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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상담의 요소와 성경적 자원에 대한 목회상담적 적용 연구
Ⅰ. 서론
‘상담’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소정의 상담과정의 공부를 거쳐서 자격증을 취득한 상담전문가에 의해 이루어지는 전문적인 영역으로서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의 사람을 직 간접적으로 도와주는 활동’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상담에 대하여 전문적인 지식이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목회자라 하더라도 상담 영역에 대하여 기피하는 실정이다. 본인 역시 목회상담학 과목을 접하기 전에는 일반 목회자와는 다소 무관한 영역으로 인식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목회상담학을 통하여 오히려 상담학을 독점, 점유하는 인상을 주는 상담심리학과 상담이론과 별개로 목회상담이 고유한 영역으로 사역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즉, 목회적 상담은 오히려 그런 일반 상담에서 요구하는 심리학과 상담 기법을 뛰어넘는 고유한 권한과 권위와 능력이 부여되어 있다. 그것은 목회적 상담이 인위적인 기술과 지식에 의한 인간 관계의 영역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맡겨주신 사명이요,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바탕이 된, 성경적 자원을 가지고, 목회자와 목회적 열정을 지닌 사람을 사용하는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에서는 상담의 진정한 주체되신 성령의 사역을 중심으로, 성령께서 조성해주신 목회상담적 만남과 관계의 성격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성경적 자원을 바탕으로 성령의 역사에 의한 목회상담의 적용과 사례를 조사해보고, 목회적 상담에서 차지하는 성경적 자원의 상담 효과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또한 목회상담학의 영역에서 연구되어진 학자들의 목회상담 이론 중 본 주제와 본인의 추구방향을 조명해 주는 연구가들의 이론을 연관시켜 오늘의 목회현장과 다양한 생활 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는 성경적 상담자원을 발견해 보고 확충시켜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성경에서 나타나는 목회상담의 근거
예수님은 목회상담자의 모델 그 자체이시다. 예수님이 찾는 대상은 병든 자요, 죄인이었다. 그리고 그 문제투성이인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갔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온 자들은 모두 치유와 회복을 경험했다. 그러므로 주님이 보이신 것은 우리가 따라 행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15)”
주님이 스스로 보이신 것은 상담자로 부름 받은 이들이 그렇게 따라 행하도록 하신 것이다.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행위로 인하여 죄인에서 의인으로 변화되는 사람들의 임상적 이야기가 바로 신약의 복음서에 소개된다.
목회상담의 출발이 되시는 예수님에 대한 전형적인 해석과 인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나사렛 예수가 나타났을 때, 그리고 그의 생각과 그 당시 주변 환경에 준 영향력으로 볼 때 모든 목회 또는 목회상담의 창시자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활동하고, 그와 관련되어 이 세계에 그리스도교가 형성된 것이 인생을 형성하는 신앙태도의 본질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신앙태도가 세상의 관례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목회상담은 그와 같은 의지를 가진 그리스도교 세계관과 매우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셋째, 부활하고 이 세상의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는 목회상담자의 모습, 즉 목회상담의 원형이다. 그는 시간을 초월해서 완전히 새로운 삶의 기쁨을 일깨워 주는 근본적인 체험을 위한 가장 이상적이고 최대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넷째, 무엇보다도 메시아로서의 예수는 완전히 변화된 현실 이해를 알려 주었고 구체화시켰다. 목회상담은 이러한 중재자 개념에서 목회상담의 본질적인 과제를 받아들인다. 목회상담은 인간을, 자기 자신의 존재와 그 자신의 상황을 종말론적인 표징과 만나도록 만들어야 하며, 동시에 비판적이면서 창조적으로 세상과 대응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목회상담에서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를 두는 것 외에 목회에서 성서구절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 성서적인 개념들은 일반적인 사회적 기능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신학적으로 특별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말하는 영혼 돌봄 개념의 뿌리에 해당되지 않는다. 목회상담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교회공동체 삶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목회상담의 기능적인 면과 만나게 되는데, 거기에서 보면 특별한 그리스도교의 목회상담적 도움이란 개인적으로 나타나는 성령의 은사가 기초가 된다.
2. 목회상담의 정의
목회상담의 정의에 대하여 안경승 교수는 “목회자가 신학적 기초 위에서 신앙 성장을 위한 자원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해서 성도들을 도와주는 (구원, 인도, 지지, 치료, 화목) 돌봄의 관계”라고 정의한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도와줄 수 있다고 제시한다. 복음으로 생명을 돌아오게 하는 일, 내담자의 행동, 태도, 가치관을 변화시키기,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예방, 사회적 기술을 가르치기, 정서를 표현하도록 격려하기, 어려울 때 지지해 주기, 통찰력을 심어주기, 결정을 내릴 때에 지도해 주기, 책임감을 가르치기, 영적 성장을 자극하기, 위기에 처했을 때 내적, 외적 자원을 활용하도록 내담자를 도와주기 등이 목회적 상담의 내용이다.
이상의 내용을 보면, 한 목회자가 그의 모든 목회사역에서 만날 수 있는 성도들에 대하여 모든 영역에서 목회적 자원을 동원하여 도움을 주는 전반적인 내용을 망라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인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목회적 도움이다.
그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또는 새로운 표현 방식으로 내린 정의가 있다. 그것은 슈톨베르크의 정의다.
슈톨베르크는 목회상담의 타당한 정의를 찾느라 고심하면서 목회상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리고 있다. “관계로서의 목회상담은 우리 죄인들 가운데 존재하는 하나의 상호 전달능력으로서 초월적인 곳을 지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목회상담은 모든 인간의 규범과 질서를 상대화시키는 것에서 출발하여 선과 악 그리고 행위와 결과를 초월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하며 그 어떤 절망적인 경우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목회상담은 사람에게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거나 어떻게 되기를 원하는 인간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다시 말해 어떤 이상적인 판단이나 독단에서 자유로운 절대적인 사랑 안에서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따라서 슈톨베르크에 있어서 목회상담에 대한 이해는 먼저 ‘제약 받지 않고’ 확장된다.
