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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장마황조전> <마초전>
[삼국지] 권36 촉서6 <관장마황조전>(관우,장비,마초,황충,조운) 중 <마초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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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卷三十六 蜀書六 關張馬黃趙傳第六
馬超字孟起, (右)扶風茂陵人也. 父騰, 靈帝末與邊章、韓遂等俱起事於西州. 初平三年, 遂、騰率衆詣長安. 漢朝以遂爲鎭西將軍, 遣還金城, 騰爲征西將軍, 遣屯郿. 後騰襲長安, 敗走, 退還涼州. 司隷校尉鍾繇鎭關中, 移書遂、騰, 爲陳禍福. 騰遣超隨繇討郭援、高幹於平陽, 超將龐德親斬援首. 後騰與韓遂不和, 求還京畿. 於是徵爲衛尉, 以超爲偏將軍, 封都亭侯, 領騰部曲[1].
[1]典略曰 : 騰字壽成, 馬援後也. 桓帝時, 其父字子碩, 嘗爲天水蘭干尉. 後失官, 因留隴西, 與羌錯居. 家貧無妻, 遂娶羌女, 生騰. 騰少貧無産業, 常從彰山中斫材木, 負販詣城市, 以自供給. 騰爲人長八尺餘, 身體洪大, 面鼻雄異, 而性賢厚, 人多敬之. 靈帝末, 涼州刺史耿鄙任信姦吏, 民王國等及氐、羌反叛. 州郡募發民中有勇力者, 欲討之, 騰在募中. 州郡異之, 署爲軍從事, 典領部衆. 討賊有功, 拜軍司馬, 後以功遷偏將軍, 又遷征西將軍, 常屯汧、隴之間. 初平中, 拜征東將軍. 是時, 西州少穀, 騰自表軍人多乏, 求就穀於池陽, 遂移屯長平岸頭. 而將王承等恐騰爲己害, 乃攻騰營. 時騰近出無備, 遂破走, 西上. 會三輔亂, 不復來東, 而與鎭西將軍韓遂結爲異姓兄弟, 始甚相親, 後轉以部曲相侵入, 更爲讐敵. 騰攻遂, 遂走, 合衆還攻騰, 殺騰妻子, 連兵不解. 建安之初, 國家綱紀殆弛, 乃使司隷校尉鍾繇、涼州牧韋端和解之. 徵騰還屯槐里, 轉拜爲前將軍, 假節, 封槐里侯. 北備胡寇, 東備白騎, 待士進賢, 矜救民命, 三輔甚安愛之. 十(五)[三]年, 徵爲衛尉, 騰自見年老, 遂入宿衛. 初, 曹公爲丞相, 辟騰長子超, 不就. 超後爲司隷校尉督軍從事, 討郭援, 爲飛矢所中, 乃以囊囊其足而戰, 破斬援首. 詔拜徐州刺史, 後拜諫議大夫. 及騰之入, 因詔拜爲偏將軍, 使領騰營. 又拜超弟休奉車都尉, 休弟鐵騎都尉, 徙其家屬皆詣鄴, 惟超獨留.
마초(馬超)는 자(字)가 맹기(孟起)이고 부풍(扶風) 무릉(茂陵) 사람이다. 부친 마등(馬騰)은 영제(靈帝:168-189) 말, 변장(邊章), 한수(韓遂) 등과 함께 서주(西州-양주涼州)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초평 3년(192년), 한수, 마등이 무리를 이끌고 장안(長安)으로 나아가니 한나라 조정에서는 한수를 진서장군(鎭西將軍)으로 삼아 금성(金城)으로 되돌려 보내고 마등을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삼아 미(郿-사례 부풍군 미현)로 보내 주둔하게 했다. 그 뒤 마등이 장안을 습격했으나 패주하고 양주(涼州)로 되돌아갔다.
