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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어 10편 호생(好生)
주의: 괄호한 부분의 한자는 공자가어 주해 부분입니다. 해석 중에서 밑줄을 친 것은 확실하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好生 第十
魯哀公問於孔子曰:「昔者舜冠何冠乎?」孔子不對.公曰:「寡人有問於子而子無言,何也?」對曰:「以君之問不先其大者,故方思所以爲對.」公曰:「其大何乎?」孔子曰:「舜之爲君也,其政好生而惡殺,其任授賢而替不肖,德若天地而靜虛,化若四時而變物,是以四海承風,暢於異類(異類四方之夷狄也),鳳翔麟至,鳥獸馴德(馴順),無他也,好生故也.君舍此道,而冠冕是問,是以緩對.」노(魯)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옛날에 순(舜)임금은 어떤 관(冠)을 썼소.」라고 물으니, 공자가 대답하지 않았다. 공(公: 哀公)이 「과인이 그대에게 물었는데, 그대가 말이 없으니 어째서이오.」라고 물으니, 공자가 대꾸하기를 「임금의 질문이 그 큰 것을 먼저 하지 않아, 고로 한창 대답할 거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공이 「그 큰 것은 무엇이오.」라고 물으니, 공자가 「순(舜)이 임금이 되어, 그 정치는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고, 그 임용은 현량(賢良)한 자를 쓰고 불초(不肖)한 자를 내쫓고, 그 덕은 천지가 조용하고 담담한 듯하고, 감화는 사시가 만물을 변화시키는 듯했습니다. 이것으로 온 천하가 그 가르침을 받들어 사방 이민족에까지 뻗쳤고, 봉황이 날아들고 기린이 와서 조수까지 그 덕을 따랐는데, 이는 다름이 아니라 살리기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임금께서 이 도를 놔두고 관(冠)에 대해 물으니 이 때문에 대답을 늦췄습니다.」라고 말했다.
孔子讀史至楚復陳(陳夏徵舒殺其君,楚莊王討之因陳取之,而申叔時諫,莊王從之還復陳),喟然歎曰:「賢哉楚王! 輕千乘之國,而重一言之信,匪申叔之信,不能達其義,匪莊王之賢,不能受其訓.」공자가 역사서를 읽다가 초(楚)가 진(陳)을 복원시킨 대목에 이르니,(진(陳)나라 하징서(夏徵舒)가 그 임금을 죽이자, 초(楚) 장왕이 그것을 토벌한 김에 그 진(陳)나라를 아예 취하였다. 그러자 그때 신숙(申叔)이 그러지 말 것을 간하니, 장왕(莊王)이 그것을 따라 진(陳)나라를 도로 돌려주었다는 내용임.) 한숨을 쉬고 탄식하며 「현량하구나, 초왕(楚王)이여. 천승(千乘)의 나라를 가벼이 여기고, 한 마디 말(주장)을 중히 여겼구나. 신숙(申叔)의 말이 아니면 그 의(義)를 달성할 수 없었고, 장왕(莊王)의 현량함이 아니면 그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孔子常自筮其卦,得賁焉,愀然有不平之狀. 子張進曰:「師聞卜者得賁卦,吉也,而夫子之色有不平,何也?」孔子對曰:「以其離耶! 在周易,山下有火謂之賁(離上艮下離爲火艮爲山),非正色之卦也.夫質也黑白宜正焉,今得賁,非吾兆也(賁飾).吾聞丹漆不文,白玉不雕,何也?質有餘不受飾故也.」孔子曰:「吾於甘棠,見宗廟之敬甚矣(邵伯聽訟於甘棠愛其樹作甘棠之詩也),思其人必愛其樹,尊其人必敬其位,道也.」공자가 한 번은 그 괘(卦)를 점쳐서 비(賁: 山火賁)괘를 얻으니, 정색하며 불평스런 모습을 했다. 이에 자장(子張)이 다가와 「제(師는 자장의 이름)가 듣기로는 복자(卜者)가 비(賁) 괘를 얻으면 길하다고 하던데, 선생의 안색에 불평이 있음은 어째서입니까.」라고 말했다. 공자가 대꾸하기를 「그 리(離) 괘 때문이니라. 주역에서는 산(山) 괘 밑에 화(火) 괘가 있는 것을 비(賁) 괘라고 한다. 이는 바른 색의 괘가 아니다.(산화비 괘는 밑의 리괘(화(火)를 상징)가 바탕인데, 리괘는 붉은 색을 나타내어 바탕에 맞는 색이 아니라서, 공자가 이렇게 말한 듯함)바탕은 흑백이 의당 바른 것인데, 지금 비(賁) 괘를 얻으니, 내 점괘가 아니다. 나는 단칠(丹漆)은 무늬를 내지 않고 백옥은 새기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왜이겠느냐. 바탕이 자체로 충분하여 꾸밈을 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또 공자가 「나는 감당(甘棠: 召南-甘棠)이란 시에서 종묘를 극진히 공경함을 엿보았다. 그 사람을 사모하면 반드시 그 나무를 아끼고, 그 사람을 존경하면 반드시 그 자리를 공경하는 것이 도이니라.」라고 말했다.