그러한 확장적인 개념은 목회자의 상담대상자의 지경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즉, 교회 내의 성도 뿐만 아니라, 목회자의 가족과 친척, 주변 이웃, 선후배, 비목회적 공동체에 까지 확장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슈톨베르크는 목회상담을 내용적으로 서술하기 위하여 다양한 목회상담의 현장을 다음과 같이 나누고 있다. 즉, ①종교, ②교회공동체, ③결혼과 가정, 독신, ④병원, ⑤학교와 교육기관, ⑥산업체, 관공서, 기업이다.
목회자의 목회상담 영역은 모든 생활에서 만나고 관계될 수 있는 대상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상황에 맞게 목회상담은 이루어질 수 있다.
슈톨베르크의 목회상담의 정의에서 영역을 좀더 확대함과 동시에 좀더 구체적으로 보완하고 있는 정의는 뵐버에서 찾을 수 있다.
뵐버는 목회상담을 ‘우리 시대에 고통받는 사람, 신앙을 떠난 사람, 그리스도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일관성 있게 전하고 실천하는 개인적이면서도 책임적인 사도직’으로 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여기서 무조건적인 위로가 문제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개신교의 칭의론이, 다시 말하면 영광의 신학이 아닌 십자가의 신학이 목회상담의 뿌리가 된다. 그것은 바로 사람을 돌보는 하나님의 관심이고, 그러한 의미에서 목회상담자로서 우리가 하는 일과 하나님이 하는 일을 동일시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며 이 땅에 대한 상상도 못할 하늘의 시도로서 하나님의 사자들을 통해서 전달된다. 목회상담에서 항상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사랑의 시도다.
그리하여 목회상담을 통하여 상담자는 하나님의 사랑의 도구가 될 수 있다.
3. 목회상담의 주체
그런데 상담을 통하여 변화되고 회복되게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상담자인가? 상담자의 기술과 전문성인가? 전통적인 상담의 영역에서는 상담자의 전문성과 내담자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의한 상담자의 능력이 될 수 있다.
목회상담의 경우는 상담의 전영역에 미치고 주도하는 다른 주체가 존재한다. 그것은 성령이다. J. E. 아담스는 그 점을 분명히 한다.
그에 의하면 성서증언에서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성령이다. “예수는 자기의제자들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약속한 지탱으로 그들에게 조언을 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인도했다. ……요한복음에 보면 그 지탱의 도움이란 진리의 영이고 그 자신이 진리의 샘인 바로 성령이며 그가 진리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목회상담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상담자가 상담을 어떻게 하느냐하는 상담 방법에 관계없이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를 기대하면서 상담을 한다면 상담의 방법으로 인해서 연약해질 수는 없다. 성령은 주로 상담자에게 주신 은사의 적절한 활용과 함께 역사하신다.
그것은 죄성으로 인하여 왜곡되고, 부패되고 병든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함을 얻고, 성령의 인도로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를 받는 우리의 신앙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주체는 바로 성령이다. 상담의 주체는 성령이다. 상담자와 피상담자의 관계에서 모든 치유와 회복의 과정을 주관하는 것은 바로 성령이심을 인정하는 것이 목회상담의 시작이다.
성령은 첫째, 상담자를 준비시키셨고 피상담자의 문제를 이미 알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둘째, 상담자와 피상담자의 만남이 성령에 의해서 계획되고 준비되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셋째, 성령은 피상담자를 자신의 양으로 회복시키고 치유시키기 위하여 상담자에게 맡기셨음을 인정해야 한다. 넷째, 성령은 피상담자를 상담하여 변화시킬 수 있는 모든 복음적 지혜와 방법을 상담자에게 제공해주신다는 것을 믿고 인정해야 한다. 다섯째, 성령은 피상담자를 회복시키심을 믿고 인정해야 한다. 여섯째, 성령은 그 결과, 상담자와 피상담자 모두 큰 기쁨과 감사를 더하실 뿐만 아니라 믿음을 향상시키실 것을 믿고 인정해야한다. 일곱째, 성령은 그 회복과 감사로 영광 받으심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여덟째, 성령은 그 회복된 양으로 교회를 견고하게 하심을 믿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상담은 소망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J. E. Adams도 소망에 대하여 언급한다. “목회상담자는 무엇보다도 소망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자신부터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는 절망적인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하다는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그렇게 할 때만이 인간이 변할 수 있다는 소망에 대해서 확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J. E. Adams는 성령의 역사가 분명히 목회상담자를 통하여 내담자의 모든 문제로부터 회복시키심을 신뢰할 것을 강조하여 말한다. “목회상담자는 회개를 믿는다. 그는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믿는다. 목회상담자는 죄의 본래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죄를 지을 성향에 따라서 죄를 지은 사람도, 잘못된 교육과 악한 사람에 의해서 잘못된 사람도 다시 성령이 주는 인격을 가지고 열매 맺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그러므로 목회상담의 주체는 상담자 자신이나, 피상담자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하나님이시오, 목회상담의 근원되신 예수 그리스도요, 목회상담의 만남부터 변화까지 주관하는 성령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인식에서부터 출발할 때, 비로소 우리의 상담은 일반 상담이 아닌, 성령께서 개입하시는 목회상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4. 목회상담자의 조건
목회상담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체인 성령에 이어 두 번째 주체는 상담자이다.
목회상담자의 조건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목회자로서 주어지는 자격적 조건이며, 두 번째는 스스로 취득해야 하는 조건으로서 미덕이다.
