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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대첩은 1951년 1월 경상북도 문경에서 아군 1개 대대가 적 1개 연대와 3일간 주야로 싸워서 격퇴하여 승리한 전투로써, 우리 전사에서 크게 기록되어 있지 않은 전투지만, 동락리나 화령장 전투에 비견되는 비중있는 전공을 기록한 전투이다.
이 전투는 한국 전사에서 적어도 두 가지의 특징을 보이기에 먼저 그 점부터 밝히고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한 가지는 무기 체계면에서의 특징이다. 이런 테마로 글을 써 본다는 것은 국내 밀리터리 미디어에서는 보기 힘들지만 외국에서는 전쟁, 또는 전투와 관련된 무기의 글을 자주 만날 수가 있다. 이러한 새로운 시각에서 써보기로 한다.
아군은 300여 명의 부대원들이 전원 개인화기로서 M2 카빈 소총을 무장했었다. M2 카빈은 미국에서 권총을 대신하기 위해서 개발한 경량 소총으로, 원래는 반자동 M1 카빈이었으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완전 자동이 가능한 M2 카빈이 나왔다.
전투 부대가 전원 M2 카빈으로 무장한다는 것은 거의 없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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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수에즈 전역 때 시나이의 밀타 고개에 공수 투입 된 아리엘 샤론 대령의 공수 부대는 전원 UZI 9mm 기단단총으로 무장되었는데도 고개 정상의 에밀 헤이탄의 이집트 군 진지를 공격해서 이를 점령했었다.
아시다시피 기관단총은 단거리 무기이고, 대 전투에 주역으로 내 보낼 주력 무기는 아니다. 중동 전사는 기관단총으로만 무장한 부대로 시나이 반도의 전략 요충지를 점령한 것에 대해서 특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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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2 카빈은 어떻게 말하면 순수한 보조 무기이고 방어용 무기이기도하다. 그 살상력에 관해서 장진호 전투 때 참전한 해병 용사들 사이에 불만이 많았었다. 관통력이 약해서 누비옷을 두껍게 껴입은 중공군들이 카빈 소총탄을 여러 발 맞고도 쓰러지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이는 남양에서 일본도를 휘 두르며 돌격하는 일본군에게서도 수차 있었던 현상이었다.
<누비 옷을 입고 참전한 중공군>
더구나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장진호의 추위에서 카빈 총은 걸핏하면 얼어붙어서 작동 불능의 불량한 성능을 자주 보였다.
[영국군의 스텐 기관단총도 이 동결 현상이 심했었다.]
카빈 소총의 성능에 실망한 해병들은 사거리도 짧고 무겁지만 구조가 단순해서 얼어붙지도 않고 근거리에서 살상력도 강한 45구경 M1 톰슨 기관단총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이 카빈의 성능에 문제점을 지리산에서 활동하던 공비들도 알고 있었다. 이태씨가 쓴 ‘남부군’에 보면 총의 성능이 약하다고 본 공비들은 여성 요원이나 비전투원에게만 지급했다고 되어있다.
이런 약한 총기로 무장한 대대가 적 연대 병력과 격돌하여 다섯 번이나 썰물처럼 공격해오는 주야 3일간의 전투를 하여서 적을 물리쳤다.
<카빈 소총과 노획한 소련제 데크챠레프 기관총으로 무장한 미군>
국군 부대가 M2 카빈으로 장비한 경무장 부대인데, 이런 부대에 압도적인 병력으로 공격해온 적 부대가 또 보통 부대가 아닌 북한군 전쟁 기록사에서 크게 평가하는 정예 부대였다.
보통 사람들은 서울을 점령한 중공군들이 최대로 남진 한 것이 평택-안성 수준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중부 전선에서는 자살 특공대 같은 북한군의 한 사단이 추위를 뚫고 남하를 계속, 경북 안동까지 남진했다.
