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대종사(大宗師) 2
“좀 자세히 말해 주시오.”
궁금하다는 듯 자신에게 바싹 붙어 앉는 마대위를 흘겨보며 혼세마왕이 물었다.
“대종사님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게냐?”
“그렇소.”
“흘흘, 호기심이 많은 놈이로군.”
마대위는 멋쩍은 듯 머리카락을 한차례 쓸어 넘긴 후 툴툴거렸다.
“뭐…, 30년 전에 석순 위에 올라가 명상에 드셨다는 분이 아직까지 살아 계시다고 하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서 그런 거요.”
“좋다, 대종사님에 대해 이야기해 주마.”
혼세마왕이 옛일을 회상하는 듯한 표정으로 느긋하게 말문을 열자, 마대위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기 위해 편안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35년 전, 그러니까 이곳으로 잡혀오기 5년쯤 전이었다. 산동 지방을 지나고 있을 때였지. 당시만 해도 노부의 외모는 지금과 많이 달랐느니라.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피부색도 피처럼 붉어 사람들이 적발염라라고 불렀단다. 어쨌든 그곳에서 너만한 꼬마 녀석을 만났는데, 그놈이 노부를 알아봤는지 강호의 해악이니 뭐니 하면서 덤비더구나. 한방에 요절내려다 놈이 악가권을 쓰는 것을 보고 점잖게 타일렀지.”
“악가권이요?”
“허, 네놈은 산동악가도 모른단 말이냐? 산동악가는 강호사대세가 중 하나로 권법이 뛰어난 곳이란다.”
마대위는 그제서야 알았다는 듯 머리를 끄덕인 후 다시 물었다.
“음, 그래서요?”
“그런데 그놈은 무림의 정의 운운하면서 계속 노부를 공격하는 게야. 내 하도 기가 차서 잠시 놈이 하는 짓거리를 두고 봤단다. 그러다 문득 그 녀석 뒤쪽에 서 있는 예쁜 계집아이가 보이더구나. 계집아이를 보는 순간 왜 그놈이 죽기 살기로 노부한테 달려드는지 곧 눈치 챌 수 있었지. 분명 계집 앞에서 자신의 무위를 뽐내고 싶었던 게야. 그래서 자신의 주제도 모르고 내게 덤벼든 대가로 작은 교훈을 내려 주기로 결정했지. 적양멸천장으로 놈을 조금 그을려 주는 정도로 말이야.”
“그을려 주었다고요? 어떻게요?”
“뭐, 심하게 손을 쓴 건 아니다. 그저 놈의 머리카락과 눈썹을 모두 태우고, 입고 있던 옷을 재로 만들어 알몸으로 만든 것뿐이지.”
상상이 가는지 마대위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큭큭큭. 그,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혼세마왕은 어깨를 한차례 으쓱 하더니 별것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노부에게 당한 게 분했는지 알몸으로 길길이 날뛰지 뭐냐. 불공대천의 원수니 어쩌니 하면서 말이야.”
“큭큭…, 그럼 계집아이는 어떻게 하더이까?”
“마치 못 볼 걸 봤다는 듯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가리고 쏜살같이 도망가더구나. 어쨌든 노부는 놈의 엉덩이를 걷어차 지근지근 밟아주었지. 그런데 허, 젊은 놈이 도망치는 데는 절정고수더구나.
노부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허연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도망치는데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마대위는 웃음을 멈추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그럼 별 일 아니네요.”
“그런데 그놈이 그날 밤 다시 찾아온 게야. 그것도 원군을 데리고 말이지.”
“도대체 누굴 데리고 왔는데 그러시오?”
그때 일이 생각났는지 말을 하던 혼세마왕은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어지간한 놈이 왔으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텐데…, 젠장! 철권 악무위가 직접 찾아올 줄 누가 알았겠느냐.”
“철권 악무위? 그건 또 누구요?”
“누구긴 누구야, 산동악가의 가주지. 그 어린놈은 악무위의 독자였고 말이다.”
