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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설교 | |
성경낭독 : 왕하 2:1-12; 막 9:2-9 본문 : 욘 1:1-3; 왕하 14:23-27 제목 : “요나서는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 |
요나서는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
나무위키에서 ‘피노키오’에 대해 검색해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몇 가지 접할 수 있습니다.
우선, 피노키오의 아버지 직업은 목수입니다.
이 아버지의 이름은 ‘제페토’인데, 제페토는 이탈리아 이름으로는 ‘주세페’이고, ‘주세페’는 ‘요셉’을 이탈리아어로 발음한 것입니다. 즉 피노키오의 아버지는 목수였고, 이름이 ‘요셉’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목수였고, 이름이 ‘요셉’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설정을 통해, 피노키오의 작가 카를로 클로디가 이 이미지들을 성경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심지어 피노키오에다 예수님의 이미지를 넣으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피노키오 동화에서는 초반부에 피노키오가 예수님의 목조 조각을 만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피노키오는 이 예수님 조각상을 보고(자기도 똑같이 나무로 만들어졌으니까 여기 피노키오와 예수님 상간의 동등적 연결이 있다)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 아저씨(예수님)를 좋아하는데 왜 저는 안 좋아할까요?
어느 모로 보아도, 작가가 피노키오에 예수님을 투사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피노키오가 이후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두고 사람들을 치유하는 예수님을 연상케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피노키오의 후반부에는 피노키오의 부활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게 진지하고 세밀하게 구상된 작업이었든, 아니면 단순히 작품을 만들 때 성경에서 예수님의 이미지만 빌려왔든, 피노키오의 작가가 피노키오 이야기에서 ‘예수님’을 투영하려고 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피노키오 이야기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이랄 수 있는 물고기 뱃속에 갇히는 이야기는 대단히 흥미로워집니다. 만약 피노키오의 작가가 피노키오를 통해 예수님을 투영하려고 했다면, 물고기 뱃속에 갇힌 이야기는 요나서에서 가져온 것이니 ‘예수님’과 ‘요나’가 한꺼번에 묶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실 피노키오의 작가가 이 정도로 성경 신학적 깊이를 가지고 이 동화를 썼을거라고까지 생각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몹시 흥미로운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죠. 적어도 작가는,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성경이 가르쳐주는 중요한 연결선과 똑같은 선을 하나 그은 셈입니다. “예수님과 요나”라는 중요한 선을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부터 요나서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서론에서 말씀드린 대로, 요나서를 읽을 때에도 우리의 핵심, 중추가 될 것은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이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구약도 구속사적으로 읽어야 하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요나서는 단지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인용하신 내용 정도만의 깊이를 갖고 있는 책은 아닙니다. 요나서에는 여러 가지 주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고, 그것을 잘 읽어내기 위해서는 ‘구속사적 시각’이 필요합니다. 아마도 주변에서 흔히 보셨겠지만, 요나서를 구속사적으로 잘 읽지 못하면 이 이야기는 단순하게
불순종한 선지자, 곧 우리도 불순종하지 말자
정도의 이야기가 되거나,
아니면, 우리나라처럼 전도와 선교가 크게 강조되어 있는 교회들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제국에조차 선교사를 보내셨다
라는 정도의 선교 지향적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를 올바르게 읽는 방법을 배우고, 그 시각으로 요나를 읽으면, 여기에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애끓는 사랑이 들어있고, 그래서 더 나아가면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제가 항상 말씀 드리듯이, 성경은 신변잡기적으로 읽으면 성경 이야기는 그저 동화나 신화나 전설이 되어, 마치 고대의 수많은 신화나 전설의 위인전기들처럼, “누구누구를 본받자”거나 반대로 “누구누구를 본받지 말자”는 수많은 예화집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부터 이제 요나서의 이야기를 찬찬히 읽어가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 또 그분의 교회를 향한 사랑, 그리고 우리의 메시아 되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들을, 이 오래된 책을 통해 듣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물어야 할 것
요나서를 올바른 방향으로 읽으려고 할 때, 제일 먼저 주목해야만 하는 점을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이것을 하지 않고 덜컥 아무렇게나 요나서로 들어가버려서, 만약 앞에 말씀드린 대로 요나의 이야기를 단순히 ‘불순종한 한 개인의 이야기’나 ‘하나님의 선교 열정’ 같은 것으로 읽어버리면, 그 주제와 불일치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 너무나 많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나서 전체의 주제와 방향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 이 책이 왜 쓰여졌고, 누구를 대상으로 쓰여졌고, 무슨 목적을 갖고 있으며, 듣는 독자들을 어디로 끌고 가는 것이 목적인가를 먼저 잘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해 보려고 합니다.