문경 전투의 비중을 이해하기 위해 이 북한군 사단을 자세히 소개해본다. UN군이 한창 철수 중에 있었던 1950년 12월 중순 김일성의 특명을 받은 사단장 김문섭 소장의 북한군 10사단 4,000명 병력은 12월 22일 야간에 강원도 양구 지구에서 한국군 방어 진지 한 곳을 은밀히 돌파해서 태백산맥을 타고 남으로 침투를 개시했었다.
1949년에 10여 차례나 남파했었던 강동 정치 학원의 유격대 경험을 되살려 한국군의 후방을 뒤 흔들 놓기 위한 임무가 주어졌었다. 이들은 영하의 날씨에 아무런 보급이나 후속 지원이 없는 특공 작전을 실행했었다.
각 병사는 실탄과 미숫가루만 배급되어 그것들이 다 떨어질 때까지 알아서 싸우라는 지시가 주어졌다. 적 후방에서 싸우다가 죽는 것이 당연하고 살아 돌아오면 그 것도 괜찮다는 식의 자살적 편도 출동이었다.
10사단은 야간에만 태백산맥을 타고 남행을 계속하였다. 사단 병사들에게는 야간에만 기동하고 산맥의 8부 능선과 소로(小路)만 이용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유엔군의 공습과 국군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서 불을 사용하는 것도 엄금되었다.
<여순 사건뒤 체포된 공비들>
영하 20도가 넘는 추위로 얼어 죽기도 하고 험한 벼랑에서 굴러 떨어져 죽기도 했지만 사단장 김문섭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후방 침투에 성공한 10사단은 3-4일 뒤에 UN군 주 방어선에서 200여리나 떨어진 강원도 평창- 영월지구에 잠입에 성공하여, 일부는 그대로 잠복하고 다른 부대는 더욱 남쪽으로 침투, 평창에서 200-300리나 떨어진 충북 단양과 경북 안동 방면까지 내려가 산속에 은신하고 중공군이 대공세를 [3차 공세] 펼 때까지 기다렸다.
1951년 1월초 공산군이 대공세를 취하자 10사단은 행동을 개시했다. 이들은 죽음을 걸고 미친 듯이 날뛰었다. 이들의 배후 교란 활동으로 국군이 큰 타격을 받았다. 대공세와 더불어 중부 전선의 전방에서는 10사단 모 부대인 북한군 5군단이 거세게 몰아 붙였다. 군단장은 무식하고 잔인했던 최현 중장이었다.
후방에서도 북한군이 보급로를 위협하는 기습을 감행하고 전면의 북한군 공세도 거세자 전선의 국군 3군단은 할 수 없이 북위 37도선인 충북 단양까지 철수 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 10사단은 완전히 게릴라화해서 영천 영주 원주의 보급로를 수시로 출몰하며 공격했다. 특히 전방으로의 보급선이 안동에서 한동안 완전 두절되고 말았는데, 이제는 대구마저도 이들에게 내침을 받을 우려성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제야 이들의 존재가 위협적인 사실을 알게 된 UN군 본부는 대병력을 동원해서 북한군 10사단을 토벌하기 시작했다. 토벌군 주력으로 앞장선 것이 한국군 2사단과 장진호에서 철수한 미 1 해병사단이며, 여기에 태국 군 벨기에 군, 캐나다 군까지 투입되었다. 한국의 전투 경찰 병력만 6,000여명에 달했고, 토벌 부대의 총 병력은 약 6만 5천명이나 되었다.
북한군 4,000 명의 부대가 전방에서 큰 역할을 할 대부대를 후방으로 유인해서 붙잡아 놓았던 것이다.
북한 측 기록은 10사단의 활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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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후에 들어간 부대들은 작전 기간에 현지의 인민 유격대와 협동 공작으로 미군 제 1해병 사단을 비롯한 국방군 부대의 전선 진출을 막아 냈으며 경찰과 반동들을 처단하고 적의 후방을 교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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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사단은 두 달 넘게 설쳐대다가 1951년 2월 23일, 김일성으로부터 전선 복귀 명령을 하달받고 한달간 추격 토벌에 쫓기며 산맥을 타고 3월 24일에 강릉 전선을 빠져 나가 북한 모부대인 5군단에 합류하였다. 10사단은 두 달 전 출발할 때 4,000명이었으나, 살아 돌아온 것은 단지 1,000여명에 지나지 않았었다.