사례교위(司隷校尉) 종요(鍾繇)가 관중(關中)을 진수하게 되자 한수, 마등에게 서신을 보내 화(禍)와 복(福)에 관해 진술했다. 마등이 마초를 보내 종요를 뒤따르게 하니 평양(平陽-하동군 평양현)에서 곽원(郭援), 고간(高幹)을 토벌하고 마초의 장수 방덕(龐德)이 직접 곽원을 참수했다. (※ [삼국지] 권10 순욱전, [자치통감] 등에 의하면 원소가 병사한 직후인 202년의 일)
그 뒤 마등이 한수와 서로 불화하자 경기(京畿)로 돌아올 것을 청하니 이에 징소해 위위(衛尉)로 임명하고, 마초를 편장군(偏將軍)으로 삼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해 마등의 부곡(部曲)을 거느리게 했다. [1]
(1) [전략]典略 – 마등(馬騰)은 자(字)가 수성(壽成)이고 마원(馬援)의 후예다. 환제(桓帝:146-167) 때, 그의 부친은 자(字)가 자석(子碩)으로 (마평馬平 ※ 참고) 일찍이 천수의 난간위(蘭干尉-양주 천수군 난간현의 현위)를 지냈는데 그 후 관직을 잃고 이로 인해 (그대로) 농서(隴西)에 머물며 강족(羌)과 섞여 살았다. 집안이 가난해 처가 없으니 마침내 강녀(羌女)에게 장가들어 마등을 낳았다. 마등은 어려서 가난해 산업(産業-가산)이 없었으므로 늘 창산(彰山)에서 나무를 베어 짊어지고 성시(城市)로 가서 팔아 스스로 생계를 이었다. 마등은 그 위인(爲人)됨이 신장 8척 남짓에 신체가 홍대(洪大-장대)하며 면비(面鼻-얼굴과 코)가 웅이(雄異-뛰어나고 남다름)하고 성정이 현후(賢厚-어질고 온후함)하니 많은 사람들이 그를 공경했다.
영제(靈帝) 말, 양주자사 경비(耿鄙)가 간리(姦吏-간사한 관원)를 신임해 백성(民)인 왕국(王國) 등과 저족(氐), 강족(羌)이 반란을 일으키자 주군(州郡)에서는 백성(民) 중에 용력(勇力)을 갖춘 자를 모집해 이를 토벌하고자 했고 마등이 이에 응모했다. 주군(州郡)에서는 그를 남다르게 여겨 군종사(軍從事)로 (임시로) 삼고 부중(部衆)을 거느리게 했다. 적(賊)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군사마(軍司馬)에 임명되었다가 뒤에 공을 세워 편장군(偏將軍)으로 올랐고 또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올라 견(汧-사례 부풍군 견현), 농(隴-양주 천수군 농현) 사이에 상시 주둔했다. 초평(初平:190-193) 중, 정동장군(征東將軍)에 임명되었다. 이때 서주(西州)에 곡식이 부족하자 마등은 스스로 표(表)를 올려 군중 사람들에게 곡식이 많이 모자라 지양(池陽-풍익군 지양현)에서 곡식을 구하려 한다 하고는 장평(長平) 기슭으로 둔(屯)을 옮겼다. 그러자 장수 왕승(王承) 등은 마등이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하니 이에 마등의 영(營)을 공격했다. 이때 마등은 가까이 외출하고 대비가 없었으므로 마침내 패주하여 서쪽으로 갔다.
삼보(三輔-장안의 경조윤, 좌풍익, 우부풍을 합쳐 일컫는 말. 즉 장안 일대)가 어지러울 때에도 다시 동쪽으로 오지 않았고, 진서장군(鎭西將軍) 한수(韓遂)와 결탁해 이성형제(異姓兄弟-의형제)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서로 매우 친했으나 뒤에 부곡(部曲)이 서로 침입하게 되자 원수 사이(讐敵)가 되었다. 마등이 한수를 공격하자 한수가 달아났는데 무리를 합쳐 돌아와 마등을 공격해 마등의 처자식을 죽였고 싸움이 연이어 풀리지 않았다. 건안(建安:196-220) 초, 국가의 강기(綱紀-기강)가 위태롭고 느슨해지니 사례교위 종요(鍾繇), 양주목 위단(韋端)을 시켜 그들을 화해하게 했다. 마등을 불러 괴리(槐里-부풍군 괴리현)로 돌아와 주둔케 하고 전임하여 전장군(前將軍) 가절(假節)로 삼고 괴리후(槐里侯)에 봉했다. 북쪽으로 호(胡-흉노 또는 북방민족 통칭)의 침범을 방비하고 동쪽으로 백기(白騎-※ 참고)를 방비하며, 선비를 대우하고 어진 이를 천거하며 백성의 목숨을 가엾이 여겨 구제하니 삼보(三輔)가 매우 편안해지고 그를 공경했다. (건안) 13년(208년)(※ 참고), 마등을 불러 위위(衛尉)로 삼자 마등은 스스로 연로(年老)한 것을 보고 마침내 (조정으로) 들어와 숙위(宿衛)했다.