1. 배경
첫째, 우리는 요나서의 배경이 되는 시대적 상황과, 또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럴 때의 일반적인 다른 성경들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대응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은 열왕기하 14장 말씀을 통해서 ‘요나 선지자’가 여로보암 2세 때 활동했던 선지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의 이름은 25절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기 나오는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가 바로 우리가 살필 요나서의 주인공인 요나 선지자입니다. 사실 요나 선지자는 독특하게도, 신약 성경에는 여러 번 나오지만, 구약 성경에는 요나서 자체를 제외하고는 여기 열왕기하에만 딱 한 번 나옵니다. 다른 곳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바는, 만약에 이렇게 요나가 여로보암 2세 때 활동했던 선지자라면, 요나가 니느웨로 보냄을 받았을 때의 정황이 바로 이 시기라는 소리인데, 그러면 이 때의 시대적 정황이 어떠했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간략하게 내용이 나오는데, 너무 축약적으로 나옵니다. 23절과 24절을 보십시오.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제십오 년에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일 년간 다스렸으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다. 이 말씀에 나오는 “여로보암”은 여로보암 1세입니다. 이 여로보암 1세는 솔로몬의 바로 다음 왕인 르호보암의 시대에 이스라엘을 둘로 쪼갠 인물, 곧 솔로몬과 르호보암의 남유다에 대항하여 무려 열 지파를 이끌고 북이스라엘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여로보암 1세가 행한 가장 중요하고도 유명한 일은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우상숭배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즉 나라를 쪼개서 북이스라엘을 만들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칭하면서 금송아지를 세워서 우상숭배를 시작하게 한 죄! 바로 이 죄 때문에 북이스라엘 역사에서 모든 왕들에게는, 그 왕들이 악할 때 이런 진술이 따라 붙습니다.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러보암의 죄를 따라 행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에서 이 여로보암 1세와 이름이 똑같은 여로보암 2세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성경이 평가할 때, 바로 이 다른 악한 왕들에게도 사용되었던 관용적인 어법을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24절).
이 진술은 매우 간결하여, 여로보암 2세의 상황에 대해 잘 알 수 없는 관계로, 여로보암 2세 치하 때의 시대적 상황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글을 하나 인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요나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의 정황을 단번에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이 솔로몬 왕 시대에 성세를 구가하고 큰 번영을 누렸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이 당시 이스라엘의 영토는 북방으로 유브라데강에서부터 남방으로는 아카바만에 이르렀었다. 솔로몬의 무역은 원방에까지 뻗쳤으며, 그의 부는 막대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이 그 영토를 솔로몬 시대와 거의 똑같이 확장하고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제2의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이 시기가 바로 B.C. 8세기, 곧 북왕조 이스라엘에서는 여로보암 2세가, 남왕조 유다에서는 웃시야가 재위하였었던 시기요, 선지자 아모스와 호세아의 시기였다. 이스라엘이 그와 같이 권력과 부에 있어서 재흥할 수 있도록 재기의 발판이 되어 준 시기는 여로보암 2세의 부왕 요아스의 재위 기간 동안이었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북방 수리아의 위협을 받아 왔으며 손실이 많은 대소간의 전쟁을 오랫동안 치러 왔는데......요아스의 시대에 이르러 수리아는 북방 이웃 국가인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정복당하였고, 앗수르의 지배자인 아다드 니라리(Adad-nirari)는 정복된 수리아 지배를 공고히 할 겨를도 없이 앗수르에 인접해 있었던 호전적 이웃 북방 국가인 우라투(Uratu)와 싸우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앗수르가 북방의 도전에 대응하게 됨으로써 수리아 남부에는 힘의 공백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 공백을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일어나 메꾸게 되었다......(그리고) 여로보암 2세는 군사적 정복을 통하여 과거 솔로몬 시대의 영토였던 북부 지방에까지 이스라엘의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웃시야는 남부를 경영하여 옛날 솔로몬의 항구 도시였던, 홍해에 인접한 에시온 게벨에까지 지배 영역을 확장하였다.
