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사랑타령만 올렸는데 오늘은 진정한 사랑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미우나 고우나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아야 할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여자 ! 사랑하는 전경식(이하 경식이라고 칭함)♡♡♡♡
나를 만난지는 31년 10개월 정도 되었으나 오늘이 결혼 30주년(진주혼식) 하루 전이니까 결혼후 30년간 아이들 잘 키우고 남편 잘 챙기고 부부 건강하게 보살편 준 때로는 가정주부 때로는 엄마 때로는 애인 때로는 친구로 살아준 전경식여사님 당신 너무 고마워요. 죽을때까지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 살도록 나 한몸 불태워 당신만을 위해 봉사희생하는 머슴이 되겠습니다.
어떻게 만났는 지는 앞 제8탄에서 이야기 하였고 여기서는 결혼전 연애시절까지만 이야기 하고 살아가면서 동고동락 이야기는 앞으로 수없이 많이 나오므로 글 쓰면서 하겠다.
나는 1987년 대구시 지방직 합격하고 계속해서 국가직 시험준비 하고 있을때 1988년 봄 대구시에서 신규자교육을 받으라는 연락이 와서 대현동 독서실에서 나왔고 4주간 교육을 받고 1988.5. 동에서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은 계속 독서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고 경식이는 내가 교육 받으러 독서실을 나올때 같은 시기에 나와서 침산동 개인업체에 경리사원으로 일했다. 다행히 내가 근무하는 동사무소와 가까이 있어서 퇴근후 자주 볼 수 있었다.
1988년 여름휴가는 단둘이 더 가까이 확실하게 내사람을 만들기 위해 2박3일간 숙식 준비해서 텐트를 가지고 지리산 뱀사골로 여행을 갔다. 지리산은 처음 가보는 곳인데 첫날은 서부정류장 가서 버스를 차고 진주에 도착해서 술한잔 하면서 저녁먹고 여관에서 자고, 다음날 진주터미널에서 함양가는 버스를 타고 뱀사골에 도착했는데 휴가철이라 사람이 엄청 많았다. 물 많고 그늘진 곳에 다른 사람들 사이 공간에 텐트를 쳐놓고 둘이 같이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속에 풍덩! 물이 너무 맑고 시원해서 하위직 업무로 쌓인 스트레스 확날려 버린 좋은 기회였다. 코펠에 밥을 해서 김치와 삼겹살을 구워 술한잔 하면서 점심먹고 텐트에 앉아 이야기하다가 낮잠 한잠 자고 또 물놀이 하다가 저녁에는 라면 끓여서 소주 한잔 하면서 식사를 하고 텐트 자크 올리고 잤다. 공기도 맑고 물이 좋아서 더 머물고 싶었으나 내일 출근해야 해서 아침에 라면 끓여 먹고 버스타고 대구에 왔다.
1988년 5월 대구시 원대동에 첫임용되어 하위직이고 불법광고 현수막, 전단지, 보도바닥에 붙은 껌제거 등 올림픽이 있는 해여서 많이 바빴다. 그래도 퇴근후 경식이 만난다는 기대로 하루도 힘든 날이 없었다. 고참들이 나는 총각이라고 매일(한달 당직비만 20만원) 당직을 시켰는데 다 퇴근하고 혼자 당직근무하고 있으면 경식이 동사무소에 온다. 그러면 같이 밥시켜 먹고 거기서 나하고 놀다가 집에 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이때 중매도 많이 들어오고 점순이 등 나한테 대시하는 여자도 많았으나 다른데는 한눈 팔지 않았다. 조건이 좋은 여자도 있었는데 오직 일편단심 민들레 경식이만 굳게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데이트 장소는 주로 사무소에 당직하면서 밥시켜서 같이 먹고 놀다가 집에 갔으며, 그렇지 않으면 경북대 캠퍼스, 수성못, 동촌유원지, 중앙통 한일극장 앞, 영화관(원대동 부민극장) 등 주로 어두껌껌한 곳을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날 자기 엄마가 보자고 한다면서 집에 가자고 해서 골목골목 지나서 갔는데 서민들이 많이 사는 달동네였고 방두칸을 얻어 처남(당시 초등 5년) 하나와 셋이 사는데 화장실도 재래식 즉 통시로 야외에 있었다. 그날 장모께서 나를 테스트 하셨는데 남자는 술을 잘 먹어야 일도 잘하고 잘 산다고 하시면서 갈비찜에 정종을 주셨는데 댓병으로 두병을 먹고 첫방문하는 날 처가집에서 이틀간 앓아누워 출근도 못했다. 나중에 친구들 불러 함을 지고 가야되는데 달동네라 챙피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냥 형식만 갖추기 위해 영규하고 둘이 가서 저녁만 먹고 왔다.