당초 조공(曹公-조조)이 승상(丞相)이 되어 마등의 장자 마초를 벽소(辟召)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 조조가 승상이 된 건 208년의 일이니 뒤에 이어지는 사건들과 시간순서가 맞지 않습니다. 아마 조조의 관직명을 잘못 적은 것 같습니다.) 마초는 그 뒤 사례교위(종요)의 독군종사(督軍從事)가 되어 곽원(郭援)을 토벌했는데 날아온 화살에 맞자 낭(囊-자루, 주머니)으로 자신의 다리를 감싼 채 싸워 곽원을 격파하고 참수했다. 조령으로 서주자사(徐州刺史)에 임명되고 그 뒤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임명되었다. 마등이 입조하게 되자 (마초를) 편장군으로 임명해 마등의 영(營)을 거느리게 했다. 또 마초의 동생 마휴(馬休)을 봉거도위(奉車都尉), 마휴의 동생 마철(馬鐵)을 기도위(騎都尉)로 삼고 그 가속들을 모두 업(鄴)으로 이주시키니 오직 마초만이 홀로 남게 되었다.
※ 마등의 부친 - [후한서] 권72 동탁열전 이현 주에 인용된 헌제전(獻帝傳)에 의하면 마등의 부친은 마평(馬平). 그외 내용은 여기의 [전략] 기사와 같음. (獻帝傳曰:「騰父平, 扶風人. 爲天水蘭干尉, 失官, 遂留隴西, 與羌雜居. 家貧無妻, 遂取羌女, 生騰.」)
※ 백기(白騎) - [후한서] 권71 황보숭 주준열전에 의하면 황건적 이후 봉기한 도적들 중 장백기(張白騎-백마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백기)가 언급되며, [삼국지] 방덕전에 따르면 홍농에서 장백기가 모반하자 방덕이 마등을 수행해 이를 토벌했다고 함.
※ 마등이 입조한 해 / 건안 15년(210년) vs 건안 13년(208년) - 후강(侯康-청나라때 학자)은 ‘五는 응당 三으로 적어야 한다’고 했다. (사마광의) 통감고이(通鑑考異)에서는 ‘장기전에 의하면 조공이 장차 형주를 정벌하려 할 때 장기에게 명해 마등을 설득해 입조하도록 했으니 三이란 글자가 잘못되어 五가 된 것으로 보인다’(이런 근거에 따라 [자치통감]에서는 [전략]의 이 기사를 채용하면서 장기전 기사등과 함께 모두 건안 15년이 아닌 건안 13년(208년) 기사로 수록)고 했다. (侯康曰吾當作三 通鑑考異云張旣傳曹公將征荊州令旣說騰入朝 蓋三字誤爲五耳 / 노필盧弼의 [삼국지집해]) … 같은 이유로 중화서국 점교본에서도 원문의 十五를 十三으로 고침.