<시청앞 대로를 행진하는 북 105 전차 여단- 북한은 안동까지 침투한
10사단을 서울을 점령한 105전차 여단 못지 않게 찬양[?]한다>
북한은 북한군 10사단의 활약을 크게 평가한다. 6ㆍ25전사에 서울 침공의 선두에 섰던 105전차 여단이나 남해안에 최초로 도달한 6사단과 같이 대 전공을 세운 수훈 부대로 기록하고 있다.
이 정예 사단의 1개 연대를 경북 문경에서 M2 카빈으로 무장한 한국군의 대대가 경찰과 청년 방위대, 그리고 미공군의 힘을 빌려 격파했던 것이다.
1950년 일본에서 동해안 축선의 지휘를 담당할 미 10군단이 편성되었다. 군단장은 6ㆍ25전쟁사에 만용스러운 지휘로 구설수에 올랐던 아몬드 장군이다.
<맥아더에 대한 충성심은 대단했지만 저돌적 성격이어서 무리한 명령을 자주 내렸었다>
10군단에 해병 1사단과 육군 7사단이 배속되어서 함경도에서 유명한 장진호 전투 등을 치루게 되었으며, 군단 본부는 흥남에 위치하고 있었다. 군단이 편성되었을 때 국군의 지원을 받아 군단 직속의 국군 특별 공격대대가 편성되었는데, 적정 정찰과 전투가 주요 임무였다.
특별 공격대대[대대장은 육사 5기 배동걸 소령]는 흥남 일대에서 흥남 철수 작전의 엄호 임무를 끝내고 연포 비행장에서 수송기를 타고 철수, 당일 부산 수영비행장에 도착하였다.
25일 동 대대는 부산 북방 50km 지점에 있는 신불산[1209m]으로 전진하여 잔적 소탕 업무를 맡았다. 부산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소탕 작전이었다. 이어서 북상하여 경주-영천을 거쳐 1951년 1월 10일 안동에 전진하였다.
<6ㆍ25전쟁 중의 국군 모습>
한편 북한 지역에서 철수한 UN군과 국군은 38선에 연하여 방어중 중공군의 1월 1일 공세로 삼척-오산선으로 남하하여 저지선을 구축하였다. 이때 중부 지구에서 미 10군단과 한국군 3군단 사이에 큰 간격이 생겨 이곳으로 북한군 10사단이 홍천-횡성-원주-제천-단양선으로 침투하였다.
10군단장 아몬드 소장은 마산에 있는 미 해병 제 1사단을 안동으로 전진시켜 적의 남하를 저지토록 하였다. 이와 동시에 특별 공격대대는 1월 11일 적의 행방을 탐색하기 위한 전진을 명받았다. 동 대대는 1중대 [윤성모 대위], 2중대 [손장래 중위], 3중대[정욱화 소위]로 편성된 300여명이며 장비는 기본이 M2 카빈 소총, 자동소총[BAR], 기관총[LMG] 등이고 3명의 미 고문관과 통신 하사관이 배속되었다.
<경상북도 문경군>
1월 12일 대대는 문경군 동로면의 면소재지 장기 부락에 도착하였다. 이 곳은 면사무소, 지서, 우체국 , 동노초등학교 등이 있으며 주민 300여명, 주위는 100-600m의 고지로 둘러싸여 었다. 진입로는 구불구불한 일방 통로이다. 지서원은 16명, 청년 방위대원은 42명이 조직되어 동네 방어에 나서고 있었다.
대대는 13:00시에 도착하여 지서 뒤편 적성리의 밭 주변의 얼은 땅에 진지를 구축하고, 동쪽의 돌담[1m]을 이용한 전면 진지 편성을 완료한 후 야전 숙영에 들어갔다.