마대위는 다음 말을 듣지 않아도 뻔히 알겠다는 듯 실소를 흘리며 혼세마왕을 쳐다보았다.
“큭큭, 그 자에게 된통 당했겠구려.”
혼세마왕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이놈아, 당하긴 누가 당해! 철권 악무위가 비록 강호백대고수 안에 들어가는 고수라지만 노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다만, 뭐요?”
“그만한 고수를 물리치자면 노부도 전력을 다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양기가 과도하게 끓어올라 이성이 마비될 위험이 있었던 게야. 안 그래도 심맥에 무리가 가서 주화입마에 빠질 위험이 높아진 상태라 조심하고 있던 노부에게는 무척 위태로운 상황이었지.”
마대위는 궁금하다는 듯 두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래서 어찌 됐소? 영감님이 그대로 맞아 주진 않았을 테고.”
“별 수 있나. 그냥 싸울 수밖에. 철권 악무위와 한참을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묘한 기분이 들더구나.”
말을 하던 혼세마왕은 별안간 마대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 이거 왜 이러슈?”
그러나 혼세마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실눈을 뜨며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넌 모를 게다. 무학의 새로운 경지를 여는 신비로운 체험을. 온몸의 신경이 마치 검 날처럼 날카로워지면서 만물이 자신의 마음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듯 느껴지고, 찰나와 영속의 시간이 자기 의지 속에서 숨 쉬고 있는 듯한 그런 신비로운 느낌을 말이다.”
혼세마왕은 그때를 회상하는 듯 잠시 침묵했다.
“그 순간 느닷없이 엄청난 쾌감이 노부의 몸 구석구석에서 일어나 척수를 관통하더구나. 그래서 노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온 산천을 울리는 듯 했지. 자칫하면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미 노부의 육신은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에 빠지고 말았단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태가 적양멸천장이 대성을 향해 치닫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지. 그리고 노부는 밀려드는 극도의 쾌감에 다시 이성을 놓아 버렸던 게야.”
말을 하던 혼세마왕은 존경어린 눈빛으로 다시 석순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대종사님께서 노부의 이십사대혈을 동시에 점하지 않으셨다면 노부는 아마 그대로 미쳐서 죽고 말았을 테지.”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대위가 탄성을 내뱉었다.
“허! 그러면 대종사님께서는 언제 나타나신 거요?”
“글쎄…, 그건 잘 모르겠더구나. 혈도를 제압당해 쓰러지는 찰나 노부는 이성을 되찾았고, 주변 모습을 둘러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지.”
“왜 그랬수? 도대체 뭘 보았기에…….”
혼세마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반경 십 장 내에 남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더구나. 사람이며 나무며 심지어 바위까지…,
전부 노부의 장력에 녹아 버렸던 게야. 땅바닥까지 모조리 걸쭉한 액체로 변한 채로 말이다.”
마대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대종사님께서는 어떻게 영감님을 제압했다는 거요?”
“대종사님께서는 그냥 허공에 떠 계셨단다.
그런 신법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지만 그분은 분명히 그렇게 계셨지. 그리고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뭐라고 말이요?”
혼세마왕은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이야, 너는 길을 잘못 들어 남을 해치고, 자신까지 해치고 있구나.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삶을 살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말을 듣던 마대위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아!”
혼세마왕은 석순을 올려다 보며 경의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그때 노부의 눈에는 대종사님이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단다. 마치 관세음보살의 현신인 것 같았지. 그래서 그 자리에 엎드린 채 대성통곡을 했단다.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던 노부의 과거가 부끄럽기도 하고, 수십 년간 강호에서 마인 취급을 받으며 다른 사람의 따뜻한 손길 한번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 서럽기도 해서 말이다.”
어느새 혼세마왕의 두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 맺혔다.
“헌데 대종사님께서는 노부를 일으켜 세우시더니 돌연 단전과 등에 손바닥을 대시는 게야. 그리고는 노부의 내력을 하나도 남김없이 흡수해 가시더구나.”