超旣統衆, 遂與韓遂合從, 及楊秋、李堪、成宜等相結, 進軍至潼關. 曹公與遂、超單馬會語, 超負其多力, 陰欲突前捉曹公, 曹公左右將許褚瞋目盻之, 超乃不敢動. 曹公用賈詡謀, 離間超、遂, 更相猜疑, 軍以大敗[2]. 超走保諸戎, 曹公追至安定, 會北方有事, 引軍東還. 楊阜說曹公曰 : 「超有信、布之勇, 甚得羌、胡心. 若大軍還, 不嚴爲其備, 隴上諸郡非國家之有也.」 超果率諸戎以擊隴上郡縣, 隴上郡縣皆應之, 殺涼州刺史韋康, 據冀城, 有其衆. 超自稱征西將軍, 領幷州牧, 督涼州軍事. 康故吏民楊阜、姜敍、梁寬、趙衢等, 合謀擊超. 阜、敍起於鹵城, 超出攻之, 不能下; 寬、衢閉冀城門, 超不得入. 進退狼狽, 乃奔漢中依張魯. 魯不足與計事, 內懷於邑, 聞先主圍劉璋於成都, 密書請降[3]
[2]山陽公載記曰 : 初, 曹公軍在蒲阪, 欲西渡, 超謂韓遂曰 : 「宜於渭北拒之, 不過二十日, 河東穀盡, 彼必走矣.」 遂曰 : 「可聽令渡, 蹙於河中, 顧不快耶!」 超計不得施. 曹公聞之曰 : 「馬兒不死, 吾無葬地也.」
[3]典略曰 : 建安十六年, 超與關中諸將侯選、程銀、李堪、張橫、梁興、成宜、馬玩、楊秋、韓遂等, 凡十部, 俱反, 其衆十萬, 同據河、潼, 建列營陳. 是歲, 曹公西征, 與超等戰於河、渭之交, 超等敗走. 超至安定, 遂奔涼州. 詔收滅超家屬. 超復敗於隴上. 後奔漢中, 張魯以爲都講祭酒, 欲妻之以女, 或諫魯曰 : 「有人若此不愛其親, 焉能愛人? 」 魯乃止. 初, 超未反時, 其小婦弟种留三輔, 及超敗, 种先入漢中. 正旦, 种上壽於超, 超搥胸吐血曰 : 「闔門百口, 一旦同命, 今二人相賀邪? 」 後數從魯求兵, 欲北取涼州, 魯遣往, 無利. 又魯將楊白等欲害其能, 超遂從武都逃入氐中, 轉奔往蜀. 是歲建安十九年也.
마초가 무리를 통솔하게 된 후 마침내 한수(韓遂)와 합종(合從)하고 양추(楊秋), 이감(李堪), 성의(成宜) 등과 서로 결탁하여 진군해 동관(潼關)에 이르렀다. (※ 211년의 일)
조공(曹公-조조)은 한수, 마초와 더불어 홀로 말을 타고 대화했는데 마초는 자신의 다력(多力-힘이 강함)에 의지해 돌전(突前-돌진)하여 조공을 붙잡으려 은밀히 꾀했으나 조공 좌우의 장수 허저(許褚)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고 이에 마초는 감히 실행하지 못했다. 조공은 가후(賈詡)의 모책을 써서 마초와 한수를 이간시키니 다시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게 되었고 군이 대패(大敗)했다. [2]
(2) [산양공재기]山陽公載記 – 당초 조공의 군대가 포판(蒲阪)에 있으며 서쪽으로 (하수를) 건너려 하자 마초가 한수에게 말했다, “의당 위수 북쪽에서 저들을 막으면 20일이 지나지 않아 하동(河東)의 곡식이 다하여 필시 달아날 것입니다.” 한수가 말하길 “하수를 건너게 해주어 하수 가운데서 몰아붙인다면 오히려 통쾌하지 않겠는가!”라 하며 마초의 계책을 펼치지 않았다. 조공이 이를 듣고 말했다, “마초 저 아이가 죽지 않는다면 내가 묻힐 땅이 없겠구나.”
마초는 달아나 제융(諸戎-여러 융족들)에 의지하고 조공이 추격해 안정(安定)에 이르렀으나 때마침 북방에 일이 생겨 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가려 했다. 양부(楊阜)가 조공을 설득하며 말했다,
“마초는 한신(韓信), 영포(英布)의 용맹을 갖추고 강(羌), 호(胡)의 마음을 심히 얻고 있습니다. 만약 대군(大軍)이 돌아가며 이를 엄히 방비하지 않는다면 농상(隴上)의 여러 군(郡)들은 국가의 소유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과연 마초는 제융(諸戎)들을 이끌고 농상(隴上)의 군현들을 공격하니 농상의 군현들이 모두 이에 호응했고 양주자사(涼州刺史) 위강(韋康)을 죽이고 기성(冀城-천수군 기현)을 점거하여 그 군사들을 차지했다. 마초는 정서장군(征西將軍), 영(領) 병주목(幷州牧), 독양주군사(督涼州軍事-양주의 군무를 도독)를 자칭했다.