먼저 목회자로서 주어지는 자격적 조건은, 대개 목회자의 경우 상담의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의 부족을 염려하여 스스로 목회상담자임을 포기한다. 그러나 목회자는 이미 목회상담의 전문가로서 자격이 주어진 사람이다. 그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이유는 이미 목회자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자원인 믿음과 성경적 지식과 안목, 목회적 능력과 리더십 모두가 바로 유능한 목회상담적 자원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목회상담의 영역과 특수성에서는 일반적인 상담의 심리학적인 온갖 기술과 자료는 불필요하며, 거부되어야 하는, 전혀 이질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J. E. 아담스의 관점은 그런 점에서 분명하다. “성서적 관점에서 볼 때 ‘심리치료와 같이 특수 전문 분야는 정당화될 수 없다. 성서에서 보면 개인적인 삶의 문제는 오직 세 가지 근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악령의 영향(특히 귀신 들림), 개인적인 죄, 그리고 몸의 병이다. 모든 인간의 문제들은 바로 이러한 세 가지 핵심 단어들에 모두 포함되며 정신적인 병을 네 번째 근본 원인으로 들 수 없다. 내 견해에 의하면 성서의 틀에서는 인간 문제에 대한 특수 전문가로서 정신과 의사 또는 심리치료사가 있을 수 없다.…… 나에게는 여기서 다음의 두 가지 점이 중요하다. 첫째, 정신과 의사는 약제를 반복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합법적인 그의 과제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설교자는 반복해서 하나님이 그에게 맡긴, 그리고 하나님에게 직접 받은(가끔 그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더라도) 그 과제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아담스의 관점은 일반 목회자에게 목회상담자로서의 위치를 회복시켜준다. 일반 상담전문가의 역할을 뛰어넘어, 보다 역동적인 사역으로서의 영역을 강화시켜준다.
다음으로 목회상담자가 지녀야 하는 것은 스스로 취득해야 할 조건이 있다.
목회상담에서 중요한 역할은 상담자 자신이다. 가장 효과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긍정적인 모습으로서 목회자 자신이 신뢰와 존경으로 비쳐지는 모습이다. 그것은 우선 말씀과 인격에서 성육신적인 일치감을 체험할 때 일어나는 존경심과 신뢰이다. 그때 목회적 상담은 최대의 효과를 가져 온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대사일 때,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 변화를 장려하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는 말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인격이며 우리의 행동이다.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우리는 진리를 말하라는 부르심뿐 아니라 참되고 생동적이고 살과 피가 있는 존재로 그 진리를 나타내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을 옮기는 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그분의 증거물이다. 우리의 삶은 그분의 은혜의 능력이 마음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나타냄으로써 우리의 방식을 통해서 드러난다.
하나님은 단순히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동정과 친절, 겸손과 온화함, 인내와 사랑으로 말할 때 사람들을 변화시키신다. 이 일을 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제시하는 진리의 실제적인 증거가 된다. 우리는 단순히 진리를 구현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른다면, 우리가 돕고자 하는 그 사람은 진정한 사랑, 연민, 온유, 용서, 인내, 친절, 겸손이 어떠한 것인지 우리에게서 보고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라고 부르신 일들과 되라고 하신 모습은, 현재 사역에 임하고 있는 사람 가운데 분명하게 나타나야 한다.
리차드 굴라(Richard Gula)는 덕이 있는 사역자들에 대해 설명한다. 그는 사역자들에게 공통되는 역할 기대들과 특별히 연관이 있는 다섯 가지 미덕을 명시한다. 굴라는 이러한 미덕들 가운데 세 가지, 곧 거룩함, 사랑 그리고 신뢰감은 ‘언약적인 미덕들인 반면, 다른 두 가지, 곧 이타심과 신중은 도덕적 미덕이라고 제안한다.
굴라는 목회상담 및 영성지도를 실행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목회상담과 영성지도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사랑과 거룩, 신중, 자기 돌봄 및 동정, 신뢰, 충실, 정의, 꿋꿋함과 용기, 절제 그리고 신체적 건강과 같은 미덕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굴라는 “사람들은 사역자들에게서 특히 신뢰감을 찾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위임을 받았다고 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굴라에 의하면 목회상담자들과 영성지도자들에게서 신뢰감이 드러나는 몇 가지 표지는 다음과 같다. (1) 사역자-내담자/교인 관계에서 신체적 및 정서적 경계선에 대한 존중, (2) 개인의 사생활과 비밀 유지에 대한 존중, (3)자기 자신의 능력의 한계에 대한 인정과 필요할 때의 적절한 의뢰 결정, (4) 연구, 수퍼비전, 자문을 통한 전문적인 기술과 지식의 유지, (5) 전문가적 활동과 개인적인 관계들에 대한 지속적인 헌신이다.
케난은 신체적 건강을 하나의 미덕으로 기술하고 그것이 기독교인들에게 특별히 중요한 것이라고 믿는다. 상담자와 지도자들이 신체적으로 보다 건강하게 된다거나 그들의 내담자에게 이 미덕의 역할 모델이 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신체적 건강의 미덕이 부족한 것이다.
목회상담자들과 영성지도자들에게서 드러나는 신체적 건강의 미덕의 몇 가지 지표들은 다음과 같다. (1) 건강한 식사와 적당한 체중을 유지하는 것, (2) 적당한 수면과 휴식, 운동, 스트레스 관리 활동의 균형 잡힌 일일 계획을 지키는 것, (3) 그들의 내담자들에게 신체적 건강과 안녕의 역할 모델을 하는 것과 건강한 영성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회상담자로서의 역할 자격은 목회자라는 훈련과 기름부음으로서 이미 주어졌지만, 동시에 목회자가 평소 지녀야 할 모습은 긍정적인 목회상담자의 모습을 위해 공동체로부터 기대되어지는 미덕의 겸비와 실천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5. 목회상담자와 피상담자의 관계
목회상담적 입장에서 상담자와 피상담자의 관계는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개인 사역에서 사랑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주목하게 해 준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는 사랑 넘치며 구속적인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관계가 그러한 성격들을 그대로 드러내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이것은 적어도 다음 세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그분은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개인적인 행복보다 더 높은 목표를 가지고 계신다. 둘째, 그분은 우리의 관계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일으키시는 변화의 바탕이 되기를 원하신다. 셋째, 우리가 이와 같은 변화 사역을 촉진하는 관계를 이루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한 바탕으로 관계를 이해할 때 우리의 피상담자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원하시는 목표로 변화되고 성장될 대상이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들을 맡기셨고 그들을 돕는 자로서 우리에게 그들을 부탁하신 것이다.