“그, 그래서 어떻게 됐소?”
“처음엔 노부의 무공을 폐지시키려는 줄 알았지. 그렇지만 그게 아니었지 뭐냐. 대종사님께서는 노부의 내력에 가득 차 있던 화독을 모두 정화하신 후 다시 돌려주셨던 게야.”
마대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그럴 수도 있소?”
“그럴 수도 있냐고? 당연히 불가능하지. 하지만 대종사님께서 몸소 실현해 보이셨으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겠니.”
마대위는 머리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허긴 그렇구만…….”
말을 하던 혼세마왕의 두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대종사님께서는 노부의 화독을 받아들이신 후유증으로 보름 동안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르셨단다.
음식을 드시지 못한 것은 물론이요,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지. 하지만 저분은 상상하기 힘든 고통 속에서도 그저 미소만 지으셨단다.”
혼세마왕의 얘기를 듣고 있던 마대위가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나머지 네 명의 노인도 두 눈이 빨갛게 충혈 되어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분위기였다.
“그럼 영감님들도 그런 식으로 대종사님을 따르게 된 거요?”
마대위의 질문에 노인들은 목이 메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대종사
잠시 후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스른 혼세마왕이 말을 이었다.
“대종사님께서는 우리뿐만 아니라 강호를 돌아다니시며 수많은 마인에게 새로운 인생을 열어주셨지. 그 누구보다 정의로운 분이셨지만 우리 때문에 정파 놈들에게 마두의 낙인이 찍히신 게야. 허나 그분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를 감싸주셨단다.
그런데 사마(四魔) 그 죽일 놈들이 배신을 하는 바람에…….”
노인들은 사마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짙은 살기를 뿜어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도대체 사마가 누구요?”
“우리처럼 대종사님 덕분에 마공의 해악에서 벗어나 그분을 따르던 자들이지. 한때 우리와 함께 구마왕이라 불리기도 했단다.”
“아, 그랬구려.”
혼세마왕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기 어려운 듯 거세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헌데, 그놈들이 정파와 내통해 대종사님께 사천당문의 무형지독을 몰래 뿌린 게야.”
마대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대종사님께서는 강호 무림을 위해 분명 훌륭한 일을 하셨는데 정파에서 왜 그딴 짓을 한단 말이요?”
“생각해 보거라. 천하에 그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우리 오마왕과 삼십육마군이 모두 저분을 따르고 있었는데 그 세력이 어떻겠느냐?”
그제서야 이해가 됐는지 마대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내가 제령에 있을 때도 새로운 건달패거리가 나타나면 관부에 밀고를 하거나 돈을 찔러주고 그놈들을 밟아버리곤 했소. 더 커서 우리 조직에 위협이 되기 전에 싹을 잘라야 하니 말이요. 생각해보니 그 대단하다는 무림도 우리 건달들 세계와 별 다를 게 없네.
무림인이라면 모두 멋지게 싸우는 줄만 알았는데 비열한 놈들은 어딜 가나 있구만.”
“허…, 그놈 누가 건달 아니랄까봐 말하는 것 하고는. 하긴 네 말이 틀리지는 않다.
어찌 보면 무림만큼 추악한 곳도 없을 게다. 어쨌거나, 당시 대종사님을 중심으로 뭉친 우리의 힘은 가히 천하를 뒤엎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러니 정파 놈들이 마두라 낙인찍은 우리들이 뭉치는 것을 달가워할 리 있겠느냐.”
“그럴 수도 있겠구려.”
“잘 듣거라, 천하의 정세란 한 개인의 의도나 노력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단다. 정파는 대종사님의 협행을 또 다른 마교와 같은 세력을 키우고 있는 걸로 여겼던 게지.”
문득 마대위는 자신의 단전을 파괴한 무당파를 떠올리며 말했다.
“정파 놈들이 하는 짓거리가 다 그렇죠, 뭐. 그건 그렇고…, 대종사님을 따르던 사마는 왜 그분을 배신한 거요?”