위강(韋康)의 옛 관리와 백성(吏民)인 양부(楊阜), 강서(姜敍), 양관(梁寬), 조구(趙衢) 등이 마초를 공격할 것을 함께 모의했다. 양부, 강서가 노성(鹵城)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마초가 출군해 이를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는데, 양관, 조구가 기성의 성문을 닫아버리자 마초가 들어갈 수 없었고, 진퇴가 낭패(狼狽)스럽게 되자 이에 한중(漢中)으로 달아나 장로(張魯)에게 의탁했다. 장로는 더불어 일을 도모하기에 부족한 인물이라 생각하여 내심 근심하고 번민했는데(於邑) 선주(先主-유비)가 성도(成都)에서 유장(劉璋)을 포위했다는 말을 듣고 은밀히 서신을 보내 항복을 청했다. [3]
(3) [전략]典略 – 건안 16년(211년), 마초는 관중(關中)의 제장들인 후선(侯選), 정은(程銀), 이감(李堪), 장횡(張橫), 양흥(梁興), 성의(成宜), 마완(馬玩), 양추(楊秋), 한수(韓遂) 등과 함께 도합 10부(部)로 함께 반란을 일으키니 그 군사가 10만으로 하수(河水), 동수(潼水) 일대를 점거하고 영진(營陳)을 벌여 세웠다. 이 해, 조공이 서쪽을 정벌해 마초 등과 더불어 하수, 위수(渭水)가 만나는 곳에서 교전하여 마초 등을 패주시켰다. 마초는 안정(安定)에 이르렀다가 양주(涼州)로 달아났다. 조령으로 마초의 가속들을 붙잡아 멸했다. 마초는 다시 농상(隴上)에서 패했다. 그 뒤 한중으로 달아났는데, 장로는 (마초를) 도강좨주(都講祭酒)로 삼고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려 하니 어떤 이가 장로에게 간언했다, “이처럼 자신의 육친(親)을 사랑하지 않는 이가 어찌 남을 사랑하겠습니까?” 이에 장로가 그만두었다. 당초 마초가 반란을 일으키기 전 그의 소부(小婦-첩)의 동생인 충(种)이 삼보(三輔)에 머물렀는데 마초가 패하게 되자 충(种)이 먼저 한중으로 들어왔었다. 정월 초하루 아침, 충(种)이 마초에게 상수(上壽)하자 마초가 가슴을 치고 피를 토하며 말했다, “온 가문의 백구(百口-근친일족)가 하루 아침에 함께 죽었는데 지금 두 사람이 서로 축하한단 말인가?” 그 뒤 수 차례 장로에게 군사를 청해 북쪽으로 양주를 탈취하려 하니 장로가 보내주었으나 이로움이 없었다.(패했다) 또한 장로의 장수 양백(楊白)등이 그의 유능함을 시기하자 마초는 마침내 무도(武都)를 따라 달아나 저족(氐) 중으로 들어갔다가 몸을 돌려 촉(蜀)으로 달아났다. 이 해가 건안 19년(214년)이다.
先主遣人迎超, 超將兵徑到城下. 城中震怖, 璋卽稽首[4], 以超爲平西將軍, 督臨沮, 因爲前都亭侯[5]. 先主爲漢中王, 拜超爲左將軍, 假節. 章武元年, 遷驃騎將軍, 領涼州牧, 進封斄鄕侯, 策曰 : 「朕以不德, 獲繼至尊, 奉承宗廟. 曹操父子, 世載其罪, 朕用慘怛, 疢如疾首. 海內怨憤, 歸正反本, 曁於氐、羌率服, 獯鬻慕義. 以君信著北土, 威武並昭, 是以委任授君, 抗颺虓虎, 兼董萬里, 求民之瘼. 其明宣朝化, 懷保遠邇, 肅愼賞罰, 以篤漢祜, 以對于天下.」 二年卒, 時年四十七. 臨沒上疏曰 : 「臣門宗二百餘口, 爲孟德所誅略盡, 惟有從弟岱, 當爲微宗血食之繼, 深託陛下, 餘無復言.」 追諡超曰威侯, 子承嗣. 岱位至平北將軍, 進爵陳倉侯. 超女配安平王理[6].