사회의 상징적 대변인으로서 상담자는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보살핌을, 거부당한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임을, 약한 사람들에게는 지지를, 혼란스러운 사람에게는 갈 방향을, 왜곡된 사람에게는 교정을 제공한다. 보다 깊은 문화적 현실을 말하는 대변인으로서 치료자는 사회가 사람에게 제공할 수 없었던 인간에 대한 관심을 구현한다. 공동체가 사람을 키우고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한 곳에서 상담자는 이들 편견 속에 묻혀 있는 정당함과 모든 공동의 친교와 공존의 토대인 은혜의 근거를 찾아낸다.
6. 목회상담의 대상자
우리가 만나는 내담자가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맡겨진 ‘주님의 양’이라는 믿음과 전제가 분명하다면, 내담자의 어떤 문제에도 불구하고 목회적 상담자가 결코 당황해 하거나 긴장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우선, 성령께서 이미 그를 돕고 치유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사실 전제할 수 있고, 그 전제와 확신을 바탕으로 성령께서는 목회적 상담자에게 그를 돕기 위한 모든 성경적 자원과 지혜를 주신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내담자의 모든 문제의 범주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인간의 타락에서 오는 죄성과 연관되어 있다고 지적하는 J. E. Adams의 시각은 목회상담자에게 그 확신을 갖도록 도와준다. 그는 모든 내담자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사람도 결코 시시한 어려움과 싸우지 않는다. 바울은 완전히 다른 시간과 문화 속에서 살았던 이스라엘 민족의 경험들이 고린도 교회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즉,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유일무이한 문제라는 것은 없다. 단지 어떤 시공간에도 근본적인 성서적 주제라고 볼 수 있는 한정된 죄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밖에 각각의 문제에 대한 성서가 제시하는 해결책이 있다.”
적어도 우리가 죄인됨을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십자가 사역을 믿음으로 그 죄에서 해방된 존재라고 한다면, 궁극적으로 목회상담자가 사역하는 방향은 피상담자의 죄 문제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그 해결은 성서에서의 심오한 자원과 성령의 역사에 있음을 분명해 해야 한다.
7. 목회상담의 성경적 자원
1) 내게 맡겨진 ‘주님의 양’과 ‘소자’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자신의 삶 속에서 성육신하라는 부르심을 잊어버릴 때 우리의 인간관계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취하게 된다. 곧바로 그들은 우리의 즐거움과 평안과 편의에 의해 지배된다. 우리는 이러한 유익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 때문에 기분이 상한다. 사실 이러한 분노는 대부분 우리가 인간관계를 도둑질했기 때문에 일어난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
그러므로 피상담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내게 맡겨진 ‘주님의 양’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니고 계신 인식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에게 당신의 양을 맡기셨다. 돌보라고 맡기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계를 맺거나,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사람 중, 부적응하고, 상처를 갖고, 고통을 안고 있는 사람 등,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나 주님께서 맡겨주신 주님의 양이 된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21:15-17)”
그 ‘주님의 양’은 바로 우리의 자녀와 우리가 목회하는 교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고, 직장 동료가 될 수 있으며, 학교에서는 담임하는 학생일 수 있다. 이렇게 우리가 오랜 기간 동안 관계되어 돌볼 수 있는 대상은 모두 주님이 맡겨주신 ‘주님의 양’이다. 그들의 신앙과 관계 없이 양이 된다. 그들은 우리에 의해서 영향을 받아 어떤 형태로든 변화되어질 ‘소자’이기 때문이다. ‘소자’란, 우리를 통해 도움을 필요로 하고, 또 그들이 상처 중에 있거나, 고통 중에 있다면, 그들은 모두 소자이다.
주님이 소자라고 지칭하실 때는 늘 돌봄의 대상으로 인식하셨다. 즉, 중풍병자, 냉수 한 그릇이라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 예수를 믿는 자 중 연약한 자, 업신 당할 수 있는 부족한 자 등에 대하여 모두 소자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소자’는 ‘우리에게 맡겨진 주님의 양’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주님이 ‘자신의 양’과 같은 개념으로 ‘소자’를 지칭하신 구절을 통하여 우리는 그 개념의 동의어를 알 수 있다. (마 9:2; 10:42; 18:6; 18:14)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사랑, 은혜, 신뢰의 관계를 세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변화의 언약적 관점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와 관계를 세우셨듯이, 우리가 세워가는 관계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변화 사역을 위한 배경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인간관계가 우리 자신에게 속해 있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주님께 속해 있고 그런 면에서 거룩하다.
그리하여 개인적으로 우리는 주체 대 주체(나-너) 관계로 만나며 미덕이 상호 작용하고 사랑이 상호 작용하여 하나님을 만난다. 여전히 우리는 동등한 아가페의 관점에서 사람들은 축소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에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 대하여 우리는 그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일상의 관계의 관점에서만 생각할 때 그들은 우리에게 부담스럽고, 회피하고 싶은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주님의 양’이라는 관점에서는 전혀 다른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피상담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주님에 속한 사람’이다. 상담자나 내담자나 모두 하나님 앞에서 불쌍히 여김을 받는 동등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상담자는 마땅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보살펴야 할 ‘주님의 양’이라는 인식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그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다.