그러나 위와 같은 가정환경은 내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치피 내가 선택한 여자고 내가 살면서 처가까지 책임지고 가겠다고 마음 먹었기 때문에 내어깨에 같이 짊어지고 가야 할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장모께는 결혼후 조그만 집(17평)도 하나 마련해 드렸고 평생 집걱정 없이 살 수 있게 해줘서 지금도 거기서 처남과 둘이 살고 있다. 지금은 처남 33평 아파트도 하나 마련했고 올해안에 결혼하므로 이제 장모 혼자 계셔야 한다. 올해 팔순잔치했고 아직 밥해드시고 다닐 수 있으므로 괜찮다.
결혼전 경식이 우리집에 소개해야 해서 데리고 왔는데 형제들이 마음에 썩 든다는 소리는 안하고 둘이 좋으면 된다 하면서 긍정적으로 봐주어서 고마웠다. 어머니께서는 사람만 좋으면 된다고 하시면서 나의 선택을 적극 지지하셨다. 지금은 이세상에 안계시지만 제3탄에서 이야기 했듯이 지나가는 동네거지 다 불러서 씻겨서 먹이고 새옷 입혀서 보내고 세상에 이런 천사같은 여자(어머니)는 없을 것다.
내가 경식이 선택한 이유는 우선 외모가 내스타일(귀염상이고 청순가련형에 순종형이라서 모든 것 내가 하자는대로 잘 따라와 줄 것)이라서 택했는데 남자는 돈만 벌어주면 되고 돈관리는 여자가 해야 돈을 모을 수 있는데 내가 주관적으로 판단하여 돈관리를 하다가 보니 그게 잘못된 것이었다. 돈을 갖고 있다가 주식투자를 하여 지금까지 살면서 큰 고통을 겪고 지금도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이들 어릴때 아이 셋을 키워서 공과금 등 은행을 갈 수 없어서 내가 돈관리를 하여 모으는 데는 실패하고 오히려 빚만 졌다는 것이다. 2016년부터 경제권을 넘겨줬지만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처음부터 다 맡겨놔야 했었는데 내가 관리한 게 지금까지 가족들 고통속에서 살게된 이유가 되었다. 지금 사는 곳 33평 10년공공임대(10년후 우선분양)에 살지만 그래도 지금은 연봉이 높아서 임대료, 대출이자, 관리비, 할부 등 지출하고도 유지된다. 지금까지 경제적으로 무너져서 좁고 대낮에도 어두운 월세에 살던 것에 비하면 5성호텔 수준이라서 괜찮다.
살아오면서 겪은 것은 나중에 더 얘기하기로 하고 결혼부터 신혼여행, 지방직에서 국가직으로 바꾼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면 대분분의 사람이 상식적으로 겪지 못하는 특이한 일을 겪었다. 먼저 장모께서 미신이 심해서 평일(목)에 결혼을 했다. 결혼후 매월 음력 초하룻날 새벽 4시에 일년 이상 갓바위 올라가서 부처님한테 108배를 하고 와서 출근했다. 그 이유는 내가 소띠고 백말띠(1966년생)인 경식이 하고는 궁합이 맞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께 그렇게 해야 문제없이 잘산다는 것이다.