子路戎服見於孔子,拔劍而舞之,曰:「古之君子,以劍自衛乎?」孔子曰:「古之君子忠以爲質,仁以爲衛,不出環堵之室,而知千里之外,有不善則以忠化之,侵暴則以仁固之,何持劍乎?」子路曰:「由乃今聞此言,請攝齊以受敎.」(齊裳下緝也受敎者攝齊升堂)자로(子路)가 융복(戎服: 무장(武裝)) 차림으로 공자를 뵙고 검(劍)을 빼서 춤추며 「옛날의 군자는 검으로 스스로를 호위했습니까.」라고 물었다. 공자가 「옛날의 군자는 충(忠)을 몸으로 삼고 인(仁)을 호신(護身)으로 삼았다. 환도(環堵: 크기가 사방이 각각 1도(堵: 5丈)인 집으로 보통이거나 가난한 집을 가리킴) 크기의 집을 나오지 않고도 천리 밖을 알고, 선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충(忠)으로 교화하고 침포(侵暴: 침노하여 포악하게 굶)하는 자는 인(仁)으로 다잡아 주니, 어찌 검을 소지했겠느냐.」라고 말했다. 자로가 「제가 지금 이 말을 들으니, 옷자락을 추어올리며 가르침을 받기를 청합니다.」라고 말했다.
楚王出遊,亡弓,左右請求之. 王曰:「止,楚王失弓,楚人得之,又何求之!」 孔子聞之,惜乎其不大也,不曰人遺弓,人得之而已,何必楚也.(王恭王弓鳥●之良弓)초왕(楚王)이 출유(出遊)했다가 활을 잃으니, 좌우에서 활을 찾기를 청했다. 왕이 「그만 두게. 초(楚) 왕이 활을 잃었고, 초(楚) 사람이 활을 주워 가질 텐데, 다시 어찌 활을 찾겠는가. 」라고 말했다. 공자가 그 말을 듣고, 「안타깝구나. 그의 도량이 크지 않음이. 사람이 활을 잃고 사람이 주워 가질 뿐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필 꼭 초(楚)인가.」라고 했다.
孔子爲魯司寇,斷獄訟皆進衆議者而問之,曰:「子以爲奚若?某以爲何若?」皆曰云云如是,然後夫子曰:「當從某子幾是.」(近也重獄事故與衆議之)공자가 노(魯)나라 사구(司寇)가 되어, 옥송(獄訟: 송사)을 판결함에 다 여러 의논 대상자(옥관)에게 나아가 묻기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무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했다. 모두 이러이러하다고 말하고, 연후에 선생(공자)이 「의당 아무개의 의견을 따름이 거의 옳겠다.」라고 말했다.
