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9년 6월 16일 북한에 제공할 소 1천마리중 1차분인 소 5백마리를 실은 트럭과 함께 판문점을 통해 방북했다.
정주영 회장은 이날 오후 개성을 거쳐 평양에 도착,7박8일간의 방북일정에 들어갔다. 분단 이후 민간차원의 합의를 통해 군사구역인 판문점을 개방, 민간인의 북한방문이 이뤄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새로 개통된 문산-판문점간 통일대교를 지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도착,평화의 집에서 방북기자회견을 가진 뒤 판문점중립국감독위 회의실을 지나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정주영 회장 초청 단체인 북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 송호경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판문점 북측지역 판문각에 나와 정회장을 영접했다. 이번 정주영 회장의 방북은 북한당국이 지난 94년 남북 정상회담 실무회담을 제외하고 김영삼 정부기간 굳게 닫아온 판문점을 민간교류차원에서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있게 했다.
▶1840 중국 아편전쟁
아편전쟁은 식민지개척에 나선 서구 자본주의가 잠자는 동양 봉건 전제주의의 심장에 비수를 꽂은 일대 사건이었다. 영국과 청제국이 주연을 맡은 이 피비린내나는 역사의 무대에서 고통스럽게 탄생한 것이 바로 식민지 홍콩이다. 연대를 따지자면 홍콩할양전에 아편전쟁이 있었고 아 편전쟁전에 아편무역이 있었다. 아편무역은 청나라 강희-옹정-건륭으로 이어지는 1백30여년간의 태평성세가 끝나고 국운이 쇠하는 시기와 맞물려 번성한다. 아편무역이 본격화되기 전 영국은 청과의 무역에서 상당한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영국이 생사, 견직물, 찻잎 등을 수입해갔으나 중화사상에 젖은청 은 대등한 통상 자체를 거부, 영국상품을 거의 수입하지 않았다. 무역 적자를 보전하기 위해 영국이 착안한 것이 아편수출.
18C말부터 아편수입이 본격화돼 청의 은이 수입대금으로 대거 빠져 나가자 은본위제인 청의경제는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1806년 한해 동안 중국이 수입한 아편은 약 27만t으로 추산되며 아 편전쟁 직전인 1838년엔 1800년에 비해 10배나 늘어났다. 도광제는 극 약처방을 동원한다. 당시 호광(호북-호남성)총독 임칙서(린쩌쉬)를 흠차대신에 임명, 아편유입저지 특명을 내린다. 엄정한 판관으로 이름을 날려 ''임청천''이라는 별명을 얻은 임칙서는 열렬한 아편금지론자였으며 강직한 인물이었다. 시골 훈장 아들로 태어나 총독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청대 고관중 외국 문헌과 국제 법에 가장 밝은 사람으로 꼽혔다. 도광제는 그에게 황제의 명령권인 조칙권을 부여, 아편유입저지에 관한한 전권을 맡겼다.
임칙서가 광동성에 도착한 것은 1839년 1월25일. 도착 9일만에 그는 아편을 중간거래해온 중국인 상회에 추상같은 명령을 내린다. ''오랑캐들에게 앞으로 영원히 아편을 들여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 아내라. 그러지 못하면 황명으로 처형한다.''. 이어 임칙서는 영국상인등이 갖고 있던 아편 1천4백25t을 압수, 소 금물에 완전히 녹여 바다로 흘려보냈다. 보복에 나선 영국은 군동원 령을 내렸고 이듬해 6월 원정군을 실은 군함이 마카오해역에 도착했다.제 1차 아편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영국 함대는 남동부해안을 끼고 북상, 천진(톈진) 앞바다까지 와 수도 북경(베이징)을 짓밟아 버릴 기세였다. 1842년 8월29일 청조정은 결국 굴복, 굴욕적인 남경(난징)조약에 도장을 찍는다. 홍콩은 불평등 조약인 남경조약 제3조에 따라 영국에 영구 할양됐다. 1백 55년 전의 일이다. 남경조약엔 아편무역에 대해 일체 언급이 없지만 영국의 아편무역은 이 조약을 계기로 ''무언의 공식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이후 아편무역은 더욱 기승을 부려 늙은 청제국을 막다른 골 목으로 몰아넣었다. 아편무역으로 은이 유출돼 은값이 뛰자 죽어나는 것은 일반 백성들이었다.
은값이 뛴다는 것은 은시세를 기준해 동전으로 세금을 내던 백성들 에겐 실질적인 증세였다. 백성들의 생활이 피폐해지면 다음 순서는 민란이다. 1850년 광서(광시)에서 과거 낙방생 홍수전(훙슈취안)을 중심으로 뭉친 배상제회(일종의 기독교)가 세상을 뒤바꾸겠다고 항거의 깃발을 들 었으니 이름하여 태평천국의 난이다. 임칙서는 바로 이 해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러 가다 병사했다. 아편추방의 기치를 든 것까진 좋았으나 어느것 하나해결하지 못한채 한많은 세상을 등졌다. 급변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간파하지 못한 임칙서는 동 점하는 서세에 깔려 ''압사''했지만 부국강병을 꿈꾸던 그의 치열한 정신은 강유위(캉유웨이) 등 자강파로 이어졌다. 아편전쟁은 임칙서가 죽고도 계속됐다.
영국은 1856년 애로우호사건을 빌미로 청과 2차 아편전쟁을 일으켜 홍콩섬위의 구룡반도 남단과 앙선주(스톤커터스 섬)를 할양받았다. 이어 1898년엔 구룡반도 북부의 신계를 99년간 조차 ''동방명주'' 로 불리는 현재의 홍콩식민지 지도를 완성했다
▶1762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영조 38∼헌종 2) 태어남.
조선 말기의 학자인 다산 정약용 선생이 1762년 오늘 태어났다. 그는 유교에도 밝아, 실학의 여러 갈래를 모아서 완성시킨 대학자로 일컬어진다.
23 세 무렵 이벽으로부터 서학(지금의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얻어 읽은 후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해 신자가 되었다. 몇 번의 귀양살이 중에도 우리 나라의 정치ㆍ경제ㆍ사회를 염려해 정치의 혁신ㆍ노비제 폐지 등을 주장했다. 저서로는 ‘목민심서’ㆍ‘흠흠신서’ㆍ‘경세유표’등이 유명하다.
첫댓글 아하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오늘의 역사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