이 내용에서 익히 알 수 있는 대로, 여로보암 2세의 시대 때 북이스라엘은 최고조의 시대였습니다.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북이스라엘은 강성했습니다. 한 주석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대 근동 지방의 주요 무역로는 모두 이스라엘의 영토 안에 들어오게 되어, 모든 대상들은 이스라엘 땅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통행세와 상무역 및 산업은 거의 2세기 이전 솔로몬 시대 이래 최대의 부를 불러들였다. 이 시대는 자신만만한 시대이며, 미래에 대한 꿈으로 부풀어 오른 시대였으나, 동시에 심대한 사회적 타락과 도덕적 부패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곧 이렇게 힘과 부가 흘러 넘치던 시대가 바로 여로보암 2세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이 글의 말미에서 ‘살짝’ 볼 수 있듯이, 상업적 번성과 국력 신장은 ‘종교적 타락’을 가져왔습니다. 한 군데만 더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부패 역시 사회적 부패와 보조를 같이 하였다. 이스라엘은 야웨 하나님보다는 바알을 보다 널리 숭배하였음이 분명하다. 그 시기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의 기록은 흔히 개인의 이름들이 바알과 함께 명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호세아는 예배 중의 매춘 행위(가나안 족속의 예배 의식 중에 공통적으로 개재되어 있었던 요소)가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서 편만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을지라도 널리 용납되고는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모세 율법이 규정하고 있었던 매일 드리는 제사에 곁들여 이스라엘 족속들은 이교의 제사 의식에도 참여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모든 종교활동이 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멸망시키시는 야웨의 날이 올 것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기뻐하지 않으셨다. 사실상 이스라엘의 종교는 죽은 의식과 노골적인 독신(瀆神)의 구별이 없는, 거룩치 못한 혼합이었다. 이는 당신의 택하신 민족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불일 듯 일게 만들었다. 구약 성경의 어떤 곳에서는 당시 이스라엘 전역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절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으며, 이전에 엘리야와 엘리사가 그랬듯이 아모스와 호세아만이 외로이 신절을 지켰을 따름임을 시사하고 있다.
2. 이상하지 않나?
이 지점에서 성경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요나서를 읽음으로써 ‘어떤 의심’을 하게 됩니다.
이때 ‘어떤 의심’이란, 요나서가 진행되는 방향, 요나서가 나가려는 방향이, ‘대단히 이질적’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는 요나서의 시작 부분에서 이런 말씀을 발견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여러분은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정말 ‘기이하다’라는 생각이 드시지 않습니까?
아마도 우리가 요나서를 읽게 되더라도, 두 가지 사실을 모르면, 이 부분이 아무렇지도 않을 수도 있습니다.
첫째, 요나서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당시의 이스라엘의 정황이 어떤지를 전혀 모르거나,
둘째, 통상적으로 성경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할 때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는지를 전혀 모르거나,
이 둘을 전혀 모르면, 이 부분이 이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첫째, 우리가 방금 살핀 대로 요나서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당시의 이스라엘은 ‘참된 신앙의 번성 시대’가 아닙니다. 이 시대는 국력 신장과 부의 증대는 있었을지 몰라도, 참된 신앙의 양상에서는 혹독한 시대였습니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에 있어 풍성한 시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너무나 만족히 여기시는 시대였다면, 그러면 ‘여력’이 있겠죠! 그러면 ‘다른 나라에 눈을 돌릴’ 여유가 있었을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복음을 좀 전해라’라는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니라는 겁니다! 아니에요! 지금 그런 때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요나와 동시대의 선지자들인 아모스와 호세아를 읽어보면, 이스라엘의 종교적 타락은 극악한 형편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잘 살고, 나라는 강건한데, 하나님 경외는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때에! 그런 참된 신앙의 위기의 때에! 니느웨로 선교사를 보낸다? 이게 정말로 이상한 일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둘째, 이것은 첫째와 닿아 있는 것인데, 성경이 이런 상황에서 주로 어떻게 하느냐? 이것은 너무나 익숙한 문제가 아닙니까! 우리가 크게 주의하고 경계해야 할 것은! 사례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례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렇게 우상숭배하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래서 그 사회 안에 온통 하나님의 법들이 무시되고 짓밟히고 있는 시절이 될 때, 하나님께서 외국에다가 선교사를 보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사례가 없어요!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이방에 대한 언급을 발견할 때, 선지서에 보시면 거의 대부분에서! 이방 나라의 멸망을 노래하는 것을 발견할 뿐입니다. 정말로 드물게, 혹 이방의 회복이 나오더라도, 하나님은 거기에 선교사를 보내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의 ‘부록’같이 등장할 뿐입니다. 