[4]典略曰 : 備聞超至, 喜曰 : 「我得益州矣.」 乃使人止超, 而潛以兵資之. 超到, 令引軍屯城北, 超至未一旬而成都潰.
[5]山陽公載記曰 : 超因見備待之厚, 與備言, 常呼備字, 關羽怒, 請殺之. 備曰 : 「人窮來歸我, 卿等怒, 以呼我字故而殺之, 何以示於天下也!」 張飛曰 : 「如是, 當示之以禮.」 明日大會, 請超入, 羽、飛並杖刀立直, 超顧坐席, 不見羽、飛, 見其直也, 乃大驚, 遂一不復呼備字. 明日歎曰 : 「我今乃知其所以敗. 爲呼人主字, 幾爲關羽、張飛所殺.」 自後乃尊事備. 臣松之按以爲超以窮歸備, 受其爵位, 何容傲慢而呼備字? 且備之入蜀, 留關羽鎭荊州, 羽未嘗在益土也. 故羽聞馬超歸降, 以書問諸葛亮「超人才可誰比類」 , 不得如書所云. 羽焉得與張飛立直乎? 凡人行事, 皆謂其可也, 知其不可, 則不行之矣. 超若果呼備字, 亦謂於理宜爾也. 就令羽請殺超, 超不應聞, 但見二子立直, 何由便知以呼字之故, 云幾爲關、張所殺乎? 言不經理, 深可忿疾也. 袁暐、樂資等諸所記載, 穢雜虛謬, 若此之類, 殆不可勝言也.
[6] 典略曰 : 初超之入蜀, 其庶妻董及子秋, 留依張魯. 魯敗, 曹公得之, 以董賜閻圃, 以秋付魯, 魯自手殺之.
선주(先主-유비)가 사람을 보내 마초를 영접하자 마초는 군사를 거느리고 곧바로 성 아래에 도착했다. 성(城)안 사람들이 진포(震怖-두려움에 떪)하여 유장이 이내 계수(稽首-머리를 조아려 절함;항복)하니 [4] 마초를 평서장군(平西將軍), 독임저(督臨沮-임저는 형주 남군 임저현)로 임명하고는 예전대로 도정후(都亭侯)로 삼았다. [5]
(4) [전략]典略 – 유비는 마초가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말했다, “내가 익주(益州)를 얻었구나.”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 마초를 멈추게 하고 은밀히 군사를 대어주었다. 마초가 도착하자 군을 이끌고 성 북쪽에 주둔하게 했는데, 마초가 도착한 후 열흘이 지나기 전에 성도(成都)가 무너졌다.