孔子問漆雕憑曰:「子事臧文仲武仲及孺子容,此三大夫孰賢?」對曰:「臧氏家有守龜焉,名曰蔡,文仲三年而爲一兆,武仲三年而爲二兆,孺子容三年而爲三兆,憑從此之見,若問三人之賢與不賢,所未敢識也.」孔子曰:「君子哉.漆雕氏之子,其言人之美也,隱而顯;言人之過也,微而著.智而不能及,明而不能見,孰克如此.」(克能也而宜爲如也)공자가 칠조빙(漆雕憑.: ‘漆雕’가 성이고 ‘憑’이 이름)에게 「너는 장문중(臧文仲)、장무중(_武仲: 문중(文仲)의 손자)과 유자(孺子: 조카(장무중의 조카로 추측됨)) 용(容)을 섬겼는데, 이 세 대부 중에서 누가 뛰어나더냐.」라고 물으니, 칠조빙이 대꾸하기를 「장씨 집안에 간직해 온 거북이 있었는데, 채(蔡: 점치는 데 쓰는 큰 거북이다. 이것은 임금의 소유 대상이기에 대부가 이것을 가지는 것은 임금을 참람한 것이라고도 함)라고 합니다. 장문중은 삼년에 한 번 점을 치고, 장무중은 삼년에 두 번 점을 치고, 유자 용(容)은 삼년에 세 번 점을 치니, 빙(憑)은 이것을 가지고 볼 뿐입니다. 만약에 세 사람 중에 누가 뛰어나고 뛰어나지 않은지를 묻는다면, 감히 잘 모르는 바입니다.」라고 했다.(대부가 거북점을 치는 것이 임금을 참람하는 것이라는 가정이 옳다면, 그나마 셋 중에 장문중이 낫다는 소리 같다.) 공자가 「군자로구나. 칠조(漆雕)씨 아들이여. 그 남의 좋은 점을 말함에 가리는 듯하며 드러내고, 남의 허물을 말함에 숨기는 듯하며 나타내구나. 아는데 능히 언급하지 않고, 환한데 능히 보지 않으니, 누가 능히 이러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魯公索氏(先落反),將祭而亡其牲.孔子聞之曰:「公索氏不及二年將亡.」後一年而亡.門人問曰:「昔公索氏亡其祭牲,而夫子曰,不及二年必亡,今過期而亡,夫子何以知其然?」孔子曰:「夫祭者,孝子所以自盡於其親,將祭而亡其牲,則其餘所亡者多矣.若此而不亡者,未之有也.」노(魯) 공삭씨(公索氏)가 장차 제사를 지내려는데, 그 희생(犧牲)을 잃어버렸다. 공자가 그것을 듣고서 「공삭씨는 2년이 안 되어 장차 망하겠구나.」라고 했는데, 일 년 후에 망했다. 문인이 묻기를 「접때 공삭씨가 그 제사 희생을 잃으니, 선생님께서 2년이 안 되어 반드시 망한다고 하셨는데, 지금 일 년이 지나 망하니, 선생님께서는 어찌 그리 될 것을 아셨습니까.」라고 했다. 공자가 「제사라는 것은 효자(孝子: 맏아들)가 그 부모에게 스스로정성을 다하는 것인데, 장차 제사를 지내려는데 그 희생을 잃어버렸다면, 그 나머지 잃어버리는 것도 많을 것이다. 이러하고도 망하지 않는 자는 없었다.」라고 했다.
虛芮二國爭田而訟,連年不決,乃相謂曰:「西伯仁也(西伯文王),盍●質之(盍何不質正也).」入其境則耕者讓畔,行者讓路;入其朝士讓爲大夫,大夫讓于卿.虛芮之君曰:「嘻!吾儕小人也(儕等),不可以入君子之朝.」遠自相與而退,咸以所爭之田爲閒田也.孔子曰:「以此觀之,文王之道,其不可加焉,不令而從,不敎而聽,至矣哉.」허(虛)와 예(芮) 두 나라가 땅을 다퉈 시비가 붙어, 해를 이어 해결이 나지 않았다. 이에 서로 이르기를「서백(西伯: 문왕(文王))이 어지니, 어찌 그에게 가서 물어보지 않으리.」라고 했다. 그 지경에 들어가 보니, 농사짓는 자는 두둑을 양보하고, 길가는 자는 길을 양보하고, 그 조정에 들어가 보니, 사(士: 대부 이하 벼슬)는 대부가 되기를 양보하고, 대부는 경(卿)자리를 양보했다. 허(虛)와 예(芮)의 임금이 「아, 우리가 소인배였구려. 군자의 조정에 들어갈 수가 없소이다.」라고 했다. 멀리 서로로부터 물러나, 다 다투던 땅으로 중간 지대로 삼았다. 공자가 「이것으로 보니, 문왕(文王)의 도는 더할 나위가 없도다. 명하지 않아도 따르고, 가르치지 않아도 들으니, 지극하구나.」라고 했다.
