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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
‘조선 예학의 집대성자’
조선 예학의 선구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은 1548년 서울 황화방 정동동에서 태어났다. 김장생은 처음에는 할아버지 밑에서 공부하다가 13세 때 송익필에게서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을 배웠고, 20세 때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예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33세 때는 성혼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김장생은 학문으로 우정을 나눈 16세기 조선 성리학의 세 거두를 모두 사사한 셈이다. 예(禮)는 학문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실천의 문제이기도 했다.
예는 이론과 실천이 일치할 때 공감을 얻게 된다. 김장생은 예를 공부하고 일상에서 실천하면서도 모나지 않게 살았다. 그는 28세 때 아버지 김계휘를 따라 관서 지방을 시찰한 적이 있었다. 당시 관서 지방은 유객(遊客)들의 성색(聲色)과 연악(宴樂)이 성행하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김장생은 여러 사람과 자주 어울렸지만, 항상 몸가짐을 반듯하게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젊은이가 그런 몸가짐을 지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제자 송시열에게 자신의 힘겨웠던 노력을 이렇게 토로하기도 했다. “젊을 적엔 색욕(色慾)을 막으려고 몹시 공력을 쏟았다. 그래서 비록 오래도록 관서 지방에 머물렀지만 끝까지 마음에서 색욕이 싹트지 않았다”라고.
김장생의 예에 관한 첫 저술은 36세 때 완성한 ‘상례비요(喪禮備要)’였다. 관혼상제(冠婚喪祭)의 네 가지 예 중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복잡한 문제가 상례였기 때문에 먼저 상례에 대한 정리 작업을 시도한 것이다. ‘상례비요’는 원래 그의 친구였던 신의경이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상례편(喪禮篇)’을 기초로 정리한 것인데, 그것을 김장생이 당시의 실정에 맞게 수정하고 보완한 것이다.
52세 때는 미완성 상태의 ‘주자가례’를 보완한 ‘가례집람(家禮輯覽)’을 완성했는데, 예서(禮書)의 고전들과 여러 학자의 학설을 참고해 체계적으로 개정한 것이다. 특히 김장생은 ‘가례집람’과 함께 ‘가례집람도설(家禮輯覽圖說)’을 편집했는데, ‘주자가례’의 31개 그림을 150개로 대폭 늘려 가례가 일상생활에서 쉽게 실천될 수 있도록 배려했다.
77세 때는 국가와 왕실의 의식(전례·典禮)에 관해 주고받은 편지들을 모아 ‘전례문답(典禮問答)’이라고 명명했고, 김장생 사후에는 친구 및 문인들과 문답한 내용을 모은 ‘의례문해(疑禮問解)’가 간행되었다. 중국에서는 ‘대명례(大明禮)’가 일상화되어 ‘주자가례’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김장생은 ‘주자가례’를 보완한 예서 4부작을 통해 중국 예학과 차별화된 조선 예학을 완성했다.
‘전례문답’이 집필된 정치적 배경은 1623년 3월 13일의 인조반정이었다. 반정(反正)으로 정원군의 맏아들 능양군이 옹립되자 정원군의 위상과 인조의 종통(宗統) 승계에 관해 논란이 발생한 것이다. 정원군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반정이 아니었다면, 능양군은 절대로 임금 자리에 오를 수 없는 방계의 여러 왕자 중 한 명에 불과했다.
인조의 종통 승계를 정당화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인조의 생부(生父) 정원군을 임금으로 추숭(追崇)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인조를 선조의 아들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인조는 정원군을 추숭하는 방법을 선호했다. 그래서 반정공신이었던 이귀는 정원군을 선조의 맏아들로 간주하는 논리를 제시했다. 정원군의 형들이 모두 자식 없이 죽었기 때문에 쫓겨난 광해군 대신에 정원군이 왕위를 계승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논리의 연장선에서 정원군의 장자였던 인조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고자 했다. 선조에서 정원군을 거쳐 인조로 이어지는 적통의 계보를 제시한 것이다.
인조는 이 계보를 확정 짓기 위해 아버지 정원군을 임금으로 추숭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인조의 주장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사람에겐 누구나 할아버지가 있고 나서 아버지가 있는 법이다. 할아버지만 있고 아버지가 없는 이치는 없다.” 할아버지 선조의 왕위를 계승했지만,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간주해 생부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조가 이런 주장을 하게 된 배경에는 김장생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다. 김장생이 제기한 반론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첫째, 인조는 선조의 왕위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선조의 아들로 간주해야 한다. 둘째, 인조가 선조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인조는 정원군을 백숙부(伯叔父)로 불러야 한다. 김장생의 이런 주장에도 결정적인 문제는 있었다.
