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남수의 ‘회억의 삼층장’
아내가 큰 딸 숙희를 낳았을 때 어머니는 무척 기뻐하셨고 아버지는 약간 서운한 표정을 지으셨다.
시집와서 삼년이 되어도 소식이 없었던 아내가 어여쁜 손주를 낳으니 어머니는 ‘첫 딸은 살림밑천’이라고 며느리를 위로하기 급급하였는데 반해 아들손주 낳기를 학수고대하시던 아버님은 기분이 안 좋은 편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백부(伯父)님, 중부(仲父)님 댁은 아들손주들이 수두룩한데 먼저 장가 든 형님도 첫 딸이었고 둘째 며느리도 딸손주를 낳았으니 체면이 안 선다는 뜻에서 인지도 모른다.
90에 가까운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장가를 보내야 한다고 고풍을 지키시던 아버지께서는 방학 때가 되면 어머니에게 은근히 나의 장가보내는 것을 재촉하셨고 그 은근한 압력에 못 이겨 나의 나이 스물 한 살 때 나는 통영 색시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의 어머니나 이웃 사람들은 나의 아내를 ‘통영댁’ 또는 ‘통영띠기’라고 부르곤 하였다.
그러니 지금부터 꼭 30년 전의 이야기가 된다.
당시 나는 대구사범대학 문학부 사회학과에 적을 두고 있었고, 겨울방학이라고 하여서 집에 머물고 있었던 참이라 방학동안에 아들장가 보내겠다는 것이 부모님의 합의 사항이었다.
그해(1947년 ) 추운 겨울날 아침 갑자기 아버님의 명에 의해서 나는 어머니를 따라 처녀 선을 보기 위하여 집을 나셨다.
삼천포를 거쳐 배를 타고 지금의 충무(그 당시는 통영)로 갔다.
미리 연락이 닿았던지 통영 부둣가에는 처녀측의 가족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 우리 일행을 정중하게 그리고 기쁘게 맞이해주었다.
그 당시 차는 없었고 부둣가에서 처녀집이 있는 당동리까지 도보로 약 30분 정도 걸어갔다.
처녀 집에서 점심을 융숭하게 대접받고 큰방에서 양측 부모님들이 입회하에 선을 보았으나, 처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 말도 없었으며 숨도 제대로 쉬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외모로 봐서 퍽 건강해보였고 얼굴을 숙이고 있어 확실한 얼굴 모습은 파악하기 힘들었으나 입이나 코가 제대로 있었고 간혹 내가 옆으로 보고 이야기할 때 옆눈으로 나를 슬쩍 훔쳐보는 것으로 보아 별로 큰 험은 없어 보였다.
긴장의 30분이 지나갔다.
어머니는 나에게 ‘처녀를 본 인상이 어떻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며느리를 맞이할 어머니의 태도가 더 궁금하였다.
나는 ‘어머니 어떻습니까?’하고 되물었다. 어머니는 그만하면 되었다는 표정이었다.
어머니가 되었다고 하면 나도 구태여 반대할 이유는 없다.
자기의 며느리를 섣불리 볼 어머니가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어머니께서 나의 동의를 얻고 처녀측에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도 반승낙을 하자 처녀측에서는 하루밤 묵고 가라고 야단이다.
그 당시 차도 없고 배도 오전에 한 번밖에 다니지 않던 시절이라 어머니와 나는 하는 수 없이 처녀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날 밤 장차 처남될 처녀의 동생 공부방에 자게 되었는데 처남 후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문을 노크하면서 낮에 선 본 처녀가 홍시 세 개를 쟁반에 받치고 조용히 방으로 들어왔다.
처녀는 홍시를 내 앞에 갖다 놓고서도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을 뿐 한 마디 말도 없었다.
아마도 낮에 서로 대화가 없었으니 부모님께 일부러 들여보내 대화라도 나누어 보라는 눈치였다.
처남 될 사람도 눈치채고 슬그머니 화장실에 가는 체하고 밖으로나가버린다.
물실호기(勿失好機), 좋은 기회가 왔다고 여기고 나는 처녀에게 여러 가지 말을 건넸으나 처녀는 고개만 숙이고 ‘예스’의 표시로 고개만 끄덕끄덕 할 뿐 일체 말이 없었다.
그것이 나를 홀딱 반하게 한지도 모른다. 여자나 남자나 입이 무거워야 한다. 상대는 처음 만난 남남이 아닌가. 거기에 십년지기처럼 술술 이야기가 나오며 말이 나올 리가 없다.
마치 원시림을 답사하고 온 느낌을 가진 어머니와 나의 보고에 의하여 아버님께서는 나의 사성(四星)과 더불어 청혼서를 처녀댁에 보내고 얼마 후 처녀댁에서 허혼서가 그의 조부 진사의 친필로 쓰여져 왔다.
그런 회억이 30여 년만에 되살아 난 것은 지난 해 12월 22일 손주의 돌을 축하하기 위하여 대전에 올라갔을 때 큰 딸 숙희가 살림하고 있는 S아파트 거실에서 였다.
옛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앞뜰에 오동나무를 심었다.
그 딸이 시집갈 때 장롱 등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자식과 함께 기른 나무로 다듬어 만든 가구를 딸 시집으 선물로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가고 없는 아내가 아침 저녁으로 정성스레 닦고 아꼈던 자개 삼층장이 딸의 거실에 아담하게 옛 모습 그대로 장식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자개 삼층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잊었던 지난 날의 아내의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지난 날의 추억들이 주마등 같이 나의 뇌리를 스쳐갔다. 첫 선 본 그때의 그 큰방, 처남의 공부방, 그리고 그녀가 가져왔던 홍시 세 개, 그리고 아무도 밟아보지 못한 원시림같은 그녀의 처녀성, 그리고 30여 년 간 나와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 한 그녀의 모습이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밀화빛으로 길들인 장판방에 무릎을 꿇고 아침 저녁으로 정성스레 닦던 아내의 모습이 눈에 선히 떠오를 때 그 옛날 3년 반 동안의 아내와 나의 대전 생활이 그리워지곤 하였다.
아내와 3년 반 동안 살았던 그 땅에 지금 딸과 아들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런 감회가 별로 깊은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그와 정 반대이다. 큰 딸이 대전으로 시집가던 날 어머니가 생전에 고이 간직한 그 삼층장을 선물로 주고 잘 간수하도록 당부했다.
그 삼층장에는 아내의 손때가 묻어 있고 아내의 혼이 들어있다.
그 삼층장은 아내의 사진이며 아내의 얼굴과 다름 없다.
그래서 나는 아내가 보고 싶으면 아무도 모르게 훌쩍 대전으로 혼자 떠나는 것이다.
회억(回憶)의 삼층장, 그것을 보고 나는 나의 지난 날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게 되고 나의 마음은 위안을 받는다.
(*빈남수 선생님은 나의 20수 년의 선배되시는 내과 선생님으로, 경북의대 수필동인 모임인 안행수필동인회를 만들어서 이끌어 오셨다. 나의 어머니도 내가 어렸을 때 큰 방의 장롱을(자개농이 아닌 평범한 나무장이었다) 닦으시던 모습이 선하다.)