠나신 것을 인정해야겠군요.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노무현 대통령님의 명복을 빕니다.
바람이 불면 당신 줄 알겠습니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