2) 오래 참음
희생을 각오하지 않고서 개인 사역에 뛰어든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대사는 왕의 메시지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성육신하듯이 드러내 보인다. 그는 왕의 위치에 서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에 대하여 행하신 사역은 희생과 고통을 의미했다. 그것은 먼저 오래 참는 것부터 시작된다. 오래참음은 그에 대한 성령의 개입하심을 믿는 믿음을 전제한다. 그것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회복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다.
피상담자는 상처난 소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일반적으로 거부감을 줄 수 있는 대상이다. 그들의 반응은 차갑고, 냉담하며, 때로 우리를 당혹케 만들며,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보통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기도 하고, 외면당하기도 한다. 그럴수록 그들은 심리적 병리 증상을 더 강화시켜나간다.
모든 인간 존재는 유한한 가능성의 경계 안에, 가족 사회적인 기회의 범위 안에, 약함과 오류를 범하기 쉬운 한계 안에 존재한다(히2:6-9; 벧전2:21; 미6:8; 막12:29; 갈5:1; 요8:31-36). 여전히 한 인간은 항상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에 있으며 현실의 사람은 또한 가능성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내게 맡겨진 주님의 양이면, 그들에 대하여 인내해야 한다.
그들은 반드시 회복될 수 있는 대상임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원래 주님의 양이다. 주님은 그들이 우리에 의해 변화될 수 있는 소자이기에 ‘당신의 양’을 맡겨주신 것이다. 그 치유와 변화의 결과는 일찍 올 수도 있고, 더디 올 수도 있다. 그러나 상담자는 그들에 대하여 반드시 변화된다는 믿음을 잃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19-20)”
언제까지 인내해야 하는가? 그가 돌아올 때까지이다. 그 점은 탕자를 기다리면서 기약을 알지 못한 채 인내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서 알 수 있다(눅 15:12-32).
우리가 믿음이 있는 한 상담자가 피상담자에 대하여 오래 참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이유이다. 그들은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믿고, 그들에 대해 오래 인내하며, 체념하지 않는 한, 피상담자들은 능히 변화될 수 있고, 치유될 수 있으며, 회복될 수 있다.
3) 기도와 감사
주님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양에 대하여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백부장의 하인이 심각한 병에서 치유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상전인 백부장의 간절한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다.(마 8:5-13)
성경은 또 말씀한다. 가족이나 교회공동체 가운데 치유되어야 할 병자가 있을 때,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도움을 요청할 것을 말한다. 그들은 병자를 위하여 먼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특별히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한다. 그리하면 주께서 저를 일으키실 것을 약속한다.(약 5:14-16)
다음은 한 부적응 청소년에 대한 목회적 상담의 사례를 소개한다. 그것은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 있는 한 학생을 위하여 신학을 하는 담임 교사 J가 하나님께 의뢰하며 그가 속한 기도공동체와 더불어 기도했을 때 성령의 감동과 놀라운 지혜로 인도되어진 사례다.
K는 2003년 6월 2일, 전 재적교인 N시에 소재하는 S중학교에서 신앙과 인성교육에 역점을 두고 있는, 지역의 기독교학교인 D중학교 제 3학년 2반으로 전학 온 학생이었다. 이때 K는 이미 이전 학교에서 발생한 폭력과 오토바이 절도로 감호소에서 일정 기간 감호된 학생으로 보호관찰 중인 상태였다. K는 표정이 없었고, 무기력한 상태였다. 전학 온 K는 늘 지각을 하였고, 수업 중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엎드려 잠을 잤다. 그는 자주 결석을 했다. 그가 학교에 와 종일 잠을 자는 이유는 자신의 (불량) 친구들과 어울리고 야밤에 심야 게임방에서 게임을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그것을 즐기고 있었고, 그때 유일하게 활기를 찾게 된다고 하였다. 교과 교사들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주의를 주다가 결국 지도가 어려운 아이로 생각하여 역시 방관하지 않을 수 없었다. K의 어머니 역시 자신의 아들에 대해 거의 체념한 듯한 태도였다.
자신의 반으로 배정된 이 학생을 대하면서 담임교사 J는 많은 고민을 하면서 담임교사로서 다음과 같은 지도목표를 세웠다.
첫째, 그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지식과 교칙 준수가 아닌, 그에 대한 수용이요, 학급 학생들로 하여금 그에 대한 인식을 기피 대상이 아닌, 도움이 필요한 급우로 인식하는 시각을 갖게 하고, 그를 위해 함께 기도하는 것. 그 기도는 매일 담임의 조회시간에 함께 기도하고, 결석하는 날은 늘 조회 종례 때에 학급 아이들과 다같이 기도하는 것
그것은 특별히 오늘날 아동과 청소년 목회상담의 주어진 조건에서 하나님이 (외관상 권위적인 요청으로서) 우선적으로 현존하는 (부모의) 관계 속에서의 적응과 순종을 요구하지 않고, 먼저 ‘신뢰적인’ 관계에 의해 불안으로부터의 해방과 안전감이 생기는 그러한 틀의 하나님 형상을 전달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갈등상황은 이러한 상황에서 거절과 같은 결손적인 상태로 경험된 것일 수 있다.