사례가 없어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엉망진창인데, 외국에 선교사를 보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례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주로 어떻게 할까요? 이것이 요나서 1장 2절이 너무나 이상한 이유인데,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듯,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있을 때, 이스라엘에게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성경이 모든 사례가 이것을 지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죄와 악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이스라엘에게!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이것이 선지서가 이토록 이스라엘 역사 말미에 몰려 있는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직전일수록 선지자가 많아요. 왜냐하면 선지자야말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돌이키게 하시기 위한” 방편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시대에 예수님도 비유로 말씀하셨죠. 포도원을 맡기고 주인이 떠났을 때, 종들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주인은 계속해서 자신의 종들을 보냈습니다. 이들이 선지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떠날 때, 그들에게 경고하시기 위하여 선지자들을 보내십니다. 누구에게요? 자기 백성들에게 보냅니다! 니느웨로 선교하러 선지자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그러면 요나서 앞부분이 너무나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이 상황에서!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십니까!
열왕기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
이 정황들을 놓고, 요나서 전체를 이해할 틀을 놓읍시다.
좁게는 하나님께서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신 이유이고, 넓게는 이 요나서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두 가지 방향에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1. 오바댜와 요나
첫째로, 간단한 것으로서 ‘오바댜’와 ‘요나’의 주제적 연관성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구약성경 순서를 잘 외고 있지만, 요나서는 오바댜 뒤에 옵니다. ‘옵욘미나합습’이죠.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순서입니다.
그런데 오바댜와 요나는 ‘붙어 있을’ 뿐 아니라, ‘주제적 연결’도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중에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길지 않으니 오바댜도 읽어보십시오. 오바댜는 ‘이방 나라 에돔을 향한 선포’입니다. 그리고 이 선포의 주제는 ‘심판’입니다. 이 주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구절을 읽어보자면, 오바댜 15절이라고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네가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즉, 오바댜는 ‘에돔 나라’에 대한 메시지인데, 이때 에돔 나라에 대한 메시지의 핵심은 ‘응보’입니다. “네가 행한 대로 네가 받을 것이다”, 즉 그들은 악을 행했으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바댜를 통하여 말씀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중은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오바댜에서의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자를 멸절시키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지만, 이어지는 요나서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요나서의 주제는, 그 대상에 있어서는 오바댜와 같습니다. 오바댜는 ‘이방으로서의 에돔’에 주어진 메시지이지만, 요나서는 ‘이방으로서의 니느웨(앗수르)’에 주어진 메시지이니까요. 즉 둘 다 이방에 주어진 메시지입니다.
하지만 요나서의 주제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악을 행한 자라 하더라도,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요나서의 주제는, 죄악을 범한 니느웨가, 악독한 니느웨가, 하나님께 회개하자, 하나님이 용서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둘을 연결해서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누구에게 주어졌나요? 성경은 에돔 족속이나, 니느웨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방금 들은 그 말씀은 에돔 족속들 스스로도 몰랐을 테고, 니느웨 사람들도 당연히 몰랐을 것입니다. 이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둘을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습니까?
악을 행한 자들에게, 공의의 하나님이 심판하신다(오바댜)는 것과
그러나 회개하면 하나님은 용서하신다(요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통해 말씀하시려는 주제가 뭔가?”라고 물을 때, 우리가 제일 먼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요나 개인의 일탈이나 불순종, 혹은 하나님의 선교 사업을 말하기 이전에, 하나님이 요나서를 통해 전혀 다른 어떤 성경에서도 하지 않으시는 일, 지금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적 타락이 극심한데도, 전혀 엉뚱하게 이방에 선교사로 선지자를 보내시는 일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은, “하나님은 너희가 회개하면 용서하신다”는 것을,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알려주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만 더 확인해 봅시다.