曾子曰:「狎甚則相簡,莊甚則不親,是故君子之狎足以交歡,其莊足以成禮.」孔子聞斯言也,曰:「二三子志之,孰謂參也不知禮乎!」증자(曾子)가 「친압함이 심하면 서로 업신여기고, 장엄함이 심하면 친하지 않게 되니, 이런 까닭에 군자의 친압함은 족히 기쁨을 나눌 수 있고, 그 장엄함은 족히 예를 이룰 수 있다.」라고 했다. 공자가 이 말을 듣고서, 「이삼자(二三子: ‘너희들’이란 의미로, 몇 사람의 제자 등을 가리키는 표현임)는 이것을 잘 알아둬라. 누가 삼(參: 증자의 이름)은 예를 모른다고 했는가.」라고 했다.
哀公問曰:「紳委章甫(委委貌章甫冠名也),有益於仁乎?」孔子作色而對曰:「君胡然焉,衰麻苴杖者,志不存乎樂,非耳弗聞,服使然也;黼黻袞冕者,容不襲慢,非性矜莊,服使然也;介冑執戈者,無退懦之氣,非體純猛,服使然也.且臣聞之,好肆不守折(言市弗能爲廉好肆不守折也),而長者不爲市(言長者之行則不爲市買之事),竊夫其有益與無益,君子所以知(竊宜爲察).」孔子謂子路曰:「見長者而不盡其辭,雖有風雨,吾不能入其門矣.故君子以其所能敬人,小人反是.」애공(哀公)이 묻기를 「큰 띠(신대(紳帶))、위관(委冠: 주대(周代)의 관(冠) 이름)、장보관(章甫冠)이 인(仁)에 이롭습니까.」라고 했다. 공자가 정색하며 대답하기를 「임금께서는 어찌 그러십니까. 최마(衰麻: 상복)、저장(苴杖: 상제(喪制)가 상중에 쓰는 검은빛의 대지팡이)차림의 사람은 뜻이 음악에 있지 않는데, 귀가 못 듣는 것이 아니라, 복장이 그러하게 한 것입니다. 보불(黼黻: 천자의 예복)、곤면(袞冕: 곤룡포와 면류관) 차림의 사람은 모습에엄하지 않음을 띄지 않으니, 본성이 긍장(矜莊: 근엄하고 장중함)한 것이 아니라 복장이 그러하게 한 것입니다. 투구를 쓰고 창을 쥐는 자는 물러나거나나약한 기운이 없으니, 몸이 순전히 용맹해서가 아니라 복장이 그러하게 한 것입니다. 또 신이 듣기로 『솜씨좋은 가게는 값을 지키거나 깎지 않고, 장자(長者: 덕망이 높고 노성한 사람)는 장사하지 않는다.』라고 들었습니다. 그 이익이 있음과 이익이 없음을 엿보니, 군자가 다스리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공자가 자로에게 이르기를 「장자(長者)를 보고 그 말을 다하지 않으면, 비바람이 몰아쳐도 나는 그 문에 들어갈 수가 없구나. 고로 군자는 그 능함으로 남을 존경하고, 소인은 이와 거꾸로 한다.」라고 했다.
孔子謂子路曰:「君子以心導耳目,立義以爲勇;小人以耳目導心,不愻以爲勇. 故曰退之而不怨,先之斯可從已.」(言人退之不怨,先之則可從足以爲師也)공자가 자로(子路)에게 이르기를 「군자는 마음으로 눈귀를 이끌고, 의(義)를 확립함으로써 용기를 삼는다. 소인은 눈귀로 마음을 이끌고, 공손하지 않음으로써 용기를 삼는다. 고로 (군자는) 내쳐도 원망하지 않고, 앞서게 하면 (남이 군자를) 따를 만하다고 한다.」라고 했다.