인조와 정원군의 관계를 숙질(叔姪)로 간주하면 선조와 정원군은 형제가 되는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장생은 대통(大統) 계승의 차별성을 강조하며 정원군과 인조의 부자 관계를 부정하고 정원군의 추숭을 반대했다. 김장생의 의도는 생부를 앞세워 왕실의 법통을 어지럽히려는 인조의 기도를 지식인의 예론으로 교정하려는 것이었다. 적장자가 왕통을 계승하지 못한 사례가 인조 이전에도 무수히 많았지만, 지식인이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문제 삼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김장생은 정원군 추숭 문제 외에도 기회가 될 때마다 인조에게 직언을 올렸다. 인조 2년(1624) 9월 77세의 김장생이 공조 참의에 임명되었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사헌부는 말썽을 부린 내수사(內需司)의 노비를 잡아서 죄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때 인조가 사헌부의 조치를 문책하는 전지(傳旨)를 내리자 승정원은 그 전지를 돌려보냈고, 인조는 승정원 관원을 추고(推考)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인조의 생모 인헌왕후의 뜻을 받들어 내린 명령이었다. 그러자 김장생은 사직 상소를 올리며 다음과 같이 진언했다. “만약 승지가 주상의 뜻을 받들어 따르는 것만 직임으로 여기고 복역(覆逆)하는 바가 없다면, 사알(司謁) 한 명만 두면 충분하지 무엇 때문에 승지를 둔단 말입니까.” 복역은 승정원이 임금의 명이 부당하다고 여겨 재고를 요청하며 되돌려 보내는 것이고, 사알은 임금의 명을 전달하는 일을 맡은 액정서(掖庭署) 소속 정6품의 잡직 관원이다. 사견(私見)을 앞세운 임금의 부당한 명령을 힐난하는 원로 지식인의 통렬한 일침이었다.
그러나 인조는 야망을 가진 인물이었다. 물론 인조도 중종과 마찬가지로 반정으로 옹립된 임금이었지만, 그는 추대에 만족하지 않고 반정을 주도했다. 인조는 거사에 필요한 상당액의 군자금을 출연했고, 거사 당일에는 직접 군사를 지휘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조의 정국 운영에 불만을 품은 세력을 통제하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는 않았다. 반정에 성공한 지 1년이 채 못 된 1624년 1월 2등 공신 이괄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 그 예였다. 따라서 인조로서는 반대 세력을 적절히 제압할 수 있는 왕권 강화가 절실했다. 그리고 결국 즉위 직후부터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元宗)으로 추숭하는 작업에 착수해 재위 12년(1635) 만에 성사시켰다.
인조는 원종 추숭에 성공해 정통성을 강화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근왕(勤王) 세력의 지지라는 제약 속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당시 근왕 세력에는 반정공신뿐만 아니라 박지계와 같은 학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박지계는 인조의 산림(山林) 우대 방침에 따라 김장생과 함께 발탁된 인물이었다. 원종 추숭 논쟁이 시작될 때부터 김장생과 박지계는 각각 사헌부 장령과 지평을 맡아 논의에 참여하고 있었다. 박지계는 근왕 세력에 가담해 추숭론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지만, 김장생은 반정공신들과 거리를 두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반정 초기에 김류, 이귀, 최명길, 장유 등의 주도 세력에게 다음과 같은 경계의 말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정국공신(靖國功臣)의 세 대장이 하던 짓을 답습하지 말아야 한다.” 중종반정의 주역이던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이 사욕에 빠져 일생을 마쳤던 선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김장생이 보기에 인조 대의 정치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송시열은 인조의 정국 운영에 대한 김장생의 평가를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두었다. “인조반정 초기는 무언가 큰일을 할 만한 기회였다. 그러나 반정에 참여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부귀에만 뜻을 두었고, 이괄의 변과 호란(胡亂)의 변을 만나 인심이 크게 무너져 어지러웠다. 게다가 임금도 국가의 형세가 위태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치부하고는 고식적인 자세로 하루하루를 넘겼다.”
1627년 정묘호란 때 김장생은 양호(兩湖) 호소사(號召使)에 임명되어 80세의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켜 참전했으니, 그의 관찰과 평가가 지나치게 박한 것은 아니었다.
김장생은 슬하에 9명의 아들과 5명의 딸을 두었고 84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둘째 아들 김집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예학을 발전시켜 문묘에 종사되었다. 부자가 함께 문묘에 종사된 유일한 경우였다. 다섯째 아들 김경은 ‘상례비요’의 삽도(揷圖)를 그렸다.
김장생이 숙종 43년(1717) 문묘에 종사될 수 있었던 것도 아들들이 아버지의 예학을 가학으로 이어받아 세상에 전했기 때문이다. 대제학 송상기가 지은 문묘 종사 교서는 김장생의 학문적 위상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뜻이 오묘한 예절과 의심스러운 글에 대해서도 자세히 분석한 것이 많았다. 길흉(吉凶)의 상례(常禮)와 변례(變禮)에 대해서도 뭇 논설을 절충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크고 작고 높고 낮은 사람들이 모두 깊은 은혜를 입었다. 일세(一世)의 태산(泰山)과 북두(北斗)처럼 뛰어났으며, 어두운 거리의 해와 별처럼 밝았다.”
연세대 교수
[출처] 사계 김장생 - ‘조선 예학의 집대성자’|작성자 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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