<문경군 동로면 지서 현재의 모습>
대대장과 각 중대장들은 학교 교실에서 숙영을 원했으나, 작전장교 손장래 중위[육사 9기]가 적정이 불투명하기 때문에 안전을 고려하여 야외 숙영을 주장 채택된 것이다.
6ㆍ25전사에서 크게 배워야 할 경계의 원칙이 있다. 전쟁중 당한 기습의 대부분이 케이스가 민가에 접근, 식사, 또는 취침등 을 하다가 당한 것이다. 민가 취침중에 당한 최초 케이스로 여순 사건 뒤인 1949년 9월 광양사건을 들 수가 있다.
토벌에 나선 15연대의 1개 연대 병력이 초등학교 교실에서 취침하다가 반란군의 습격을 받고 수백명이 꼼짝없이 포로가 되었었다. 다행히 반란군들이 과거의 전우들이었던 포로들을 죽이지 않고 노획품 운반만 시키고 모두 방면했었다.
이날 손 장래 중위의 건의는 정확한 판단에서 나온 것이었다. 적정 불투명지에서는 절대 민가를 피해야 한다. 이 원칙은 북한군 10사단이 남하할 때 받은 기본 엄수 명령이기도 했다.
한편 단양으로 넘어가는 고개에는 동네 노인들과 청년 방위대원들이 자진하여 군인을 따라 매복을 나갔고 또한 좌측 문경방면에도 경계 부대를 배치하였다. 20:00 시경에 단양 고개의 아군 매복조 앞에 적이 나타나 총격전이 벌어져서 청년 방위 대원이
달려와 적과 교전중이라고 보고하였다.
대대는 즉시 전투태세를 갖추고 대기하였다. 이때 북한군 제 10사단의 1개 연대는 어떻게 아군의 상황을 알았는지 아군의 주위를 포위하였다.
1월 13일, 05:00시를 기하여 북쪽 적성리와 동쪽 능선에서 복소리 꽹과리 소리를 신호로 기관총과 소총으로 집중사격을 가해왔다. 이어서 동쪽의 적이 1중대 정면으로 공격해왔다. 10cm의 하얀 눈이 쌓여 있어 시계는 비교적 양호하여 50m 전방은 보였다.
적은 근접하면서 따발총으로 난사를 하였다. 그러나 아군은 돌담을 이용하여 적이 50m까지 접근했을 때 M2 카빈 소총과 기관총으로 응사하여 30분간의 사격전 끝에 적은 무수한 시체를 유기하고 퇴각을 하였다.
적이 퇴각하자 대대장은 지휘관 회의를 열어 “적정이 불분명하지만 현재 우리는 포위된 상태이다! 후퇴하다가 죽느니 보다 최후의 일인까지 진지를 사수하자! 날이 밝으면 증원 부대가 올 것이다!”
적의 제 2차 공격은 날이 밝아오자 이번에는 북쪽 적성리 쪽에서 아군 2중대 정면에 시작되었다. 적은 3파로 공격해와 06:00시에는 진지가 돌파되려 하였지만 좌우익 1ㆍ3중대가 M2 카빈으로 공격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제 3차 적의 공격은 3중대 정면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은 지서의 주위 석축 방벽이 구축되고 토치카 진지로 구성되어 훌륭한 방어진지가 되었다.
<일선 개인호, 문경 전투에서도 이런 개인호가 마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적은 노출된 논바닥으로 전진해오다가 아군의 급사격과 수류탄의 세례를 받고 무수한 시체를 남기고 후퇴하였다. 적은 3차 공격도 실패하자 11:00시경에는 82mm 박격포로 사격해왔다. 이날 오후에야 대대는 본부와 무선 교신이 되어서 지원 부대를 요청하였다.
그날 밤 자정을 넘기고 새벽 01:00에 적은 북, 꽹과리, 호각 등의 신호에 따라 아군 대대의 3개 방면에서 야간 총 공격을 가해왔다. 아군은 대대장의 명령으로 20-30m 지근거리 조준 사격과 수류탄으로 반격하였는데, 적은 날이 밝으면서 퇴각하였다.