孔子曰:「君子三患,未之聞,患不得聞;旣得聞之,患弗得學;旣得學之,患弗能行.有其德而無其言,君子恥之;有其言而無其行,君子恥之;旣得之,而又失之,君子恥之;地有餘民不足,君子恥之;衆寡均而人功倍己焉,君子恥之.」(凡興功業多少與人同,而功殊倍己故恥之也.) 공자가 「군자는 세 가지 걱정이 있으니, (어떤 것을) 아직 듣지 않았다면 듣지 못함을 걱정하고, 이미 들었다면 배우지 못함을 걱정하고, 이미 배웠다면 능히 행하지 못함을 걱정한다. 그 덕이 있는데 그 말(그 덕에 대한 평판이나 소문)이 없음을 군자는 부끄러워하고, 그 말이 있는데 그 실행이 없음을 군자는 부끄러워한다. 이미 얻고서 또 잃는 것을 군자는 부끄러워한다. 땅은 넉넉한데 백성은 풍족하지 않음을 군자는 부끄러워하고, 사람 수가 비슷한데 남의 공이 나보다 갑절이 많음을 군자는 부끄러워한다.」라고 했다.
魯人有獨處室者,鄰之釐婦(釐寡婦也),亦獨處一室.夜暴風雨至,釐婦室壞,趨而託焉,魯人閉戶而不納,釐婦自牖與之言:「何不仁而不納我乎?」魯人曰:「吾聞男女不六十不同居,今子幼吾亦幼,是以不敢納爾也.」婦人曰:「子何不如柳下惠?然嫗不建門之女,國人不稱其亂.」 魯人曰:「柳下惠則可,吾固不可. 吾將以吾之不可,學柳下惠之可.」 孔子聞之曰:「善哉! 欲學柳下惠者,未有似於此者,期於至善而不襲其爲,可謂智乎!」한 노(魯) 사람이 홀로 집에 거처했고, 이웃의 과부도 또한 홀로 한 집에 거처했다. 밤에 폭풍이 몰아쳐, 과부의 집이 무너져, 그에게 달려가 부탁했으나, 노(魯)사람은 문을 닫고 들여 주지 않았다. 과부가 창에서 그와 말하기를 「어찌 인자하지 못하게 나를 들이지 않소.」라고 했다. 노(魯)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남자와 여자는 60살이 되지 않으면 같이 거처하지 않는다고 들었소. 지금 그대도 아직 젊고 나 또한 젊으니, 이런 까닭으로 그대를 들일 수가 없소.」라고 했다. 여인이 「그대는 어찌 유하혜(柳下惠: 노(魯)의 대부로 성은 전(展)이고 이름은 획(獲)임)처럼 하지 않소. 오갈 데 없는 여자를 거둬보살폈는데, 나라사람이 그를 문란하다고 일컫지 않았소.」라고 했다. 노(魯) 사람이 「유하혜라면 가하나, 나는 진실로 불가하오. 내가 장차 나의 불가함으로 유하혜의 가함을 배우리라.(이 발언은 겉으론 유하혜를 칭송한 것으로 보이나, 유하혜의 행위를 과도한 것으로 완곡하게 표현한 듯하고, 과부를 절대 들일 일이 없다는 말 같다)」라고 했다. 공자가 이를 듣고서 「훌륭하도다. 유하혜를 배우고자 하는 자 중에 아직 이와 유사한 자가 없었다. 지극히 좋은 점을 목표로 하고 그 (따라하지 않아도 되는) 행위는 답습하니 않으니, 가히 지혜롭다 이를 만하도다.」라고 했다.