혼세마왕은 으드득 소리 나게 이를 갈았다.
“사마, 그 쳐 죽일 놈들은 처음부터 대종사님을 해칠 목적으로 접근했던 게다.”
마대위는 흠칫하며 되물었다.
“아니, 그럼 대종사님 같은 분에게도 적이 있었단 말이요?”
“당시 대종사님의 무공은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에 올라 만독불침(萬毒不侵)은 물론, 더 나아가 금강불괴(金剛不壞)를 거의 완성한 경지였단다.
그러니 대종사님께서 무형지독에 중독 되셨다고 해도 때맞춰 암습을 당하지 않으셨다면 어찌 정파인들이 그분을 핍박하고, 또 삼십육마군을 죽음에 이르도록 할 수 있었겠느냐.”
말을 듣던 마대위는 마치 자기가 암습을 당한 것처럼 격분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암습? 아니, 그럼 대종사님께서는 무형지독에 중독 된 걸로도 모자라 암습까지 당하셨다는 거요?
도대체 영감님들은 뭘 하고 자빠져 있었기에 그분이 암습을 당하도록 내버려뒀단 말이요?”
일순 혼세마왕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마대위의 입에서 자신들을 책망하는 말이 튀어 나올 줄 몰랐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천하의 오마왕인 자신들에게 뭘 하고 자빠져 있었느냐는 말에는 어이가 없어 화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곧 혼세마왕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안 그래도 오랜 시간 그때 암습을 막지 못해 대종사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지 않은가.
“아, 어서 말 좀 해 보슈! 정파 놈이요?”
그때 마대위가 금마동에 들어왔을 때부터 언제나 과묵한 얼굴이었던 수라마왕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부끄럽게도 우리는 암습을 한 놈을 막지 못했다.”
마대위는 수라마왕의 눈치를 보며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참나, 삼십육마군과 자칭 오마왕이라는 영감님들의 철통같은 호위를 뚫고 들어와 암습을 했다는 건 도무지 이해하기가…….”
혼세마왕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의 음성에는 짙은 자책감과 회한이 서려 있었다.
“휴…, 수마의 말이 맞아. 우리가 그 자를 막지 못해 대종사님께서 해를 당하신 게야.”
마대위는 자세한 상황을 꼬치꼬치 캐묻고 싶었으나 오마왕의 안색이 침울한 것을 보자 더 이상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대신 주먹으로 땅바닥을 치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씨팔, 거지같은 이놈의 세상…….”
잠시 회한에 잠겨있던 혼세마왕은 고개를 들고 다시 입을 열었다.
“대종사님께서 무형지독에 중독되시고 치명적인 암습까지 당하신 후, 우리는 모두 그분과 함께 정파의 포위망에 갇히게 됐단다.
당시 정파 쪽에서는 장로급 이상의 고수만 그 수가 백여 명이 넘었었지. 삼십육마군과 우리 오마왕은 죽기를 각오하고 대종사님을 보호하기로 맹세했단다. 하지만 대종사님께서는…….”
마대위는 답답했는지 다음 말을 재촉했다.
“뭐라고 하셨소?”
“그러지 말라고 하시더구나. 수많은 생명이 죽게 될 것이라고. 대종사님께서는 이미 자신의 생사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으셨던 게야.”
대종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마대위의 놀라움은 컸다.
삼십육마군과 오마왕이 죽음을 각오하고 정파인들과 싸웠더라면 충분히 양패구상(兩敗俱傷)에 가까운 타격을 입힐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종사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이 죽음으로써 수많은 생명을 살리려 하지 않았는가.
마대위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탁 쳤다. 대종사야 말로 자신이 꿈에도 그리던 대형이었다.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쫄따구들을 위해 목숨까지 웃으며 내버릴 수 있는, 건달이 가져야 할 필수 덕목인 주먹과 의리를 대종사는 다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대종사를 만날 수 있었다면 형님으로 평생 모셨을 거라고 마대위는 생각했다.