결혼날짜가 1988.10.27.인데 대구첫방문날 장모께서 나를 테스트 하셨는데 남자는 술을 잘 먹어야 일도 잘하고 잘산다고 하시면서 갈비찜에 정종을 주셨는데 댓병으로 두병을 먹고 첫방문하는 날 처가집에서 이틀간 앓아누워 출근도 못했다. 대구○○예식장에서 친구들 지인들과 피로연을 하고 신혼여행을 부산 태종대에서 동해안 강릉 설악산으로 가기로 하고 술취한 상태로 저녁에 동대구역에서 기차로 부산역 도착해서 부산 태종대 인근 모텔에서 자고 28일 아침에 거기서 복국 한그릇 먹고 태종대 구경을 하고 오후에 부산서 강릉 가는 열차를 타고 저녁에 강릉에 도착해서 자고 29일 아침 먹고 경포대, 오죽헌 등 강릉 관광지를 쭉 둘러보고 양양 낙산사 가는 버스를 타고 낙산사 구경을 하고 인근 해변에서 사진도 찍고 설악산 입구 여관이 많은 곳에 가서 저녁먹고 모텔에서 잤다.
30일은 설악산 입구 식당에서 아침먹고 등산을 시작하여 울산바위까지 갔다가 내려와서 저녁을 먹고 모텔에 머무르고 있는데 부산청 인사주무관한테서 신규임용 발령났으니 11.1.09:00까지 청에 도착하라는 연락이 와서 31일 아침 일찍 일어나 버스 타고 강릉역 가서 기차를 타고 영주역서 대구 가는 열차로 갈아타고 동대구 도착하여 저녁 8시쯤 처가집에 도착하여 자고 다음날 동부터미널에서 부산북부터미널 가는 첫 고속버스를 타고 터미널에 도착해서 택시로 부산청으로 가는데 도로가 막혀서 10:00시 넘어서 늦게 도착해서 신규자가 청장 신고도 못하고 인사주무관이 심하게 나무라면서 질책을 하는 것이다. 동기 4명이 임용되었는데 나혼자 청장신고를 못하고 욕 실컷 얻어먹고 인시기록카드와 보안각서를 작성하고 첫발령기관인 대구로 올라왔다. 부산청이 부산역 앞에 있는 것을 알았더라면 동대구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역 내려서 가면 10분도 안걸리는데 생전 처음 가는 곳이라서 길을 잘 몰라서 늦었는데 신규자한테 그렇게 심하게 욕하면서 짜증 낼 줄은 몰랐다. 이해는 하지만 나중에 같이 근무하면서 다 풀고 친하게 지냈지만 그러면 안되는데 기본이 덜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신혼은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주로 기차, 버스, 택시를 이용하였으며 식사는 순두부찌개, 비빔밥, 된장찌개, 김치찌개 등 싼 것으로 먹었고, 숙소는 한번도 호텔을 이용하지 않았다. 결혼 시 둘 다 돈이 너무 없어서 신혼생활은 방 1칸 월세로 신혼살림도 없이 그냥 숫가락 젓가락 두개로 시작해서 아이들 셋 낳고 살림은 하나하나 사서 모으면서 살았다. 사실 월세 살면 좁아서 짐 놓을 곳도 없다.
이렇게 1988년도에 공무원생활이 시작되어 30년이 지난 2018년 지금은 기여금도 33회 다 넣었고 공직생활도 30년 6개원 지났고 10.27. 진주혼식(결혼30년)날도 지났다.
제11탄까지는 태어난 환경, 어린시절, 학창시절, 연애시절, 첫임용에 대해서 기억나는대로 썼는데 100% 다 기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잊어버린 추억도 많을 것이다. 제12탄부터는 결혼해서 아이들 키우고 직장생활 하면서 일어난 여러가지 좋은 일, 힘들었던 일에 대해서 기억나는대로 시대순으로 써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