둘째, 엄했던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과 암 투병 중이었던 어머니에 대한 불안감, 과오로 인한 보호감찰 기억, 그에 따른 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문제아 인식 등에서 피폐되어진 정서를 일관된 애정과 관심으로 회복시키기
셋째, 공부와 학교생활 부적응으로 인한 출결에 대한 불확신으로 중학교 졸업을 장담할 수 없는 상기학생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회복시켜서 졸업시키기
넷째, 나아가서 자신의 적성과 장래직업을 고려하여 고등학교에 진학시키기
이상의 목표를 정하고 담임교사 J는 허심탄회한 대화와 관심, 칭찬과 이해, 격려와 기다려 줌,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는 스킨십 등 교직 17년의 학생지도경험을 되살려 지속적으로 실행하기 시작했다. 학급에서는 급우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아닌, 친절과 따뜻한 이해로서 대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매일의 학급 기도시간을 통해 K를 축복했다. 그리고 동료 교사들에게 K의 입장을 대변하며 그 학생의 처지에 대하여 이해와 관심을 부탁했다. 정기적으로 기도모임을 갖는 기독교사들 모임에서도 K를 위해 특별히 기도와 조언을 부탁했다.
그 결과 시간이 지나면서 K는 예상대로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얼굴의 무표정에서 미소가 감돌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든지 묵묵부답하던 태도가 서서히 공손히 대답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지각과 결석을 하지 않으려고 일찍 등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 어머니도 아이의 변화가 가정에서도 확인되자 기뻐하고 감사했다. 무엇보다도 학생 본인이 자신의 변화에 대해 놀라기 시작했다. 어느 날, 고등학교 원서를 쓰면서 담임 J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생님, 제가 이렇게 고등학교 원서를 쓸 수 있게 될 줄은 저도 믿지 못했어요. 이제는 제가 졸업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믿음과 소망이 생겼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원서를 작성했던 담임교사 K도 감격했다. 이제는 이 학생이 자신감을 회복하고 정상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되었구나 하고 기뻐했다. K는 드디어 C에 있는 C공업고등학교에 합격이 되었다. 그리고 급우들과 졸업앨범 사진을 찍으며 좋아했다.
그런데 예기치 못했던 난관이 발생했다. K가 본교에 적응하지 못했던 본교 전입 수일 후인 6월 초 이전 학교 친구들과 밤에 어울리며 집단 폭력에 관여되었던 일이 보호관찰 중 재발된 범행사실로 확인되어 6개월이 지난 뒤 11월 28일 구속 송치됨으로, 지금까지 희망적으로 진행되어온 치료회복교육이 중단되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이 사태에 대해 학급급우들과, 기독교사회 교사들과 함께 집중 기도했다. 기도회 중 성령께서 놀라운 지혜를 주셨다. 그것은 그동안 K가 6개월간 얼마나 변화되었는지, 그리고 학교와 급우들이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선처를 간곡히 바라는 마음을 재판장에게 전달하는 지혜였다.
그리하여 담임교사 J는 탄원서를 작성하고, 함께 기도하던 급우들은 친구를 용서해 다시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바라는 편지와 서명을 하고 법원으로 보내졌다.
그 결과, K는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고, 무사히 졸업을 하였으며,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지금은 열심히 직장생활하는 사회인이 되었다. 그는 그때 자신을 수용해주고, 오래 참아주고, 기도해주었던 담임과 급우들, 교사선교회 교사들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가끔씩 학교를 찾아온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약 5:15a)"의 말씀이 도움이 요구되는 한 부적응아에 대한 공동체의 기도를 응답하셨던 것이다.
성령께서 도우셨던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상담자나 피상담자가 모두 감당하기에 어려운 문제 앞에 기도하게 하셨다. 담임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급우들이 날마다 함께 기도했다. 그 결과, 공동체의 구성원은 이 이방인에 대해 거부감 대신 불쌍히 여기며, 기도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신들의 반 급우라는 인식을 같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기도 공동체가 확대되어 다른 믿음의 교사들도 관심과 기도에 참여하기 시작하여 기도의 띠가 확대되었다.
둘째, 피상담자가 자신을 수용하는 담임교사와 급우에 대하여 마음이 차츰 열리기 시작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거기서 서서히 외부의 관심에 반응하며, 대화가 시작되고, 잠 자는 시간이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으며, 나아가 일찍 등교하게 되었으며, 결석도 줄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졸업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상급 고등학교에 합격을 하여 진로에 대한 강한 긍정적인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셋째, 위기의 상황에 기도공동체가 기도하며 서로 지혜를 모으는 중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방안이 기도공동체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넷째, 학급 기도공동체는 진심으로 마음을 모으고, 도출된 방안을 실천함으로써, 구체적인 결실을 눈으로 목격하고 체험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모든 기도공동체와 피상담자 모두 기도의 능력과, 사랑의 결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었던 점이다.
다섯째, 몇 년의 시간이 경과한 뒤에도 피상담자와 상담자가 서로 지속적인 감사와 신뢰의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공동체의 기도는 가장 합당한 때에,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응답이 되어짐을 알 수 있다.
감사는 자기애적인 창의적인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것’을 상쇄하기 위해 포기할 수 없는 관점이다. 그러한 감사로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근본 정신상태가 다시 개념화된다. 그러므로 아동과 청소년을 위한 목회상담은 ‘모든 상황에서’, 즉 모든 여건과 관련하여 마침내 감사가 나오도록 영향을 미쳐야 한다.
4) 지혜와 자기 부인
상황에 따라 목회적 상담의 자원은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성령은 목회적 상담자에게 ‘자신의 양’을 때로 극한 상황에서 예기치 않는 상황에서 맡기시기도 한다. 그때, 성령께서는 당신을 의뢰할 때, 가장 최적의, 최선의 지혜를 주신다. 그것은 ‘자기 부인’이라는 성경적 자원으로서 주어질 수 있는 상황이다.
상담자로서 누군가가 지닌 고통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 고통을 완전히 알고, 공포 속으로 들어가 공포를 깊이 느끼며, 그가 홀로임과 홀로라는 것을 확실하게 주장할 때, 상담자는 공공연하게 누군가가 지닌 상처를 탐험하고 경험하며 그리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때 ‘자기 부인’이 가능해진다. 상담자의 자기 부인은 분노에 처하여 극한 사태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의 감정을 극약처방처럼 가라앉히는 능력이 있다. 가장 최적의 대응 지혜는 성령께서 주실 수 있는 것이다. 그 사례는 다음과 같다.
