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다할 때 戒行이 벗 되리라 / 종진 스님
계(戒)는 범어로 시라 (sila;尸羅)인데 어원 실(sil)은 명상하다,
봉사하다, 실행하다에서 온 습관성, 경향, 성격 등을 의미하고,
율(律)은 범어로 비나야 (vinaya;毘奈耶)로 이끌어간다,
없앤다, 규칙, 등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은 계와 율을 하나로 합쳐 ‘계율’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지계 없이 열반 없어
처음부터 계율이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모든 악은 짓지 말고, 모든 선은 힘써 행하며,
제 마음을 맑게 하라. 이것이 곧 부처의 가르침이다’라는 칠불통계게(七佛通誡偈)의 가르침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승단이 구성되며 구성원들의 수행 과정에서 문제가 하나씩 도출됐는데 바로 그 문제를 하나씩 풀어가면서 계율이 정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율장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처님 성도 후 12년 되던 해
한 비구가 일을 냈습니다. 당시는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려웠던지
율장에는 굶어 죽은 사람들로 인해 ‘백골이 낭자’했다고 표현돼 있습니다. 당연히 스님들도 걸식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를 지켜 본 그 비구는 속가로 가 스님들을 위해 공양을 올리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그 비구의 부모님은 “외아들인 네가 출가해
우리 대가 끊겼다”며 “대가 끊기면 모든 재산은 국가에 귀속되니
아이 하나만 낳고 출가하라”고 간청했습니다.
이에 비구는 출가 전 부인과 관계를 맺고 아이 하나를 낳았습니다.
이후 그 비구는 한참 동안 고민해 빠졌습니다.
급기야 그 비구는 부처님에게 그 간의 사정을 전하며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그와 같은 행동은 불법과 먼 것”이라며
계를 정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에 모든 계율을 정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물을 때 마다
그 해법을 찾으며 정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계율을 정한 이유는「사분율」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는 교단의 질서를 잡기 위해서요, 대중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며,
대중의 안락을 위해서입니다.
또한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며,
이미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을 더욱 굳게 하기 위해서라 했습니다.
또 다루기 어려운 사람을 잘 다루기 위해서이며,
부끄러운 줄 알고 뉘우치는 사람을 안락하게 하기 위해서며,
현재의 실수를 없애기 위해서고, 미래의 실수를 막기 위해서며,
바른 법을 오래 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보면 계율은 지키게 하는 데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하는 사람이 흐트러지지 않고 더욱 정진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 되어줌을 알 수 있습니다.
“계는 번뇌의 도적을 붙드는 것이요,
정은 번뇌의 도적을 포박하는 것이며,
혜는 번뇌의 도적을 죽이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또한 “계는 사람의 피부와 같으며, 정은 사람의 살과 같고,
혜는 사람의 뼈와 같다”고도 했습니다.
계는 삼학의 기본임을 강조한 말입니다.
계는 율사만 지키는 것인 줄 아는 분이 참 많은데
불자라면 당연히 출세간을 막론하고
당연히 계율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어쩌면 너무도 당연해서 간과하고 있는 줄도 모르겠습니다.
불자라면 최소한 5계는 받지 않습니까?
그 5계조차도 율사만 지키면 되고
누구 누구는 안 지켜도 된다는 식의 말은 가당치도 않습니다.
지계정신의 나태가 낳은 오판입니다.
조계종은 현재 행자교육원을 통해 인재를 배출하고 있습니다.
정화운동 이전에 이미 이러한 행자교육원을 두고 교육에 힘썼더라면
조계종의 위상은 지금과는 판이하게 달라졌을 것이라 봅니다.
저는 1955년 사미계를 받았는데 그 사미계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1961년 비구계를 받았지만 역시 그 의미를 몰랐습니다.
1985년 해인사 율원 소임을 맡아 율장을 보면서
사미계와 비구니계가 갖는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미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 비구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를
비로소 알았다는 말입니다.
사미계를 받기 전에 사미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비구계를 받기 전에 비구계를 수지하는 뜻을 헤아렸다면
정화운동 이전과 이후의 조계종은 달라졌을 것이라 봅니다.
「사분율」에 따르면 계율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공덕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하나는 이름이 난다는 것인데 타인들로부터 칭송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공양을 많이 받는다고 했고
다른 하나는 사후에 하늘 세계에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능엄경」에서 아난이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계는 율사만 지킨다?