09:00, 군 정찰기 L-19가 상공에 나타나서 교신을 하고 떠났다. 09:30시에 F-51 무스탕 전폭기가 4기가 날아와서 미고문관의 유도에 의하여 적진에 네이팜탄과 기총 소사를 하여 아군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네이팜탄을 투하하는 F-51 무스탕기>
10:00, 헬리콥터가 실탄과 식량을 초등학교 운동장에 투하하였는데, 이를 운반하다가 미 연락 장교와 통신병이 적의 사격으로 부상을 입었다. 또한 적은 82mm 박격포 사격을 해왔으나, 교실 지붕에 한 발이 명중했을 뿐 기타는 불발탄이었다.
<소련제 82mm 박격포>
이 때 청년 방위대원들이 탄우 속을 뚫고 필사적으로 왕복하면서 보급품을 옮기는데 성공하였다. 그들은 다시 진지로 돌아와 99식 소총을 가지고 군인과 경찰의 사이사이에서 싸웠다.
10:30, 재차 4기의 F-51기가 적진을 폭격함으로서 낮 동안 적의 공격은 없었다. 한편 10군단 본부에서는 이날 기갑부대를 파견했는데 아군 진지 3km 지점에서 적이 매설한 지뢰에 선두차가 파괴되자 후속 차량의 진로가 차단되어 지뢰 제거 작업을 하느라 제 시간에 특별 대대와 합류하지를 못했다.
이날 밤에 적은 전일의 수법대로 제 5차 공격을 가하여 왔다. 아군은 근거리에서 수류탄과 M2 카빈으로 적에게 타격을 가했다. 지서원과 청년 방위대원도 필사적으로 적을 막아 냈다. 15일의 날이 밝히면서 적은 공격을 중지하고 일부 엄호 부대만을 남기고 단양 방면으로 후퇴를 하였다.
그리하여 11:30시 경에는 북한 엄호 부대도 완전히 퇴각을 함으로서 특별대대 장병들은 3일 만에 호 안에서 나올 수가 있었다. 영하 12-13도의 혹한 속에서 적군에 완전 포위된 가운데 군인, 경찰, 청년방위대원 그리고 주민들이 합세하여 마침내 적군을 물리친 것이다.
전장을 정리한 결과 적의 유기 시체 1247구, 포로 대좌이하 군관 7명, 사병 72명, 부상 900명[이는 적성리 주민들이 부상자들을 단양으로 후송시키면서 계산 된 추정수], 노획 무기 소총 370정, 82mm 박격포 2문, 아군 피해 전사 9명, 부상 2, 미군 부상 2, 민간인 사망[수류탄 사망] 경찰 부상 1, 청년 방위대원 전사 1명 이었다.
이 전투는 앞에서 밝혔듯이 당시의 부대가 미군에 배속되어 싸웠기에 주목을 받지 못했는지 한국 전사에서는 큰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풀숲의 뱀처럼 후방으로 새어 들어와 설쳐댄 북한 정규군의 병력 다수에게 칼빈으로만 무장한 대대와 경찰과 방위대원이 일심단결하여 격파했다는 것은 대단한 승리라고 하겠다.
이 문경 전투에서 북한 10사단은 정규군으로서의 전투력을 대폭 잃었다. 이후 10사단은 빨치산식의 유격활동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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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담이지만 한국군도 1951년 2월 북한 후방으로 600명의 특공대를 파견하였다. 월남전의 영웅으로 유명한 채명신 중령이 대장인 이 부대는 백골병단이라는 부대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 부대도 10사단이 남한에서 했듯 북한군 후방을 휘젓고 다니며 남한 공비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남하하던 길원팔을 잡아 죽였고 여러 차례 북한군 부대들을 기습해서 섬멸하였다.
이 부대는 두 달뒤 침투 요원의 절반인 300명만 생환했었다. 백골 병단의 파견은 아마도 북한군의 10사단 남한 침투에 대한 대응 침투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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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있었던 문경의 동로면 현지에는 기념비가 건립되어 있어 위대한 전투를 겨우 후세에 전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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