마을 일을 하는 한 젊은 이장이 어느 날 술에 취해 마을의 연장자의 집에 가서 실수를 하였다. ‘이장’이라는 직책상의 용무로 찾아갔지만, 취중이어서 나이 든 주부에게 반말하며 무례를 행했다. 이를 집안에서 듣고 보던 남편이 화를 참지 못하고, 나가서 그 이장의 뺨을 때렸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뺨을 맞은 이장은 격분하였고, 밤새 그 집 대문 앞에서 소리를 지르며 그 주인을 나오라고 하며 분을 달래지 못하였다. 무슨 일이 일어날 상황이었다.
이때 한 청년이 그 이장 앞에 섰다. 그는 그가 왜 그토록 화가 났는지 정중히 물었다.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뺨을 때린 저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청년에게 하소연을 하는 것이었다.
이를 듣던 청년은 별안간 그 이장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가 바로 그 분의 아들입니다. 제 아버지 대신 제가 뺨을 맞겠으니 분이 풀리도록 저의 뺨을 실컷 때려주십시오. 정말 죄송합니다.”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 그 이장이 그 청년의 손을 가만히 잡고, 일으켰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젖어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길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간 이장은 가족들에게 그 되어진 일을 말하며, 어린 두 딸에게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말해주며 감격하였다. 그의 분노는 그 청년의 행동에 의해 일순간 사라졌다.
다음 날, 이장이 어제 그 집을 다시 찾아 자신의 무례함을 정중히 사과하며, 화해를 청했다. 그리고 청년을 칭찬했다. 그 이후 이장과 그 중년 부부의 집안과는 가깝게 왕래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앞서 말했던 슈톨베르크의 확장된 개념의 목회상담으로서, 목회상담은 사람에게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거나 어떻게 되기를 원하는 인간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모습’을 볼 때, 생활 현장 속에서 일어나는 인간관계의 예기치 못하는 급작스러운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하게 되는 내담자’를 그가 현재 처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볼 때, 성령께서는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인 지혜와 용기를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바라볼 때 ‘갑작스럽게 등장하게 되는 내담자’는 가까이에 얼마든지 나타난다. 그런 내담자는 스스로 상담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상담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있는지 모른다.
어떤 직장에 K라는 한 30대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이혼한 충격에서 아직 회복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평소 친밀하게 지내던 직장 동료 S에게 자주 하소연하며 위로 받고자 했다. 그런 중에 직장 동료는 과중한 만남과 경청의 요구에 부담을 느껴 절교를 선언했다. 그것은 너무 큰 충격이었다. 어느 날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K는 S에게 다가가 머리채를 쥐고 흔들었다. 배신감에 참고 있던 분노가 폭발했던 것이다. 그 이후 K는 직장 상사의 경고를 받게 되었고, 많은 동료들로부터 외면 당하게 되었다. 이혼 직후의 K의 심리 상태는 거의 공황상태에 이르렀다. 그때 같은 부서에 있던 선배 직원인 J가 그녀를 불러냈고, 그를 위로하였다. 그는 K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나는 당신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당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압니다. 나는 무조건 당신의 편입니다.”
그녀는 그 말에 하염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왜 그런 실수를 저지를 수 밖에 없었는지를 울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너무 비참했고, 외로웠는데, 믿던 동료의 절교 선언은 그녀로 하여금 이성을 잃게 했다는 것이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견딜 수 없었고,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날 자기도 모르게 그녀에게 다가가 그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에게 “나는 당신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나는 당신의 편입니다.”라는 그 말에 그녀는 큰 위로를 얻게 되었다.
“나는 당신의 편입니다.” 는 한 마디는 그녀가 듣고 싶었던 가장 큰 위로와 용기의 메세지였다. J는 K를 위해 함께 기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후 그녀는 급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했고, 오래 가지 않아 이전의 밝고 활기찬 상태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
이는 상담자가 찾아간 경우였다. 찾아가 스스로 상담자와 내담자의 긴밀한 관계를 만들었다. 그때 그녀의 행위로는 상식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덕적인 잣대로 평가될 수 없는 상황도 있다. 도덕적으로는 그 행위가 분명 잘못된 것이다.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녀를 바라보면, 이혼으로 인한 충격과 늘 가까이 했던 동료의 배신을 당해 이성을 잃고 행한 일로 더욱 곤경에 처해진 그녀의 상황은, 잘잘못을 떠나 그 어떤 누구보다도 절실히 위로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소자’요, 내담자인 것이다.
도덕과 율법적인 잣대로 바라보았던 사람들과는 달리 현장에서 잡혀온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실존적인 그녀의 영혼 상태를 보셨던 것이다.
5) 합력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피상담자에 대한 합력은 그 프라이버시에 침해되지 않는 한 유기적인 협력이 필요하다. 특히 그가 속한 공동체의 기도와 이해는 우선되어야 한다. 상담자와 공동체의 기도로 얻는 유익은 성령이 이루시고자 하는 동역의 유기체와 같다. 대개 정상적인 집단의 부적응아일 경우 그 자신이 공동체에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다. 그는 공동체에 대한 자신의 부정적인 인식의 틀을 더욱 견고히 하게되며, 점점 더 공동체를 위시한 사회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다.
거기에 반하여 공동체에서의 부적응아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는 공동체에 속한 모든 구성원들의 관심과 배려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공동체는 지도자의 시각에 따라 영향을 받고 움직인다. 그러므로 지도자가 피상담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 사랑을 공동체에 지속적으로 나타내야 한다. 그것은 기도를 통해서, 피상담자의 처지와 고통, 불안한 심리상태 등을 지속적으로 돕고자 하는 마음을 통해서 공동체는 합력으로 하나되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하여 합력된 공동체 모두가 기뻐하며 감사하게 된다.