2. 열왕기하 14장 말씀에서
요나가 등장하는 본문에서 열왕기하 14장의 말씀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스라엘의 악에 대한 묘사로 시작합니다. 23절은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음을 말하지만, 즉시 24절에서 그가 “여호와의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느밧의 아들 여로보암”, 곧 우리가 앞서 말했던 여로보암 1세의 악을 따라 행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25절에서 ‘요나의 예언’이 이어집니다.
여러분이 만약 열왕기하의 내용을 모른 채로, 이 상황에서 요나가 예언한다면 어떤 예언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도 거듭 살펴보았지만, 여로보암 2세의 시기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땅바닥에 떨어진 시대라면, 선지자의 책무는 거기에 가서 ‘심판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성경의 모든 시대에, 성경의 모든 선지자가, 다 행했던 일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이렇게 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나의 예언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점을 잠깐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하 7장 7-17절 말씀에서 다윗 왕국에 대한 언약을 주십니다(찾아보실 분은 펴서 보십시오). 이 언약의 특성은 이것입니다. “네가 만약 나와의 언약을 지킨다면, 내가 영구히 너에게 이것을 주겠노라.” 곧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왕국의 특성이 나타납니다.
여기에는 네 가지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나라’, ‘언약’, ‘땅’, ‘왕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1) 나라 :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13절),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16절)
2) 언약 :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8-9절),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14절)
3) 땅 :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를 심고, 그를 거주하게 하고, 다시 옮기지 못하게 하며, 악한 종류로 전과 같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게 하여”(10절),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11절)
4) 왕권 : 8절,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11-12절, “여호와가 나를 위하여 집을 세우고....네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16절)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그분이 주신 다윗 왕조의 왕권, 그리고 땅, 또 언약 같은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할 때에 주어지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반대로 행한다면? 그 하나님과의 약속에서 이탈하여 하나님을 버린다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경히 여기고, 하나님을 비웃고, 우상을 숭배한다면?
우리는 그 결과를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열왕기하 14장에서 요나가 당시 여로보암 2세에게 한 예언은 이런 것입니다. 열왕기하 14장 2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왕하 14:2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우리가 놀라게 되는 것은, 사무엘하의 “나라”나 “영토”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의 여부와 관계되는 것인데, 여로보암 2세는 그와 반대의 길로 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요나 선지자를 통해 예언케 하신 내용은 그 반대라는 것입니다. 여로보암 2세는 하나님을 비웃은 “여호와의 보시기에 악을 행한”(24절) 왕인데도, 하나님께서 요나를 보내 예언하게 하신 내용은 “영토를 회복”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우리가 앞서 살핀 여로보암 2세 때가 거의 솔로몬 때 만큼이나 영토를 회복한, 이스라엘 전체 역사상 거의 두 번째로 강성했던 시절이라는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면 왜일까요?
왜 하나님은 이렇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그 다음 절인 26절과 27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아! 우리는 깜짝 놀라게 됩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불쌍해서 그랬다는 것이지요. 불쌍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 숭배하고, 그래서 바알을 섬기는 일이 극에 달하여, 이스라엘의 율법에 대한 해이가 땅바닥에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땅을 더 회복하도록 해 주셨는데, 그 이유가......그들이 불쌍해서, 그들이 고난이 많고, 삶이 힘들고, 어렵고, 곤란하고, 낭패 중에 있음을 보고......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것을 전한 선지자가 바로 ‘요나’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오바댜와 요나의 비교를 보았지요.
오바댜는 ‘하나님의 공의’, ‘죄에 대해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선지자였습니다.
반면 요나는, “심판이 예정되었더라도, 뉘우치고 회개하면 하나님은 용서하신다”라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쳐주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요나서 전체를! 바로 이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요나서는 요나 개인의 이야기, 하나님께 순종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도 아니고, 요나서는 저기 먼 땅 앗수르에게 전도하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요나서 전체는, 이 패역의 시절에, 하나님께서 심지어 이방인들조차도! 회개하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알려주심으로써, 이스라엘이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성경입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시고 요나서를 읽도록 합시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끝이 없는 사랑과 인애! 그분의 놀라운 자비하심과 긍휼하심! 우리는 요나서에서 바로 이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