그동안 혼세마왕의 말은 계속되었다.
“우리는 대종사님을 돌아가시게 놔둘 수 없었지. 그래서 정파 놈들과 협상을 했단다.”
“어휴, 답답해! 그런 새끼들하고 무슨 협상을 한단 말이요!”
그 당시 기억이 떠오르는지 혼세마왕은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었느니라. 정파인들에게 삼십육마군은 모두 자진을 하고, 대종사님과 우리 오마왕은 무공을 폐지해도 좋으니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했단다.
물론 우리가 살고자 했던 건 대종사님의 수발을 들기 위해서였고.”
“대종사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
당연하다는 듯 혼세마왕은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 그러셨지. 하지만 삼십육마군은 대종사님께 절을 올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심맥을 끊어 자진했단다.”
마대위는 당시의 상황을 상상해보다 찌르르 가슴이 저려옴을 느꼈다.
모시는 형님을 위해 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말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종사님께서는 그 모습을 보시더니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하시면서도 미소를 지으시더군. 그리고 당신의 단전을 파괴하던 무당파 고수에게도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이셨지. 그때는 왜 그러셨는지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혼세마왕은 경외심이 가득 담긴 표정을 지으며 석순을 바라보았다.
“저분은 이미 우리 오마왕과 삼십육마군의 충정과 목숨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의 생명조차 연연하지 않으실 만큼 대도의 깊은 경지에 들어 계셨던 게야.”
마대위는 그 말의 의미가 가슴에 잘 와 닿지 않았다. 그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건 좀 이해하기 힘들구려. 대종사님께서는 자신을 돌보지 않으실 만큼 타인의 생명을 아끼셨다고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소?”
“우리 같은 범부가 어찌 감히 저분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절대의 경지는 말이나 글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납득이 되지는 않았지만 머리를 끄덕이며 석순을 다시 올려다보는 마대위의 두 눈에는 대종사에 대한 존경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늙은 소나무의 껍질처럼 거칠고 두꺼운 석회석 조각들이 대종사의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 안에서 시간을 잊고 세상과 떨어진 채 깊이 잠들어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이 희미하게 비쳐졌다.
위대함!
마대위는 위대하다는 말로도 대종사의 진면목을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석순 앞에 우두커니 섰다.
그리고는 석회석 속에 감추어진 대종사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백설처럼 흰 수염이 멋지게 뻗어 내렸고,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는 한 노인의 형상이 천천히 만들어졌다. 그러나 마대위는 이내 머리를 가로 저었다.
은연중에 은혜원 고아들의 글 선생인 하 노사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야, 하 노사의 학문이 높다지만 어찌 대종사님과 비견될 수 있겠어.’
마대위는 다시 새로운 인물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굳게 다문 입술과 우뚝 선 콧날에서 불굴의 의지를 느끼게 했던 사람 한없이 자애로운 눈빛을 지닌 한 중년인이 그려졌다.
‘대부님…….’
마대위가 떠올린 사람은 바로 은혜원의 대부였다.
대부는 부모를 잃고 구걸로 연명하고 있던 자신을 거두어 주었고, 한평생 고아들에게 헌신하며 살았던 사람이다.
잠시 대부를 생각하던 마대위는 또다시 머리를 가로 저었다.
‘아냐, 대종사님께는 무언가 다른 게 더 있을 거야.
저분이 대부님 같은 인물이었다면 절대로 삼십육마군의 죽음을 허락하지 않으셨을 테니까.’
마대위는 태령진인의 인자한 모습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자기가 만났던 사람들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있었던 무당 장문인 청학진인을 그려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대종사와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대종사는 이미 범인의 상상을 벗어난 ‘초월한 자’였다.
마대위가 대종사의 위대한 정신 영역을 엿보고 그것을 형상화한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지도 몰랐다.
마대위는 그저 경외의 시선으로 조용히 석순을 응시할 뿐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