8. 반응과 변화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내 양’은 변화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반드시 변화되게 마련이다. 애정과 열정을 쏟은 만큼 변화된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는 그 변화의 폭을 결정한다.
반응은 감동의 크기에 비례하여 지속된다. 적게 주면 적게 받고, 많이 주면 많이 받는다. 식물의 건강 유무는 그 토양과 일조량 및 수분의 차이에서 온다. 즉, 식물이 잘 자라지 못하고 시드는 것은, 식물 성장에 필요로 하는 조건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다. 문제가 있는 경우는 사랑과 관심의 결핍에서 유래된다. 그러나 그것은 맡겨진 목자와 양과의 관계에 한함을 전제로 해야 한다. 양이 아닌 경우, 죄성의 결과, 배신한 가룟 유다처럼, 사랑과 관심이 공급된다할지라도 수용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맡겨진 양은 그 사랑을 안다. 그리하여 그 사랑의 크기에 따라 변화의 폭도 달라진다. 사랑을 많이 받으면 변화의 폭도 크다. 다음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그것을 설명하기에 적절하다.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6-47)”
이는 상담자 예수님 앞에 피상담자가 된, 죄인인 여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수용과 사랑, 용서로 말미암아 놀랍게 변화된 모습이다. 그 변화된 모습은 눈물로 회개하며,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드려 헌신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가 변화된 폭은 너무나도 컸다. 그것은 상담자의 모범되시는 예수님이 친히 보여주신 사례이다.
우리의 소망은 바로 그리스도시다! 그분 안에서만 버림받고 혼란스럽고 분노하며 상처 입고 낙심한 사람들이 자신의 바람직한 모습을 찾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행한다.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소망과 도움은 항상 그분에게 맞추어져 있다.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은 그 사람과 우리의 만남이 아니라, 그 사람과 그리스도의 만남이다. 우리가 할 일은 단순히 그 만남을 주선하는 것이고, 그럴 때에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분의 용서와 위로와 회복과 능력과 지혜를 간구할 수 있게 도우신다.
신학자이며 정신분석가인 할메르슈타트(H. Halbertstadt)에 의하면, 교회는 치유에 대한 신약성서의 위탁을 영적인 위기와 관계의 갈등상황에 있는 인간을 상담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상담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교회 사회봉사다.
Ⅲ. 결론
목회상담학은 일반상담학과 구별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일반상담학과의 연관성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나아가 뛰어넘어야 한다. 적어도 우리가 죄인됨을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십자가 사역을 믿음으로 그 죄에서 해방된 존재라고 한다면, 궁극적으로 목회상담자가 사역하는 방향은 피상담자의 죄 문제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그 해결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서에서의 심오한 자원과 성령의 역사에 있음을 분명해 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회상담의 원형과 모범으로 우리에게 맡겨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회상담자는 성경적 자원을 토대로 하여 목회적 차원의 확대된 사역으로서 그들을 돌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회상담에서 모든 내담자는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주님의 양’이라는 인식으로 다가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이 있는 한 상담자가 피상담자에 대하여 오래 참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이유이다. 그들은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믿고, 그들에 대해 오래 인내하며, 체념하지 않는 한, 피상담자들은 반드시 변화되며, 치유될 수 있으며, 회복될 수 있음을 믿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성령은 목회적 상담자에게 ‘자신의 양’을 때로 극한 상황에서 예기치 않는 상황에서 맡기시기도 한다. 동일하게 성령께서는 오직 당신의 역사하심을 믿고 의뢰할 때, 가장 최적의, 최선의 지혜를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전제를 필요한다. 그것은 성령 앞에서 ‘자기 부인’이라는 성경적 자원으로서 주어질 수 있는 상황이다.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소망과 도움은 항상 그분에게 맞추어져야 한다.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은 그 사람과 우리의 만남이 아니라, 그 사람과 그리스도의 만남이다. 우리가 할 일은 단순히 그 만남을 주선하는 역할이다.
또한 목회상담은 사람에게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거나 어떻게 되기를 원하는 인간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모습’을 볼 때, 생활 현장 속에서 일어나는 인간관계의 예기치 못하는 급작스러운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하게 되는 내담자’를 그가 현재 처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볼 때, 성령께서는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인 지혜와 용기를 주시는 것이다.
상담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교회의 사회봉사다. 교회는 치유에 대한 신약성서의 위탁을 영적인 위기와 관계의 갈등상황에 있는 인간을 상담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동과 청소년, 장년과 더불어 신자, 비신자를 위시한 모든 목회상담은 ‘모든 상황에서’, 즉 모든 여건과 관련하여 마침내 감사가 나오도록 영향을 미쳐야 한다. 그때 그들은 자신에게 조성되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한 눈뜸과 하나님의 자신에 대한 구속적 사랑에 한발 더 접근하게 된다.
목회상담자로서의 역할 자격은 목회자라는 훈련과 기름부음으로서 이미 주어졌지만, 무엇보다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항상 긍정적인 목회상담자의 모습을 위해 공동체로부터 기대되어지는 미덕의 겸비와 실천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참고문헌
1. 제이 E. 아담스, 「목회상담학」(Competent to Counsel) 정정숙 역(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2001)
2. Klaus Winkler, 「목회상담: 영혼돌봄」(신명숙 역, 학지사, 2007)
3. 폴 트립, 「치유와 회복의 동반자」(서울: 디모데, 2005)
4. David W. Augsburger, 「문화를 초월하는 목회상담」(서울: 도서출판 그리심, 2005)
5. 렌 스페리, 「목회상담과 영성 지도의 새로운 전망」(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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