(5) [산양공재기]山陽公載記 – 마초는 유비가 후대하는 것을 보고 유비와 더불어 말하며 늘 유비의 자(字)를 부르니 관우가 노하여 그를 죽일 것을 청했다. 유비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 궁박해져 내게로 귀의했소. 그런데 경 등이 분노하며 내 자(字)를 불렀다 하여 죽이자 하니, 천하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이겠소!” 장비가 말했다, “그렇다면 응당 예(禮)를 보여야지요.” 다음날 크게 모이며 마초를 청했는데, 관우, 장비가 함께 도(刀)를 쥐고 곧게 서 있었다. 마초는 좌석(坐席)을 둘러보았을 때 관우, 장비를 보지 못했다가 그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니 마침내 다시는 유비의 자(字)를 부르지 않았다. 다음날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이제야 패망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인주(人主-주인,임금)의 자(字)를 부르다 하마터면 관우, 장비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구나.” 이후로 유비를 존중하며 섬겼다. / 신 송지가 보건대(주석자인 배송지裵松之의 견해), 마초는 궁박해져 유비에 귀의하여 그의 작위를 받았는데 어찌 오만하게 유비의 자를 부를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유비가 촉으로 들어올 때 관우를 남겨 형주를 진수하게 했으니 관우는 일찍이 익주 땅에 있은 적이 없다. 그래서 관우는 마초가 투항했다는 말을 듣고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재주는 누구에 비견될 수 있는지를 물은 것으로 이 책(산양공재기)이 말하는 바 대로가 아니니, 관우가 어찌 장비와 함께 곧게 서 있을 수 있었겠는가? 무릇 사람이 일을 행할 때는 모두 그것이 가능하다 하여도 불가함을 알면 이를 행하지 않는 법이다. 과연 마초가 유비의 자를 불렀다면 또한 이치로 볼 때 의당 그리해도 된다고 여겨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설령 관우가 마초를 죽일 것을 청했다 하더라도 마초는 이를 듣지 못했는데, 단지 두 사람이 곧게 서 있는 것을 보고 무슨 까닭으로 이내 (자신이 유비의) 자를 불렀기 때문임을 알아채고는 ‘하마터면 관우, 장비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다’고 말했겠는가? 말이 이치에 닿지 않음이 너무 심해 가히 분질(忿疾-분노하고 미워함)에 이르는구나. 원위(袁暐-헌제춘추의 지은이), 악자(樂資-산양공재기의 지은이) 등이 기재한 여러 대목은 추잡하고 헛되고 그릇되니(穢雜虛謬) 이와 같은 부류가 거의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다.
선주가 한중왕(漢中王)이 되자 (※ 219년의 일) 마초를 좌장군(左將軍), 가절(假節)로 임명했다.
장무(章武) 원년(221년), 표기장군(驃騎將軍), 영(領) 양주목(涼州牧)으로 올리고 태향후(斄鄕侯)로 올려 봉했다. 책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짐이 부덕(不德)하나 지존(至尊)의 자리를 이어 종묘를 봉승(奉承)하게 되었다. 조조(曹操) 부자(父子)가 대대로 죄가 가득하니 짐은 참달(慘怛-참담하고 비통함)하여 열병으로 머리가 깨어질 듯하구나. 해내(海內)가 원망하고 분노하여 정(正)에 귀의하고 본(本)으로 되돌아오고 저(氐), 강(羌)이 솔복(率服-잇따르며 와서 복종함)하고 훈육(獯鬻-흉노)이 의(義)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대는 북토(北土)에 신의를 드날리고 위무(威武-위엄과 무력) 또한 아울러 빛났도다. 이로써 그대에게 임무를 맡기니 효호(虓虎-포효하는 범)의 위용을 높게 드날려 만리 밖까지 겸하여 바로잡고 백성들의 아픔을 구하도록 하라. 장차 조정의 교화를 밝히고 베풀어 멀고 가까운 이들을 품어 보호하고 상벌을 엄숙하게 삼가고 한나라의 복운을 두텁게 하여 천하의 기대에 보답하도록 하라.
장무 2년(222년)에 죽으니 이때의 나이가 47세였다. (※ 마초 생몰 : 176-222) 죽음에 임해 다음과 같이 상소(上疏)했다.
- 신의 문종(門宗-종족) 2백여 명이 맹덕(孟德-조조)에게 주살당해 거의 다 없어지고 다만 종제(從弟) 마대(馬岱)가 남았으니 미천한 종족을 위해 혈식(血食-제사)이 이어질 수 있도록 폐하께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그 외에 더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시호를 추증해 위후(威侯)라 했다. 아들 마승(馬承)이 후사를 이었다. 마대(馬岱)의 관위는 평북장군(平北將軍)에 이르렀고 진창후(陳倉侯)로 올려 봉해졌다. 마초의 딸은 안평왕(安平王) 유리(劉理)의 배필이 되었다. [6]
(6) [전략]典略 – 당초 마초가 촉으로 들어올 때 그의 서처(庶妻-첩)인 동(董)(씨)와 아들 마추(馬秋)는 남아서 장로에 의탁하고 있었다. 장로가 패망하자 조공이 이들을 손에 넣었는데, 동씨를 염포(閻圃)에게 하사하고 마추는 장로에게 주니 장로가 자기 손으로 직접 마추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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