孔子曰:「小辯害義,小言破道,關雎興于鳥而君子美之,取其雄雌之有別;鹿鳴興於獸,而君子大之,取其得食而相呼. 若以鳥獸之名嫌之,固不可行也.」공자가 「작은 달변은 의를 해치고, 작은 말은 도를 깨뜨린다. 관저(關雎: 시경의 周南-關雎)는 새에서 유래했으나, 군자가 그것을 아름답게 여겨, 그 암수가 유별함을 취한 것이다. 녹명(鹿鳴: 시경의小雅․-鳴之什鳴)은 짐승에서 유래했으나, 군자는 그것을 중대하게 여겨, 그 먹을 것을 얻었을 때 서로 불러 먹음을 취한 것이다. 조수(鳥獸)라는 이름으로 혐오했다면, 진실로 지을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孔子謂子路曰:「君子而强氣,而不得其死;小人而强氣,則刑戮荐蓁.豳詩曰:『殆天之未陰雨,徹彼桑土,綢繆牖戶(殆及也徹剝也桑土桑根也,鴟鴞天未雨剝取桑根以纏綿其牖戶,喩我國家積累之功乃難成之苦者也),今汝下民,或敢侮余.』」(今者周公時,言我先王致此大功至艱,而下民敢侵侮我周道,謂管蔡之屬不可不遏絶之以存周室者也)孔子曰:「能治國家之如此,雖欲侮之,豈可得乎?周自后稷積行累功,以有爵土,公劉重之以仁,及至大王亶甫,敦以德讓,其樹根置本,備豫遠矣.初,大王都豳,翟人侵之,事之以皮幣,不得免焉,事之以珠玉,不得免焉,於是屬耆老而告之,所欲吾土地.吾聞之君子不以所養而害人,二三子何患乎無君?遂獨與大姜去之,踰梁山,邑于岐山之下.豳人曰:『仁人之君,不可失也.』從之如歸市焉.天之與周,民之去殷久矣,若此而不能天下,未之有也,武庚惡能侮(武庚紂子名,祿父與管叔共爲亂也).鄁詩曰:『執轡如組,兩驂如舞(驂之以服和調節中).』」 孔子曰:「爲此詩者,其知政乎! 夫爲組者,總紕於此,成文於彼,言其動於近,行於遠也.執此法以御民,豈不化乎!竿旄之忠告至矣哉!」(竿旄之詩者樂乎善道告人,取喩於素絲良馬如組紕之義)공자가 자로(子路)에게 말하기를「군자가 기가 굳세면 제명에 살지 못하고, 소인이 기가 굳세면 형륙 당함이 많다. 빈시(豳詩: 시경의 豳風-鴟鴞)에 『하늘이 흐려 아직 비가 내리기 전에, 뽕나무를 뿌리를 벗겨다가, 창과 지게문을 얽어매니, 지금 너의 하민(下民)이, 혹 감히 나를 얕보랴.』라고 했지.」라고 했다. 공자가 「능히 국가를 다스림이 이러하니, 그를 얕보려고 해도, 어찌 그리 되겠는가. 주(周)는 후직(后稷)부터 행적을 쌓고 공을 쌓아, 작위와 봉토를 가졌다. 공류(公劉)는 그것을 인(仁)으로 강화하고, 대왕단보(大王亶甫)에 이르러서 덕양(德讓)으로 돈독하게 하고, 그 뿌리를 심고 근본을 마련하여, 예비함이 오래 되었다. 애초에 대왕(대왕단보)이 빈(豳)에 도읍하고 있었는데, 적인(翟人: 오랑캐)이 침입하니, 그들을 피폐(皮幣)로 섬겼으나 면할 수 없고, 주옥으로 섬겼으나 면할 수 없었다. 이에 기로(耆老: 耆는 60, 혹은 70 이상의 노인)를 모아놓고 『저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 토지이오. 나는 이런 말을 들었는데, 군자는 봉양하는 것 때문에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고 했소. 그대들은 어찌 임금이 없음을 걱정하리오. 』라고 고하고, 끝내 홀로 대강(大姜: 대왕단보의 부인)과 떠나 양산(梁山)을 넘어, 기산(岐山) 아래에 자리하였다. 빈(豳) 사람이 『사람을 가엾게 여기는 임금을 놓칠 수가 없구나.』라고 하며, 그(대왕)를 따라가기를 저자에 몰려드는 듯하였다. 하늘이 주(周)를 편들어 주고, 민심이 은(殷)을 떠난 지가 오래인데, 이러하고도 천하를 능히 하지 못한 적은 아직 없었으니, 무경(武庚: 주(紂) 의 아들)이 어찌 능히 업신여기겠느냐. 패시(鄁詩: 시경의 鄭風-大叔于田)에 이르기를 『고삐 쥐기를 베를 짜듯이 하니(말을 능숙하게 몲을 표현함), 두 곁마(두 마리 이상의 말이 마차를 끌 때, 옆에서 끌거나 따라다니는 말)가 춤추듯 달리는구나.』라고 했지. 」라고 했다. 공자가 「이 시를 지은 자는 그 정치를 아는구나. 끈을 짜는 자는 가선을 여기에 거느리고 무늬를 저기에 이루니, 이는 가까운 곳에서 행동하여 먼 곳에서 행해짐을 말한다. 이 법을 고수하여 백성을 다스리니, 어찌 교화되지 않겠는가. 간모(竿旄: 시경 용풍(鄘風))의 충고가 지극하구나.」라고 했다.
[출처] 공자가어 10편 호생(好生) |작성자 풀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