“말법 시대의 중생들은 부처님으로부터 점차 멀어져
삿된 가르침이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넘쳐나게 될 것이니,
그들이 마음을 거두어 삼매에 들고자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에 부처님은 “마음을 거두어들임이 계율이고,
계율로 말미암아 선정이 생겨나고,
선정으로 인해서 지혜가 발하는 것이니
이를 일컬어 세 가지 무루학(無漏學)이라고 한다”고 설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이 말씀에 이어서 음란함과 살생, 도둑질 등을 금하셨습니다.
즉 계율을 지키면서 선정을 닦아야 지혜가 발현된다는 말씀이십니다.
‘계율은 제대로 안 지켜도 도만 깨치면 된다’ 식의
말을 하시는 분이 있는데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부처님은 “만일 음란함을 끊지 않고 선정을 닦으려 하면,
마치 모래나 돌을 삶아 밥을 짓는 것과 같아,
설령 백천 겁이 지나더라도 단지 뜨거운 모래에 불과할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계율을 간과한 해탈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계정혜 삼학 역시 나누다 보니 계요, 정이요, 혜라 하는 것이지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닙니다.
삼학을 함께 실천할 때 열반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계의 그릇이 깨끗해야만 정의 물이 맑아지고,
정의 물이 맑아야 지혜의 달이 나타난다’는 뜻을 잘 새겨야 합니다.
계율을 목숨처럼 여겨야
불자라면 항상 자신의 신심을 점검해야 합니다.
맹목적으로 믿는 것은 맹신이요 광적으로 믿는 것은 광신입니다.
부처님은 정심(正心)을 우리에게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진정 우리는 부처님 법을 진심으로 믿고 있는 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멀리서 찾는 게 아니라 부처님 말씀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이라 하면 ‘팔정도’가 아닙니까?
그 중 정어, 정업, 정명은 계에 해당하는 것이니
자신이 얼마큼 계를 지키고 있는지는 팔정도 실천을 보면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계는 가장 뛰어난 재물이요 햇빛처럼 멀리 비추나니
목숨 마치려 할 때 계행이 벗이 되고 도우리라’했습니다.
계행 없이는 열반에 이를 수 없음을 상기하시며
계율을 자신의 목숨처럼 여기며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이 법문은 조계종 교육원 부설 불교서울전문강당이 12월 8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개최한
‘해인총림 율원 율주 초청 법회’에서 종진 스님이 설한 내용을
요약 게재한 것이다. 이날 주제는 ‘계율과 수행’.
질의응답
종진 스님은 “현대사회에서 계율에도 융통성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단호하게 “융통성은 없다”고 단언했다.
종진 스님은 “계는 헌법과 같으므로 절대 지켜야 하는 것”이라며
“어떠한 방편도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종진 스님은 그 이유에 대해 현재는 “부처님이 안 계시는
무불시대 이기 때문”이라며 계율에 대해 열고 닫는
개차(開遮法)는 “부처님 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재가불자로서 5계를 자주 깨며 참회를 거듭하고 있는데
고민이 많다”라는 질문에 종진 스님은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계에 대해서는
계를 받을 때 대답하지 말라”고 전했다.
종진 스님은 “아마도 술 먹지 말라는 계를 많이 깰 것”이라며
“계를 어겼을 경우엔 반드시 참회를 해야 하지만
참회만 거듭해서는 안 된다”며 “수계식에서 계사가
‘술을 마시지 않겠습니까?’ 하고 물을 때 답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나 종진 스님은 “가능한 한 5계를 받고
지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5. 12월)
출처 : 법보 신문
*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는 첫 번째 부처님은 비바시불, 두 번째는 시기불,
세 번째는 비사부불, 네 번째는 구류손불, 다섯 번째는 구나함모니불,
여섯 번째가 가섭불이고 석가모니불이 일곱 번째다.
이 일곱 부처님을 총칭해 ‘과거칠불’이라고 하는데 칠불통계게는
과거칠불의 공통적인 가르침이다.
칠불통계게는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로
‘모든 악을 저지르지 말고, 모든 선을 행해 스스로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라고 풀이할 수 있다.
악행은 조금도 하지 말고 선행만 하되 그것이 끝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라는 뜻이다.
이는 지극히 평범한 가르침이지만 깨달음의 실천이란 어떤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일러주고 있다.
〈출요경〉에 따르면 중국 당나라 도림선사는 칠불통계게에 대해
“세살짜리도 아는 말이지만 팔십 먹은 늙은이도 실천하기 어렵다”고 말해
실천의 중요성을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